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구르 사태, 중국 대륙에 도미노 되나?

‘역사’와 ‘현재’가 얽힌 비극, 소수민족 정책 한계 드러내
현대화 가속하며 기회균등 보장·정체성 존중 가능할까

2009-08-06     마르틴 뷜라르/<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특파원

세계 경제위기 속에 새로운 도약을 모색 중인 중국이 현재 남부의 티베트, 북부의 내몽골, 극서부의 신장으로 이어지는 변방 도처에서 위협을 받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중국 내의 52개 종족 중 단지 하나가 위협을 하는 것일까? 어쨌든 중국 대륙은 이제 소수민족들의 봉기로 들썩이고 있다. 2009년 7월 우루무치에서 한족에 대항해 투르크어를 쓰는 무슬림 소수민족들이 벌인 집단행동은 엄청난 폭력을 수반했다.

중국 정부는 이러한 유혈 사태를 자국의 안정을 해치려는 국제 음모의 증거로 여긴다. 과거에는 인도에 망명 중인 14대 달라이라마 텐진 갸초, 이번에는 워싱턴에 망명 중인 위구르 세계회의 의장 레비야 카디르 여사를 주동자로 지목한다. 만약 중국이 다른 정책을 펼쳤더라면 지금처럼 이 지도자들의 영향력이 크지는 않았을 것이다.

위구르족의 ‘한족화’를 중국 당국이 계획적으로 추진한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베이징이 밀어붙이는 급속한 현대화 정책에서 사실상 이들은 배제되었다. 이 지역의 비약적인 관광 붐 또한 이들의 문화를 단순히 볼거리 풍습으로 축소시켰다. 결국 중국 당국의 정책은 이들을 구석으로 몰고 있다.


중국의 서쪽 끝 지방을 향한 우리의 취재 여행은 파리 부근 샤토드뱅센 지하철역 인근의 한 평범한 카페의 구석에서 시작되었다. 겁먹은 눈빛, 손까지 떠는 한 위구르인은 프랑스 사복형사의 경호를 받으며 나와서 나를 혹시 신문기자로 위장한 중국 비밀경찰 소속이 아닌지 의심부터 했다. 이 사람은 해외의 반중국운동 위구르족을 규합해 설립된 세계위구르족회의(1) 소속으로 방금 프랑스에서 정치망명 자격을 얻었다. 그의 사례는 평범했다. 신장 자치구에 있는 자신의 일터에서 불의에 항의했고, 체포되고, 투옥되고, 그리고 탈옥…. 그의 두려움에 찬 모습은 이 평화로운 장소와 대비되어 희극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의 모습은 중국 내에서 투르크어족 무슬림 반체제 운동원들이 겪는 정신적·육체적 고통이 얼마나 큰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베이징에서 약 4천km 떨어진 신장성 주도 우루무치는 우리가 방문했던 2009년 5월 당시만 하더라도 아무런 긴장도 느낄 수 없이 평온해 보였다. 시내 위구르족 거주 지역도 마찬가지로 조용했다. 여기에는 무슬림 소수민족인 우즈베크인, 카자흐인, 키르기스인과 함께 한족이 공존한다. 한족은 중국 전역과 마찬가지로 우루무치에서도 수적으로 우세하다. 그러나 신장성에서는 소수이다. 일부 한족은 여러 세대에 걸쳐 이곳에 살고 있다. 최근에 새로 칠한 대형 상가건물 옆의 시끄러운 골목에서 상인들은 좌판 위에 별의별 물건(빗, 염색약, 약초, 전화카드, 히잡)을 다 진열해놓고 팔고 있었다. 이 골목에는 국수를 곁들인 닭꼬치와 양고기꼬치도 판다. 위구르족은 한족의 기본 음식인 쌀과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 두 종족 간의 차이는 이것만이 아니다.

그러나 이 근방에서, 특히 신장대학 앞에서 2009년 7월 5~8일에 전례 없는 유혈 사태가 발생했다. 몇 시간 동안 몽둥이, 칼 그리고 다른 흉기로 무장한 위구르족은 버스, 택시, 경찰차량을 불태우고 가게를 약탈했으며 한족에게 폭력을 휘둘렀다. 한족도 다음날부터 대대적인 복수극을 전개해 위구르족을 죽이고 상해를 입혔다. 7월 말에 발표된 공식적인 사상자 수는 사망 194명과 부상 1684명이다. 그러나 정확히 집계된 종족별 희생자 수는 알려지지 않았다.

아무도 예상 못한, 그러나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두 달 전만 하더라도 이같은 종족 간의 유혈 충돌을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지만, 천대받고 차별받는 한 공동체에 쌓인 분노는 이미 감지할 수 있었다. 운동원이건 평범한 사람이건 위구르족과 약속을 잡기가 쉽지 않았다. 여러 번 사전 확인을 하고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는 공공장소에서 만났으며 길거리에서 대화를 끝냈다. 간혹 인터뷰 대상자가 아무것도 숨길 게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지역 공산당(한족)에 신고까지 했다. 위구르족은 외국인과 접촉하면 ‘민족주의 활동’으로 즉각 의심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테러리즘 다음으로 중죄에 해당되어, 직장을 뺏기고 경찰에 불려가 투옥까지 당할 수 있다.

“위구르족에게는 의심과 억압이 규칙이다. 한족도 만약 정치에 관련되어 의심받게 되면 곤란해진다”고 위구르족 토목기사 압데라함(2)은 말했다. 그는 우리를 초대하기 위해 일부러 우루무치에서 가장 유명한 위구르 식당을 선택했다. 이 식당은 한족과 무슬림(희잡을 착용한 여성, 청바지를 입고 화장한 젊은 여성도 포함)뿐 아니라 외국인 관광객도 자주 오는 식당이다. 직원 5명을 데리고 작은 기업을 운영하는 압데라함은 그리 두려워하는 기색을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자신의 공동체가 당하는 차별에 대해 말할 때는 목소리를 낮췄다. 몰래 뜻을 전하려고 자신의 손에 ‘세뇌’라고 적기도 했다.


감시는 도처에서 이루어진다. 특히 회교사원 근처에서는 집중적인 감시를 당한다. 신장성 남부 카슈가르에 있는 대형 사원도 예외가 아니다. 최대 2만 명이 운집하는 금요일 예배는 사복경찰이 면밀하게 통제한다. 이맘(회교 지도자)은 관계당국의 동의를 얻어 임명되며 설교 내용에는 가이드라인이 설정된다. 신장성 정부 공식 사이트는 ‘중국에서의 이슬람 역사’를 올려놓고 당국이 선택한 회교 지도자들과 중국 공산당이 합작해 20분 혹은 30분 분량으로 제한된 설교집을 만들어 이를 4권에 묶었다. 이맘은 예배 시간에 이 중 하나를 골라 읽기만 하면 되도록 해놓았다. 노골적인 종교 통제 방식을 그대로 인터넷에 공개하는 당국의 태도가 너무 순진해서 냉소가 나왔다.

과거에는 이렇지 않았다. 종교적 자유는 1954년 중국 헌법에 명시돼 있었다. 196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무슬림은 큰 제재 없이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다. 카슈가르에서 가이드로 일하는 아메드는 어렸을 때 자신의 할머니가 히잡을 두르고 옆집 아주머니는 눈만 내놓고 몸 전체를 가리는 부르카를 입고 있던 장면을 기억한다. 문화혁명의 암흑기 중에 회교사원은 폐쇄되거나 파괴되었다. 심지어 집 안에서도 작은 종교적 표지조차 내걸 수 없었다. 억압은 1978년 덩샤오핑이 전개한 경제개방 정책과 함께 종식되었다. 종교적 자유의 원칙은 1982년 헌법에서 다시 복원되었다.

중국 내 이슬람의 약진, 억압을 예고하다

문화혁명이 막을 내릴 무렵, 겨우 392개 회교사원만이 카슈가르에 남아 있었다. 사원의 수는 1981년 말 4700개로, 그리고 1995년에는 9600개로 증가했다. 위구르 운동에 대한 프랑스의 권위 있는 전문가인 레미 카스테츠(3)는 “2000년경, 신장성에는 2만4천 개의 회교사원이 있으며 이는 중국 전체 회교사원의 3분의 2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회교학교가 설립되고 과거 무슬림 학자들의 책이 출간되었으며 민영 출판사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종교가 발전하면서 위구르 문화와 민족 정체성이 고취되기 시작했다.

1990년대 초반, 상황은 악화되기 시작했다. 우선 이슬람이 정치화되었다. 정치적 요구를 표명하는 이슬람 지역조직 메슈렙(meshrep)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으며 ‘동투르키스탄 운동’과 같은 이슬람 운동조직이 창설되었다. 이 조직은 알카에다와 연결된 것으로 의심받고 있다. 다른 한편, 국경 너머로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독립은 당시까지 잊혀졌던 독립의 열망에 불을 지폈다. 일부는 당시 양쪽으로 분단돼 있는 공동체를 합쳐서 ‘위구리스탄’을 만들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우루무치의 고대문학 교수인 사니야는 1992년 초 친척과의 재회를 기억한다. 문화혁명 당시 우즈베키스탄으로 도피했던 그녀의 이모가 우루무치를 방문했다. “그리고 우리가 타슈켄트를 방문할 차례였습니다. 그곳에서 충격을 받았어요. 우즈베크인들이 우리보다 잘 살고 전통문화도 더 잘 보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동시에 그곳 이슬람 문화는 그리 억압적이지도 않았어요.” 이 시기부터 “독립에 대한 욕구가 강하게 제기되었죠. 신장과 우즈베키스탄 간에는 어떠한 문화적·종교적·언어적 장벽도 없어요. 타슈켄트 사람들은 종종 우리에게 묻습니다. 무엇을 기다려요? 우리는 성공했는데. 당신들은? …위구르족의 자존심을 건드렸죠. 독립에 대한 열망이 일종의 상승작용을 일으켰어요.”

아마도 이러한 감정이 파키스탄과 터키에 있는 위구르족과 연계해 위구르 민족운동(독립운동이건 아니건)을 출현시키는 데 공헌했을 것이다. 이 운동이 전체 위구르족에게 큰 영향을 끼친 적은 없지만 1990~2000년대 동안 시위와 사건이 주기적으로 일어났다. 중국 정부는 3가지 수단을 사용하면서 대응했다. 첫째, 상하이협력기구를 통해 위구르 운동세력과 주변 회교국(중앙아시아 국가들, 파키스탄…)과의 모든 연결 고리를 끊으면서 ‘3개의 세력’(극단주의, 분리주의, 테러리즘)에 대응하는 외교적 수단을 동원했다. 둘째, ‘신장생산건설병단’(新疆生?建設兵團)을 전면에 내세워 발전과 현대화를 꾀하면서 해당 지역에 한족의 대대적인 유입을 조장했다. 마지막으로 감시와 억압을 위한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중국 정부의 대대적 투자는 또 다른 중국화

“중앙정부의 목표는 이슬람 자체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이슬람이 분리주의나 반정부 담론을 정당화하는 걸 막는 것이다. 중국 공산당은 후이족(回族)에 대한 대응 방식을 상대적인 모범답안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고 카스테츠는 지적한다. 중국에서 가장 다수(1천만 명)를 차지하는 무슬림 공동체인 후이족은 중국 당국과 안정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4) 중국 정부는 위구르족과도 같은 방식의 협약을 맺을 것을 강구하고 있다.

그는 2000년 이후 중국 정부가 신장성에 투자한 액수가 8700만 위안(약 900만 유로)에 달할 것으로 평가한다. 지하자원(석탄·석유·가스) 개발, 신에너지(우루무치와 투루판을 잇는 고속도로변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풍력발전 단지)(5) 개발, 대규모 신도시 건설(쿠얼러에는 석유회사들의 본사가 위치해 있다), 공항과 도로 건설 등 도처에 건설현장이 널려 있다. 심지어 있어서는 안 될 곳까지 건설현장이 밀고 들어온다. 이렇게 카슈가르의 위구르족 밀집지역인 구시가지는 강제 철거되고 ‘신도시’으로 바뀌고 있다.

천연자원, 농식물 그리고 여행산업이 주종인 이 지역 경제의 절반은 유명한 ‘병단’(兵團·신장생산건설병단의 현지 약어)이 소유하고 있다. 중국 대륙 서쪽 끄트머리에 있는 이 지방의 사정을 약간이라도 이해하자면 ‘병단’이라는 국가 속의 국가를 알아야 한다. 1954년에 창설된 병단은 한편으로는 국경을 방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농사를 짓기 위해 만들어졌다. 국공내전이 끝난 후 생긴 잔여 병력, 농촌계몽운동에 투신한 공산주의자, 강제수용소 입소자나 유배형을 당한 한족이 병단의 일원이 되었다. 이 중에는 ‘우경화’(6) 죄목으로 실형을 받은 유명한 공산주의 문필가 왕밍도 속해 있었다. 당시 12개 병단이 중국의 변방 곳곳(헤이룽장·티베트·내몽골 등)에 창설되었다. 마오쩌둥 사망(1976) 이후 다른 모든 병단은 사라졌지만 신장성의 병단은 살아남아 더욱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시헤지 박물관에서는 사회주의 리얼리즘 방식의 영웅적 서사로 병단의 출생 과정을 표현한 전시물이 진열돼 있다. 허름한 학교 안에서 가난한 농병(農兵)과 어린이들의 모습을 담은 빛바랜 10여 장의 사진들은 당시의 개척정신을 보여준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방 하나를 가득 메운 커다란 지도가 지방정부보다 더욱 강력한 현재 병단의 힘을 과시하고 있다. 여전히 인민해방군의 통제하에 있는 이 ‘군단’은 190만 명의 일반 주민도 거느린다. 이 조직은 관할 지역에서 세금을 걷고 1500여 개의 기업을 소유하고 있다. 이들 중 일부는 증시에 상장까지 되었다. 병단은 또한 2개의 대학을 소유하고 있다. 신장성 경작지의 3분의 2를 관리하며 산업생산의 4분의 1, 수출의 절반에서 3분의 2를 담당한다. 병단은 세계에서 가장 큰 케첩 생산자이며 프랑스 자회사인 ‘신장 찰키스’를 통해 2004년 ‘레콘세르브드프로방스’를 인수하기도 했다. 1996년 신장성의 보안을 위해 열린 역사적 회합에서 중국 공산당 정치국은 “신장생산건설병단에 중국 청년들의 가입을 고취”(7)했다.


1949년 신장성 인구의 6%에 불과하던 한족이 2006년에 40.6%로 증가하게 된 것은 중앙정부의 이주정책 때문만은 아니었다. 완전한 거주 이전의 자유가 보장되면서 한족은 재산을 모으기 위해 자발적으로 ‘신개척지’로 모여들었다. 또한 쓰촨성, 산시성 혹은 간쑤성과 같이 신장성보다 소득 수준이 낮은 곳의 가난한 농민들도 이곳으로 몰려왔다. 서방 언론이 허드렛일에 종사하면서 근근이 생존하던 한족까지 묶어 간혹 ‘식민주의자’로 칭하는 것은 지나친 처사다.

위구르족의 구조적 박탈감

신규 이주자 중에는 더욱 편안한 임금을 받는 공기업 간부들도 있다. 우루무치와 호탄을 잇는 철로 공사현장에서 일하는 엔지니어인 류왕이 그 경우다, 산시성 출신인 그는 1년에 한 번, 설 연휴에만 부인과 자녀들을 만난다. 그는 한족이나 위구르족이나 카자흐족이나 다 똑같다고 생각한다. 그는 신장성 전체가 다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는 아직도 사회주의가 장악하고 있어요.” 이 사회주의란 말은 그에게는 당연히 칭찬이 아니다. 관할 관청의 일처리가 너무 늦다는 뜻이다. “항상 더 높은 곳의 눈치를 봐야 하고 매사를 조심해야 한다”고 그는 불평했다. 그의 결론은 공금이 낭비되고 있다는 것이다. “고속도로, 공항, 호텔을 건설하고 있지만 제대로 된 인력이 따라주지 못해요.” 이 때문에 그가 일하는 현장에도 좋은 일자리는 한족이 차지하고 다른 하찮은 일자리는 위구르족의 몫이 된다. 이러한 설명을 여기서는 수없이 듣게 된다. 카슈가르와 호탄을 잇는 철로 건설현장으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위구르 택시기사도 같은 말을 했다. 그는 “물론 위구르족 엔지니어도 있지요. 그러나 독일이나 일본 기술이 도입되는데도 그들은 외국에 공부하러 나갈 수가 없어요. 여권을 구할 수 없기 때문이죠.” 사실 중국에서 여권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권리가 아니다. 이 권리는 관청 책임자의 마음에 달려 있다. 엔지니어건 연구자건 평범한 시민이건, 소수민족에게는 여권을 만드는 것이 하늘의 별 따기나 마찬가지다. 혹시나 여권을 손에 넣더라도 원하는 나라의 영사관에서 비자를 받으려면 베이징까지 비행기를 타야만 한다. 평범한 위구르족에게는 꿈같은 이야기다.

일자리를 얻는 데 언어장벽 또한 넘기 힘들다. 위구르족 대부분은 베이징어를 못하거나 더듬거리는 수준이다. 그런데 베이징어는 한족이 소유한 대부분의 기업에서 사용한다. 베이징 중앙민족대학 인류학 교수인 왕장민은 “언어와 종족을 구분해야 한다. 사원들이 베이징어를 정확히 구사하는 것을 기업이 요구하는 점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기업이 한족만을 고집한다면 이는 비정상이다”라고 말한다. 물론 원칙적으로는 맞는 말이다. 그러나 오히려 정상이 “쉽지 않다. 이슬람 소수민족을 위해 따로 무슬림 구내식당을 운영하거나 특별한 음식을 준비해야 한다. 음식문화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시헤지 교외에서 기업을 경영하는 한 젊은 사업가는 설명한다. 일반적으로 문제가 생길 때 당장 시골로 보낼 수 있는 ‘민공’(농촌 출신 한족 노동자)과 달리 “위구르족은 더 까다롭다”고 말한다. 고학력 위구르족 청년일지라도 직업을 얻기가 힘들다. 물론 일반적 불경기 상황에서 중국 전체 대학 졸업생의 3분의 1이 실업 상태지만 이들의 상대적 박탈감은 더욱 크다.

언어장벽은 실제로 존재한다. 과거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소수민족 학교에 아이를 보냈다. 학교에서 베이징어는 여타 과목 중 하나에 불과했다. 더구나 지방에서는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이로 인해 청년들에게 소수민족 언어가 통용되는 유일한 곳인 자신의 고향을 떠나는 것은 힘든 선택이었다. 이것이 현재 이들의 언어장벽이 되었다. 반면 중국 학교(위구르어 선택)에 통학하는 위구르 도시 상류층 자녀에게 이런 언어장벽은 없다.

2003년 이후, 초등학교 1학년부터 중국어는 필수과목이 되었다. 신장성에서도 위구르어는 이제 제2언어의 지위로 내려앉았다. 이것이 이제 두 종족을 나누는 적대감의 핵심 고리가 되고 있다. 많은 위구르족은 이 조치를 ‘문화적 학살’ 혹은 ‘세뇌’로 간주한다. 농촌 지역에서는 간혹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우루무치 사범대학 출신의 젊은 여교사 나디라는 카슈가르에서 멀리 떨어진 한 마을학교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이 학교에서는 베이징어로만 가르치기 때문에 모든 학생을 받을 수가 없었어요. 실제로 학교 선택은 학부모가 아니라 정치 지도자들이 하는 겁니다.” 이런 일방적인 처사 때문에 베이징어 의무수업에 부정적인 위구르족 가정의 불만이 커졌다.

한족은 한족대로 불만

우루무치대학의 학장인 위구르인 나짐은 오히려 이것이 공동체에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모국어는 고유문화를 지키기 위해 필요하고 지식·교환·노동을 위해서는 베이징어도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오히려 나짐은 상류층이 자녀에게 더욱 나은 미래를 열어주기 위해 중국인 학교를 선택함으로써 모국어를 차츰 포기하지 않을까 걱정한다. 부모들은 점점 위구르어를 사용하지 않고 이들의 글쓰기 능력도 퇴보한다. 바로 “이런 방식으로 언어는 죽어간다”고 나짐은 한탄한다.

젊은이들은 더욱 분개한다. 어릴 적부터 중국어 수업을 들었던 아씨안은 자신의 생각을 토로하기 위해 상급생이 떠나기를 기다렸다. “위구르어 수업이 줄기 시작하더니 이제 완전히 사라져버렸어요.” 그녀가 학교에 다녔던 윈난성에서는 소수민족 언어를 더 이상 가르치지 않는다. 아씨안은 이것이 정체성의 상실로 가는 길임을 알아차리고 있다. 더욱이 “수업은 우리 문화를 단순한 풍습으로 축소했다”고 한다. 부인할 수 없는 이런 현실을 한족은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이들은 이러한 불평에 신경질적 반응을 보인다. 싸움꾼처럼 생긴 사진작가 장위는 “소수민족은 가산점을 받기 때문에 대학 입학시험에 유리합니다. 공무원직에도 소수민족 자리가 마련돼 있지요. 작가들도 한족보다 더 수월하게 책을 냅니다.” 그는 능력 있는 한족 대신 무능한 위구르족이 채용되는 사례를 알려주었다.

2003년부터 행정부처의 장은 한족과 소수민족이 함께 맡도록 법으로 정해졌다. 그러나 실제 지휘권은 한족 기관장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 대세다. 신장성의 경우, 겉으론 위구르족 누르 베크리가 최고 책임자지만 당 비서인 왕르콴이 실제적으로 권력을 행사한다. 1994년 이래 그가 이 지역에서 강권통치를 휘두르고 있다. “그는 상황을 이해하기 위한 머리도 없고 지역에 대한 깊은 애정도 없는 인물이다. 그는 사람들의 마음 밖에 났다”고 베이징의 연로한 공산당원 이팡은 토로한다. 그는 7월의 유혈 사태는 “중국의 수치”라고 생각한다. 왕르콴은 주민과 그들의 문화는 무시하고 “자유주의와 억압”으로 통치한다. 이팡은 이러한 태도가 식민주의보다는 권위주의에 가깝다고 설명하면서 신장성은 중국의 완전한 일부이고 중국의 국경은 유엔이 승인하고 있다고 우리에게 상기시켰다.

항상 그렇듯이, 역사는 정치적 목적으로 날조되거나 일부 사실만 부각된다. 먼지를 둘러싼 카슈가르 박물관 입구에는 이런 문구가 쓰여 있다. “기원전 60년에… 한나라 부속 군(郡)이 세워졌다. 이후 신장은 중국의 일부가 되었다.” 이것이 오랫동안 중국의 공식적인 역사였으나 현재는 폐기되었다. 또한 이 지역에 살던 최초의 인종이 중국인이라는 주장도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발견된 미라가(8) 인도유럽어족으로 밝혀지면서 거짓으로 드러났다. 오아시스로 점철된 비단길의 통로였던 신장성은 과거 여러 다양한 종족·문화·군대의 지배를 받았다. 이를 단 하나의 영향권 아래로 정리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불평등이 위구르의 이슬람화 부채질

반대로 레비야 카데르 여사의 ‘위구르세계회의’가 주장하듯이 1949년 중국 공산당이 처음으로 위구르 지역을 “식민지화”했다는 주장도 전혀 사실이 아니다. 신장에 최초로 중국의 정치제도가 설립된 것은 1750년대 청나라 시대였다. 이 지역에서 일어난 폭동 직후 청나라 8번째 황제 도광제가 일찍이 ‘동화 정책’의 일환으로 재건부(再建部)를 세우고 직접 통치를 시도하면서 지역 부족장을 통한 간접 지배를 배제했다. “이들이 부패하고 중앙정부의 정책을 방해했기 때문”(9)이라는 것이다. 1884년, 이 지역은 중국 영토로 편입되었다. 비교하자면, 이보다 약간 전에 뉴멕시코(1846)와 캘리포니아(1850)가 미국 영토에 편입되었다. 물론, 역사는 단선적이지만은 않다. 신장 지역에서는 여러 번에 걸쳐 독립운동이 전개되기도 했다. 카슈가리 왕국은 오토만제국과 영국, 러시아의 승인 덕분에 1864년에서 1877년까지 존속했다. 단명한 ‘동투르크스탄 이슬람 투르크 공화국’은 1933년 11월에서 1934년 2월까지 생존했다. 마침내 소련의 어정쩡한 위성국이었던 동투르크스탄의 행정력은 1944~49년에 북부 3개 구역에 미쳤다. “간혹 중국과 경쟁하기도 했던 제국 혹은 강력한 왕국의 후손이라는 감정”이 이들 위구르족의 정신에 각인되었다고 레미 카스테츠는 강조한다.

사실, 위구르족 대부분은 독립을 요구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의 정체성에 대한 존중과 더욱 공정한 대우를 원할 뿐이다. “10년 전보다 우리는 잘살고 있어요. 그러나 남들에 비해서는 항상 뒤처진다”고 압데라흐만은 말한다. 신장성 내 1인당 소득은 시헤지 1만5016위안(한족의 90%), 아커쑤 6771위안(한족의 30%), 카슈가르 3497위안(한족의 8.5%), 그리고 호탄 2445위안(한족의 3,2%)이다.(10)

이처럼 종족 간의 확연한 불평등으로 인해 위구르족은 이슬람의 품으로 더욱 다가갔으며 이슬람은 이들의 저항과 정체성 강화의 유일한 통로가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가장 근본주의적인 이슬람 교파가 위세를 떨칠 위험이 존재한다. 길거리에서 부르카를 둘러 망사로 눈까지 가린 여성을 마주치는 것도 이미 흔한 일이 되었다. 이슬람 성전을 외치는 극단주의 운동 세력은 아직 미미하지만 중국 당국이 이들과 대화를 거부하고 억압 일변도로 나온다면 상황이 급변할 수도 있다.

위구르족을 위시해 중국 내 소수민족은 고유문화를 짓밟는 현대화, 성장의 과실에서의 차별적 소외, 그리고 문화적 차이를 짓뭉개는 권위주의 사이에 갇힌 몸이 돼버렸다. 갈등의 원인은 종교적 차원이 아니라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차원에 있다. 만약 베이징이 말뿐인 자치권에 실제로 생명을 주었다면 신장웨이우얼자치구는 이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글 · 마르틴 뷜라르 Martine Bulard
번역 · 김태수 asticot@ilmonde.com 



<각주>

(1) 2004년 이후 ‘위구르세계회의’는 해외의 다양한 운동조직과 규합을 시도하고 있다. 본부는 뮌헨에 있으며 2009년 5월 15일 재선된 레비야 카데르 여사가 의장이다.
(2) 인터뷰에 응한 모든 사람의 이름과 성은 이들의 안전 문제를 고려해 가명으로 처리했다. 다만 공직자 실명을 그대로 썼다.
(3) 레미 카스테츠, ‘신장성 위구르족 이슬람의 변화’, Etudes orientales, Paris, n°25, 1er semestre 2008.
(4) 이들은 많은 수가 닝샤 자치구에 거주하지만 중국 전역에 퍼져 있다. <르몽드세계사> 2009년판 참조.
(5) 풍력발전은 현재 전체 에너지 생산의 8%를 점하고 있으며 2020년에는 15%(신장성의 경우 50%)에 이를 전망이다.
(6) 1963년 12월에서 1979년 6월까지 유배형을 산 왕밍은 그 뒤 복권되어 문화부 장관을 지냈다(1986~89). 그의 유배생활과 위구르족에 대한 글은 <잿빛 눈동자, 그리고 머나먼 서역 이야기> <신장성의 소식>, Bleus de Chine, Paris, 2002 참조.
(7) 레미 카스테츠, 같은 글에서 재인용.
(8) Corinne Debaine-Francfort, Abduressul Idriss, Kerya, <어떤 강의 기억, 타클라마칸 사막 오아시스의 고고학과 문명>, Findakly, Sully-la-Tour, 2001, 참조. Olivier Horn의 다큐멘터리 영화, <타클라마칸의 미라>, G?d?on Programmes, 2003, 참조.
(9) C. Patterson Giersh, ‘티베트의 장례식’, Perspectives Chinoises, n° 104, Hongkong, 2008.
(10) 유로화로 환산하면 각각 1575, 710, 367, 256유로.


중앙아시아 국가와의 공조

중국은 국내 안보와 에너지원 확보를 위해 1996년부터 러시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과 더불어 ‘상하이그룹’을 구성했다. 이는 잠재적인 국경분쟁을 해소하고(최근 해결됨)(1) 안보 문제(분리·독립주의 대응)에 대한 검토, 관련국과의 경제적 협력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1990년대 중국은 실제로 신장성에서 강력해지는 카자흐 소수민족 운동과 인근 중앙아시아 국가에서 결성되기 시작한 위구르 정당에 대해 우려하고 있었다. 1992년 “동투르크스탄(신장성)(2) 민족자결권의 고취”를 목표로 중앙아시아 국가에서 온 150명의 대표자를 규합해 알마티(카자흐스탄)에서 ‘위구르국제연합’이 조직되었다. 키르기스스탄에서는 위구르 정당이 탄했다. 키르기스스탄 국영방송에서 위구르어 프로그램을 방영하면서 신장에서도 청취가 가능해졌다. 신장에서 사회적·종교적 요구가 대두되는 가운데 일종의 위구르 민족의 공간이 형성되었다.

중국 당국은 이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상하이그룹 회원국들은 지명수배된 위구르 운동가들이 자신의 영토에 들어오는 것을 막기 시작했다. 몇 년 후, 위구르 운동가들은 이들 국가에서 추방되어 투옥되고, 고문받고, 간혹 사형까지 집행되었다. 중국은 이렇게 국내 안보 문제를 해결했다.

2001년, 상하이그룹은 우즈베키스탄, 몽골, 인도, 파키스탄을 참관국 자격으로 참여시켜 ‘상하이협력기구’(OCS)가 되었다. 이 기구의 최우선 목표는 ‘세 개의 세력: 극단주의, 분리·독립주의, 테러리즘’과 싸우는 것이다. 과거 수많은 위구르 젊은이들을 받아들여 코란학교에서 교육했던 파키스탄도 중국과 국경을 거의 닫아버렸다. 관타나모에 수용되었던 22명의 위구르인들은 알카에다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 같다. 이 중 5명이 2006년 석방되어 버마로 망명했으며 17명은 2009년 석방되어 팔라우섬에 보내졌다.

중국 당국에 안보 문제와 경제적 이해관계는 밀접히 연관돼 있기도 하다. 신장은 러시아, 투르크메니스탄, 카자흐스탄에서 오는 석유와 천연가스 라인의 교차점이다. 1992년에서 2006년 사이 신장성과 인근 중앙아시아 국가 간의 교역량이 6배나 증가할 만큼 이곳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이다. 중국 정부는 신장 교통망 건설(도로·철도·공항 등)에 주안점을 두는 한편 인근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교통망 건설까지 지원했다.

“지리적으로 신장은 28억 인구가 사는 광대한 지역의 중심에 있습니다. 이 상황을 잘 이용해야 합니다.” 경제학자, 신장 자치정부 자문위원, 그리고 <신장의 발견>(3)의 공동 저자인 탕리지우는 설명한다. 그는 이 지역에 러시아, 특히 인도를 포함시킨다. 엄청난 잠재력이 있는 시장인데다 인근 국가 간의 문화적 친화성까지 증진하면 금상첨화라 할 수 있다. 7월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우루무치는 다가올 여행 산업의 특수를 기대하고 있었다.


<각주>

(1) 중국 전체 국경의 2%만이 러시아, 카자흐스탄과 국경분쟁 중이다.
(2) Thierry Kellner, <중국의 서역: 베이징과 새로운 중앙아시아(1991~2001), PUF, Paris, 2008.
(3) 탕리지우·쿠일 바옥신, <신장의 발견>, 신장인민출판, 우루무치, 2009.

 

 

번역 · 김태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