진화인가, 진보인가?

이정우의 철학 에세이

2015-06-04     이정우

 한국에서 가장 치열하게 글을 쓰는 철학자로 평가받아온 이정우 교수가 그동안 종횡으로 가로 질러온 자신의 사유의 흔적을 본지에 담아낸다. 많은 학자들이 '전공'이라는 좁은 감옥에 갇힌 채 자신과 심사위원만 읽는 따분한 논문들을 써내는 것이 우리 학계의 풍토라면, 이 교수는 살아 숨 쉬는 ‘철학의 대중화, 대중의 철학화’를 위해 노력해왔다. 1998년 제도권 대학의 철학교수직을 돌연 사직하고, 세상 밖으로 나와 철학아카데미 등 대안공간적 시민 인문학 강좌에서 철학과 삶의 접목을 시도했으며, 3년 전 경희사이버대학교의 교양학부장을 맡은 후에도 그동안의 대안 공간 실험을 대학에 접목시키고 있다. 대안시민대학의 원조격이라 할 철학아카데미에서 보기 드문 ‘마감강사’로 각광받았지만, 오히려 해마다 두터운 책들을 펴낸 저술가로도 유명하다. 독자 여러분의 관심과 성원을 부탁드린다.

 <편집자>

순서
1. 진화인가, 진보인가?
2. 사후적 구성의 시대
3. 대중주의와 민주주의
4. 개발되는 사회, 개발되는 언어
5. 속류 유물론의 시대
(계속)
 
하나의 말, 더 정확히는 말이 아니라 개념은 사상가에 의해 창조되지만, 그것이 사회 일반으로 흘러나갈 무렵이면 거기에는 이미 오해의 그림자가 깃들게 마련이다. 아니, 하나의 개념이 일반화될 경우 거기에는 필연적으로 왜곡이 동반된다고 할 수 있다. 사상/개념의 역사는 속화(vulgarization)와 희화화(parody)의 역사이다.
‘트라우마’라는 말은 그 전형적인 예이다. 여기저기에서 이 말이 애용된다. 하지만 프로이트의 원래 개념화에 따르면, 트라우마는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반복되는 것이다. 강박적으로 반복되는 것, 그러나 주체의 의식에서는 기억되지 않는 것, 그것이 트라우마이다. 그래서 멀쩡히 잘 기억되는 것을 ‘트라우마’라고 부르는 것은 이 말을 너무 쉽게 사용하는 것이다. 이렇게 사상의 언어는 대중의 언어가 되면서 큰 인플레이션을 겪게 된다.
그러나 언어란 늘 변해 가기 마련이므로, 이런 왜곡을 심각하게만 받아들일 필요가 없을 지도 모른다. 그저 맥락을 잘 구분해서 사용하면 그만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속화와 희화화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은 경우, 거기에 무엇인가 많은 역사적 · 정치적 · 사상적 착잡함이 깃들어 있는 경우들도 있다. 그래서 진지하게 비판적으로 검토해 볼 필요가 있는 경우들도 있다. 오늘날 ‘진화’라는 개념이 바로 그런 경우일 것이다.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 가장 남용되는 개념어는 어떤 것일까? 쉽게 답하기 어려운 물음이지만, 그 중 하나로서 ‘진화’라는 말을 뺄 수는 없을 것이다. 찰스 다윈 탄생 200주년을 기념한 행사들이라는 외부적 영향도 있고 해서 최근에 이런 경향은 더욱 심해지는 것 같다.
그런데 유심히 보면 사람들이 ‘진화’라 말하는 경우들은 진보나 발전/발달, 변신 등으로 말해야 할 경우들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드는 경우는 ‘진화’와 ‘진보’이다.
진화와 진보의 가장 핵심적인 차이는 전자는 자연적 과정이고 후자는 역사적 과정이라는 점이다. 예컨대 사람들은 어떤 새로운 기술이 등장했을 때 기술이 “진화”했다고 말한다. 또 기업이 자신들의 가치를 홍보할 때도 “진화”라는 말을 애용한다. 오늘날 진화라는 말을 가장 자주 사용하는 분야는 자본주의의 영역, 기업이나 기술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흐름은 대중문화의 물결을 타고서 더욱 일반화된다. 자본주의, 과학기술, 대중문화, 평소에도 궁합이 잘 맞는 이 세 영역에서 ‘진화’라는 말은 일종의 공용어가 되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 묘한 것은 이들이 이 말로 뜻하고자 하는 바는 본래 의미의 진화가 아니라 오히려 ‘진보’라는 점이다. 기업들은 자신들의 회사가 진보하고 있다는 뜻으로 ‘진화’라는 말을 쓴다. 과학기술은 새로운 기계를 만들어냈을 때 기술이 진보하고 있다는 뜻으로 ‘진화’라는 말을 쓴다. 그리고 이런 용법들은 대중매체/대중문화를 타고서 일반화된다.
 
진화와 진보의 동일시, 또는 오용
 
이런 용어법은 발터 벤야민의 용어법과 묘하게 어긋난다. 발터 벤야민은 자본주의와 과학기술이 추구하는 발달/발전을 ‘진보(Entwicklung)’라고 표현했다. 사실 “Entwicklung”이라는 말은 19세기 이래 진화와 진보를 동시에 뜻했으며, 이는 많은 사람들이 진화와 진보를 동일시했음을 뜻한다. 벤야민의 이 용법은 이런 흐름을 이어받고 있기도 하지만, 그가 말하고자 한 것은 자본주의와 과학기술이 자체의 발달/발전을 ‘진보’라고 생각한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본주의와 과학기술이 생각하는 진보의 역사관―“기술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역사관―을 맹렬하게 비판한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 벤야민은 오늘날 한국의 자본주의, 과학기술, 대중문화가 남용하는 “진화”의 역사관을 비판한 것이다.
이것은 곧 기술에서의 발달이 역사에서의 발달이 아님을 역설하는 것이다. 예컨대 벤야민은 독일 노동계급이 실패한 한 이유를 기술의 발달을 역사의 발전으로 착각한 점에 있었다고 지적한다. 이런 식의 역사 이해는 기술의 발달이 “자연에 대한 통제력의 진보만을 인정할 뿐, 사회적 퇴행은 인정하지 않았던” 데에서 유래한다(<역사철학 논고>). 거대하고 화려하게 들어선 새로운 아파트 마을의 밑바닥에는 그곳에서 갈 데도 없이 쫓겨난 철거민들의 눈물이 묻어 있다. 벤야민은 헤겔 이래에 일반화되고 다시 진화론과 혼효한 진보 개념을 비판한 것이다. 그리고 이 진보 개념은 바로 오늘날 남용되는 개념으로는 “진화”인 것이다.
진화는 자연적 과정이다. 거기에는 인간의 어떤 의도적인 배치나 의지적인 노력도 개입하지 않는다. 그래서 어떤 야구 선수가 피땀을 흘려 발전된 모습을 보이는 것을 두고 그 선수가 “진화했다”고 표현하는 것은 참 이상한 용법이라 하겠다. 물론 오늘날 자연과 문명의 ‘공-진화(co-evolution)’를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때에도 문명은 자연사적으로 다루어진다는 전제 하에서의 문명으로 이해해야 한다. 인간의 의지와 사유가 개입하는 것은 역사이다. 물론 우리는 역사 자체도 의지와 사유라는 요인을 빼고서 자연사적으로 다룰 수 있다. 이는 또 하나의 환원주의이다. 어떤 것도 다른 것으로 환원되어 설명될 수 있지만(자연을 역사로 환원해서 설명하는 것도 물론 가능하다), 모든 환원주의는 참이 아니다. 자연의 문법과 역사의 문법은 엄연히 다르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역사에 대해서 “진화”를 이야기할까?
여기에는 물론 여러 가지 맥락들이 있겠지만, 적어도 한국에서는 ‘진보’라는 말이 함축하고 있는 특정한 뉘앙스를 빼놓고서는 설명이 되지 않을 것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에게 ‘진보’란 한국의 현대사, 특히 해방 이후의 현대사를 개념화한 대표적인 개념이다. 한국 현대사를 민주주의의 진보로 파악할 때의 그 ‘진보’이다. 그리고 이런 역사철학과 각을 세우면서 이루어진 또 하나의 개념화가 곧 ‘산업화’이다. 흔히 현대 한국의 두 업적으로서 이야기된다. 그러나 “산업화와 민주화”라고 말하지만, 이 ‘와’에는 적지 않은 긴장이 들어 있다.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이라는 말들이 이 점을 잘 드러내준다. 자본주의와 친자본주의적 영역들에서 ‘진보’라는 말을 쓰기가 어색한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아울러 자본주의와 자연과학의 친화성 또한 큰 역할을 할 것이다. 자본주의에서 자연과학은 기술의 기초이며, 자신들의 힘을 증강해 주는 고마운 존재이다. 그에 비해 인문사회과학, 더 정확히 말해 ‘사상’이라 부를 수 있는 영역에 대해서는 적대적일 수밖에 없다. ‘사상가’라 부를 수 있는 인물들이 대개는 반자본주의적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학문이 자본주의에 점점 종속되면 될수록, 학자들은 사상보다는 과학에 기울어진다. 과학은 자본주의에 ‘응용’될 수 있지만, 사상은 자본주의를 ‘비판’하기 때문이다. 경영학은 이런 흐름의 첨병이라 할 것이다.
결국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오늘날 자본주의, 과학기술, 대중문화 등은 ‘진화’를 말하지만, 이들이 말하고 싶은 것은 사실 ‘진보’이다. 그런데 이들이 생각하는 진보란 바로 민주화 진영이 생각하는 진보와는 반대되는 진보, 즉 자본주의의 진보이다. 전자의 진보는 자본주의적 물질문명의 진보이지만, 후자가 말하는 진보는 민주주의의 진보라고 할 수 있다.
 
진보는 이성‧의지‧노력의 과정
 
진화와 진보의 또 하나의 중요한 차이는 진화란 극히 긴 시간대에 걸쳐 일어나는 것이지만, 진보는 상대적으로 짧은 시간대에 걸쳐 일어나는 것이라는 점이다. 사실 ‘역사’라는 것 자체가 길게 잡아봐야 10,000년 정도의 일이므로 이는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일 것이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물리적 시간대의 길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진화와 진보의 본성 자체에 있다. 진화란 생명의 차원에서 자연적 과정을 통해 일어나는 매우 느린 ‘과정’이지만, 진보는 인간의 차원에서 어떤 극히 중요한 시간대에 즉 ‘카이로스’의 시간대에 벌어지는 ‘사건’이라는 점이다.
일본의 어떤 애니메이션을 본 적이 있다. 여기에서 주인공들은 위험에 처한 순간이 닥치면 가지고 다니는 공을 던진다. 그러면 그들을 따라다니던 원래 아주 귀엽게 생긴 몬스터가 한 마리의 거대한 괴물로 변화하곤 한다. 도롱뇽이 용가리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변화를 여기에서는 “진화”라 부른다. 진화라는 개념의 본래 의미를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어리둥절한 용어법이다. 확인해 봐야겠지만, 이 만화의 작자는 어쩌면 <장자>의 ‘소요유’를 참조했을지 모른다. 북녘바다의 작은 물고기 곤(鯤)이 ‘화(化)’해서 거대한 붕(鵬)이 되는 이야기 말이다. 이런 식의 변화는 진화가 아니라 ‘변신(metamorphosis)’이다. 그레고르 잠자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거대한 벌레로 변한 자신을 발견한 것, 이것이 바로 ‘변신’인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상황을 ‘진화’라고 하는 것은 정말이지 이상한 용어법이라고 하겠다.
자본주의적 맥락에서만이 아니라 일반적인 맥락에서까지 사람들은 왜 이렇게 “진화”라는 말을 좋아할까? 어쩌면 그 이유들 중 하나는 ‘진화(進化)’라는 번역어 자체에 이미 깃들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 말 자체가 더 나아지는 것, 더 우월해지는 것, 즉 발달/발전의 뉘앙스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론적 맥락을 모르는 대중이 이 말을 쉽게 사용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일본의 생물학자 나카무라 게이코는 이 말을 다시 ‘evolution’의 본래의 번역어인 ‘천연(天演)’으로 되돌리자는 주장까지 내세운 적이 있다.
다윈 자신은 “evolution”이라는 말을 쓴 적이 없다. 이 말은 진화론이 이미 사회적 함축을 띠기 시작하던 시기, 심지어 제국주의의 이데올로기로 화하던 시기에 만들어진 말이다. 다윈을 비롯한 자연학자들이 이해하는 의미에서의 ‘진화’에는 ‘진보’라는 뉘앙스는 들어 있지 않다. 환경이 변했을 때 어떤 종들은 살아남고 어떤 종들은 도태된다. 그러하면 살아남은 종들이 ‘우월한’ 것일까? ‘생존’을 기준으로 하면 물론 그럴 것이다. 그러나 진화는 기본적으로 ‘우발적인(contingent)’ 과정이다. 그것에는 어떤 필연적인 시나리오가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그 차이는 미묘해서 이런 혼동을 피하려 노력한 다윈 자신에게서조차도 문득문득 가치 판단이 작용하고 있음을 <종의 기원>의 여기저기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진화는 인간의 가치판단을 넘어선 자연적인 과정일 뿐이다. 어쨌든 우리는 앞에서 본 ‘진화’라는 개념의 여러 이상한 용법들에는 ‘진화’ 개념에 깃들어 있는 이런 혼동, 곧 순수한 자연적 과정으로서의 진화 개념과 역사에 대한 진보사관적 개념을 함축하는 진보 개념 사이의 혼동의 영향이 각인되어 있다고 하겠다.
진화가 우발적인 과정이라면 진보는 이성과 의지, 노력의 과정이다. 진화에는 어떤 이성적 개입도 없다. 갈라파고스 군도의 생명체들은 환경에 적응해 가면서 각자의 본능에 따라 살아갔으며, 그 전체적 과정이 진화를 형성했다. 그러나 기업들이나 기술자들, 야구선수들은 각자의 판단과 의지에 따라 ‘더 좋은’ 미래를 위해 노력한다. 그 결과를 진화론적 용어들로 설명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그 과정을 삭제하고 그 결과만을 서술하는 것일 뿐이다. 나아가 역사의 발전을 위해, 민주화를 위해 노력한 사람들은 말할 필요도 없이 그들의 이성과 의지에 입각해 싸웠고 때로 피를 흘리기도 한 것이다. 이들은 진화를 위해 노력한 것이 아니라 진보를 위해 노력한 것이다. 그러나 얄궂게도 1987년 이런 ‘진보’에의 노력이 어느 정도 가시화되었을 때, 시대는 오히려 ‘진화’의 시대로 접어들었다고 하겠다.
진화는 우리 삶의 필연적 조건이다. 그러나 진보는 충분한 목적이다. 자연과 마찬가지로 역사도 어떤 면에서는 진화한다. 이성의 사유와 의지의 노력 바깥에서 우발적으로 진화해 간다. 그러나 인간은 그 진화 위에서 진보를 꿈꾼다. 우발적이고 맹목적인 역사의 흐름인 진화는 우리에게 필연적으로(자연적으로) 주어진 조건이지만, 우리가 꿈꾸었던 진보는 우리의 삶에 충분한 의미를 부여해 줄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주체적 노력이 어느 정도 달성되었다 싶었던 1987년 6월 이후, 우리의 삶은 얄궂게도 “진화”의 시대로 접어들었던 것이 아닐까? 그래서 ‘진화’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지본, 기술, 대중문화로 이루어진 ‘포스트모던’의 시대를 아무 생각도 없이 살아온 것이 아닐까? 진보의 길이 아직도 멀고 먼데, 자기도 모르게 ‘진화’에게 자리를 내 준 것은 아닐까? 이제 1987년 이후 오늘날까지 이어진 시간들을 반추해 보면서 잃어버린 진보를 찾아서 다시 역사에 대해 사유해봐야 하지 않을까?
 
글·이정우
1959년에 영동에서 태어나 서울대에서 공학, 미학, 철학을 공부했고 아리스토텔레스 연구로 석사학위를, 미셸 푸코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역임했으며, 최초의 대안철학학교인 철학아카데미를 창설해 시민들을 위한 철학, 인문학 강좌를 열었다. 소운서원을 열어 연구와 후학 양성을 해오고 있으며, 최근에는 경희사이버대학교 교양학부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최초의 대학 내 대안공간인 파이데이아 홍릉을 창설해 대학의 시민교육운동에도 앞장서고 있다. 저서로는 <소운 이정우 저작집(전5권)>, <천 하나의 고원>, <진보의 새로운 조건들>, <세계철학사 1>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