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새로운 소통과 문체 실험의 장

2009-07-03     오에 겐자부로 | 1994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노벨문학상을 받기 4년 전만 해도, 나에게는 구식 전화기 하나밖에 있지 않았다. 그 뒤 나는 팩스 한 대를 장만했다. 무척이나 매력적이었다. 특히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해외 소설가들과 팩스를 주고받을 수 있어 좋았다. 그전까지는 우편으로 연락을 주고받던 이들이었다. 그토록 짧은 시간에 수도 없이 팩스를 주고받을 수 있다는 점, 특히 원하는 시간에 자유롭게 답신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일례로, 옛 소련 붕괴 뒤 나는 러시아 소설가 한 명과 단 하루 만에 네다섯 통의 팩스를 주고받았다. 우리는 러시아와 일본 사이 문화적 배경의 차이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얘기했다. 그동안의 서신 교환에서는 한 번도 다루지 않은 주제였고, 우리의 대화는 격앙된 분위기로 흘러가 위태로운 단계까지 갔으나, 서로가 함께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는 상황으로 발전하며 그 위기를 극복했다.

또 한 가지 예는 영화감독이었던 내 처남의 자살 이후 힘들어하던 어느 날 저녁, 나는 뉴욕에서 팔레스타인 출신의 작가 에드워드 사이드가 보내온 팩스를 받았다. 그날 밤 내가 느꼈던 반가운 느낌을 나는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런 경험 때문에 나는 팩스 기술이 내게는 희망의 원천이라고 떠들고 다녔다. 각국의 작가들이 서로 팩스로 소통할 수 있는 국제적 대화 창구가 마련되길 바라기도 했다.

팩스 교신으로 흥분했던 시절

어느 날 나는 서가를 뒤져 단기간 팩스로 주고받으며 두 사람 사이에서 오고 갔던 대담이나 교류 내용이 모아져 책으로 나온 적이 있는지 알아보았다. 하지만 헛수고였다. 해외 서신집이라면 앞다퉈 번역하는 일본이라도, 두 사람 사이에서 주고받았던 팩스의 내용이 출간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게르숌 숄렘(1)과 발터 베냐민(2)처럼 한 사람은 해외에 거주하고 다른 한 사람은 이스라엘에 체류하면서 학식이 높은 두 유대인이 이 나라가 겪고 있는 위기를 주제로 팩스를 주고받은 경우가 있다면, 나는 이를 책의 형태로 읽고 싶을 것 같다.

팩스의 시대에 그런 종류의 책이 출판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분명 이메일과 인터넷의 시대에도 더더욱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는 걸 뜻한다. 그렇지만 그런 책이 출판되었다고 생각해보자. 나는 소설가의 직감으로, 아니 솔직히 말하면 소설가의 괴벽으로 떠오르는 생각들이 있다.

먼저, 뉴미디어와 구미디어 사이에 일종의 ‘피드백 고리’를 만든다는 것은 뉴미디어의 발전에도 유용하다고 본다. 인터넷 공간에서의 표현과, 책이라는 구미디어 사이에 부분적이나마 연결고리를 만들고, 인터넷상에서 이메일로 주고받은 내용들을 취합해 책의 형태로 다시 펴낼 때 어떤 결과가 생기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꽤 쓸 만한 시도가 되지 않겠는가?

두 번째로는 뉴미디어상의 내용을 책으로 다시 출판할 경우, 이 새로운 형태의 소통 방식에 사용되는 ‘문체’를 정확히 살펴볼 수 있다는 점이다. (문자 그대로의) ‘문체’가 뉴미디어에서는 전혀 그 의미를 갖고 있지 않다고 볼 수 있을까? 뉴미디어가 21세기 사람들의 문체를 만들어내는 건 아닐까?

현재 진행 중인 연구에서는 전세계의 소수 언어들이 인터넷에서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반가운 일이다. 소수 언어의 개념과 현저히 동떨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한글의 경우를 한번 살펴보자. 남한과 북한을 넘어, 일본, 미국, 심지어 유럽 간에 인터넷을 통해 한글이 널리 퍼져나갈 수 있지 않겠는가. 이에 따라 동아시아에서의 국제 교류가 무척이나 긍정적인 발전을 이룩할 것임은 자명한 일이다.

문체의 변화는 정신세계 변화의 지표

좀더 구체적인 예를 살펴보자. 인터넷을 통해 전세계 사람들과 교류할 때, 일본 사람들은 종종 영어를 사용한다.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인터넷상에서 이메일을 통해 사용되는 일본인들의 영어 문체이다. 아마도 현재로서는 일본의 영어 문체는 일본어를 단순히 서툰 영어로 변환해놓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인터넷 덕분에 이런 식의 영어 사용을 하는 일본인들이 유례없는 규모를 보인다면, 100% 일본식 영어가 세상의 빛을 보지 않겠는가? 그리고 이런 양식의 글쓰기는 구미디어에서 사용되는 일본어에 반영되고, 책에 인쇄되는 일본어 문체를 변형시키지 않겠는가? 소설가인 내가 관심을 갖는 건 바로 이런 부분이다. 글쓰기 양식의 근본적인 변화는 일본인들의 정신세계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지표가 되지 않겠는가?

언어학에 관한 나의 지적 수준이 60년대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새로운 연구’라는 말이 다소 과장되긴 하나 ‘새로운’ 언어학 연구에서는 ‘문체’의 문제에 대한 학술적 연구가 거의 이뤄지지 않는 듯하다. 문학 분야에서와 같이, 학자들은 이런저런 작가들의 문체에 관한 개별 연구에 그칠 뿐, 보편적인 그 규칙을 세우는 일은 거의 포기한 것 같다. 따라서 일본 사람들이 영어로 글을 쓸 때 드러나는 문체의 특징을 확실히 알고 있는 학자는 거의 전무하다.

하지만 인터넷에 힘입어 일본인들의 영어 문체가 확실히 풍부해진다면, 작가들이 사용하는 글의 문체는 더욱 풍요하고 심화될 것이다. 근대에 접어들면서 구어와 문어의 통합으로 일본 문학은 이미 상당한 변화를 겪었다. 인터넷상에서 ‘영어 문체’의 새로운 발견이 이뤄지면 원하든 원치 않든, 이로 인해 일본어로 쓰이는 문학의 문체가 변화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뉴미디어의 글쓰기, 뛰어난 전파력

신속한 정보 전달을 1차 목표로 하는 인터넷 언어는 당연히 소설가들이 사용하는 언어와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과거에 나 또한 문학에서 쓰이는 단어와 일상 언어 간에 언어학적 표현의 차이를 언급하지 않았던가? 당시 나는 러시아 형식주의의 언어학 논문을 참고했었다. 여담이긴 하나, 옛 소련이 사라지긴 했어도 1920년대나 30년대에 일어난 훌륭한 지식 운동은 그 타당함을 잃지 않았고, 20세기의 살아 있는 유산이 되었다. 러시아 형식주의가 그것이다. 간단히 말해, 러시아 형식주의에서 ‘오스트라네니에’(낯설게 하기)라고 일컬어지는 문학적 글쓰기는 의미의 전달을 늦추고 이 전달 과정을 더욱 길게 만든다. 그럼으로써 단어에 거부감이 부여되고, 문학작품을 접하는 순간 이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인터넷상에서 사용되는 단어들이 이렇게 기능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정보와 의미 전달을 지연시키거나 복잡하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고백하자면, 소설이나 일반 문학작품에 대한 내 시각은 바로 이 ‘오스트라네니에’ 이론에 기반을 두고 있고, 내가 의미의 전달을 어렵게 만드는 것도 고의적인 행위이다. 아마도 그래서 젊은 지식인들 다수가 나를 신기술로써 사장시켜버릴 소설가 제1호로 여기는 게 아닐까 싶다.

구미디어 시대의 사람인 나는 이메일에서 사용되는 단어라 해도 문학적 표현에서 사용되는 단어와 마찬가지로 나름의 글쓰기 ‘양식’을 갖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그래서 뉴미디어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를 수행하는 학자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 전쟁과 같이 너무도 현실적인 비극에 대한 인류의 해답을 찾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 인터넷과 이메일을 어떻게 이용하는지 살펴보라는 것이다. 가령 이들이 대인지뢰 퇴치운동을 벌이면서, 인터넷 공간에서 전달한 정보의 ‘양식’은 어떤 것이었는지 알아보는 것이다. 이 운동이 야기했던 엄청난 결과를 생각해본다면, 전세계 곳곳에 정보가 퍼지기까지 1초가 채 걸리지 않았던 이런 정보 전달 형태와, 일본에 오기까지 60년이 걸렸던 정보 전달 형태의 비교가 무의미한 작업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다.

어딘가에서 마루야마 마사오는 “소설가는 아주 사소한 것에서 출발해 굉장히 많은 것들을 이야기하는 사람”이라고 썼다. 하여 나는 내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를 요약해보고자 한다.

내가 인터넷에서 기대하는 건 하나의 힘을 가진 언어가 세계 각국과 국제 교류 무대, 지구 전체를 초토화시키고 있는 이 시대에, 인터넷 네트워크는 개인을 위한 저항 미디어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개인이 사용하는 말은 지배 집단의 영향을 받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서 지배 집단의 의미를 전달하고, 그같은 지배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생각이 이쯤 이르니 <1984>의 작가인 조지 오웰이 떠오른다. 그는 전체주의적 언어에 대한 선견지명을 가졌던 사람이다. 영국 라디오 방송사에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작가는 사람들이 기초 수준의 영어를 사용해 자신들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다는 점에 많은 관심을 가졌었다. 내가 인터넷상에서 사용되는 일본인들의 영어 ‘문체’에 관심을 갖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일본인들은 종종 기초 영어에 가까운 문장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영어를 충분히 개성 있게 만들어가며 ‘일본화’할 수 있다면, 색다른 문체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영어의 ) 새로운 지배에 저항하는 것이다.


<각주>

(1) 게르숌 숄렘, 1897년 베를린 태생, 1982년 예루살렘에서 사망. 문헌학자, 사학자, 이스라엘 신학자. 주요 저서로는 <유대교 신비주의의 주류>(Major Trends in Jewish Mysticism·1941), <카발라의 기원>(The Origins of the Kabbalah·1966), <유대교의 메시아사상>(The Messianic Idea in judaism·1974) 등이 있다.

(2) 발터 베냐민(1892~1940), 프랑크푸르트학파 소속의 독일 문필가. 주요 저서로는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The Work of Art in the Age of Mechanical Reproduction·1936) 등이 있다.

이 글은 1998년 9월 <아사히신문>이 ‘멀티미디어 시대의 저널리즘’이라는 주제로 개최한 심포지엄에서 발표된 것으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자매 격월간지 <마니에르 드 부아> 2009년 6~7월호에 재구성돼 게재된 내용이다.

글·오에 겐자부로
1943년 출생, 소설가. 1994년 노벨문학상 수상. 주요 작품으로 <개인적 체험> <동시대 게임> <그리운 시절로 띄우는 편지> <히로시마 노트> <상처를 딛고 사랑을 되찾은 나의 가족> 등이 있다.

번역·배영란 runaway44@ilemonde.com
한국외대 통역대학원 졸업. <미래를 심는 사람> 등의 역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