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리다 빈집엔 왜 대마초만 무성할까

은행 압류에 주인 잃은 주택서 음성적 재배 만연
정부·개발업자 횡포에 맞선 빈집점유운동 번지나

2009-08-06     올리비에 시랑/<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특파원

 

풍광 좋기로 소문난 플로리다는 관광객이 즐겨 찾는 곳이다. 북동부와 중서부 지방의 은퇴자들은 이 지역에 주거를 마련하길 꿈꾸지만 아직은 때가 이른 것 같다. 미국에 허리케인이 불어닥치는 시기가 돌아오면, 이곳 플로리다에서는 경제위기 속에 압류된 채 방치된 집들이 ‘위험물’이 된다.
 

리하이 에이커스에서는 여느 집이나 마찬가지다. 우편엽서에나 나올 듯한 차고를 갖춘 예쁜 집, 바비큐 파티를 할 수 있는 잔디가 깔린 정원이 있으며 성조기를 걸어두는 키 큰 깃대도 있다. 손님을 맞는 입구에 붙은 ‘급매’라는 팻말을 보며 톰이라는 17살 고등학생은 “절대 안 팔 것”이라고 이죽거린다. 잔디는 군데군데 파였고 차고 문을 지탱하던 경첩에는 거칠게 말뚝이 박혀 폐쇄돼버렸다. 은행이 집주인들을 거리로 내쫓아버린 2007년 이후 깃대에는 더 이상 국기도 펄럭이지 않는다. 톰은 램프를 손에 들고 집 안을 한 바퀴 돈 다음 판자 두 장으로 막아버린 창문 앞에 멈춰서 “이쪽으로 와보라”고 손짓한다. 판자 하나를 뜯어내고 부엌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지독한 곰팡이 냄새가 진동한다. 강제 퇴거 때 개수대를 뽑아버려서 나는 냄새다. 그는 “삼촌과 숙모가 집을 비울 때 모든 것을 깨부숴버렸다”고 설명해준다. “여기서는 모두가 그렇게 했어요. 지극히 정상적이죠. 그것만이 그 고약한 은행가들에게 복수하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죠.” 램프 불빛에 쓰레기 더미 사이로 플로리다 해변의 일몰 광경이 담긴 달력 사진이 드러난다. 톰은 부엌 뒤로 난 계단을 타고 조그마한 지하실로 내려가 자신의 비밀 작업장을 공개한다. 거기에는 자극적인 향내를 풍기는 열 그루 남짓의 대마가 자라고 있다.

“사업을 하기에는 적절한 시기다. 이렇게 신나는 시절은 없었다”고 억만장자인 도널드 트럼프가 지난 4월 15일 <CNN>에서 말했었다. 위기의 시기는 그 위기를 이용하려는 자들에게 좋은 기회를 제공하는 법이고 ‘자영업자’라고 스스로를 소개하는 톰도 말하자면 그 기회를 멋지게 붙잡은 것이다. 건축 기술자인 그의 아버지는 플로리다 서부 해안 지역인 포트마이어스의 영원한 교외 지역 리하이 에이커스가 폐허로 변한 뒤 직장을 잃었다. 지옥과도 같은 부동산 차압 조치는 심지어 지역 신문의 찬사를 받기도 했다. <뉴욕타임스>는 그 나름대로 2009년 2월 8일자 ‘플로리다, 절망과 담보물 권리 상실’이라는 기사에서 “완전히 후진하는 아메리카의 꿈에 오신 것을 환영한다”고 비꼬기까지 했다.

     
2000년 초 투기 붐이 일어난 뒤, 낡은 주택들은 마치 빵조각처럼 허물어졌다. “더 이상 예전의 빈민굴이 아니라 3만 인구가 3년 사이에 8만으로 증가한 매력적인 개발지가 되었다”고 지역 상공회의소 소속 건축가 애드워드 와이너는 말한다. “우리는 은행의 탐욕을 과소평가했던 것이지요. 은행은 너무 많은 돈을 벌려 했고, 브루클린·독일·베네수엘라 등지에서 온 투기꾼들은 거기서 살게 될 임차인들에 대한 고려도 없이 집을 무더기로 사들였습니다. 오늘날 이들은 새로 지은 집들이 뿌리부터 썩어가도록 내버려두고 있습니다. 당시 세워졌던 1만 가구 가운데 20%는 사람이 한 번도 거주한 적이 없습니다. 은행은 더욱 신중해졌으나 빚을 진 집주인들을 내쫓으려고 합니다. 황당한 일입니다. 차압을 하면 아직 사람이 사는 이웃집들의 가격을 떨어뜨릴 게 분명한데도 은행은 다시 되팔 수도 없는 집들에서 사람들을 내쫓고 있는 꼴이지요.”

집값 폭락에 실업률은 급상승

2004년 당시 30만 달러를 호가하던 주택은 현재 10만 달러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와이너는 “3월의 압류 건수가 2100건으로 2월의 2300건보다 약간 줄었다”며 “늦어도 18개월 뒤부터는 집값이 반등할 것”이라고 낙관적으로 전망한다.

그러는 사이 일자리는 수천 개씩 사라지고 있다. 실업률은 2007년 3.5%에서 2009년 3월 12%로 2년 사이 4배나 증가했다. 이곳 중산층 역시 일자리가 줄고 저당 잡힌 부동산의 담보 회수권을 상실해 다른 수입마저 사라진 처지다. 인도도 없는 아스팔트길을 따라 멀찍이 떨어진 곳에 위치한 이들의 주택은 그나마 이웃한 것이라곤 교회나 쇼핑센터 또는 간간이 서있는 골프장뿐이어서 대마 재배업자들이 ‘불법 행위’를 하기에 안성맞춤이다.

“비어 있는 집들이 즐비하다. 내 삼촌 집도 아직 전기가 그대로 연결돼 있다. 은행도 그 집을 되팔 능력이 없는데, 그 집을 무엇인가 유용하게 사용하는 게 왜 안 되나? 나는 가끔 모든 것이 잘 돌아가는지 살펴보러 들른다. 만일 경찰이 온다고 해도 내가 한 짓인지는 알지 못할 것”이라고 톰은 말한다.

이렇게 ‘담보 회수권’을 상실한 주택들이 불법 행위를 위한 비밀스런 토지로 둔갑하는 통에 경찰에게는 골치 아픈 업무만 하나 더 늘어난 셈이다. 2008년 리하이 에이커스 경찰은 시가 700만 달러어치 대마 3천 그루를 적발했다. 당사자들의 자백에 따르면 맨해튼보다 4배나 넓은 지역에 흩어져 있는 수천 가구의 빈집을 일일이 수색하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경찰 반장 리처드 돕슨도 “사람들이 점점 더 가난해지고 이것이 마약 밀매와 청소년 비행으로 이어진다”고 인정하고 있다. “가치의 70%가 사라져버린 주택을 마이애미의 라틴계들이 사들여 대마 재배 장소로 이용한다. 체포 사건이 없이는 단 한 주도 그냥 지나가는 법이 없으며 벌써 주택 수백 채가 봉쇄됐다. 그렇다 해도 완전한 통제는 불가능하다.” 돕슨 반장의 공지문을 읽어주면서 톰은 어깨를 으쓱한다. “경찰은 쿠바인들에게 혐의를 두고 있어요. 맞아요. 그들은 사업을 벌일 때는 확실하게 하죠. 하지만 똑같은 사업을 하는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을 나도 알고 있어요. 위험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쿠바인들보다는 덜 의심을 받거든요.”

젊은이들, 대마 키우거나 군대에 가거나

번성하는 대마 재배를 막는 데 한계를 절감한 경찰 당국은 ‘잡초와 씨’라는 제법 목가적인 이름을 붙인 프로그램을 통해 주민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잡초’는 ‘나쁜 녀석들’에 해당하고, 반대로 ‘씨’는 주민들에게 우선 먹을 것과 의복을 제공하고 주민들은 그 대가로 의심스러운 걸 발견하면 경찰에 신고하게 하는 구상을 가리키죠.” 톰은 눈살을 약간 찌푸린다. 회의감의 표시다. “그들은 땅콩버터를 나눠주고 고발을 부추겨 문제를 해결하길 바란다”면서 잘 자라고 있는 대마 잎을 쓰다듬는다. “그렇다고 해도 이미 잃을 게 아무것도 없어 이 시궁창에서 탈출하려는 욕망조차 없는 사람들을 막을 수는 없을걸요. 저희 집은 어머니가 아직 일이 있기에 어렵사리 집을 간직할 수는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제 학비는 댈 수 없다는 걸 알지요. 그래서 저는 잡초와 군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일만 남았지요.”

이웃집의 두 아들은 다른 선택을 했다. 하나는 해군에, 다른 하나는 해병대에 입대했다고 한다. 리하이시 홍보실 부실장인 파멜라 케이 여사는 군대 간 아들들 사진을 액자에 곱게 넣어 사무실 책상 위에 올려놓고 있다. “내 아들들이 자랑스러워요. 어찌됐거나 그들은 떠나야만 했지요. 가까운 이웃들이 하나둘 축출될 때마다 더는 안전하지 못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지요. 남편은 무기를 사려고 했지만 전 총포를 싫어하거든요.”

케이 여사는 ‘잡초와 씨’ 프로그램에서 ‘영양가 만점’인 땅콩버터, 쌀, 국수, 잼, 우유 등으로 구성된 식량 원조 프로젝트의 코디를 담당하고 있다. 2008년 10월에서 2009년 4월까지 그녀의 팀은 1245가구에, 보관 기간이 길어 신선하지는 않지만 영양가는 만점인 통조림을 배포했다. “어떤 이들은 식수도 없고 전기도 공급받지 못한다”고 그녀는 덧붙인다. “집을 빼앗긴 사람들은 자동차에서 자거나 가까운 친척집으로 가거나 또는 어딘지도 모를 곳으로 갑니다. 여기 리하이에는 노숙자를 위한 숙소가 없기 때문이죠. 되는 대로 도울 뿐입니다. 책정된 예산도 없어 기부와 자원봉사자들에게 의지할 뿐입니다.”

주민세로 걷어들인 돈도 2008년 47%나 격감했다. 이 때문에 이 도시의 재정 적자는 900만 달러나 쌓였다. 빈곤층을 돕기 위해 시는 지역 유지나 교회의 자비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리하이시 홍보실의 자그마한 대기실에서 만난 작달막하고 뚱뚱한 체구의 50대 남성 지미는 광고판을 벗겨내느라 태양빛에 잔뜩 그을려 있었다. 그는 25년 동안 배관공으로 일하다 일주일 전에 해고되었다. 그가 식량 원조를 청한 것은 처음이라고 한다. “나는 내 집을 내 손으로 지었지요. 아무도 내 집을 빼앗아갈 수 없어요. 그럼에도 난 이전에 진 빚을 갚으려고 새로 융자를 받는 바람에 빚이 목까지 찼습니다. 내 집 땅값은 2002~2004년에 3배가 뛰었는데, 지금은 거의 값어치가 없지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건축 토목, 부동산 중개인, 은행 등에 모든 걸 걸었던 것 같아요. …위기는 마치 벼락처럼 닥쳐왔고 일단 닥쳐오자마자 그 다음날 모든 것이 끝나버렸습니다.”

시는 재정 적자 허덕, 빈민 구호는 민간에

그렇다면 버락 오바마의 경제 재건 프로그램은 어떤가? 은행에 과다 채무자들과 대출 재협상을 하라고 요구하지 않았던가? “그거야 아직 수입이 있는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얘기다. 아무것도 없는 사람에겐 해당 사항이 없다”고 지미가 비꼰다. 케이 여사도 “여기 오는 이들은 어느 은행에서도 대출 재협상을 하려 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자기 집에서 축출된 가정들은 바로 그 집을 파손하는 것으로 분노를 표시한다. 이것이 바로 내 이웃들이 겪는 실태다. 나는 그들을 비난할 수 없다”고 인정한다.

한 쿠바인 엄마가 문을 살며시 열고 들어와 음식을 요청한다. 겉으로 보기에도 몹시 불편해하는 것 같다. 밖에서는 남편과 두 아이가 자동차에서 기다리고 있다. 차 뒷문에는 ‘급매’라는 문구가 스카치테이프로 붙어 있다. “그나마 자동차가 있으면 집을 잃어도 차 안에서 잘 수 있다. 그러나 자동차마저 잃게 되면 될 대로 되라는 식이 된다. 특히 여기서는 버스도 뜸하고 멀다”며 케이 여사는 한숨을 내쉰다. 애브람스가에 있는 자동차 중고 판매상을 방문해보면 그것이 특수한 경우만은 아님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 수백 대의 차가 대기하고 있지만 사려는 사람은 없고 팔려는 사람들만 있다. 거래는 한산할 뿐이다”라고 한 중개인이 탄식한다.

그럼에도 고등학생, 경찰, 건축가, 실업 중인 노동자, 공익 담당 여성 노무자 모두가 위기가 더는 악화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지미도 이를 확신한다. “플로리다는 활력 있는 주입니다. 경제는 분명 재건될 것입니다. 어쨌든 나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은퇴를 생각할 수도 없고요.” 돕슨 반장 역시 “건축 경기는 되살아날 것”이라고 말하면서 “벌써 그 조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덧붙인다. “지금부터 몇 달 안에 나도 다른 곳에서 일자리를 찾아볼 생각이다. 그러면 대마초는 내가 개인적으로 소비할 만큼만 재배할 생각”이라고 톰도 억지웃음을 지으면서 말한다.

불확실한 이 낙관론은 그 불확실함만큼이나 근거가 없는 것인가? “플로리다에 투자합시다”라고 프랑스인 고객을 모집하는 인터넷 사이트가 번창하는 것으로 봐도 그건 아닌 것 같다. 2008년 54만9414채의 부동산 압류로 미국에서 가장 심각한 위기가 닥친 캘리포니아주 다음으로 높은 수치를 기록한 플로리다는 “여전히 투자가들에게는 무한한 가능성이 잠재한 주이며 유럽보다 훨씬 싼 가격으로 다양한 형태로 정착할 수 있는 기회의 땅”이라고 ‘모나파르타미아미닷컴’(Monappartamiami.com)은 광고한다. “플로리다에 수영장을 갖춘 주택? 2만 유로만 출자하면 마침내 실현 가능한 꿈”이라고 떠들고 있는 캡플로리드닷컴(capfloride.com)은 메인 화면에 “미국의 위기를 이용합시다”라는 배너를 달고 있다.


프랑스 부동산업자들은 ‘바이 아메리카’

브리지트 베니세 부인은 이 기회를 이용했다. 파리9대학 경제학 학사인 그녀는 20년 전부터 마이애미에 살았는데, 미국의 프랑스인들이 운영하는 제1의 부동산 중개업소라고 소개하는 ‘리치홈스 오브 플로리다’의 열정적인 사장이다. 그녀 생각에는 이 위기가 그녀의 몇몇 경쟁자들을 제거하는 호기로 작용했다. “2004년은 누구에게나, 그리고 아무렇게나 해도 팔 수 있는 시기였어요. 사람들은 아파트를 사기 위해 새벽 5시부터 줄을 섰습니다. 가격은 ㎡당 6천 달러가 넘는, 현기증이 날 만한 액수였지요! 당시에는 마이애미의 프랑스인 모두가 부동산 중개업자가 되고 싶어했어요. 아시겠지만 미국에서 중개업자 되기는 무척 쉬워요. 복수 답의 문제지 하나로 통과하는 면허면 충분했답니다. 하지만 남용과 사기도 있었지요. 4천만 달러의 외상을 남기고 도망쳐버린 동료도 알고 있습니다. 위기가 이런 시스템을 정리해줘서 ‘선악’을 구별하는 계기가 되었답니다.”

그녀는 마이애미의 번드레한 구역인 사우스비치 카페의 테라스에 앉아 “붐이 일었던 시기보다는 확실히 적은 수익을 올린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불평하지는 않는다. “어떻게든 잘 극복할 거예요. 오늘 오전에는 2년 전이라면 120만 달러 정도는 됨직한 아파트를 40만 달러에 팔았습니다. 당시에는 내 인터넷 사이트에서 두 번의 클릭이면 충분했을 것들을 요즘은 500번 정도는 한답니다!” 그녀의 고객층은 100% 프랑스인들인데 더 이상 중소기업의 사장들과 정부의 고위 관료들에게만 한정되지 않는다. 좋은 사업의 식단이 민주화된 셈이다. “매일 아침 15만 달러에도 못 미치는 예산을 지닌 은퇴자 자영업자들의 메일을 받는다. 이처럼 ‘가난한’ 고객들을 예전에는 결코 알지 못했다!”며 그녀는 웃음을 터뜨린다. “그럼요. 플로리다는 여전히 꿈꿀 만한 곳이지요.”

그녀의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리치홈스 오브 플로리다’의 여사장은 확신에 찬 미래를 그리고 있다. “미국 전체적으로 170만 채의 부동산 압류가 있었습니다. 압류는 2012년까지는 계속되리라 생각됩니다.” 이 우스꽝스러운 전망에 독특한 세제 조건도 더해진다. 여기 미국에서는 사회적 자산의 남용도 합법적이기 때문이다. 베니세 부인도 ‘세금을 내지 않고’ 회사의 수입으로 생계를 댄다. 그녀가 미국인들의 정신을 매우 편하게 생각하는 것도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니다. “사람들이 프랑스보다는 훨씬 더 철학적인 것 같아요. 이들은 사물에 대해 감정적인 관계를 갖지 않습니다. 어떤 이의 주택이 압류당하면 모두가 그것을 정상적이라 간주하고 그 상황에서 각자의 이익을 추구합니다. 이런 식이지요. 여기서 흔히 말하듯이. ‘나는 내 계산서를 지불했고 그것으로 좋다.’”

그러나 몇 달 전부터 다소 까탈스러운 행동이 마이애미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도시에서 가장 가난한 구역 중 하나이며 그런 이유로 당연히 베니세 부인의 관심 구역이 아닌 리버티시티라는 흑인 거주지에서 ‘땅을 되찾자’는 뜻의 ‘테이크백 더 랜드’(Take Back the Land)라는 이름의 단체가 은행빚으로 주인이 쫓겨난 집들에 무주택자들을 거주시키기 위해 강제 점유에 나선 것이다. 이날은 단지 10여 가구만이 비어 있는 적당한 집을 찾았다. 쉬운 일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이 단체의 설립자 중 한 명인 마르크스 라모는 “먼저 훼손이 덜 된 양호한 집을 찾는 게 급선무”라고 말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집들은 퇴거 당시 심하게 훼손되었습니다. 우리 팀이 간단한 작업을 하고 전기를 연결하고 수거한 가전기기를 설치하지만 대규모의 작업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다음에는 미국에서 가장 혐오스럽다고 소문이 자자한 마이애미 경찰과 다퉈야 합니다. 우리가 승리하려면 이 위기를 극대화해 경찰이 사건을 덧나게 하고픈 마음이 안 들도록 하거나 그럴 여유가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경찰은 지역 민심이 우리를 지지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폭동을 부추기는 일이 그들의 우선순위가 아닌 것이지요.”

제3세계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프랑스인 프란츠 파농의 열렬한 팬이자 아프리카 미국인 해방 운동인 ‘블랙 팬더스’의 지지자인 아이티 이민 2세 라모는 이 급작스런 위기를 적어도 자신이 거주한 지역에서 부동산에 대한 탐욕에 제동을 거는 수단으로 잘 이용한 셈이다. 비록 투기꾼이 활개를 치고 마을 곳곳이 파헤쳐졌지만, 리버티시티 역시 2000년 초의 부동산 붐에서 크게 비켜나 있지는 않았다. 17번 애버뉴에서 62번 스트리트 사이의 함석으로 막아진 구역은 좋은 예다. “2006년 시장은 이 얼마 안 되는 구역을 개발업자에게 넘겨 호화 아파트를 건축하려 했습니다. 이 계획은 1990년대부터 리버티시티에서 언급되곤 했던 도시 재구조화의 일환으로 삽입되었지요. 미국의 흑인 지역구가 대부분 같은 변화를 따라갔습니다. 먼저 개발업자가 상륙해서 싼값에 땅을 사들인 다음, 토지를 비우고 다시 비싸게 파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도시 중심부를 공격하지 않고 주변부부터 서서히 갉아먹습니다. 일반적으로 새로운 백인들이나 얼마간 부자가 된 흑인들이 유입되면서 기존 구역은 조금씩 엷어지게 됩니다. 우리가 토지 반환 단체인 ‘테이크 백 더 랜드’를 결성한 것은 이런 소외에 대항해 싸우기 위해서입니다”.

도시의 역사는 투쟁의 역사와 관련이 깊다. 2006년 10월 23일 ‘테이크 백 더 랜드’의 투사들이 개발업자의 토지를 강제 점유해 이웃의 무주택자들에게 나눠줄 나무집을 지었다. “먼저 회의적이던 지역 주민들을 설득하기 위해 공청회를 열었고, 가가호호 방문해 설득할 수 있는 좀더 고도화된 집단을 결성했다. 일단 행동에 옮기자 주민들은 우리가 농담하는 게 아니라는 것에 놀라워하면서 지지하기 시작했다. 이 경험은 시가 우리를 거주지에서 쫓아내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라모는 말한다.

브라질의 토지 무소유 운동과 이와 유사한 남아공의 아산티 마을 운동에서 영향을 받은 이 단체는 오직 알코올과 마약, 성 학대만이 금지되는 자율 거주지를 마련했다. 스와힐리어로 단합을 의미하는 ‘우모자’(Umoja)라 불리게 된 이 마을은 6개월 동안 번성했으나 2007년 4월 어느 날 밤 화재로 전소되고 말았다. “그 다음달 바로 불도저가 와서는 아직 남아 있는 모든 것들을 밀어버렸고 진상 조사도 전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거대한 사회적 변혁의 전야인가?

그 이후로는 갑자기 닥쳐온 경제위기가 공격적인 개발업자들을 대신 막아주었다. 라모는 “그들은 현재로서는 다른 급한 불부터 꺼야 하니까 리버티시티에서 다시 그들을 볼 일은 없을 것”이라고 빈정대는 투로 말하면서도 ‘담보 회수권 상실’이 대규모의 항의로 이어지지 않는 것에 놀라는 표정이다. 그 다음 절차는 은행들이 수많은 미국인들과 부동산 업자들로부터 압류한 것들을 다시 점유하는 쪽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매주 라모의 블로그에 달린 성난 댓글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네 집도 아닌 집을 점유하다니 뻔뻔하기 그지없구나”라고 한 네티즌이 비난하는가 하면 “왜 호텔에 가서 무료로 방을 달라고 요구하지 않느냐”고 비꼬는 글도 다.

“소유권에 관한 금기를 공격한 것이다. 이 나라에서는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상당히 신기한 일인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은행이 자기들을 축출할 때 자기 집을 파괴하는 것은 정상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당신이 가족들과 살기 위해 그 집을 복구하는 것에는 훨씬 많은 불편함을 느낀다”며 ‘테이크 백 더 랜드’의 대변인은 한숨짓는다.

물론 도널드 트럼프와 같은 이유 때문은 아니지만 그 역시 낙관론을 피력한다. “우리의 행동은 이제 포틀랜드와 덴버, 캘리포니아에서 적수를 만나기 시작했습니다. 아직은 소수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스스로 나서는 것 외에는 대안이 없습니다. 이것은 생존의 문제입니다. 어쩌면 10년 이상이 필요하겠지요. 그러나 나는 우리가 거대한 사회적 변화의 전야에 와 있다는 확신이 있습니다.”

글 · 올리비에 시랑 Olivier Cyran
번역 · 이진홍 memosia@ilemond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