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의 간섭이 키우는 이란 민족주의
2009-07-03 알랭 그레쉬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국제전문기자
오랜 위기를 겪은 뒤, 현재의 이란은 16세기에 사파비 왕조의 설립과 함께 다시 태어났다. 투르크족과 수니파가 지배한 강대한 오스만 제국에 맞서 독립을 염원하던 사파비 왕조의 이스마일 1세는 강압적으로라도 이란을 시아파 국가로 개종시키려 했다. 그러나 시아파 믿음을 심어줄 만한 신학자가 부족했던 까닭에 이스마일 1세는 자발 아밀(현재 레바논 남부)에서 신학자들을 ‘수입’하며 레바논과 이란의 시아파와 관계를 맺기 시작했고, 그 관계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란은 통일을 이뤄냈지만 오스만제국, 러시아제국, 그리고 인도를 지배하던 영국제국 간의 다툼에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위기는 계속됐고, 결국 18세기 말에 카자르왕국이 들어섰다. 카자르왕국은 러시아제국과 여러 차례 전쟁을 벌였지만 결국 카프카스 남부를 잃고 말았고, 영국과 다툰 끝에는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지배권을 포기해야 했다. 더구나 근대화 시도마저 외세의 간섭으로 실패했다. 결국 1906년 ‘헌법혁명’이 일어나며 민주적인 자유를 요구하는 동시에 러시아와 영국의 침략을 비난했다. 그러나 1907년 러시아와 영국은 이란을 분할해 각자의 영향권에 두는 조약을 체결했다.
1차 대전 동안 열강들의 각축장이었던 이란은 완전히 피폐해졌고, 리자 한이 쿠데타로 집권했다. 1925년 리자 한은 스스로를 리자 샤 팔레비로 칭하고 왕위에 올랐다. 한편 볼셰비키 혁명으로 러시아가 순식간에 지정학적 다툼에서 밀려나며, 영국은 새로이 발견한 유전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한 영국-이란 석유회사를 앞세워 거의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란은 2차 대전 초에는 중립을 유지했지만, 북부에 주둔한 소련군에 1941년 8월에 침략당했고, 영국군은 남부에 주둔했다. 팔레비는 아들 무하마드 리자에게 왕위를 양도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빠졌고, 무하마드 리자가 1979년까지 이란을 통치했다. 소련은 1945~46년에 이란 영토에 쿠르드족과 아제르바이잔을 앞세워 두 독립국을 세우려 했지만,(1) 미국과 영국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군대를 철수시켜야 했다.
이런 영토 분할 시도들은 민족주의에 불을 붙였고, 이란 민족주의는 외국에 착취당하는 원유를 되찾으려는 의지로 나타났다. 영국-이란 석유회사가 수입을 이란 정부와 새롭게 분배하는 걸 거부하면서 여론이 급격히 나빠졌다. 시위자들은 “석유는 우리의 피이고, 석유는 우리의 자유다”라고 외쳤다. 1951년 4월 28일, 온건한 민족주의자 모하마드 모사데크가 의회의 지원을 받아 총리에 오르면서, 석유의 국유화를 추진했다. 얼마 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카이로 연설에서 인정했듯이, 미 중앙정보국이 영국의 지원을 받아 시도한 쿠데타로 샤가 정권을 되찾았다.(2) 미국은 그런 노력의 대가로 이란 석유의 40%를 지배하게 됐다. 민주주의를 반대하는 수많은 사람을 처형하고 제거한 대가로 테헤란은 질서를 되찾았지만, 모사데크는 진정한 독립을 위해 노력했으나 실패한 상징적 인물로 이란 국민의 기억에 남아 있었다.
1960년대와 70년대 이란은 샤의 독재에 신음하면서, 서구 세계를 본뜬 현대화를 피상적으로나마 시도했다. 이란에 상주한 3만 명의 미국인과 많은 외국인들이 민중의 감정을 건드렸다. 1975~76년 석유 가격의 인하로 닥친 사회·경제적 위기, 도처에서 가해지는 억압, 매사에 간섭한 미국 등 여러 요인이 겹치면서 지극히 평범하던 사건이 큰불로 번졌다.
1978년 1월 7일, 정부 기관지가 당시 이라크에 망명해 있던 시아파 최고지도자 중 하나인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를 비방하는 기사를 게재했다. 그로 인해 며칠 동안 수천 명의 신학생이 거리로 쏟아져나와 시위를 벌였다. 경찰의 발포로 상당수의 시위자가 숨졌다. 몇 주 뒤인 2월 18일과 19일에 이란 타브리즈에서 봉기가 일어났고, 100명 이상이 숨지는 참혹한 결과가 빚어졌다. 시위와 탄압, (죽음 후) 넷째 날의 종교의식이란 악순환이 계속되며 사망자가 수천 명으로 늘어났다. “샤에게 죽음을! 미국에 죽음을!”이란 구호가 시위대에서 터져나왔다. 독재 체제와 그 체제를 지원하는 강대국을 거부하는 구호였다.
1978년 10월 미 정보기관의 보고서는 그 뒤로도 오랫동안 샤 체제가 유지될 거라고 예측했다. 그러나 지미 카터가 샤를 지지하고 군대를 대규로로 파견했지만 그 예측은 빗나갔다. 20세기 후반기에 일어난 최대의 민중 혁명으로 샤 체제는 전복됐고, 이슬람 공화국이 1979년 4월 1일에서 2일로 넘어가는 밤에 선포됐다. 같은 해 11월 4일 테헤란 주재 미국 대사관의 점령은 이란을 사사건건 간섭한 서구를 민중이 혁명으로 거부한 전형적인 사건이었다.
글·알랭 그레슈 Alain Gresh
번역·강주헌
<각주>
(1) Jean Piruz, ‘마하바드의 학살’,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1997년 1월.
(2) Mark Gasiorowski, ‘이란에서 획책한 미 중앙정보국의 음모’,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0년 10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