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미셸 옹프레의 위험한 사상

2015-07-02     에블린 피에예

 철학자 미셸 옹프레는 왕성한 집필 능력을 바탕으로 방대한 지적 영토를 종횡으로 넘나드는 사유의 모험가로 꼽힌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는 그를 조르조 아감벤, 알랭 바디우, 슬라보예 지젝, 페터 슬로터다이크, 마이클 센델 등과 함께 ‘우리 시대의 위험한 사상가들’ 중 한명으로 꼽은 바 있다. 간헐적으로 그의 저서들이 국내에 소개됐지만, 손에 꼽을 정도여서 그의 사유를 이해하기에는 역부족이다. 본지 에블린 피에예 기자는 최근 신작 <코스모스>(Cosmos)를 출간한 미셸 옹프레의 사유 세계를 짚어본다.

 
옹프레는 그의 <코스모스>가 자신의 대표작이자, 위대한 작품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의 사상이 이 책에서 마침내 완전히 완성될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다. 옹프레의 사상은 모든 순응주의에 반대하는 유쾌한 합리론을 자처하며 사람들을 매혹시킨다. 하지만 바로 ‘순응주의 반대’라는 명목아래 <코스모스>는 비합리적인 것과 전통적인 것을 찬양하는 담론을 부활시킨다.
 
“프랑스에서 가장 대중적인 지식인이자 마뉘엘 발이 제일 미워하는 사람의 뒤에는 누가 숨어 있는가?” 이 적절한 질문은 미셸 옹프레의 신작 <코스모스>(1)의 발간에 맞춰 그의 친구인 프란츠 올리비에 지스베르가 편집장으로 있는 주간지 <르 푸엥>이 제기한 질문이다.(2) 미셸 옹프레의 사상과 견해가 가진 파급력 때문에 그의 저서는 베스트셀러가 되기에 충분하다. 그가 잡지 표지를 장식하기만 해도 잡지 판매량이 눈에 띄게 늘어날 정도다. 게다가 미셸 옹프레가 “좌파를 자처하는 마피아가 고취시킨 이데올로기 테러”를 고발하고 “맹, 아탈리 혹은 베르나르 앙리 레비의 부정확한 분석보다는 알랭 드 브누아의 정확한 분석”을 선호한다거나, 혹은 “알랭 브누아의 부정확한 분석보다는 베르나르 앙리 레비의 정확한 분석”(3)을 선호한다고 말할 때면, 마뉘엘 발스 총리까지도 반응을 보여야 할 의무가 있다고 느끼게 된다. 물론, 발스 총리는 브누아를 언급한 사실에 다소 혼란스러워했다. 브누아는 소위 ‘신우파’의 중요 인물이자 오래전에 창설된 유럽문화연구개발모임(GRECE)의 공동창립자다. 스스로 좌파를 자처하고 심지어 프루동주의자라고까지 말하는 옹프레가, 발스 총리로부터 “어떤 의미로는 국민전선(FN)의 사상적 모태를 만들어 낸” 사람으로 평가받는 브누아와 의견을 같이한다면, 그것은 “기준점을 상실했음을 의미”(4)하는 것이다. 또 다른 각료인 장 마리 르겡은 “대체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간결한 표현으로 결론을 대신한다.
옹프레가 가끔 자기 진영을 향해 대립각을 세우는 것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그럴 때도 항상 해방의 이상과 연결되어 있는 인간이라는 개념을 내세우고 있다. 이 개념을 살펴보면 오늘날 모호하거나 모순적으로 보이는 것을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코스모스>는 <세계의 간단한 백과사전>이라는 겸손한 제목의 3부작 저서의 첫 권이다. ‘죽어가는’ 우리 문명의 데카당스를 선고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사람들에게 대단히 친숙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고 할 것이다. 또한 옹프레에게 영감을 준 위대한 철학자들 가운데 한 명인 프리드리히 니체의 표현(‘힘에의 의지’)을 인용하자면, 이 책은 우선적인 가치의 추락이 분명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허무주의와의 투쟁, 즉 ‘몰락한 서구’(5)의 한 특징이랄 수 있는 ‘의미의 소멸’에 맞서 싸우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토록 고통스러운 역사의 순간에 무엇을 해야 하는가? “에피쿠로스가 했던 말이 남는다. 배는 가라앉지만 개인적으로 살아남을 가능성은 있다. 똑바로 꼿꼿하게 서서 ‘허무주의는 나를 거쳐 가지 못하리라’라고 말하는 것이다.”(6)
옹프레는 “우선적인 가치”를 되찾고 의미를 재창조하기 위해서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에게 실망한 많은 사람들이 접어들었던 길을 제안한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 더 이상 접근할 수 없게 된 “신성한 자연”을 이해하고 맞아들이는 것이다. 그는 신성한 자연이 언어에 의해 타락했다고 말하는데, 그 이유는 “사람들이 실재에 이름을 붙이자마자 단어는 실재를 매개하면서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이후 신성한 자연은 문자에 의해 축소된 것에 반해, “책이 출현하기 이전의 구술문화는 자연의 관조, 우주가 부여한 징후들에 대한 사색의 결과인 지혜를 보유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신성한 자연은 일신교, 특히 유대-그리스도교적 문명의 해석 속에서 훼손되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 문명 이전에는 “세계는 하나의 완전체다. (…) 그 어느 것도 우월하지 않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존재론적으로 평등한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예전, 즉 문명이 “굴절되고 회절된, 그리고 결코 순수하지 않은 것의 빛을 프리즘에 통과시키기 이전”이 더 좋았던 것이다.
 
모호하고 막연한 영성에 젖어든 옹프레
 
이 모든 해악에 “허무의 시대, 가상의 것을 만들어내는 기계들에 의해 다시 세워진 시대, 들판의 시대에 대항하는 도시의 시대”인 근대성의 피해를 덧붙인다면, 이미 논의는 끝났다. 문명에 동화되지 않은 집시의 “형이상학적 진실성”을 되찾는 일, “이 세계에서 순수한 현존으로, 본연의 느린 시간의 관능적 쾌락으로” 자신의 하루를 살아가는 은 정말 멋진 일일 것이다.
놀라우리만큼 집요한 이러한 반(反)주지주의는 그만큼 집요한 확신을 겸한 것이기도 하다. 이 확신에 따르면 인류는 생명체의 한 변종일 뿐이며, 반드시 가장 많은 것을 갖추고 있는 것도 아니다. 옹프레는 대담하게 식물도 생각하고 계산할 줄 알며(적어도 둘까지는 계산할 줄 안다고 명시한다) 예견하고 소통한다고 주장한다. 경이롭게도 식물은 “우주와 직접적으로 교류하는 감각이라는 기본적 생리를 방해하는 복잡한 부속장치 없이 인지하고, 느끼고, 감동할 수 있다.” 동물의 경우, 동물과 인간 사이에는 체질적인 차이가 없다. 인간도 똑같은 동물이다. 하지만 문명에 의해서 ‘변질된’ 동물이다. 둘 사이에는 단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옹프레는 그 ‘정도’란 것이 어떤 것으로 이루어져 있는지는 명확하게 말해주지 않고, 그가 말하는 ‘지성’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분명하게 가르쳐주지 않는다.
그와 같은 모호한 개념들의 집합은 자연스럽게 우리 동시대의 감수성을 띠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감수성은, 육체-정신의 이원론을 견지하고, 나머지 생명체에 대해 경멸감을 품고, 수익성을 최고의 가치로 강요하며 기술의 발전을 이끈 허위의 서구 이성을 거부함으로써 활기를 띤다. 옹프레는 오랫동안 자신을 쾌락주의적 무정부주의자로 소개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매우 오랫동안, 지성에 대한 기만적인 믿음을 버리고 성숙한 자유를 회복시켜야 할 필요성에 대한 담론을 펼쳐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코스모스>에서는 감각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면서 인류의 특성이라 할 수 있는 언어의 역할을 부인하는 면모도 보인다. <코스모스>는 그 영향을 상술하는 기회이기도 하다. ‘자연’이라는 이름 아래 생명의 원칙 자체를 찬양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에너지 생기론’ 또는 ‘힘에의 의지’라 부르는 이 원칙은 자유와는 거의 관계가 없다.
사실, 그것이 무엇과 관계있는지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어렵다. “힘에의 의지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명명한다. 우리를 원하고 우리가 선험적으로 원할 수 없는 현상을 알고, 인식하고, 사랑하는 것 이외에는, 힘에의 의지에 대항해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다.” 물론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란 말인가? 이 부분에서 어휘들은 신중해진다. 생명에 고유한 힘을 부여하는 이론이 등장한다. 옹프레는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룬 강연계획서(반-철학사, 1999년 1월 5일)에서 이렇게 요약했다. “a. 모든 것은 물질이다. b. 하지만 무언가는 이 구성에서 벗어나 있다. 지금으로서는 지적으로 단순화할 수 없는 것인데, 그것은 생명이다.” 사람들은 모호함 속을 떠다니는데, 스스로 유물론자라 주장하는 옹프레는 모호함으로 과학성의 무게를 채우고 싶어 한다. 모호하고 신비한 힘인 생명은 그 자신 이외의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연’이라고 부르는 다양한 형태를 갖는다. 자연은 버팀대로, 생명의 화신으로서만 존재한다. 인간도 여기에 포함된다. “우리의 은밀하고도 심오한 진실”은 그래서 “생물학, 이 경우 조직학(세포 조직의 거시구조를 다루는 생물학의 한 분야=역주) 안에 들어있다. 이 진실은 근원기억을 간직하고 있고, 우리는 그 근원기억이 생명체의 프로그램을 간직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죽기 위해 태어나고, 번식하고 죽기 위해 살아가고, 자연의 계획을 실현하고 죽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이고, 우리가 원하는 것보다 더 우리를 원하는 생명 속에서 맹목적으로 나아가면서 자신이 자유롭다고 생각하고 자유롭다고 말한다. 그리고 죽는다.”
그러므로 자유의지는 한낱 “허구”, 즉 “우리를 예정해놓은 결정론에 대한 무지를 감추려는 꾸며낸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 프로그램이란 참으로 대단한 것이다. “섹스, 피, 죽음, 어떤 동물도 이것들을 벗어날 수 없다.” 스스로를 자율적인 존재라고 믿고, 수많은 선택과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우리는 모든 분야에서 그저 “복종”할 뿐이다. 예를 들어 “인간이 살충제를 뿌릴 때에도 (…) 자연의 계획을 펼쳐 보여주는 데 만족하는 것”이다. 그러니 일차적이고, 본질적이고,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되는 프로그램에 의해 작동되는 인간의 본성이 있을 것이다. 그 프로그램은 “종(種)의 이익을 위해 개체들을 필요로 한다. 개체들은 종의 이익을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 자기들 스스로 그것을 원하는 것이라 믿지만 사실은 프로그램이 그들을 필요로할 뿐이다.” 선과 악을 넘어선 ‘1차 동력’은 바로 순수한 존재의지다.
휴머니즘 또한 당연히 이런 세계관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숙명이 자유를 대체한다. 주체는 이제 계속되기 위해 사용되는 힘의 매개물일 뿐이다. 역사는 환상일 뿐이다. 유일한 가변성, 유일한 자유의 틈새가 존재한다. 그것은, “이 땅에서 싹을 틔우는 힘과 동일한 힘이 인간에게도 지속된다. 맹목적이고 은밀한, 그러나 강력하고 결정적인 힘, 그 힘이 어떤 것이지 알고 그것에 동의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우리가 그 힘에 반대해 대단한 일을 할 수 없는 그런 힘”을 인정하는 것이다.
“생식력을 제거해버리는” 기만적인 문명으로부터 피해 있던 “고대인”들의 지혜, 즉 참고 받아들이기는 그 좋은 본보기다. 옹프레는 “파종과 수확의 시대, 출생과 죽음의 시대”, “우주와 관계 맺으며, 세계의 질서와 사이좋게 살았던” 예전의 사람들에게 감동적인 오마주를 바친다. 이 옛날의 사람들이란“철학자보다 더 세상에 대해 많이 알고 있던 농부, 농민, 원예가, 양봉가, 선원, 사육자, 경작자, 소작인, 시골사람, 임업자”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존재의 근원”을 모르지 않기 때문이다. 도시 문화란 것이 “엄청나게 잔인한 도시의 장점을 찬양”하는 것 말고는 없는 반면에 그들은 자연의 작품 속에서 직접 생의 충동을 느끼게 해왔다.
 
최근에 옹프레는 용감하게 주장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철학의 임무는 저항하는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도 철학은 반항과 거역을 요구한다. 그 어느 때보다도 철학은 불복종이라는 미덕을 구현해야 한다.”(<견유주의>, Grasset, 1990) 그런데 그의 생기론은 앙리 베르그송의 ‘생명의 도약’을 부분적으로 차용한 것이다. 샤를 페기는 베르그송을 영적 생명을 세계에 재도입한 철학자로 평가한 바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코스모스>의 저자 옹프레가 발전시키고 있는 것은 놀랍게도 불변의, 제일의, 유일하게 진리를 담고 있는, 그래서 그것에 복종하는 것이 합당한 질서라는 생각과 합류한다.
본능과 집단무의식에의 열광, 인간의 동물성에 부여한 우위, ‘문명’에 대한 혐오, 생명력 예찬, 조락에 대한 강박, 전통으로의 회귀를 통한 황금시대의 재발견 등 이성을 희생시킨 수많은 개념들에서는 때로 무척 정확하게 오래전의 감성의 메아리를 들을 수 있다.
모리스 바레스(1862~1923)는 “창조적 에너지, 세계의 활력, 무의식”(<베레니스의 정원>), 서민들의 직관, 그리고 민족주의를 찬양했던 인물이다. 독일 보수혁명에 근접해 있는 루트비히 클라게스(Ludwig Klages, 1872~1956)는 최초의 위대한 생태학 선언문 가운데 하나가 된 <인간과 대지>(1913)라는 저서에서 우주는 살아있으며, 진보는 “충족되지 않은 살해욕망”이고,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 구원이라고 말했다. 독일의 오스발트 슈펭글러(1880~1936)는 질서와 의무, 그리고 ‘보수적’ 사회주의에 천착하며 <서구의 몰락>(1918)에서 근대성의 헛됨을 한탄하고 과거의 고찰에서 집단적 구원을 찾아낼 것을 주장했다. 엄격히 말하면 모두 반동적 경향을 대표하는 이런 몇 가지 예들은, 1930년대까지 절정을 이루었던 사상(사람들이 감히 ‘뉴에이지 사상’이라 부르지 못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사상의 최신 변형이었다)의 열기를 모두 보여주지는 못한다. 모든 주관성을 폐기하면서 생명력에 직접적으로 접근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일은 신비주의적 환상의 일부다. 그것을 이론화하는 것은 해방보다 비합리적인 것을 선호하는 위험한 길로 접어드는 것이다.
옹프레는 <르 푸엥>(2005년 3월 9일)을 통해 “더 이상 에티켓에 휘둘리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오늘날에 이런 태도는 거의 창의성의 표시로 여겨지지 않는다. 반대로 이것은 자신의 독자들에게 보내는 충고 같은 것이다. 길들여지지 않은 거친 무신론자였던 그는 이제 모호하고 막연한 영성에 완전히 젖어들었다. 합리주의자이고자 했던 그가 고요한 직관을 찬양한다. 절대자유주의자임을 자칭했던 그가 전통에 경의를 표하고 있다.
 
 
<미셸 옹프레는 누구인가>
 
 
프랑스의 철학자. 1959년 노르망디 샹부아에서 태어나, 1983년 캉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뒤 20년 동안 고등학교 철학교사로 근무했다. 이후 2002년 캉에 누구나 수강할 수 있는 자유대학 UP(Universite Populaire)를 설립한 뒤 대중에게 철학을 가르치고 있다. 1989년 <철학자들의 위장>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철학사, 쾌락주의 이론, 여행, 미학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50권이 넘는 책을 펴냈다. UP에서의 강의 노트에 해당되는 <반(反)철학사>에서는 인류 지성사의 주류에서 소외되어온 철학 사상들, 그중에서도 쾌락주의와 급진주의를 재조명했다. 감각기계인 육체와의 합일을 강조하며 미학에 바탕을 둔 새로운 윤리학을 제안하는 그는 반역의 철학자이고, 열렬한 니체주의자이며, 정신분석 없는 철학은 존재할 수 없다고 믿는 프로이트-마르크스주의자다. 국내에 출간된 그의 대표적인 저서로는 <철학자의 여행법>(세상의모든길들), <원숭이는 왜 철학교사가 될 수 없을까>(모티브북), <무신학의 탄생>(모티브북) 등이 있다.
 
글·에블린 피에예Evelyne Pieiller
 
번역·김계영
파리4대학 불문학박사.
 
(1) <르 푸엥(Le Point)>은 친절하게도 인터뷰, 비디오, 논평 등을 모아 온라인 문서를 만들기까지 했다. ‘미셸 옹프레, 프랑스를 뒤흔드는 철학자,’ www.lepoint.fr.
(2) 미셸 옹프레, <코스모스, 유물론적 존재론>, 플라마리옹, 파리, 566쪽, 22.9유로, 3부작 중 1부, 2부 <데카당스>, 3부 <지혜> 출간 예정.
(3) <르 푸엥>, 2015년 2월 25일.
(4) 마뉘엘 발, Europe 1-i-Télé, <르몽드>, 2015년 3월 8일.
(5) 미셸 옹프레, <코스모스>, 앞의 책, 이후 모든 인용문은 따로 언급된 경우를 제외하고 이 책에서 발췌한 것이다.
(6) 프란츠 올리비에 지스베르의 사회로 니스 오페라극장에서 열린 토론, 2015년 6월 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