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의 탁발행렬과 루앙프라방의 '행복'

[여행] 라오스 제2도시 루앙프라방을 가다

2009-08-06     최갑수 시인

“라오스는 동으로 베트남과 서쪽으로 버마, 남으로 타이, 북쪽으로 중국에 오랫동안 고통스러운 지배를 받아왔습니다. 근대에 들어서는 일본과 프랑스, 미국한테 무자비한 노략질을 당해왔죠. 국토는 너덜너덜해졌습니다.”

공항에서 숙소까지 차를 타고 가는 약 20분 동안 라오스인 가이드 캠빗은 유창한 영어로 이렇게 말했다. 거리는 식민지풍 건물과 라오스의 전통양식으로 지은 건물이 함께 서 있었다. 바늘처럼 따가운 햇살 아래 붉은색 법복을 입은 승려와 허름한 티셔츠에 반바지 차림의 아이들이 지나갔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싸바이디”(안녕하세요)라고 인사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로 화답했다.

“이곳 루앙프라방에서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해야 하나요?”

“사람들요. 저들의 맑은 얼굴과 스며 있는 미소와 묻어나는 마음이오. 그리고 할 수 있는 일은…” 약간 뜸을 들인 캠빗이 말했다. “별로 없어요. 일어나서 차 마시고 거리를 걷다가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저녁 무렵이면 근처 시장을 둘러봅니다. 그리고 거리에서 만난 여행자나 라오스인들과 맥주를 마시는 정도?”

라오스 제2의 도시의 경건함


라오스의 국토는 23만6천㎢, 남북한 면적의 1.1배다. 하지만 인구는 590만 명에 불과하다. 1인당 국민소득은 500달러 수준으로 세계 최빈국 중 하나다. 총 교역량도 19억7600만 달러밖에 되지 않는다. 공업화 기반은 거의 없으며 철도는 식민 지배를 했던 프랑스가 부설한 7km 구간이 전부다. 라오스 제2의 도시인 루앙프라방 역시 인구라고 해야 4만 명, 상주 인구는 8천 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툭툭’이나 ‘점보’ 같은 오토바이 택시와 소형 트럭의 엔진 소음을 빼면 소란스러울 것이 없다. 건물과 집, 수많은 사원들이 어울린 이 작은 도시는 승려와 아이들, 배낭여행자들로 섞여 있다. 이들이 만들어내는 자유로움과 순진함, 종교적인 경건함이 도시를 지배하고 있다.

다양한 소수민족들의 전통의상

루앙프라방은 14세기 중반부터 18세기까지 수도였다. 그래서 왕궁과 수많은 불상으로 가득한 동굴, 사원을 간직하고 있다. 1995년 12월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는데 사원과 왕궁, 전통 민가는 물론 다양한 소수민족들의 의상과 풍습, 근대 건축물이 보존할 가치가 있다고 평가했다.

가장 큰 볼거리는 탁발 행렬이다. 라오스의 수도인 비엔티안에서도 볼 수 있지만 1년에 한두 번 정도다. 루앙프라방에서는 하루도 쉬지 않고 매일 새벽 탁발 행렬이 이어진다. 승려들 수백 명이 마을을 돌며 아침거리를 공양하는 장엄한 행렬은 감동을 주기에 충분하다. 가장 나이가 많은 승려들이 앞장서고 서열에 따라 승려들이 한 줄로 그 뒤를 따른다. 승려들이 바리때 뚜껑을 반쯤 열면 시주들은 준비한 음식물을 넣는다. 승려들은 머리를 숙이거나 허리를 굽혀 답례하는 일이 없다. 다음 시주를 향해 빠르게 지나친다.

승려들은 아침과 점심 두 끼밖에 먹지 않는다. 먹는 양도 적어 바리때에 담긴 음식이 남는 경우가 많다. 이 음식을 어떻게 처리할까? 아침 탁발 행렬에 공양을 하기 위해 나온 주민들 끝에는 걸인들이 자리잡고 있다. 대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도 있고 백발이 성성한 노인도 섞여 있다. 승려들은 바리때에 담긴 음식을 이들에게 나눠준다. 걸인들 역시 당연한 듯 음식을 받는다.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와 달리 이곳에서는 거리에서 걸인을 만났던 적이 한 번도 없다. 이러한 음식의 재분배 때문인지 모르겠다.

걸인을 만날 수 없는 이유

이곳은 고요한 도시였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소수의 배낭여행자들만이 루앙프라방을 찾았다. 하지만 최근 수많은 여행자들이 여기로 몰려들면서 여러 가지 부작용이 생기고 있다. <뉴욕타임스>가 ‘2008년 꼭 가봐야 할 여행지’ 1위로 루앙프라방을 꼽은 뒤 미국과 유럽 등에서 수많은 단체관광객이 찾아오면서 엄청난 ‘달러’가 이 작은 도시에 뿌려지고 있다. 숙박비, 음식값, 교통요금 등 모든 물가가 급등한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문제는 전통 생활양식과 순수한 가치가 흔들리고 있다는 점이다. 탁발 행렬 역시 관광객을 위한 퍼포먼스로 전락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루앙프라방을 떠나기 전날, 가이드 캠빗과 함께 카페에 앉아 얼음이 든 비어 라오를 마셨다. 취기가 약간 오른 나는 라오인들이 행복하게 웃는 이유를 물었다. “나는 라오인들의 웃음을 당연히 좋아하고 사랑할 수밖에 없어요. 아마도 그 웃음 때문에 전세계의 배낭여행자들 역시 라오스를 가장 좋았던 나라로 꼽을 것입니다. 하지만 한 달 소득이 50달러도 되지 않고, 빈곤 속에 아이들이 자라나는 이 나라 사람들이 행복한 웃음을 지니며 살아가는 이유를 정말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한동안 말이 없던 캠빗이 대답했다. “이유는 나도 모릅니다. 나 역시 가난한 가정에서 자라 어렵게 대학을 졸업했어요. 하지만 지금까지 내 기억의 대부분은 행복했던 순간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메콩강에서 수영을 하고 가족과 함께 밥을 먹고 친구들과 함께 들판에서 뛰어놀았던 모든 지난날들이 내게는 행복입니다. 우리 라오스인들은 하루하루를 살게 해준 신에게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덧붙였다. “당신이 이해하기 쉬운, 자본주의적으로 말하면, 아마도 우리 모두가 가난하기 때문에, 빈부 격차가 없기 때문에 행복할지도 모릅니다. 이게 바로 내가 당신에게 대답할 수 있는 최선입니다.”

글·사진 최갑수
시인이자 여행작가. <문학동네>에 <밀물여인숙>을 발표하며 문단에 등단했다. 여행이 삶에 대한 가장 진실한 위로 방식이라 믿고 국내외 곳곳을 돌아다니며 여행기를 쓰고 있다. 시집 <단 한 번의 사랑>, 여행사진 에세이 <당분간은 나를 위해서만> <구름그림자와 함께 시속 3km> <목요일의 루앙프라방> 등을 펴냈다.
 

내가 다시 이곳을 찾은 이유

3년 전 루앙프라방을 처음 찾은 이후 해마다 이곳을 찾았다. 일주일을 머문 적도 있고 두 달 동안 머문 적도 있다. 루앙프라방 사람들이 좋았고 그들이 보내는 사금파리 같은 미소가 좋았다. 그냥 놀았다. 자전거를 빌려 동네 여기저기를 쏘다녔고 메콩강의 노을 속에 앉아 롤랑 바르트를 읽었다. 가끔 현지인들과 어울려 독한 라오스 술을 밤새 마시기도 했다.

그렇게 놀며 우리는 매일 밤 만났다. 나와 캠빗, 그리고 아드리. 아드리는 네덜란드인인데 한국인 아내와 함께 루앙프라방에서 카페를 운영하며 사진 작업을 하고 있다. 베트남 하노이에 스튜디오가 있는 그는 작업이 있을 때마다 하노이로 떠나곤 한다.

“이봐 캠빗, 내가 이곳에 처음 왔을 때, 넌 사찰 몇 곳과 시장을 제외하고는 사실 보여줄 게 별로 없다고 말했지. 넌 엉터리 가이드였어, 하하.”

“그런데, 초이(Choi), 넌 여기 왜 다시 온 거야? 난 네가 다시 올 줄은 몰랐어.”

“나도 내가 다시 온 이유를 모르겠어. 근데, 한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루앙프라방이 계속 떠오르는 거야. 당신과 함께 마셨던 차가운 맥주와 나를 보고 웃어주던 사람들의 표정들 모두가 말이야. 그리고 어느 날 루앙프라방으로 떠날 채비를 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지.”

아드리가 내 방문을 두드렸다.

“초이, 아침 먹으러 가자. 내가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쌀국수집을 알고 있어.”

시장 한켠에 허름한 노상 쌀국수집이 있었다. 마음씨 좋아 보이는 아주머니가 환한 미소로 우리를 맞았다. 아주머니의 이름은 숨(Sum). 아드리는 “저것 봐” 하며 벽 한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메뉴판이 붙었는데 이렇게 쓰여 있었다. ‘Noodle with pork 7,000kip(700원), 콜라 3,000kip…, Sum’s Smile Free!!’

아드리가 말했다.“Sum’s Smile Free! 내가 어떻게 루앙프라방을 떠날 수 있겠어? 아마 네가 이곳으로 다시 돌아온 이유도 이것 때문이 아니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