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룬디공화국, 또 다른 위기의 시작

2015-07-02     피에르 베네티

 

 평화협정 위반과 대규모 시위 확산, 십 만이 넘는 주민들의 집단 이주, 군부의 쿠데타 시도로 부룬디가 위기를 겪고 있다. 이 모든 것이 한 달도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일어났다. 이미 긴 내전으로 상처가 깊은 부룬디 공화국에서 연임을 시도하려는 피에르 은쿠룬지자 대통령에 의해 또다시 정치와 사회의 균형이 위협받고 있다.

시위가 처음 시작된 부룬디 수도 부줌부라의 외곽에 “우리는 민족 간 문제에서 벗어나 어느 정도 평화를 지키고 있었다!”는 시위대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피에르 은쿠룬지자 대통령이 재선을 위해 대선에 출마하려 하자 부룬디 청년들의 분노는 폭발했다. 이들은 1993년부터 2008년까지 3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가고 부룬디를 황폐화시킨 내전 때나 그 이후에 태어난 세대로, 2000년 8월 28일 정부와 후투족 반군들(1) 간에 체결된 아루샤(탄자니아) 협정 덕분에 내전이 종식되고 평화를 되찾았다고 믿고 있었다. 아루샤 협정에 따르면 보통선거나 직접선거로 당선된 국가원수는 최대 2번만 연임이 가능하다.(2)
하지만 이번 위기는 단순히 선거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이웃국가 르완다가 1994년 투치족 대학살 이후 모든 공식문서에서 민족 관련 언급을 삭제한 것과 달리, 부룬디 헌법은 국회 내 후투족과 투치족과 트와족의 의원할당제를 명시하고 있다.(3) 또한 이 원칙은 아루샤 협정에 따라 행정부와 군에도 똑같이 적용된다.(4) 이 같은 ‘아루샤 합의’가 지속되자 후투족 출신의 전후 첫 대통령인 피에르 은쿠룬지자의 운신의 폭이 좁아지고 그의 일당 체제에 긴장감이 증폭했다. 1963년 부룬디 북부 은고지에서 태어난 은쿠룬지자 대통령은 2005년 대통령으로 뽑힌 뒤 2010년에 재선됐다. 그의 3번째 대권 도전이 자신의 권력욕을 채우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두 번의 임기 동안 잇따라 터진 각종 스캔들(부정부패, 반대파 암살)에 연루된 측근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인지 그 진위를 파악할 수는 없다.
‘페테로’라고도 불리는 은쿠룬지자 대통령이 걸어온 여정은 부룬디 정치와 사회가 겪은 역사를 여실히 보여준다. 부룬디는 지난 1962년 벨기에로부터 독립한 뒤 유일 정당인 국가진보연합의 깃발 아래 30년간 투치족의 지배를 받았다. 당시 국회의원을 지낸 은쿠룬지자의 아버지는 1972년 민족 간 분쟁으로 살해되고, 투치족이 이끄는 부룬디군은 후투족의 쿠데타 시도를 진압하고 이 과정에서 후투족의 지도층을 대대적으로 제거했다. 후투족 출신의 부룬디 최초 민선 대통령인 멜치오르 은다다예가 1993년에 암살된 이후 시작된 내전에서 은쿠룬지자는 또 한 번 가족 2명을 잃었다. 학살과 주민 강제이주가 자행되었고 후투족이 이끄는 무장단체와 부룬디군 간의 전투가 ‘주기적’으로 일어났다. 당시 스포츠학과 교수였던 은쿠룬지자는 은다다예가 속했던 부룬디민주전선을 기반으로 출범한 민주방위국민평의회에 가담했다.
아루샤 평화협정이 체결된 이후 은쿠룬지자는 반군의 새로운 분파인 민주방위국민평의회-민주방위군(CNDD-FDD)의 수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런데 CNDD-FDD는 2003년에 이르러서야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중재 하에 무장해제를 선언했다. 이로써 당시 평화교섭에 참여하지 않았던 현 정권의 정치세력이 이른바 ‘아루샤 정신’을 업신여기는 행태를 보이고 있는 걸 설명할 수 있다.
 
대통령의 연임 시도로 분쟁 발생
 
정부의 표현에 의하면 ‘폭동’이 일어난 거리에는 올해 2월에 축출당한 부르키나파소의 블레즈 콩파오레 전 대통령(5)에 은쿠룬지자 대통령을 비유한 전단지가 나뒹굴었다. 끈질긴 탄압에도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여러 민영 방송의 인기와 소셜네트워크의 비약적인 발전에 힘입어 정치와 사회에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세대가 등장한 것이다. 이들은 외국계 출자자들과 비정부기구들(NGO)의 적극적인 지원 속에서도 소수계층만이 재산을 축적하는 일이 계속되자 현 정권의 권위주의와 족벌주의에 대한 불만을 내비치기 시작했다. 또한 이웃 국가 르완다가 경제 성장의 성과를 이룬 것에 비해 극심한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도 부룬디가 불안한 정세를 겪는 데 한몫을 했다.(6)
수도 부줌부라는 시위의 열기가 뜨거웠지만 은쿠룬지자 대통령은 CNDD-FDD 청년단 ‘임보네라쿠레’(‘멀리 보는 자들’)과 초등학교 무상교육 및 의료비 면제 혜택을 베풀었던 농촌 주민들의 지지에 기대를 걸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벨기에나 네덜란드와 달리 프랑스는 여전히 부룬디와 안보군 양성을 위한 협력정책을 유지했다. 아루샤 협약 체결을 주도했던 유엔, 미국, 남아프리카공화국도 은쿠룬지자 대통령의 결정으로 촉발된 위기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는 것으로 그쳤다.
부룬디 정세에 대해 ‘민족주의’적인 관점으로만 접근한다면 분쟁의 원인을 찾을 수 없다. CNDD-FDD 회의 이튿날인 4월 26일에 내전기간 동안 투치족의 거리로 여겨졌던 무사가와 니아카비가 같은 외곽 지역에서 시위가 시작되었는데, 여기에는 정부의 거리 시위 금지에도 불구하고 거리로 나온 후투족도 많았다. 게다가 여기저기서 모아 쌓은 바리케이드 너머로 도시 출신의 중산층 젊은이들이 주로 눈에 띄었고 최근에는 시골 출신의 청년들도 부쩍 늘었다. 제일 마지막으로 2008년에 무장해제를 선언했던 후투족 반군인 민족해방군(FNL)이 재빨리 반군에 합류했지만 가시적인 활동을 전개하지는 않았다. 결국 CNDD-FDD 내의 고데프로이드 니욤바레 후투족 장관이 5월 13일 당의 고위 군간부들의 지지를 받아 쿠데타를 주모했다.
따라서 부룬디의 폭력사태는 거리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평화협정의 명목 하에 옛 반군들을 재교육한 옛 정규군이 일으킨 것도 아니다. 바로 정권 내부에서 비롯된 것이다. 정권 내부에서도 전제주의는 더 이상 용납되지 않았다. 그러나 실패한 쿠데타에서, 은쿠룬지자 대통령이 1년 전부터 내부적으로 ‘정리’해왔던 군 참모부와 CNDD-FDD의 핵심층으로부터 어느 정도 암묵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당장은 선거 자체가 무효화되지 않았다. 대통령도 선거 운동을 재개했다. 하지만 4월 초부터 수십만의 난민들이 르완다, 탄자니아, 콩고민주공화국으로 망명길에 오른 마당에 선거를 수월하게 치르기는 틀림없이 힘들 것이다. 독립 언론사가 정부와 시위대에 의해 훼손된 상황에서, 아무도 모르게 부룬디가 또다시 정치적 폭력에 휘둘릴 가능성이 크다.
 
 
글·피에르 베네티Pierre Benetti
 
번역·배영미
이화여대 통번역대학원 졸.
 
(1) 2003년에 대표적인 후투족 무장단체는 피에르 은쿠룬지자가 이끄는 민주방위국민평의회-민주방위군(CNDD-FDD)과 아가톤 르와사가 이끄는 민족해방군(FNL)이었다. 무장해제를 하지 않았던 단체들과는 2008년에 또 다른 협정이 체결되었다.
(2) 2005년에 간접선거로 선출된 은쿠룬지자 대통령은 재출마할 수 있다.
(3) 콜레트 브랙크만, ‘르완다-부룬디, 닮아가는 이웃사촌’,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0년 5월호 참조.
(4) 이와 관련된 조사가 이루어진 적은 전혀 없고 집계된 수치(후투족 85%, 투치족 14%, 트와족 1%)는 식민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까지 비슷하게 유지되고 있을 것이다.
(5) 다비드 코멜라, ‘부르키나파소의 청년단체 ‘시민 빗자루’’,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5년 4월호 참조.
(6) 유엔개발계획이 평가하는 인간개발지수 순위에서 부룬디는 총 187개국 가운데 180위, 르완다는 150위를 차지했다.
 
<부룬디, 불안의 반세기 역사>
 
● 1962년 7월 1일 음완부차 4세가 1919년부터 지속된 벨기에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나 부룬디의 독립을 쟁취했다.
● 1966년 피에르 부요야(투치족)가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군주제를 종식시키고 미콤베로 대령이 대통령에 취임했다.
● 1972년 군부가 후투족에 대한 대학살을 자행했다.
● 1993년 6월 후투족의 멜치오르 은다다예가 첫 민주주의 선거를 통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 1993년 10월 21일 투치군에 의해 은다다예 대통령이 암살되었다. 시프리엔 은타리아미라(후투족)가 임시 대통령직을 맡게 되었다. 내전이 시작되었다.
● 1994년 4월 6일 은타리아미라 대통령과 주베날 하비아리마나 르완다 대통령이 함께 탄 비행기가 격추돼 사망했다. 르완다 대학살이 시작되었다.
● 1996년 7월 피에르 부요야가 군부의 지지를 받아 재집권했다.
● 2000년 8월 28일 민주방위군(FDD)와 민족해방군(FNL)은 제외된 채 아루샤 평화협정이 체결되었다. 협정에 후투족과 투치족 간에 권력 분배가 명시되었다.
● 2003년 11월 16일 피에르 은쿠룬지자가 이끄는 민주방위국민평의회-민주방위군(CNDD-FDD)과 정부 간에 평화협정이 체결되었다.
● 2005년 은쿠룬지자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 2006년 9월 7일 팔리페후투-FNL과 정전협정을 체결했다.
● 2010년 은쿠룬지자 대통령이 연임했다.
● 2015년 4월 25일 은쿠룬지자 대통령이 6월 26일 대선에 당대표 출마를 발표했다.
● 2015년 4월 27일 은쿠룬지자의 출마를 반대하는 시위가 시작되었다.
● 2015년 5월 13일 고데프로이드 니욤바레 전 정보국장이 쿠데타를 주모했다. 동아프리카 국가 정상들과의 긴급 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탄자니아로 출국한 은쿠룬지자가 대통령직에서 해임되고 정부는 해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