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성장’주의, 경제위기 구할 새로운 대안인가?

경제 및 환경 위기로 관심 높아지면서 다양한 실천 노력 등장
사상·조건 따라 십인십색… 차이 넘어 대안 제시할지 미지수

2009-08-05     에리크 뒤팽/언론인

환경위기를 계기로 생산지상주의와 과학 및 기술 진보에 대한 맹목적 믿음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인류의 진보를 정의할 필요성이 점차 대두되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물질은 부족하나 의미는 풍부한 생활양식을 제안하는 탈성장 이론가들과 운동가들이 반자유주의 좌파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 사이에서도 세력을 넓혀나가고 있다. 이들은 특히 다양한 정치적·철학적 사고를 대표한다.


2008년 10월 14일 녹색당의 이브 코셰 의원이 의회 본회의 단상에서 ‘탈성장’을 역설했을 때 프랑수아 피용 총리의 어리둥절한 표정을 봤어야 했다. 이날 코셰 의원은 현 상황을 ‘인류학적 위기’로 진단하면서 “이제 성장의 추구는 반경제적이고 반사회적이며 반환경적”이라고 주장했고, 우파는 열화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코셰의 ‘절제사회’를 건설하자는 호소는 의회의 지지를 얻지는 못했다. 그러나 탈성장이라는 도발적인 주제가 공적 논쟁의 테두리 안으로 들어온 것은 분명하다.

우리 사회는 경기 후퇴를 겪고 있다. 물론 탈성장은 이 사고를 옹호하는 유일한 프랑스 중앙정치인인 코셰가 강조한 것처럼 “성장의 산술적인 역, 즉 역성장과 전혀 관련이 없다”.(1) 그렇지만 성장에 대한 문제제기는 전세계를 뒤흔들고 있는 경제 및 환경 위기의 논리적 귀결인 듯 보인다. 사람들은 갑자기 탈성장 사상가들의 주장에 좀더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그중 한 명인 세르주 라투슈는 “예전보다 더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며 기뻐한다. 폴 아리에스도 “토론회를 열 때마다 청중으로 가득 찬다”고 말한다.

‘탈성장’이라는 단어 자체가 급진 생태주의자 집단의 경계를 넘어 점점 더 자주 사용되고 있다. 일례로 성장 반대론자들로부터 ‘위선적인 환경운동가’라는 비난을 받는 니콜라 윌로는 유럽의회 선거운동 도중 “현실이 탈성장 옹호자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상황에서 현재의 경기 침체 같은 수동적인 탈성장과 의도적인 탈성장 사이에 대안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했다.(2) 윌로는 ‘녹색 성장’의 가능성을 확신하지 못한다고 고백했고, ‘선택된 탈성장과 선별적 성장의 융합’을 주장했다. 심지어 사진작가 얀 아튀스베르트랑도 “오직 탈성장만이 지구를 구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아튀스베르트랑의 영화 <홈>(Home)은 명품 기업 PPR의 자금 지원으로 제작된 영화로, 지난봄 선거에서 녹색당의 약진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3)

탈성장은 거부할 수 없는 운명?


어떤 탈성장 옹호자들은 현재의 위기야말로 그들의 대의를 관철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확신한다. 예전에 작가 드니 드 루주몽이 주창했던 ‘재난의 교육학’을 옹호하는 라투슈는 은행가 프랑수아 파르탕의 저서 제목을 인용하며 “위기가 악화되기를” 바란다.(4) “마침내 위기가 도래했다. 인류는 냉정을 되찾을 기회를 잡은 것이다.” 코셰는 라투슈처럼 지나치게 앞서나가지는 않지만, 인류가 생태적 한계에 부딪치면서 합리적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라고 평가한다. 녹색당 소속 의원이자 지질학자이고 실증주의자인 코셰도 “더 이상 성장은 없을 것이며 탈성장이 우리의 운명”이라고 예언한다. 따라서 이제 위기를 통해 사람들의 의식이 새롭게 일깨워지길 기대하면서 “민주적이고 공정한 탈성장 시대가 도래하도록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낙관주의적 관점은 일부의 입장일 뿐이다. 잡지 <라 데크루아상스>(탈성장)의 편집장 뱅상 셰네는 “우리는 재난의 교육학에 전혀 동조하지 않는다”며 “위기는 스스로를 돌아보고 문제를 제기해보는 기회를 제공하지만 두려움을 퍼뜨리고 혼란을 몰고 올 수 있다”고 평가한다. “위기는 최악의 상황”이라는 것이다. “위기는 성장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계기가 되지만, 사람들은 이 시기 동안 개별적인 이해관계만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성장반대운동(MOC)의 대변인 장뤼크 파스퀴네의 분석이다. 아리에스도 위기의 이중성을 지적한다. “위기가 도래하면 환경문제는 뒷전으로 밀리게 된다. 구매력과 고용 방어에 급급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기는 우리가 수십 년 동안 거짓 속에 살아왔다는 것을 보여준다.”(5) 경기 후퇴가 역성장으로 귀결된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은 걱정과 희망이 뒤섞인 전망을 내놓는다.

‘탈성장’이 주는 강한 임팩트는 이것을 주장하는 정치집단의 극도로 취약한 정치력과 대조된다. 2006년 셰네는 ‘제도 장악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탈성장당(PPLD)을 창당했다. 그러나 PPLD는 실제로 존재한 적이 결코 없다. 의견이 모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셰네는 “어느 정도 무정부주의적 성향을 보이는 사회계층에서 정당을 창당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한탄한다. 사실 그는 모든 탈성장 옹호자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는 않다. 최근에 새로운 집단들이 PPLD 재창당을 시도했다. PPLD 대변인 뱅상 리에게는 “시민단체 출신의 젊은 활동가들을 영입하겠다”고 단언하면서도 다소 ‘시행착오’를 겪고 있음을 인정한다. PPLD는 대대적인 당원 유치를 거부한다. 이 극소 정당의 또 다른 대변인 레미 카르디날은 “우리는 대중 정당이 되고픈 생각이 없다”며 “당원 유치도, 유권자 유치도 바라지 않는다”고 말한다.

‘성장’ 꿈꾸는 탈성장 정치운동

반면 2007년 설립된 MOC는 당원 200여 명과 지방의회 의원 10여 명이 가입해 있다. 조직 구조는 매우 분권화돼 있다. PPLD의 대변인을 지낸 파스퀴네나 녹색당 출신의 크리스티앙 스텅 같은 베테랑 운동가들도 MOC에 가입했다. 특히 많은 여성들과 젊은이들의 참여가 눈에 띈다.

MOC와 PPLD는 성장반대운동연합(ADOC)을 공동 설립함으로써 합당 절차를 시작했다. 이 두 단체는 ‘유럽 탈성장’이라는 기치 아래 유럽의회 선거에 참여했다. 두 단체는 새로운 방식으로 정치를 하겠다며 투표용지도 제출하지 않았다. 그럴 만한 수단도 전혀 없었다. 따라서 이들은 유권자에게 두 단체의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직접 투표용지를 인쇄하라고 부탁했다.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파리 근교의 일드프랑스 지역 공천을 받은 파스퀴네는 0.04%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그러나 탈성장 테마는 이런 수치들과 비교할 수 없는 파급력을 보여준다. 라투슈는 “어쨌든 정당은 시기상조”라며 “정당 창당에 반대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2004년 창간된 월간지 <라 데크루아상스>의 구독률을 보면 탈성장학파의 영향력을 알 수 있다. 이 잡지는 2만 부가 배포되었고 그중 1만3천 부가 서점에서 팔렸으며, 주로 ‘녹색 자본주의’와 ‘지속 가능 발전’을 주장하는 ‘위선적인 환경운동가’들을 겨냥해 논쟁을 이끌어나갔다. “우리는 차분한 논리를 앞세워 민주주의 활성화를 도모한다.” 셰네의 말이다.

1982년 창간 이후 6천 부가 보급된 환경운동 잡지 <사일런스>는 1993년, 탈성장 개념의 창시자 니콜라스 제오르제스쿠 뢰젠의 저서에서 발췌한 내용과 함께 탈성장에 대한 최초의 특집 기사를 실었다. 그러나 별다른 호응은 없었다. 그렇지만 이 잡지가 2002년 두 번째로 탈성장 특집을 실었을 때 상황은 다르게 흘러갔다. 조제 보베, 이반 일리치 등 700명이 참여했던 ‘수평선’이라는 단체가 개최한 유네스코 학술회의에서 이 개념이 수면 위로 부상한 것이다. 2002년 <사일런스>의 탈성장 특집호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잡지의 편집위원인 미셸 베르나르는 “탈성장은 21세기의 주제일 것이지만 나는 잘 모른다”고 말했다.

탈성장학파는 심지어 2008년부터 괜찮은 이론서들을 출간하고 있다. 예로 장클로드 베송지라르가 이끄는 탈성장 이론 및 정치 잡지 <안트로피아>는 상당히 유연한 사고를 발휘하며 탈성장 전망이 제기하는 많은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6)

탈성장학파는 반핵이나 반유전자변형농산물(GMO) 단체, ‘슬로푸드’(7)나 ‘슬로시티’ 운동단체 등 다양한 단체들과 어느 정도 비공식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일반적으로 탈성장 운동가들은 구체적인 단체행동을 선호한다. <사일런스>라는 학술잡지는 미래 사회의 방향설정에 기여하는 체험의 산지식을 중시한다. 이 잡지의 편집위원 기욤 강블랭은 “변화의 욕구는 대안의 실현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강조한다.

상상만 하지 말고 행동하라

스텅은 구체적 행동을 중시하는 이 조류의 대표적 인물이다. 환경의 이용 권리, 관리, 그리고 변화에 작동하는 정치적 힘을 명백히 하려는 이른바 정치생태학의 오랜 주창자였던 스텅은 오늘날 MOC의 일원이다. 스텅의 아들은 옛날 방식으로 곡물을 재배하고 있고, 스텅 자신은 농촌과 숲을 연계시키는 이른바 근린농촌삼림 문제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실생활에서도 탈성장을 실천하고 있는 스텅은 전기도 없이 직접 지은 집에서 살고 있다. 스텅은 “수백 명의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있는” 세벤이 자기 집처럼 편하다고 말한다. ‘임시·이동 주택 거주자 협회’의 회원인 그는 지난 4월의 생장뒤가르 시청 점거 사건의 전말을 설명했다. 시청이 무허가 주거용 요트를 철거한 게 시발점이었다. “우리는 강제 퇴거 후 이동주택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보호한 것이다. 이들은 대부분 파리 지역 출신 젊은이였다.” 이후 국민 모두의 주택 소유 권리를 주장하는 ‘주거권 협회’라는 단체가 스텅이 속한 단체에 이사회 참여를 제안했다.

‘탈성장주의’는 최근에 등장한 조류가 아니다. 심지어 오늘날보다 1970년대에 탈성장주의가 훨씬 더 유행했다. 우리 모두 당시 <폴리티크 엡도>에 연재됐던 반생산지상주의 만화 <01년>과 이 만화의 유명한 대사인 “다 그만둬”를 기억한다.(8) 또한 ‘세상의 종말’을 예고했던 <라 겔르 우베르트>는 1970년대 선구적인 탈성장 사고를 집대성했던 월간지다.

그러나 30여 년 전 생산지상주의에 대한 문제 제기는 폐쇄적인 사상 공간에 국한돼 있었고, 공산당과 ‘진보적’ 마르크스주의가 지배하던 좌파의 방어벽을 뚫지는 못했다. 비록 오늘날 탈성장주의가 과거에 비해 약화된 것이 사실이라도 확실성을 상실한 좌파와 더 쉽게 교류하고 있다. 환경 위기가 발생하고 노동 가치의 위상이 흔들리면서 반자본주의와 반생산주의를 결합하려는 움직임이 대두하고 있다.

젊은 시절 공산당원이었던 폴 아리에스는 “탈성장은 노동운동에 제기되었던 오래된 문제들을 반영한다”고 주장하며 “나 역시 기존 노동운동이 낳은 소외에 대한 비판에서 이 일을 시작했다”고 설명한다. “좌파는 ‘나태할 권리’를 부르짖기도 했다. 좌파가 항상 생산주의의 길을 택한 것은 아니었다.”

장뤼크 멜랑숑의 사상 역정은 좌파 내에서 탈성장주의가 획득한 영향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엄격한 마르크스주의 전통의 신봉자였다가 트로츠키주의자가 되었고 결국 사회주의자로 변신한 좌파당(PG) 창립자 멜랑숑은 오늘날 탈성장 옹호자들의 ‘문제 제기의 힘’을 찬양한다. “우리의 생활양식에 대해 다른 방식으로 사고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항상 더 빨리 움직여야 하는지 자문해봐야 한다.” 이어서 그는 “탐나는 모든 것은 필수품이 되어야 한다는 사고를 불어넣은 생산지상주의”를 비판한다. 여러 좌파 정당 당원들이 모여 있고 몇몇 탈성장 테제와 유사한 주제를 제시하는 소그룹 ‘유토피아’의 지도자 프랑크 퓌퓌나도 멜랑숑의 주장에 동의한다.

생태와 출산의 상관관계는?

반자본주의신당(NPA)도 ‘탈성장주의자’들과 교감하고 있다. 결국 실패로 끝나긴 했지만, NPA와 PG는 지난 유럽의회 선거에서 탈성장주의가 가장 잘 정착한 남동부 지역 단일 공천자로 탈성장 운동가를 내세우는 방안을 고려했었다. 두 정당의 대표자들은 지난 5월 리옹에서 지난 2007년 니콜라 사르코지의 주창 아래 환경과 지속 가능 발전의 접목을 위해 마련된 ‘그르넬 환경 라운드’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여해 ‘지속 가능 발전’의 환상을 폭로하기도 했다.

녹색당의 경우, 오히려 탈성장 사고의 명맥이 거의 끊겼다. 사실 코셰는 당내에서도 고립된 처지다. 올해 4월 코셰는 “신생아는 파리~뉴욕을 620번 왕복하는 것과 맞먹는 환경 비용을 유발”한다며 셋째아이 출산부터 가족수당 총액을 줄이자는 충격적인 주장을 제시했다. 코셰는 자신의 추론이 “과도하게 과학적일 수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인구 증가의 위험성을 새롭게 인지한 ‘네오맬서스주의자’임을 자처한다.

녹색당은 의회 내에서 어느 정도 의석을 확보하고 있고 체면 유지 욕구도 있다. 따라서 녹색당은 유권자들을 기겁하게 만들 수 있는 탈성장 테제와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도미니크 부아네 녹색당 당수는 당명을 ‘지속 가능 발전당’으로 개명할 것을 검토한 적도 있었다. 지난해 12월 녹색당 전당대회 안건은 사상 처음으로 탈성장 테제를 포함했지만, 이는 오직 ‘생태계’에 국한된 내용이었다. 유럽의회 선거 당시 유럽 환경연합의 프로그램은 여기에 ‘육류 소비량’ 감소를 추가한 것이다. 사회당(PS)의 경우, 당 지도층의 지적 호기심 부재로 탈성장주의와 접촉 자체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탈성장은 단순한 슬로건이 아닌 어떤 것일까? 아리에스는 탈성장이 생산지상주의를 뒤흔들 수 있는 ‘키워드’라고 말한다. 셰네는 사회에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이 단어의 잠재력을 찬양한다. 그러나 탈성장주의의 최대 약점은 바람직한 미래에 대해 아무런 청사진도 제시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변화가 없는 ‘정태균형’(靜態均衡) 사회에서 단순한 생산 감소를 주장하는 ‘성장 반대론자’는 없다. 이는 빈곤을 악화시킬 수밖에 없을 것이다. 라투슈는 특히 아프리카 빈곤층의 경우 서구식 생활양식을 모방해서는 안 되지만 물질적 생활수준의 향상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무엇보다 탈성장학파는 철학적으로 심각한 견해차를 보이고 있다. 셰네는 공화주의적, 보편주의적 입장을 고수하는 반면, 라투슈는 ‘문화적 상대주의’를 주장한다. 젊은 시절 중도파에 몸담았던 셰네는 “나는 공화주의, 민주주의, 인본주의적 전망을 갖고 있다”고 선언한다. 이에 반해 “보편적이라는 단어를 좋아하지 않는” 라투슈는 “국민국가는 낡은 개념일 뿐만 아니라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반박한다. 아리에스는 잡지 <골리아스>의 가톨릭계 좌파 운동가들과 협력하면서도 공화주의적 태도를 견지한다. 2002년 대선 후보로 나서려고 했던 탈성장학파의 피에르 랍비는 유심론자들을 대표한다.

극좌에서 극우까지 너무나 다양한 스펙트럼

비록 탈성장학파가 좌파적 성향이 강하지만 이 학파의 강한 생산지상주의 비판은 상이한 범주의 해석들을 초래할 수 있다. 셰네도 인정하는 것처럼 탈성장주의는 정치적으로 “극좌에서 극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망라한다. 예를 들어 2007년 ‘신우파’ 사상가 알랭 드 브누아는 <내일, 탈성장>이라는 저서를 출간한 바 있다.

민주주의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뚜렷한 견해차가 존재한다. 셰네처럼 선거에 입후보하고 제도권 편입을 노리는 쪽과 직접민주주의나 강제위임(주권은 오로지 국민에게만 있으며, 의회는 국민을 위해 이 주권을 강제로 위임받았다는 주장)을 중시하는 쪽으로 나뉜다. 파브리스 플리포는 “이쪽에서 대의민주주의에 대한 불신은 크다”고 지적한다. 아리에스는 “우리는 직접민주주의뿐만 아니라 대의민주주의 강화도 필요하다”고 말한다. 라투슈는 이 모호함을 다르게 표현한다. “난 내가 민주주의자라고 믿지만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탈성장 옹호자들 중에 자신이 바라는 사회가 어떤 사회인지 명시하는 이는 거의 없다. 그러나 2002년 셰네는 이를 시도한 바 있다.(9) “건전한 경제에서 항공 운송, 내연기관 차량은 사라지게 될 것”이며 “자전거, 돛단배, 기차, 동물이 끄는 마차로 대체될 것”이다. 또한 “대형마트가 사라지고 동네 상점과 시장이 활성화될 것이며 지역 특산물이 싼 공산품을 대체할 것”이다. 모든 탈성장 이론가들이 과거 외국으로 이전된 생산기지의 재복귀를 주장하고, 또 많은 이들이 각 지역 통화의 창설을 주창한다. 그러나 모두가 그 정도까지 앞서가는 것에 동의하는 건 아니다.

더구나 우리는 어떻게 그런 프로그램이 대다수 유권자들을 설득할 수 있을지 이해하기 어렵다. 라투슈는 ‘8R 자립사회’ 구축 방안을 강조한다. 알파벳 ‘R’로 시작하는 단어들인 재평가, 재개념화, 재분배, 재이전, 감소, 재사용, 재활용이 8R이다.(10) 라투슈는 소도시 연방사회를 꿈꾸면서도 타협을 주장한다. 즉, “채집·수렵 사회의 자급자족 경제와 현대사회의 기술소외 경제 사이에 타협점을 찾는 것은 정치적 문제다.”

어떤 성장 반대론자들은 ‘자발적인 절제’라는 개별적인 운동에 안주하면서 이 미묘한 문제들을 회피한다. 또 어떤 이들은 주로 영국에서 에너지 역성장과 생산기지 재이전을 목표로 130여 지자체가 참여하는 ‘변화도시’ 프로젝트 같은 지역 주도 프로젝트의 힘을 믿는다.(11)

그러나 여전히 탈성장 테제는 전성기 사회주의처럼 호소력이 강한 긍정적인 정치적 정의가 부족하다. 코셰는 “집단적 상상의 세계를 위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탄한다. “어떻게 더 적은 생산량으로 더 나은 삶을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코셰는 “어떤 유토피아가 필요할까?”라고 자문한다. “더 적은 재화, 더 많은 유대”라는 공식은 충분하지 않다. 아리에스는 “우리가 좋게 사용하는 재화의 무료 공급을 확대하고 나쁘게 사용하는 재화 공급을 금지할 것”을 제안한다. 이때, ‘사용’의 의미를 정의할 때 정치적 고려도 필요하다고 그는 주장한다.

부정의 정의에서 긍정의 정의로 가야

아리에스는 “우리의 목표는 사회적 불평등을 줄이는 것”이라고 덧붙인다. 사실 탈성장은 필연적으로 각 국가뿐만 아니라 전세계적 차원에서 최상위 소득계층에 타격을 줄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탈성장 논쟁에서 암암리에 드러나는 것은 ‘좋은 삶’이라는 철학적 문제다. 기술 진보의 동학(動學)이 주도하는 경제 발전을 민주적 타협의 논리가 대체하는 것이다. 탈성장 옹호자들의 문제 제기에 관심을 갖는 철학자 파트리크 비브레는 전체주의화의 위험성을 구실 삼아 행복을 정치적 문제로 제기하는 것을 금지하는 태도를 거부한다. “만약 우리가 현재 발전 양식에 대한 비판적 사고를 구축한다는 명목하에 더 나은 삶의 문제를 민주적으로 제기하는 것을 거부한다면 어찌될 것인가?” 진보주의자들은 자유주의자든, 사회주의자든, 공통적으로 물질적인 부의 증가를 추구하며 행복은 개인적 문제로 간주한다. 그러나 만약 인간 사회조직의 궁극적 목적이 자연의 물리적인 한계에 직면해, 이런 물질주의적 전제조건을 벗어나게 된다면, 정치적으로 어떤 의사결정도 할 수 없는 현기증 나는 일들이 생겨날 수 있을 것이다.

글 · 에리크 뒤팽 Eric Dupin

번역 · 박수현 domynosie@ilemonde.com 


<각주>

(1) 개인적인 인용은 저자와의 인터뷰에서 발췌한 것이다.
(2) 니콜라 윌로, ‘유럽의회 선거의 주요 쟁점’, <르몽드>, 2009년 5월 15일.
(3) 미셸 게랭 & 나타니엘 헤르츠버그, ‘아튀스-베르트랑’, 브랜드 이미지, <르몽드>, 2009년 6월 4일.
(4) 세르주 라투슈, ‘위기가 악화되길!’, <폴리티스>, 파리, 2008년 11월 13일.
(5) 로르 누알라, ‘탈성장을 매력적으로 만들기’, 폴 아리에스와의 인터뷰, <리베라시옹>, 2009년 5월 2일.
(6) 탈성장주의에 대한 급진적 비판을 보려면 특히 <카이에 막시스트> 2007년 5~6월호를 참조하라. 또는 ‘탈성장, 완벽하게 보수반동적인 관점’, <뤼트 드 클라스>, 파리, n°121, 2009년 7월.
(7) 카를로 페트리니, ‘식도락 운동가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6년 8월.
(8) 제베, <01년>, 파리, 2004년.
(9) 브뤼노 클레멩탕 & 뱅상 셰네, ‘지속 가능한 탈성장’, <사일런스>, 리옹, 2002년 2월.
(10) 세르주 라투슈, ‘자립사회를 위해’, <안트로피아>, n°5, 2008년 가을.
(11) 아그네스 시나이, ‘녹색 신기루와 캘리포니아식 절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9년 7월.

프랑스의 대표적인 진보 언론인. 그는 <렉스프레스> <리베라시옹> 등의 기자, <피가로>의 편집위원, <미라안2>의 편집인을 거치는 동안 거침없는 필력으로 권력의 부당함에 맞서왔다. 특히 <피가로> 재직시에는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을 비판하는 기사를 썼다가 사주의 기사 검열 시도가 있자, 곧바로 사직해 지식인 사회에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현재 그는 파리정치학교(시앙스포)에서 정치경제학을 강의하며 진보 매체에 글을 기고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미테랑 이후>(1991),<완전한 우파>(2008) 등이 있다. 웹 블로그(http://ericdupin.blog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