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말라야, 알피니즘의 성지에서 탐욕의 제물로

과시적 ‘정복욕’ 사고파는 상업주의만 만연
초보자들, 온갖 편의 제공받아 자기만족 즐겨

2009-08-06     프랑수아 카렐/<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특파원

에베레스트를 필두로 한 히말라야 최고봉들이 전세계 알피니스트의 관심을 받은 지 거의 200년이 되었다. 탐험의 형식과 정신은 시대와 그 지배적 이데올로기- 19세기의 정복 욕망과 양차 대전 시기의 민족주의 같은- 에 따라 변화했다. 오늘날 고봉 정복의 강박관념 때문에 히말라야 고봉들은 훈련받지 않은 여행객들의 자기만족 수단이 돼버렸다. 여행객들은 경솔함의 대가로 때때로 목숨을 지불해야 했다.



지상 최고봉이면서 신비에 싸인 에베레스트는 네팔과 중국 국경지대인 히말라야산맥에 있으며 높이는 8848m다. 2007년 가이드 뤼도빅 샬레아는 티베트 쪽 경사면으로 에베레스트를 등반했다. “에베레스트는 이제 경험 많은 산악인들이 마지막에 달성하는 목표가 아니라 인간이 소비하는 하나의 제품이 돼버렸다. 수백 명의 셰르파(1)들이 텐트, 산소통, 버너, 가스, 식품, 침낭 등을 나르기 위해 끊임없이 산에 오른다. 극히 몇 사람만을 제외하고, 7700m부터는 과학적인 방식으로 산소의 도움을 받는다. 성공률은 상대적으로 증가했고 최고봉에서 발생하는 사고는 줄어들었다”고 샬레아는 말한다. 2007년 봄에만 630명이 정상에 올랐다. 이 정복 횟수는 영국인이 최초 등정에 성공한 해인 1953년부터 1993년까지 40년간 이루어진 횟수와 같다.

파키스탄에서 티베트와 네팔을 거쳐 인도까지 이어진 히말라야가 이렇게 많은 산악인들을 불러들인 적은 결코 없었다. 1960년대 말까지만 해도 ‘8천m급 14좌’로 불리는 고봉들은 엘리트 산악인의 욕망만을 자극했다. 당시에는 민족주의적 동기 때문에 모험과 스포츠 경쟁이 극심했다.

1990년대 초부터 정상 등극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등정 후보자들 대부분의 동기는 개인적인 것이었고, 초보자는 아니어도 경험이 부족한 후보자들이 점점 많아졌다. ‘아치형의 히말라야 위기’라 불리는 지정학적 혼란(네팔의 내전, 티베트의 항거, 인도-파키스탄 분쟁, 파키스탄의 이슬람 폭동 등)에도 불구하고 이런 경향은 별 영향을 받지 않았다. 히말라야 등반가들은 지역적으로 불안하거나 금지된 지역을 피해 등정했다. 고지산악여행 비즈니스(탐사를 조직하는 서구나 지역 여행사들)의 발달로 ‘8천m 고봉’ 등정이 차츰 일상화되었다.

19세기 중엽부터 제1차 세계대전까지 ‘팽창주의 식민시대에 탐험과 정복의 철학으로 무장한’(2) 소수의 등산가들이, 즉 앨버트 머머리 같은 영국 등산가뿐만 아니라 아브루제스 공작 같은 이탈리아 산악인들이 과학자들과 함께 인도제국, 중국, 러시아의 국경에 위치한 이 미지의 땅을 답사했다. 최고봉들에는 영국식 이름이 붙었다. 스포츠맨십(에베레스트, K2 혹은 낭가파르바트 등정)과 과학적 목적 외에도 특히 대영제국의 전략적·상업적 관심이 작용했다.

민족주의로 불붙은 20세기 히말라야 도전사

7천m급 고봉이 정복됨으로써 양차 대전 사이 ‘무훈을 자랑하는 위대한 영웅’의 시기가 도래했다. ‘8천m급’ 고봉 경쟁은 때때로 비극적 대가를 치르면서 악착같이 시도되었다. 당시 히말라야에는 매년 10여 명의 서구인이 출현했다. 영국인들은 탐험대를 조직해 에베레스트 정복에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대영제국은 이 상징적인 꼭대기에서 전쟁 중 추락한 군사적·경제적 패권뿐만 아니라 등산 강국의 명성을 되찾고자 했다.

사실 오스트리아-독일인들과 이탈리아인들은 파시스트 나치 체제하에서 돌로미테스, 세르벵, 그랑드조라스, 아이거 등의 ‘마지막 남은 미정복 봉우리들’을 민족주의적 우열의 상징으로 만들고 새로운 등산 기술을 개발하면서, 19세기 영국인들의 전유물이던 알프스산맥에서 치열하게 경쟁했다. “무솔리니 총리와 히틀러 총통이 메달과 보상금을 수여하고, 등산가들을 국가와 국민의 품격을 높이는 사람으로 묘사했다”(3)고 사회학자 미셸 라스포는 기억한다.

애국심 경쟁은 ‘8천m급 고봉’ 쪽으로 이동했다. 독일인들은 1929·31년에 칸첸중가 등정을 시도했고, 독일제국의 확실한 지원을 받아 1932·34·37년에는 파키스탄에 위치한 낭가파르바트로 방향을 돌렸다. 낭가파르바트는 ‘젊은이들이 달성해야 할 공식 표적으로서 민족의 희망’이 되었다고 모리스 에르조그는 말한다.(4) 영국인들은 걱정했다. “에베레스트 등정은 민족과 제국의 관심사다. 현재 우리가 우스꽝스런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독일인들과 미국인들이 이미 에베레스트를 정복하고자 했다. 앞으로 우리가 더 열심히 하지 않는 한, 에베레스트에 대한 우리의 독점권은 정당화되기 어려울 것이다”라고 베를린 올림픽 두 달 후인 1936년 10월 17일자 <모닝포스트>는 질책했다.

1928년 북극에서 추락한 비행선 ‘이탈리아’의 비극(5)에 충격을 받은 이탈리아인들은 알프스에 초점을 맞췄다. 프랑스인들 역시, ‘조국애는 산을 통하여’라는 프랑스 산악클럽의 신조가 증명하듯, 시대정신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프랑스인들은 1936년 아직 미정복지인 ‘8천m급’ 고봉 ‘히든피크’(혹은 가셔브롬 1봉)에 대한 기념비적 탐험을 기획했다. 한편 미국인들은 1938·39년에 K2 등정에 착수했다.

히말라야로 향한 국가 동원 체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영웅적 행동 시대’가 열려, 1950년과 1964년 사이 여러 탐험대가 ‘8천m급’ 14좌를 정복했고, 애국심 경쟁을 했던 모든 탐험대는 군사적 조직을 갖추고 군사훈련을 받았다. 그 후 히말라야 등반객 수가 매년 100~200명에 달했다. 암흑 시기를 보낸 프랑스인들은 영광을 되찾기 위해 1950년 안나푸르나를 정복했으며, 뒤이어 1953년 영국인들, 오스트리아-독일인들이 경쟁적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에베레스트와 낭가파르바트를 등정했다. K2를 정복한 후 영국(1953년)과 이탈리아(1954년)가 국가적 자긍심을 느꼈던 것처럼, 정복이 성공할 때마다 국가적 자긍심은 배가되었다. 기업가들은 정복 시도가 있을 때마다 긴밀히 협조했으며, “등반 탐험은 각 국가가 개발한 기술 수준을 자랑하는 수단이 되었다.”(6)

그 시절에는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엄청난 규모의 원정팀, 수많은 산소통, 수km의 고정로프, 엄청나게 많은 고지 짐꾼들이 동원되었을 뿐 아니라, 프랑스의 안나푸르나, 오스트리아-독일의 낭가파르바트, 이탈리아의 K2 정복에는 중추신경 각성제인 암페타민도 사용되었다. 모든 나라가 ‘8천m급’ 고봉을 최초 정복하고자 했다. 인도와 파키스탄이 건국되고, 네팔은 외부 세계에 문호를 개방하고, 티베트는 국경을 폐쇄당한 상태에서 중국의 침략을 받는 등 그 지역의 정치 지형이 1949년 이래 근본적으로 바뀌었음에도 거의 모든 등반팀들이 몰려들었다.

인도·일본·중국도 ‘8천m급’ 고봉 경주에 참여했다. 일본인들이 마나슬루를 차지했고, 중국인들은 양차 대전 사이 영국인들이 정복하려고 한 에베레스트 북벽으로 접근하는 것을 모두 차단하면서, 수백 명의 산악인들을 줄지어 정렬시킨 등정을 시도해 1960년 에베레스트 북벽을 최초로 정복했다.

인도인들과 미국인들이 각각 60명 이상의 등반가들을 동원해 유사한 시도를 했다. 이 경쟁 시기는 1964년 중국인들이 시샤팡마를 최초로 정복하면서 마감되었다. 1966년부터 1960년대 말까지 탐험이 금지되었다. 중국과의 긴장이 한층 고조되면서 네팔·파키스탄·인도가 외국인들의 국경지역 출입을 금지시켰기 때문이었다.

무산소 등정·신루트 개척, 그리고 상업화

카트만두의 미국 여기자인 엘리자베스 호울리(7)가 ‘과도기’라고 명명한 새로운 시기는 1970년대와 1980년대를 가리킨다. 매년 300명에서 600명의 히말라야 등반가들이 산악지역 곳곳에 출몰함으로써 그 빈도수가 예전의 수치를 훨씬 넘어섰다. 특히 이탈리아인 라인홀트 메스너 덕택에 접근 가능한 모든 국경에 산악인들이 넘쳐났다. 메스너는 1975년 오스트리아의 피터 하벨러와 함께 가셔브롬 1봉에 신루트를 개척했다. 나흘 동안 산악 등정을 하면서 그들은 산소통, 고정로프, 셰르파도 없이 배낭 속에 오직 텐트만을 소지하고 있었다. 알프스에서처럼 한 다발의 로프를 들고 가볍고 신속하게 산을 등정한 것이다. ‘알핀 스파일’이라 불리는 이 방식은 이후 히말라야 등정의 새로운 표준이 되었다.

여러 국가들이 에베레스트(1970년 일본, 1979년 유고슬라비아, 1982년 캐나다와 소련)나 K2(1978년 프랑스)를 ‘최초 등정’하면서 군대식 진지 기술을 사용했는데, 이 기술은 곧바로 사라졌다. 피터 하벨러와 함께 에베레스트를 무산소 등정해 세계에 충격을 준 메스너는 1978년 낭가파르바트(8125m)에서 알프스 스타일로 혼자 신루트를 개척했다. 수단의 윤리성과 경제성을 결합한 알프스 스타일은 모든 국적의 최고 수준 등반가들이 사용하는 주요 기술이 되었다. 메스너는 마침내 1970년과 1986년 사이 ‘8천m급’ 14좌를 무산소 등정한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8천m급 14좌 도전’은 이렇게 탄생했으며, 최초의 상업적 탐험들도 1980년대에 생겨났다.

새로운 유형의 히말라야 알피니즘은 에베레스트와 초오유, 네팔의 아름다운 아마 다블람(6856m) 정상 등정을 상품으로 특화한 앵글로색슨계 가이드 여행사들이 설립되면서 1990년부터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매년 1천~3천 명의 히말라야 등산객들이 이 지역에 물밀듯이 쇄도했다. 8천m급 고봉들이 대부분 점령되면서 등산객이 급속도로 증가했다. 등산객의 급증은 고봉들의 최초 등정 50주년 기념 효과 때문으로 간주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중국·네팔·파키스탄 정부가 총력 경쟁을 벌여 여행객을 유치한 결과였다. 이 국가들은 입산 비용을 인하하고, 인프라를 구축했다. (현재 중국의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는 도로로 연결돼 있고, 네팔의 베이스캠프는 헬리콥터가 운행되고 있다.)

새로운 히말라야 등산객들은 두 부류로 나뉜다. 가이드들과 셰르파 팀의 도움을 받는 상업적 탐험 고객들은 에베레스트 등정을 위해 각자가 3만에서 4만 유로를 지불하고, ‘가이드 없는’ 부류는 어느 정도 등반 식견을 갖춘 아마추어들이다. 등반 식견을 가진 아마추어들은 지역 여행사들과 하청 계약을 맺어 베이스캠프에 물자를 보급하고, 입산 비용을 배분하기 위해 자기들끼리 조직을 짜며 수시로 고지 짐꾼들을 고용한다. 그들은 패키지 요금을 지불하고, 그 대신 무거운 짐을 나르는 데 이들 짐꾼을 이용한다. 2000년과 2006년 사이 에베레스트 등산객 중 3분의 2는 이런 범주에 속했다. ‘개인적으로’ 탐험하러 온 1800명의 등산객이 1160명의 셰르파를 고용했는데, 상업적 탐험으로 오게 된 938명의 고객들은 996명의 셰르파와 가이드의 도움을 받았다.(8)

파트너 팽개치고, 셰르파 물건 취급하고

2008년 여름 가셔브롬 2봉에도 역시 많은 등산객이 몰려들었다. 서류상 17개 상업적 탐험대와 개인 탐험으로 나눠진 약 170명의 히말라야 등산객들(파키스탄 짐꾼들은 제외)이 가셔브롬 1과 2의 공동 베이스캠프에 몰려들었다. 이들 중에 히말라야의 경험은 거의 없지만 고도의 등반 기술을 가진 포르투갈 산악인들이 포함돼 있었다. 8천m 고봉을 염원했던 파울로 록소와 다니엘라 테익세이라가 바로 그들이었다. 등정을 마친 후 그들은 매우 비통해했다. “고정로프는 가장 경사면이 급한 지역에서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고정로프들이 상업적 목적으로 너무 자주 사용되고 있다. 고정로프는 등반 기술이 없는 많은 사람들에게 정상 등반을 보장해준다.” 그들은 자격 없는 히말라야 등산객들을 신랄히 비난했다. “우리는 사망 사고를 일으킬 수 있는 치명적인 실수들과 전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런 실수들은 무경험의 산물이다.” 그들은 자격 없는 등산객들의 해로운 정신 상태를 지적했다. “등정에 성공했다고 거짓말하고(가짜 정상에 도달), 위험한 설빙 속에 파트너들을 방기하고, 고지 짐꾼들을 물건처럼 취급하는 등 모든 상황을 종합해볼 때, 상당수 등산객들은 진정한 알피니즘 정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영광을 추구하고 자기애를 만족시키기 위해 등정하고 있는 것이다.”

전세계에서(대부분 선진국에서) 날아온 수천 명의 남성과 여성은 재정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고, 에베레스트를 필두로 한 최고봉들의 높은 고도에서 서로 만난다. 히말라야에 입산하는 것은 신화의 공간, 즉 선구자들이나 국가적 영웅들의 이야기 공간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1980년대부터 성과 제일주의와 극단적 개인주의의 확산으로 인해 우리 모두는 자아실현이라는 일종의 사회적 압력을 받고 있다. 사람들은 탐험을 통해 평범한 영웅이 되고자 한다. 히말라야 알피니즘은 위업 달성을 위해 모험정신을 발현하는 일이며, 한계를 뛰어넘는 확실한 수단이 되고 있다”고 히말라야 알피니즘에 관한 논문을 쓴 에릭 부트루아(9)는 분석한다. 히말라야에서 귀환한 ‘선택받은 자’는 콘퍼런스, 저서, 인터뷰 등을 통해 자신의 무훈을 상징적으로나 상업적으로 이용해 돈벌이할 찬스를 갖게 된다.

프랑스 가이드들인 크리스티앙 트롬스도르프, 야니크 그라지아니, 파트리크 와니옹은 ‘리더들 TGW‘(TWG는 세 사람 이름의 이니셜)라는 별명을 가진 히말라야 알피니즘의 최고 리더들 중 하나다. 가장 순수한 알프스식 스타일로 7천m급 고봉들을 여러 차례 최초 등정한 이들은 8천m급 고봉의 정상 루트에 사람들이 몰리는 현상에 대응하는 산악 엘리트들의 표준적 태도를 보여준다. 현재 높은 수준의 등반 기술이 사용되는 곳은, 비록 언론의 관심을 끌지는 못하지만, 고도 6천~7천m 봉우리에서다. 8천m급 고봉들은, 2005년 가을 사망한 장크리스토프 라파유의 경우처럼, 신루트 개척이나 겨울 등반의 경우에만 저명 산악인들의 관심을 끈다.

한물간 등정주의, 미디어의 집요한 애착

‘TGW’ 트리오는 2008년 여름 K2에서 신루트를 개척하고자 했다. 그들은 베이스캠프에서부터 만난 60여 명의 등정 후보자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금세 친숙해졌다. 등정 후보자들 중에는 가이드들이 이끄는 상업적 탐험대는 한 팀도 없었고, 네덜란드·미국·한국·세르비아 등에서 스폰서를 받고 언론의 조명을 받는 전문 모험가들이 이끄는 탐험대만이 존재했다. 8천m급 고봉들의 모든 기슭에서 그런 것처럼, K2 기슭에서도 사람들은 자신들이 시도했거나 성공했던 고봉 수로만 자신을 소개하고 스스로를 규정했다. ‘8천m급 14좌 정복’을 의미하는 ‘그랄’(Graal)은 이미 16명이 달성했는데 그중 8명은 무산소로 등정했다. 그럼에도 14좌 정복은 여전히 산악 등반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 (미디어들은 이 경쟁에 열광하고 있다.) 8천m급 7개좌에서 13개좌까지 달성한 전체 산악인 수는 70명으로, 주요 경쟁자들이 새롭게 등정할 때마다 관심을 끌고 있다. 특히 8천m급 9개좌에서 12개좌까지 달성한 여성 산악인이 5명에 불과하기 때문에, 여성 산악인들은 언론의 각별한 관심을 받고 있다.

K2 등정에서 ‘TGW’ 트리오는 다음과 같은 분석을 내놓는다. “‘8천m 정복주의’는 하나의 새로운 스포츠다.” 트롬스도르프는 요약한다. “괜찮은 육체 조건, 어느 정도의 아이젠 개념, 약간의 산소와 주마(Jumar·고정로프에서 견인되게 해주는 자동잠금 등강기)가 있으면 어느 누구라도 8천m급 고봉을 기어오를 수 있다. 알피니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기어오르는 것이 아니라 로프 위에서 견인되고 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어떤 자율성도 가질 수 없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산악 일정을 탐색하지 않으며, 스스로 전진하는 노고를 감수하지 않는다. 산에 대한 경외가 없는 이런 알피니즘은 집단 강간과 유사하다.” 뒤이어 와니옹이 자세히 설명한다. “‘8천m 정복자’는 주마와 가장 완벽한 통신수단을 갖추고 혼자 또는 그룹으로 고봉 정상에 도착한다. 8천m 정복자가 받는 외부 도움은, 스스로 설치하거나 돈을 주고 보상하는 다른 탐험대의 고정로프에서부터 산소를 비롯한 갖가지 신경흥분제까지 포함된다.” 7천m 봉이나 심지어 6천m 봉에서 그러는 것처럼, 8천m 봉을 올라가는 데 필요한 제품은 8천m 정복자들 스스로가 먹는다고 인정하는 신경흥분제다. 몇몇 텐트 속에 약품들이 감춰져 있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몇 개만 언급하자면 부신피질호르몬과 다이아목스(Diamox·고산병 예방약이며 이뇨제)가 흔하게 사용된다.

날씨를 자동으로 알려주는 장치를 통해 ‘정상의 날’을 예고받은 베이스캠프가 열광에 휩싸였을 때인 7월 말, ‘TGW’ 트리오가 캠프를 떠나게 되었는데, 그때 트롬스도르프가 중요한 문제점을 지적했다. “K2는 등정하기 힘든 산이다. 이 산은 경험 많고 완벽하게 자율적인 아마추어들만이 표적으로 삼을 수 있다. 우리와 함께했던 등산객 중 80%는 여기서 할 게 아무것도 없다. 공동 물자보급 체계, 짐꾼들, 고정로프가 없는 상태에서 그들은 겨우 서 있기도 힘들어한다.”

신앙이 된 8천m급 등정, 결국 산을 잃다

이들 프랑스인은 엘리트주의와는 상관없는 것이라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불행하게도 뒤이어 발생한 사고들이 그들 말의 정당성을 증명해주었다. 8월 1~2일에 8천m급 등산객 7명과 파키스탄·네팔 짐꾼 4명이 정상 근처에서 추락, 과도한 피로, 빙산 붕괴로 차례차례 사망했다. 완벽하게 좋은 날씨였지만 인원이 많은 관계로 더디게 전진했기 때문에 그들은 절대적으로 지켜야 할 ‘타이밍’을 준수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산소 사용자들의 산소가 떨어졌고, 특히 고정로프가 없는 곳에서 매우 취약한 등산객들이 정상 바로 아래에서 고정로프 없이 야밤에 하산해야만 했다. 에베레스트나 초오유 곳곳에서 받을 수 있는 상업적 탐험대의 물자 보급을 이곳 K2에서는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올라가면서 고지의 일부에만 장비를 설치했다. 게다가 저녁 무렵 눈사태가 발생함으로써 그들이 설치했던 고정로프의 일부가 휩쓸려가 버렸던 것이다.

히말라야 알피니즘에 대해 생각하는 수많은 서구와 파키스탄 혹은 네팔 산악인들처럼, 파트리크 와니옹은 이번 비극이 벌어진 뒤 위험신호를 보냈다. “8천m급 고봉 등정이 점점 더 맹목적 신앙이 되어가는 것 같다. 걸린 돈이 상당하기 때문에, 환경적 고려와 안전을 무시하고 이런 경향이 강화되고 있다. 8천m급 고봉 탐험은 대부분 스폰서와 언론의 관심을 엄청나게 받고 있다. 적지 않은 8천m급 등정 산악인들은 많은 산악인들에게 이미 폐기된 정상 지상주의(등정주의) 알피니즘을 전파하는 모험 전문가들이다. 정상이 목표라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정상에 오르는 산악 활동의 본질 자체와 그것을 실현하는 방법을 잃어가고 있다.”(10)

1950년대 가이드이자 기독교 목사이며 고봉 히말라야의 간편 등반 개척자인 폴 켈레르는 이렇게 상기시킨다. “알피니스트는 기술적 능력과 위험에 대한 인식, 친숙함과 존경의 결과인 산에 대한 사랑을 결합할 줄 아는 사람이다.”(11) 그는 산을 완전히 망각하면서 산을 ‘자기 자신들에 대한 열정의 수단’으로 삼는 히말라야 등산가들을 비난했다. 그러나 ‘8천m 알피니즘’ 실행자와 프로모터가 불안해할 필요는 전혀 없는 것 같다. 2009년 5월 18~23일 에베레스트 경사면 정상에 수백 명의 산악인이 몰려들어 광기가 넘쳐났던 것과 관련해 ‘8천m 등정 산악인’이라는 친목모임을 운영하는 마운트에베레스트(mounteverest.net) 사이트는 이렇게 주장했다. “에베레스트 주변의 혼잡은 베테랑 히말라야 산악인들과 환경운동가들만 걱정하는 것 같다. 다른 모든 사람들은 히말라야에 가고 싶어한다. 독자들은 ‘다음번 에베레스트 등정은 언제입니까? 되도록 빨리 알려주세요. 나는 훈련을 빨리 시작했으면 좋겠어요’라는 메일을 우리에게 보낸다. 우리가 미래를 정지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글·프랑수아 카렐 François Carrel
번역·고광식 kokos27@ilemonde.com 


<각주>

(1) 히말라야 짐꾼들과 가이드들로서, 원래는 티베트의 네팔족 출신이다.
(2) 사회학자 미셸 라스포의 표현, <히말라야의 모험-세계 최고봉 탐험의 쟁점>, 그르노블 대학출판사, 2003.
(3) 앞의 책.
(4) <히말라야의 대모험>, 파리, 라트, 1981. 모리스 에르조그는 루이 라쉬날과 함께 1950년 6월 3일 8천m급 최고봉 중 하나인 안나푸르나를 최초 등정했다.
(5) 1928년 5월 23일, 북극에서 기후, 자기, 지리 측정을 수행 중이던 이탈리아 비행선 ‘이탈리아’가 추락했다. 탐험대원의 반이 사고로 사망했다.
(6) 미셸 라스포, 앞의 책.
(7) 엘리자베스 호울리 & 리처드 샐리버리, <숫자로 본 히말라야- 네팔 쪽 히말라야 등정 통계 분석>, 2007년 9월, www.himalayandatabase.com.
(8) <에베레스트 탐험 통계 2000~2006>, www.adventurestats.com.
(9) 에릭 부트루아, <이국과 고도- 히말라야 알피니즘의 민족학>, IDEMEC/엑스-마르세유대학, 2004.
(10) 파트리크 와니옹, ‘K2봉 사고에 대한 성찰’, <산 매거진>, 337호, 그르노블, 2009년 1월.
(11) 폴 켈레르, <잊힌 산>, 게렝출판사, 샤모니,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