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공과 이스라엘이 공모하는 이유

남아공 흑인들과 팔레스타인인들의 닮은꼴 불행
양국 지배세력은 국제사회 공범자로 눈총 받아

2009-08-06     알랭 그레슈/<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특파원

이스라엘이 자행한 가자 전쟁은 브라질에서 인도네시아까지, 모로코에서 프랑스까지 세계 각처에서 분노와 시위를 촉발했다. 남아공에서는 팔레스타인과의 연대가 특별한 열정 속에 표출되었다. 이곳 사람들은 오랫동안 흑백차별정책(아파르트헤이트)을 실시한 백인정부와 이스라엘 정부 간의 끈끈한 동맹관계의 경험을 잊지 못한다. 그들의 눈에는 팔레스타인의 상황과 과거 백인 정부 지배하에서 대부분의 흑인들이 겪어야 했던 불행이 겹쳐진다.


유명한 캐리커처 작가인 자피로가 2001년 11월에 그린 풍자화는 이러했다. 탈출한 유대인 무리의 선두에 노벨상을 받은 남아공의 여류 소설가 네이딘 고디머와 자피로 자신이 있다. 득의양양한 미소를 띤 채, 그는 ‘이스라엘에 대한 무조건적 지지’라는 글귀가 적힌 요새에서 도망쳐나온다. 간수들은 “저놈 잡아라”고 고함을 치지만, 그의 행동은 단호하다.

로니 카스릴스는 전 생애에 걸쳐 어떠한 어려운 일도 해내는 불굴의 의지를 보여주었다. 발트해 연안 국가에서 이주해온 유대인의 아들로 1938년 남아프리카에서 태어난 그는 일찍이, 특히 1960년 3월 21일, 경찰이 비무장의 흑인 시위자들에게 발포해 1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세이프빌 사건 때 인종차별의 현장을 경험한다. 이 학살은 아예 공개적으로 독재로 가는 하나의 서곡이자 전환점이었는데, 당시는 대다수의 아프리카 국가들이 독립을 얻는 시기였던 만큼 국제적인 여파가 그만큼 더했다.

그 자신이 동유럽의 유대인 박해를 받아온 부친의 삶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을 카스릴스가 어떻게 또 다른 시각을 가질 수 있었을까? 그는 공산당과 아프리카민족회의(ANC)에 가입한 후 근 30년 가까이 망명 생활을 하면서 긴 투쟁을 한다. ANC의 정보 책임자인 그는 ‘테러리스트’라는 별병을 얻었다. 1970년대 정부가 텔레비전에 그의 사진을 공개하면서 ‘위험하고 무장한’이라는 수식을 붙일 정도였다.(1) 그는 1990년 귀국한 뒤 아파르트헤이트가 종식되자 여러 부처의 장관직을 거친 후 지난해 각료직을 사임했다.

아파르트헤이트 반대의 투사로서, 공산주의자로서, 그리고 유대인으로서 그는 팔레스타인의 비극에 민감했다. 산림수산부 장관이었던 2004년 2월, 그는 이스라엘군에 포위된 라말라 지역의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사령부(무카타)로 야세르 아라파트를 방문했다. 아라파트가 창문 밖을 가리키며 “아파르트헤이트 시절 당신네 나라의 흑인 자치구와 똑같지 않소?”라고 묻자, 그는 “아니요”라며 “어떤 흑인 자치구도 이처럼 전차와 전투기의 공격을 받은 적은 없다. 오히려 남아공 정부는 멋진 건물을 세우려고 많은 돈을 투자했고 심지어는 국제사회가 자치구를 인정하도록 영공권까지 허용했다”고 답했다.

2008년 12월에서 이듬해 1월 사이에 일어난 가자 사태의 충격은 남아공에 즉각 전달되었고 광범위한 반발과 시위로 이어졌다. 2008년 4월에도 짐바브웨로 가는 무기를 실은 컨테이너 하역을 거부한 적이 있을 만큼 강력한 남아공노동조합연합 ‘코사투’(Cosatu)는 이스라엘 선박을 보이콧하기에 이르렀다.

팔레스타인 남아공의 동병상련

“팔레스타인과 남아공, 가자와 이곳의 흑인 자치구인 트란스카이나 시스카이 사이에는 일종의 동병상련이 있기 때문에 국민들 사이에서도 팔레스타인에 대한 동정심이 자발적으로 일고 있다”고 아담 하비브 요하네스버그대학 부총장은 설명한다.

남아공 정부는 이스라엘이 가자지구를 무력으로 침공해 자행한 폭력을 단호하게 비난했으며 “학살”을 중지하고 “조건 없이 즉각” 군대를 철수하라고 촉구했다. 의회는 이스라엘 대사와의 면담에서 이스라엘군의 만행은 아파르트헤이트 시절의 기억을 유희 정도로 만들어버릴 만큼 잔인했다고 말했으며, 외교분과 위원장인 잡 시톨은 이른바 ‘국경 통과 검문’ 때 팔레스타인을 다루는 정도가 가축을 다루는 것과 비슷하다고 꼬집었다.(2)

이런 상황에서 유대인 공동체의 지도자들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정책에 지지를 보냈다가 질책과 비난을 받았는데, 특히 아파르트헤이트에 반대했던 유대인 지식인층의 큰 반발을 샀다. “가자를 공격할 때 가장 열렬하게 이스라엘을 지지한 사람은 이스라엘 대사가 아니라 랍비인 워렌 골드스타인이었는데, 그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가자 폭격에 찬성했다. 이는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행동임이 분명했다”고 하비브가 지적한다.

유대인 단체는 “이스라엘 정부의 가자지구 하마스에 대한 군사 공격 결정에 굳건한 지지” 입장을 밝혔다. 이들은 며칠 뒤 네티즌들이 유대인과 이스라엘을 혼동해 인터넷상에서 유대인 상점 불매운동으로 번지는 등 반유대주의를 야기했다며 분개했다. 실제로, 아프리카민족회의나 이슬람 지도자를 비롯해서 팔레스타인 지지 단체들까지도 유대인 모두를 적대시하는 반유대주의에는 반대하고 있다.


수천km나 떨어진 곳에서 일어난 분쟁에 대해 격렬한 논쟁을 벌이는 것이 놀라운 일은 아니다. 어떤 요인은 명백하게 드러나고 또 어떤 요인은 드러나지는 않지만, 남아공과 이스라엘을 이어주는 분명한 이유는 있다. 역사의 우연이겠지만, 1948년 이스라엘 건국과 남아공 국민당의 총선 승리는 단 몇 주의 시차밖에 없었다. 국민당은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채택함으로써 인종차별 정책의 절정을 구가했다. 국민당 지도자들은 2차 대전 당시 나치의 반유대 정책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대부분 투옥 생활을 했는데도 이스라엘과 점차 돈독한 관계를 맺어나갔다. 이스라엘대학 교수인 벤자민 바이트알라미는 이 역설을 이렇게 설명한다. “유대인을 혐오하지만 이스라엘인을 좋아할 수 있습니다. 어느 면에서는 이스라엘인들이 반드시 유대인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인들은 남아공 최초의 네덜란드 식민지인처럼 식민지의 식민이거나 전사입니다. 그들은 반항적이고 강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지배하는지를 알죠.” 그는 또한 “반유대주의는 유대인의 이미지를 물리적 억압에 대해 수동적이고, 어떤 지적인 면모도 갖추지 못한 존재로 그리고 있다”며 “그래서 이처럼 이스라엘인을 좋아하면서도 유대인을 혐오할 수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3)

‘남아공의 오랜 친구’ 이스라엘의 탐욕

그러므로 모든 것이 달라 보이는 두 나라 사이에도 어떤 동질감이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외무부 장관인 모세 샤렛은 1950년 남아공을 처음 방문했다. 유엔이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에 대한 제재를 결정했던 1984년 11월, 남아공의 외교부 장관인 피크 보타가 이스라엘을 방문해 당시 총리인 이츠하크 라빈의 환영을 받았다. <르몽드>의 장피에르 랑겔리에르 특파원은 이스라엘과 남아공의 긴밀한 관계(당시 이스라엘은 백인이 지배하는 남아공의 꼭두각시 정권과 관계를 유지했던 지구상의 유일한 국가였다)를 상기하면서, 당시 남아공의 흑인 정권은 서안지구의 이스라엘 식민지들과 닮은꼴이었다고 지적했다. (4)

우선 두 나라의 관계는 경제적 측면에서도 굳건했다. 1970~80년대 이스라엘 경제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사회주의 경향의 이스라엘 최대 노조 히스타드루트의 후원 덕분이다. 에르라트 아오브딤(Hevrat Haovdim)사는 남아공과의 무역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했다. 그리고 키부츠도 있었다. 예컨대, 나치와 싸운 동유럽 출신 유대인이 설립한 로하미 하게타오트 키부츠는 남아공 크와줄루의 자치구에 있는 카마의 화학공장을 경영했다.

이런 관계는 군사·안보 분야에서 또 다른 차원으로 맺어진다. 이스라엘은 남아공의 원자폭탄과 미사일 시스템 구축을 도왔다.(5) 남아공의 이스라엘 군사고문관은 행정수도인 프레아토리에서 열리는 참모회의에도 참석한다(이스라엘은 이 밖에 미국의 군사고문관을 파견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무기들은 남아공에서 허가를 받아 제조되었다. 두 나라 정보국도 아무런 충돌 없이 예전의 공산주의, 그리고 테러리즘에 맞서 협력했다. 여기서의 테러리즘 단체란 아프리카민족회의, 팔레스타인해방기구, 앙골라와 모잠비크 등 포르투갈 식민지의 해방운동, 남아공이 점령한 나미비아의 독립운동을 이끈 서남아프리카인민 해방운동(Swapo) 등을 일컬었다. 넬슨 만델라에게 종신형을 선고한 1964년 리보니아 사건의 주 검사, 수백 명의 사상자를 내며 1976년 폭동을 분쇄한 나미비아의 폭동진압 타격대(일명 ‘소웨토의 벌목꾼’)의 창설자들이 1970년대에 거의 정기적으로 이스라엘을 방문해 환영을 받았다.

남아공·이스라엘 지배세력, ‘선택된 민중’이란 착각

카스릴스가 보기에 이스라엘은 토착 노동력을 필요로 하지 않고 소수인 아랍인에게도 투표권을 부여하는 등 남아공과 명백한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이념적으로는 매우 유사하다. 이른바 아프리카너라고 불리는 초기 식민지 시대의 네덜란드인들은 성경과 총을 사용했고, 이스라엘인들은 성경을 사용했다. 이념적으로는 둘 다 문명화의 사명을 지닌 ‘선택된 민중’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유대 공동체는 이러한 묵계 의식에 아무런 문제의식이 없다. 반대로 유대사회는 아프리카민족회의와 공산당에 참여한 일원들은 배척한다. 전 아프리카민족회의 의원이며 가족 중 일부가 나치 수용소에서 희생된 앤드루 파이스타인은 2000년 5월 새로운 남아공 의회가 처음으로 홀로코스트 문제를 다루도록 이끌었다. 그는 “1933~39년에 나치가 유대인에게 취한 정책과 아파르트헤이트 기간에 대다수 남아공인들이 겪은 것 사이에는 명백한 유사성이 있음에도, 수만 명에 이르는 남아공 유대인들의 대다수가 백인들처럼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었다”고 설명한다.(6) 그는 만델라 사건 심리 당시 검사로 만델라에게 사형을 구형했던 퍼시 유타가 요하네스버그의 정통 유대교회의 지도자들로부터 ‘공동체의 보루’라는 찬사를 받았던 사실도 소개했다.

1994년 만델라가 대통령이 된 후 두 나라 관계는 상대적으로 약화되었다. 새 정부는 1998년 만료되는 기존 조약들을 존중하면서도 군사적 동맹을 중지시키고 아라파트와 팔레스타인을 강력하게 지지했다. 이런 태도는 아파르트헤이트 체제를 지원했던 미국에서 이스라엘에 이르기까지 세계의 거의 모든 국가들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2000년 반이스라엘 저항운동인 2차 인티파다가 터지기 전까지 지속되었다. 2004년 아라파트 팔레스타인해방기구 의장이 사망하자 만델라는 그를 “우리 세대의 가장 뛰어난 자유의 투사”라고 추모했다.

서방 국가들의 지지를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새로운 남아공이 이스라엘과의 모든 연결 고리를 끊을 수는 없다. 게다가 민간 분야를 필두로 두 나라 사이에 이미 형성돼 있는 경제적 관계의 긴밀도도 상당하다.

이같은 남아공의 현실적인 정책은 팔레스타인과의 연대를 위한 운동 진영의 분노감을 자극하고 있다. 즉, ‘이스라엘의 점령과 남아공 간의 협력-식민주의와 아파르트헤이트 간의 공모’라는 운동 진영의 문건이 이를 보여준다.

요하네스버그의 아프리카-중동센터 책임자인 나엠 제나는 타보 음베키 전 대통령이 “이스라엘과 관계 정상화를 꾀하려 했다.(7) 두 나라 사이의 교역은 그해 재화와 인적 교류 분야에서 15~20% 증가했다. 심지어는 군사적 관계를 활성화하려는 시도도 있었다”고 평가한다. 이스라엘에 대한 제재 조치는 현재 가자 학살 사건을 조사하는 유엔 조사위원회의 책임자 리처드 골드스톤이 남아공 판사 출신인 점을 감안하면 거의 물 건너간 게 아닐까?

글 · 알랭 그레슈 Alain Gresh

번역 · 이진홍 memosia@ilemonde.com 


<각주>

(1) 1993년 초판된 그의 자서전 제목이기도 하다. <위험하고 무장한>, Jonathan Ball 출판사, 요하네스버그, 1998.
(2) ‘남아공 국민당 의원들 이스라엘을 비난하다’, <Jewish Telegraphic Agency>, 2009년 1월 19일.
(3) 벤자민 바이트 알라미, <이스라엘 커넥션, 이스라엘 군대는 누구이며 왜?>, Pantheon, 뉴욕, 1987, p.161.
(4) 장 피에르 랑즐리에, ‘남아공 외무장관의 방문이 두 나라의 긴밀한 관계를 설명해준다’, <르몽드>, 1984년 11월 6일자.
(5) 알 제이 벤터, <어떻게 남아공이 6개의 원자폭탄을 소유하게 되었는가?>, Ashanti 출판사. 케이프타운, 2008.
(6) 그의 책 <파티가 끝난 후>, Jonathan Ball 출판사, 요하네스버그, 2007. 특히 제9장 참조.
(7) ‘Democratic South Africa’s complicity in Israel’s occupation, colonialism and apartheid‘ ; http://stopthewall.org/activistresources/1976.s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