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지식인들, 현재와 미래 사이에서 길을 잃다

키치(kitch)적 전통주의로 미학적 선회 뒤 “국제화 위해 자기 것부터 알아야”
정작 자신들은 ‘일본의 단일성’이라는 담론에 숨어들어

2009-08-06     알랭 주프루아/작가

일본인들은 자주성을 되찾아야겠다는 막연한 의지는 있지만 여전히 주춤거리고 있다. 지식인들은 자기 나라의 현실을 냉소하거나 비관하면서도 지식인이 져야 할 표현의 책임을 숙명처럼 고민한다. 하지만 이들의 목소리는 ‘일본과 서구’, ‘나와 세계’의 관계 방식을 놓고 엇갈리고 있고, 자신들이 세상에 투영한 혼돈스러운 그림자를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도쿄에서는 모든 것이 무난하게 돌아간다. 물 흐르듯 끊임없이 조용히 지나가는 인파 사이로 도시를 걷다 보면 그런 느낌이 든다. 운전자들은 주차시 절대 이웃 차량 범퍼를 긁는 법이 없다. 도쿄 시민들은 늘 지진의 위협 속에 살아간다. 그러면서도 건축가 단게 겐조가 설계한 새로운 도쿄도청을 비롯한 드높은 빌딩들을 위시한 거대도시를 건설한 것은 일본이 초강대국임을 언제라도 확인하기 위해서일 게다. 무적(無敵)이기에 고요하고, 고요하기에 그만큼 더욱 위력을 발휘하는 나라가 바로 일본이다. 행인들 틈에 선 이방인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마천루로 이루어진 이 성채가 결국에는 조상 대대로 내려온 ‘모노노아와레’(物の哀れ)의 정서, 즉 모든 사물이 덧없다는 감정을 망각하게끔 만드는 장치는 아닐까 하고 말이다.

농촌이든 어딜 가든 마찬가지다. 맹위를 떨치는 경제적 성공 아래로 시적 환상이 매몰된 것 같다. 확신에 찬 모습 뒤로는 우려의 목소리가 꿈틀대고 있다. 특히 기득권층에 편입된 작가나 화가들에게서 이러한 현상이 두드러진다. 1950년대 파리에서 기량을 닦고 1980년대 중반 급작스레 ‘포스트모던 키치(kitch)’로 전향한 전직 전위예술가들의 일부는 오늘날 롤스로이스나 메르세데스를 몰고 다닌다. 화가 이마이 도시미쓰(1)도 그들 중 하나다.

‘포스트모던 키치’로 전향한 예술가들의 기득권 편입

   
 

그 어떤 초월적 신의 선지자도 인정받지 못한 사회에서 줄곧 살아온 일본인들은 마치 부락민처럼 오로지 공동체의 길흉화복과 자신들의 운명을 동일시한다. 그럼에도 이마이 도시미쓰는 서슴지 않고 가이후 도시키 일본 총리를 “일본에서 훌륭한 정치인이 되기엔 너무 젊고” 무엇보다 “지나치게 친미적”이라고 평가한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걸프전쟁 동안 어떤 중대 사안을 결정이라도 할라치면 반드시 미국 정부에 전화를 걸어 의견을 묻곤 했던 가이후 총리에게 도쿄시민들은 ‘부시폰’(Bushphone)이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지식인들이 비난하는 것은 미국에 대한 바로 이런 복종이다. 1960년대보다는 덜 격렬할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한층 도도하게 이뤄지고 있다.

젊은이들을 비롯한 일본인들의 반미주의는 새로운 형태의 국수주의일까? 이마이 도시미쓰는 그렇지 않다고 단언한다. 가게에서 국기(國旗)가 팔려나가는 것도 아닐뿐더러 젊은이들은 일본 국가(기미가요)를 그저 스모 선수들이 부르는 노래 이상으로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그는 말한다. 그러나 키치적 전통주의로 미학적 선회를 한 이래 줄곧 “국제화를 위해서는 먼저 자기 것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그 자신이야말로 ‘일본의 단일성’에 관한 담론을 피난처 삼아 숨어드는 건 아닐까?

일장기 뒤에 진실을 숨기는 일본의 두 얼굴

태양을 표상하는 일장기를 가면 삼은 그늘진 나라, 진실이 늘 꽁무니를 빼는 듯한 이 나라에서는 베를린 장벽 붕괴와 걸프전쟁 이후 변한 게 하나도 없는 것만 같다. “한 가지 있긴 하죠.” 시인인 오오카 마코토(2)는 말한다. “이러한 사건들 이전과는 달리 우리도 세계 정세를 논하는 데 익숙해졌다는 것입니다. 걸프 분쟁 동안 정부는 해외 파병을 금지한 일본헌법 9조 조항과 파병을 요청하는 미국의 압력 사이에서 절충점을 찾으려 했습니다. 여기에서 정부가 명확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자 이러한 현상이 더욱 두드러졌죠.” 가이후 내각이 ‘사막의 폭풍’ 작전 지원금으로 미국에 90억달러를 건네기로 하자 지식인들의 비난은 거세졌다.(3)

그러나 일본에서 국제 정세에 관한 논의는 ‘환경투쟁’이라는 주제에 이내 자리를 넘겨주게 된다. “기업들은 골프장 건설을 위해 삼림을 파괴하고 강의 흐름을 바꾸기까지 하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저는 일본 지도층의 태도, 즉 그들의 전적인 윤리의식 결여에 항의하는 각종 운동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소설가 오에 겐자부로의 태도는 극단적으로 비관적이다. 그는 고향인 일본 서남부 시코쿠섬에 대한 집착을 벗어던질 수 없다. 도쿄에만 가도 이방인처럼 느낀다. 그는 이러한 내부적 유배자의 처지에서 같은 국민들을 평한다. “일본인들은 현 세계의 온갖 문제를 단 한 가지로 축소합니다. 일본과 미국의 관계가 바로 그것이죠. 동유럽 국경이 개방됐을 때 일본인들은 우려했습니다. 유럽이 더욱 단결하고 강해질 수 있는 기회였으니까요. 반면 미국이 이라크에서 승리를 거두자 일본인들은 역시 강자의 정책을 따르길 잘했다며 안도했습니다.”

일본 엘리트의 윤리 의식 결여

그렇다고 지식인들이 일본의 각종 현안에 비판적 영향력을 실질적으로 발휘하기를 포기한 것일까? “그렇습니다. 지식인들은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더 이상 의지하지 못하게 된 뒤 자신들의 말이 힘을 잃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새로운 세계관을 고안해내지 못했습니다.” 확실히 그는 솔직하다. 이런 예민한 감수성 때문에 그는 쉽게 공격을 받기도 하지만 동시에 감동도 준다. 이런 그의 태도에는 정치적 무능함에서 오는 괴로움이 엿보인다. 준거가 되는 이념적 틀이 없기에, 게다가 (흔히들 그 중요성을 간과하지만) 일본어에는 중립적 형태가 없기에, 지식인들은 객관성의 확신에 도달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그럼에도 이를 추구하는 오에 겐자부로의 모습이 다음에서 드러난다. “핵전쟁 시대는 끝난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긍정적이죠. 하지만 산업공해로 인한 자연 파괴와 에너지 문제가 1960년대 이래 악화되고 있습니다. 이제 세계를 구원하느냐 아니면 파괴하느냐 하는 최종적 양자택일의 관점에서 사물을 판단할 수밖에 없게 됐습니다.”

이러한 극단적 비관주의 때문에 오에 겐자부로가 다른 문인들과 손잡고 걸프전 반대운동에 참여조차 않느냐 하면 그건 전혀 아니다. “저는 가토 슈이치(4)와 함께 좌파 성향의 잡지인 <세카이>(世界)에 항의문 두 건을 기고한 바 있습니다. 아사다 아키라, 나카가미 겐지, 시마다 마사히코 등 저희보다 젊은 지식인들도 이 전쟁을 비판했습니다. 이들의 발언은 흥미로웠죠. 그러나 가토 슈이치와 제가 성명서에서 ‘우리’를 주어로 사용한 반면 이들은 개인 자격으로, 분산된 방식으로 글을 기고하면서 ‘나’를 주어로 삼아 국가를 언급했고 결국 효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일본은 구태여 프랑스의 1968년 5월 같은 상황을 겪지 않고서도 이미 ‘우리’라는 표현이 집단의 전통윤리를 반영하고 있었다. 이런 나라에서 ‘나’를 정치적 맥락에서 사용한다는 것은 새로운 문화 현상이다. ‘우리’라는 표현이 진부한 수사로 간주되는 오늘날에는 젊은 문인들의 ‘나’라는 표현이 오에 겐자부로의 말과는 달리 오히려 젊은 독자층의 마음을 더욱 사로잡기도 한다.

‘데탕트의 고아가 된 일본인들’

일본인들은 ‘데탕트(긴장 완화)의 고아’가 되다시피 했다. 자주성을 되찾아야겠다는 막연한 의지는 있지만 여전히 주춤거리고 있으며, 걸프전쟁으로 인해 도리어 퇴보한 듯하다. 도쿄대학 프랑스문학 교수인 아베 요시오(5)와 그의 아내인 시인 요사노 후미(6)는 이를 심히 걱정한다. 요사노 후미는 유명한 여류 시인 요사노 아키코의 손녀로 프랑스어로 시를 쓴다. 히로오에 있는 널찍한 카페에서 아베 요시오는 전쟁과 관련해 예술가들이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를 새롭게 규정한 성명을 미술평론가 및 화가들과 함께 발표했다는 소식을 들려줬다. 그러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예술은 유혹의 수단을 이미 소진해버리고 궁지에 몰렸습니다. 미국의 군사력 과시는 우리를 겁주기 위함이었고 실제로 우리는 미국의 리더십이 그 어느 때보다 위협적임을 알게 됐습니다. 일본은 미국에 군사적으로 대항한 지구상 유일한 국가인 동시에 지구에서 유일하게 핵폭탄 세례를 받은 국가이지 않습니까.”

미술평론가인 치바 시게오(7)는 예술과 걸프전에 관한 특별 심포지엄에 참여했다. 호리 구사이 등의 예술인, 다니 아라타, 미네무라 도시아키를 비롯한 미술평론가들과 화가 오카자키 겐지로도 함께한 자리였다. “걸프전을 계기로 현재 일본 예술의 문제점을 살펴보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정치와 예술에서 미국이 쥐고 있는 헤게모니에 대해서도 문제가 제기됐다. 그러나 대학가인 간다 지역에서 몇 시간에 걸쳐 진행된 이 심포지엄 당시 “참석한 예술가들 대부분이 걸프전이 미국의 헤게모니에 비마르크스적으로 저항한 첫 번째 사례라는 점에는 동의”했으나, 탈정치화가 두드러진 젊은 예술가들은 “서구 예술과 미국 예술에 대해서는 명확한 태도를 취하지 못했다”고 치바 시게오는 지적했다.

한편 젊은 작가들도 평소보다 한층 정치적인 담론들을 내놓았다. 가토 노리히로, 다케다 세이지(도쿄 태생 한국인)뿐만 아니라 이른바 ‘외부(外部) 학파’(프랑스를 비롯한 일본 외부와 교류하는 학파)를 이루는 저명한 젊은 철학자 아사다 아키라와 비평가 가라타니 고진도 여기에 동참했다.

건축가 이소자키 아라타(8)의 시선은 냉정하다. “정치적으로 해방될 기회들을 족족 놓치고도 경제전에서 미국을 이겼다며 의기양양해하던 일본이 정치전에서는 결코 이 나라를 이길 수 없음을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사실 일본인들에게 도덕이란 오직 한 가지뿐입니다. 아주 값비싼 무언가를 살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대단한 명예라고 생각하는 거죠. 이를테면 미국이라는 거대한 매춘부가 그 구매 대상입니다. 일본인들이 반 고흐나 고갱의 그림을 구입하는 것도 은유적으로는 같은 도덕관에 입각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반 고흐가 이들에겐 최고급 매춘부가 된 셈이죠.”

일본식 1차원적 인간과 문화의 상대화

<아사히신문> 파리 특파원을 지냈고 현재는 교리쓰대학 교수로 재직 중인 네모토 초베에의 말도 이와 일맥상통한다. “1968년 마르쿠제는 일차원적 인간의 위험성을 고발한 바 있습니다. 그 일차원적 인간이 바로 일본에서 실현됐습니다. 이런 말을 하면 도발적으로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유럽인들, 특히 프랑스인들이 이러한 상황에 책임이 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일까? “모든 문화는 상대적이라는 사고를 확산시키면서 그들은 자신의 문화도 상대화했습니다. 이 때문에 일본인들의 눈에 유럽은 현저하게 품격을 상실했습니다. 반면 제2차 세계대전 이전 일본에서 선(禪)사상과 독일 실존주의의 결합을 꾀한 니시다의 철학은 새로운 형태로 재탄생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일본 좌파는 우파가 선사상을 독점하도록 방치했으며, 이를 좌파의 관점에서 받아들인 이는 아직 아무도 없습니다.”

플로베르 연구의 대가로서 완벽한 프랑스어를 구사하는 하스미 시게히코(9)는 이 전쟁에 관심 갖기를 거부한다. “우리는 싫어하는 것에 관해 말하지 않을 권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인류의 전반적 퇴보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 이 전쟁을 논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세계 정세를 분석할 수 있습니다.” 그는 현재 마르크스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통탄했다. “비록 우리는 전쟁의 끔찍함을 겪지 않았지만 그래도 우리에게 이를 설명해줄 누군가가 필요합니다.”

일본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무능함을 확인하고, 세계의 종말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면서 일종의 구조 신호를 보내고 있는 건 아닐까? 유럽 최고의 선사(禪師)인 다이센 데시마루는 “형태가 올바르다면 그림자도 올바르게 마련”이라고 기록한 바 있다.(10) 새로운 국제적 무질서에 대응할 그 어떤 ‘올바른 형태’도 찾아낼 수 없음에 상처를 입은 일본 열도의 창작자들은 오늘날 자신들이 세상에 투영한 그림자가 빚어내는 뒤틀리고 혼돈스러운 그림을 두려움으로 바라보고 있다.

글 · 알랭 주프루아 Alain Jouffroy

번역 · 최서연 qqndebien@ilemonde.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역서로 <텔레비전의 종말>(2007) 등이 있다. 


<각주>

(1) 이마이 도시미쓰(1928~2002). 전후 전위예술의 선구자.
(2) 오오카 마코토(1931년생). 시인 겸 전통시 역사가.
(3) 일본은 결국 130억달러를 분담했고, 걸프 지역에 해군 지뢰제거팀을 파견했다.
(4) 가토 슈이치(1919년생). 도쿄대 의대 졸업. 작가. 대표 저서 <일본문학사, 3 Vol.>(파야르·파리·1985~86). 2008년 12월 별세.
(5) 아베 요시오(1932~2007). 도쿄대 불문학과 교수. 보들레르 전공. 프랑스어로 에세이 발간.
(6) 요사노 후미. 저서 <젊은 행인을 위한 시>(디페랑스출판·파리·1989).
(7) 치바 시게오(1946년생). 미술평론가 겸 도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사.
(8) 이소자키 아라타(1931년생). 건축가. 로스앤젤레스 현대미술관 및 쓰쿠바의 건축물 다수 설계.
(9) 하스미 시게히코(1936년생). 도쿄대 교수. 문학 및 영화 관련 에세이 다수 발간. 1991년부터 1993년까지 일본-프랑스 합작 잡지 <표상>(表象) 간행.
(10) 다이센 데시마루. 저서 <선(禪) 수행>(알뱅 미셸·파리·19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