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대에 오른 우크라이나의 위기

2015-07-02     장 피에르 슈벤느망

 

 서방 각국 정상들은 우크라이나 사태를 이유로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2차 세계대전 승전 7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이 글을 기고한 장-피에르 슈벤느망 전 장관은 2014년 5월 5일 프랑스 대통령의 요청으로 블라드미르 푸틴 대통령을 만나 갈등 해결 방안을 모색했다. 슈벤느망은 본지에 서방이 왜 러시아를 불신하는지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은 무엇인지 적었다.

 1991년 말, 보리스 옐친과 우크라이나와 벨로루시 대통령의 주도로 소비에트 연방이 평화적으로 해체되었다. 당시 대통령이던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반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엄청난 갈등의 가능성을 안고 있었다. 소련 해체로 2,500만 명의 러시아인들이 러시아 국경 밖에서 살아야 했고(1989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러시아의 인구는 1억4,700만 명이고 구소련의 인구는 2억 8,600만 명이었다) 러시아 내에도 다양한 민족들이 살았다. 게다가 변화무쌍한 국경선은 신생 독립국가들과 소수민족(나고르노 카라바흐, 트란스니스트리아, 남오세티아, 아브카지아, 아자리야 등) 사이에 갈등을 낳았다.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된 이 독립국가들은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나라들이다. 우크라이나도 마찬가지다. 우크라이나가 독립국이었던 적은 역사상 딱 한번, 차르 군대의 붕괴를 틈탄 1917년부터 1920년까지 3년 동안 뿐이었다.
1991년 12월 25일 탄생한 지금의 우크라이나는 다양한 민족과 문화로 구성되어 있다. 서부 지역은 양차 세계대전 사이에 폴란드에 속해 있었고 동부는 러시아정교를 믿고 러시아 말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다. 흑해 연안은 옛날부터 오스만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그리고 크림반도는 1954년 니키타 후르시초프 서기장이 일방적으로 우크라이나에 양도하기 전까지 한 번도 우크라이나 땅인 적이 없었다. 우크라이나가 국가가 된 것도 채 25년도 안된 최근 일이다. 1990년대 국영산업을 민영화하는 과정에서 올리가르흐라 불리는 산업재벌이 등장했고 이들이 국가를 통치하고 있다(국가가 이들을 통치하는 것이 아니다!). 국가부채가 염려스러울 정도로, 우크라이나의 경제 상황은 심각하다. 그래서 우크라이나의 미래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하든 중립을 지키든 유럽과 세계에서 재편되는 힘의 역학관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이미 1998년 저서에서 러시아가 다시 강대국이 되지 못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우크라이나를 러시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라고 적었다.(1)
현 우크라이나 사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역사적 사건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오렌지 혁명’(2004) 때와 유럽이 처음으로 우크라이나를 북대서양조약 기구에 가입시키려고 시도했을 때(2008) 이미 우크라이나 사태는 예견된 것이었다. 유럽연합(EU)이 ‘동방 파트너십’(2009) 정책을 시작하면서 우크라이나와도 EU가입 협정을 위한 협상을 시작했다면 오늘날의 우크라이나 위기를 피할 수도 있었다. 물론 복잡하게 얽혀 있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경제를 고려해야 했겠지만(2), ‘리스본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자유로운 왕래가 가능한 공간의 창설을 목표로 한 2003년 EU와 러시아가 맺은 전략적 파트너십과 유사한 협정이 체결되었더라면 EU는 NATO가 동쪽으로 확장되는 것을 원하는 국가들에게 이용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대신 EU는 유럽과 러시아 중 하나를 선택하라며 우크라이나를 난감한 상황에 처하게 했다. 빅토르 야누코비치 당시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망설였다. 러시아의 제안은 유럽의 제안보다 경제적으로 훨씬 더 매력적이었다.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2013년 11월 29일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에서 서명하기로 한 EU가입 협정 조인을 뒤로 미뤘다.
스테판 훌 우크라이나 담당 유럽집행위원이 마누엘 바로소 당시 집행위원장에게 지침을 받았는지 그리고 유럽미사일 위기(1982-1987)(3) 이후 가장 심각한 지정학적 위기의 씨앗이 될 소지가 있는 문제를 결정하는 데 유럽이사회가 관여하지는 않았는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푸틴 대통령은 EU의 지도부(마누엘 바로소 집행위원장과 헤르만 판 롬파위 상임의장)가 2014년 1월 브뤼셀에서 우크라이나가 주권국가라는 구실을 들어 EU 가입 협정의 내용을 러시아와 논의하는 것을 거부했다고 밝혔다.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EU가입 협정의 협상을 중단하자 마이단(독립) 광장에서 ‘친유럽’ 시위가 시작됐다. 그리고 2014년 2월 22일,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축출되었다. 많은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유럽에 기대를 거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유럽집행위원회가 유럽의 기준과 규범을 비유럽연합 국가들에게 요구할 수 있는 것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많은 유럽 정치인들이 마이단 광장을 찾아 시위자들을 격려했다. 미국의 고위 정치가들도 볼 수 있었다.(4) 비정부기구와 언론은 마이단 광장의 시위를 세상에 적극적으로 알렸다. 그런데 기본적으로 극우조직이 질서유지를 담당한 집회와 시위에 대해 지지를 표명한 것이 EU 및 NATO의 입장과 미국 및 미국 기관의 입장 사이에 혼란을 초래하지는 않았을까? 민주주의는 다양한 형태로 ‘수출’될 수 있다.
야누코비치 대통령과 야권이 2014년 2월 21일 정국 위기 타협안에 합의했으나, 하루만인 22일 우크라이나 의회는 대통령의 해임과 연내 조기 대선을 선언했다. 또한 의회는 국회의장과 내무부장관 대행을 야당 의원들에 맡기는 한편, 대통령의 대표적 정적인 율리아 티모셴코 전 총리를 석방했다. 러시아는 이 사태를 쿠데타로 보았다. 크림반도가 1954년 이전에는 러시아 땅이었지만 주민투표 방식으로 합병이 결정되었다고 해도 러시아가 과도하게 반응했다는 것은 반론의 여지가 없다. 크림반도에 대한 러시아의 합병은 러시아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주장한 독립국의 영토존중 원칙에도 반하는 것이다. 러시아는 코소보가 유고슬라비아에서 분리독립을 할 때도, 이를 반대하며 자신의 원칙을 어겼다. 크림반도의 경우는 무엇보다도 흑해가 러시아의 전략적 요충지라는 점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리고 우크라이나의 새 정부가 크림반도 남부의 군항 세바스토폴을 러시아에 2042년까지 임대한 약속을 깨지는 않을까 두려웠을 것이다
우크라이나 위기는 결과적으로 우연한 사고였다. 크림반도의 합병은 계획에 없었다. 푸틴 대통령은 2월 말, 러시아의 영광을 과시하기 위해 개최한 소치 동계올림픽 폐막을 선언하고 있었다. 그리고 역시 EU가 계획하지 않았던 사건에 과도하게 반응했다. 물론 유럽이 경솔하게 사건을 부추긴 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외부에서 너무나 많이 쏟아져 들어오는 제안에 EU가 정신이 없었던 것은 분명하다. 오늘날 EU에 중요한 질문이 던져졌다. 과연 EU는 상황을 통제할 능력이 있는가?
푸틴 대통령은 크림반도의 합병을 구실로 미국이 제재조치를 취할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 미국은 먼저 제한적인 조치를 취하고(2014년 7월) 나중에 훨씬 더 강력한 추가조치를(9월) 발표했다. 2014년 5월 초,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와의 갈등을 줄이려는 노력을 하겠다고 밝혔다. 친러시아 지역에는 문제를 우크라이나 내에서 해결하라고 격려했다. 5월 10일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베를린에서 우크라이나 헌법에 지방분권을 명시할 것을 언급했다. 5월 25일 페트로 포로셴코 대통령이 선출되었고 러시아는 즉시 신임 대통령을 인정했다. 그리고 6월 6일 ‘노르망디 포맷(우크라이나-러시아-독일-프랑스)’ 정상회의가 계획되었다. 위기가 평화적으로 해결되는 듯했다.
하지만 여름에 일이 틀어지기 시작했다. 우크라이나가 동쪽 돈바스 지역에서 독립을 선포한 공화국들(도네츠크 인민공화국, 루간스트 인민공화국)에 대해 ‘대테러 군사작전’을 선포했다. 하지만 작전은 갑자기 끝났다. 마이단시위에 참가했던 ‘의용군’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우크라이나 군대가 힘을 쓰지 못했기 때문이다. 9월 5일 민스크 I 협약으로 휴전이 선포되었다. 6일 후인 9월 11일 미국과 EU는 휴전을 보장받기 위해 강력한 제재조치를 시작했다. 미국의 제재조치에 놀란 은행들 때문에 유럽과 러시아의 무역은 거의 마비상태에 이르렀고 러시아는 서방의 제재조치에 식품분야의 맞대응 제재를 결정하고 교역과 산업협력을 다양화하기 위해 서구유럽에서 ‘개발도상국’ 특히 중국으로 눈을 돌렸다.
하지만 원유가가 폭락했다. 루블화는 2014년 말, 달러 당 35루블에서 70루블까지 뛰었다. 휴전협정은 후속 조치 부재로 답보상태였고 우크라이나는 두 번째 군사공격을 감행했다. 이번에도 첫 번째 때처럼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노르망디 포맷 정상회담에서 올랑드 대통령의 주도로 모인 정상들의 발의와 유럽 안보협력기구(OSCE)의 개입 덕분에 ‘민스크II’라는 새로운 협약이 2015년 2월 12일 체결된다.
장애물은 사라졌다. 서방의 제제조치가 해제되었다. 민스크 II 협약의 군사분야는 그런대로 지켜졌지만 정치분야는 삐걱거렸다. 우크라이나 국회 라다에서 선거법 투표, 돈바스 지방선거 실시, 헌법개정, 지방분권법안 통과, 새로운 선거 실시, 마지막으로 러시아로부터 국경 통제권 환수 등 분명한 일정이 정해졌지만 3월 17일 라다는 ‘군대 철수’를 선결조건으로 내세우며 일정을 중지시키는 법안을 채택했다. 우크라이나 정부가 민스크 협약 실행을 중지시킨 것은 실제는 우크라이나 사태를 ‘그대로 동결시키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다시 제재조치를 고려해야 하는 악순환이 시작되고 말았다. 제재조치 재게는 원칙적으로 만장일치로 결정되어야 하지만 실제는 ‘합의제’ 적용을 받는다. 이미 메르켈 총리는 6월 말에 유럽의 제재조치가 재개될 것이라고 4월 28일 발표했다.
이 전쟁에는 이름이 없다. 2000년대 초반 계획했던 대로 유럽과 러시아의 협력을 원하는 세력과 러시아에 대해 억지 나아가 억제 정책을 써야한다고 주장하는 세력, 즉 새로운 냉전을 원하는 세력이 조용하게 싸움을 벌이고 있다. 미국과 러시아가 충돌하는 싸움에 우크라이나가 대리전을 치르고 있다. 미국과 미국의 연합국은 우크라이나 군대와 ‘의용군’을 지원하고 동부 친러시아 주민들과 인도적 차원이라고 주장하는 러시아는 ‘분리주의자들’이라고 불리는 민병대를 지원하고 있다. 이 싸움이 계속된다면 우크라이나는 유럽연합과 러시아 사이에 장기적인 불화의 씨가 될 것이다. 미국이 사상적으로 무장한 홍보전을 통해 러시아를 고립시키고 동시에 유럽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신냉전주의자들은 러시아는 근본적으로 보편적인 가치에 반대하고 소비에트 연방을 다시 재건하려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오늘의 러시아를 아는 사람들은 이 주장이 지나치고 왜곡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푸틴 대통령은 1990년대에 국민총생산이 반토막 난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웠고 국가가 해체되는 것을 막았다. 이것이 그가 국민들로부터 인기를 얻는 이유이다. 푸틴의 정책은 제국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민족주의적인 것이고 러시아를 현대화하는 것이다. 그리고 러시아도 다른 모든 나라들처럼 자국 안보에 신경을 쓴다.
과거의 공포를 다시 환기시킬 수도 있다. 하지만 푸틴을 국가로 생각하는 것은 고대 도시 피레아스를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6)만큼 잘못된 것이다. 러시아 사회는 변모하고 있다. 중산층이 두터워지고 있고 중산층은 2013년 푸틴 대통령이 다시 권력을 잡는 것을 반대했지만 오늘날에는 그의 지지자가 되었다.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조차도 1991년부터 서방이 유럽의 위대한 일원인 러시아를 실패한 나라로 부당하게 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7) 그리고 러시아가 독일 나치에 대항해 가장 큰 희생을 치렀다는 것 역시 지워졌다. 오늘날 우리는 역사 새로 쓰기의 현장을 목도하고 있다. 공산주의가 반공산주의보다 절대 더 오래 살아남아서는 안 될 것처럼 역사가 새로이 쓰여지고 있다.
두 가지의 경제체재와 두 가지의 사상의 대립이 냉전의 물질적 기반이었다. 하지만 이는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러시아 자본주의는 물론 고유의 특징이 있을 테지만 어쨌든 자본주의다. 푸틴 대통령이 추구하는 보수적인 가치는 70년의 공산주의 역사의 상처를 아물게 하기 위한 것이다. 어쨌든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현재 우크라이나 사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다극화된 세계에서 유럽이 독립적인 주체로서 능력을 보여주느냐 아니면 포기하고 미국에 오랫동안 종속될 것이냐를 확인하는 것이다. 언론의 반러시아 감정은 1990-91년 걸프전 때 보았던 여론몰이와 유사하다. 하지만 오늘의 러시아 현실에 무지하기 때문에 여론을 조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상적 흑백논리와 정보조작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러시아의 회복력은 대단하다. 여기서 프랑스 역할은 자신이 발의한 노르망디 포맷을 통해 유럽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다. 우리의 외교정책이 극단주의나 수정주의 조류에 발목이 잡히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지난 4월 9일 우크라이나 국회가 통과시킨 ‘과거사법(Memory law)’이 규정한 것처럼 공산주의와 나치주의를 동일한 선상에 두는 것은 반대한다. 보수적인 메르켈 총리의 독일은 우크라이나 사태에서 지나치게 미국과 같은 노선을 견지하고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와의 관계에서 돌파구를 찾기 위해 전통적인 대러시아 정책인 ‘동방정책’을 잠시 포기하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우크라이나에 진출한 독일 기업은 2010년 1,800개에 이른다. 프랑스는 50개에 불과하다. 우크라이나는 저렴한 노동력의 ‘중앙유럽’의 범위를 확장시킬 수 있을 것이고 중앙 및 동유럽의 임금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독일 산업에 비교우위를 제공할 수 있다. 아울러 독일은 미국 국가안전보장국(NSA)이 독일 연방정보부(BND)(8)를 이용한 것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단순한 미국의 정책 전달자가 아니라는 것을 유럽인들에게 설득해야 한다. ‘노르망디 포맷’은 우크라이나가 민스크 II 협을 실행에 옮기고 협약의 정치분야를 반대하지 못하도록 하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 유럽은 재정적 지렛대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
이제 ‘유럽의 유럽’이 나타나야 할 때가 되었다. 이 유럽은 러시아를 ‘서방’ 밖으로 밀어내지 않고 서로 받아들일 수 있고 합리적인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새로운 게임의 규칙을 러시아와 함께 다시 정하는 것이 진정한 국익을 위하는 것이라고 미국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글·장-피에르 슈벤느망 Jean-Pierre Chevènement
미테랑 정부 시절엔 국방부장관, 조스팽 정권시절엔 내무장관 등을 지낸 그는 뚜렷한 소신과 자신감, 그리고 민족적인 정서를 자극하는 거침없는 발언으로 대중적 인기가 높다. 반미주의자로 유명한 그는 2000년 내무장관 재직 시 코르시카섬 자치 확대 문제를 둘러싸고 조스팽 총리와 이견을 빚어 사임하기도 했다. 앞서 1991년 걸프전쟁 당시 국방부장관으로 재직하다 프랑수아 미테랑대통령이 미국의 이라크 공격을 지지하자 반발, 사임하고 사회당을 떠났다. 앞서 1983년 미테랑 정부에서 산업기술장관이었던 그는 자신의 경제정책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미련없이 사표를 내기도 했다.
 
번역·임명주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1) Zbigniew Brzezinski, <거대한 체스판(Le Grand Echiquier)>, Fayard-Pluriel, Paris, 1997.
(2) 읽어보기, Julien Vercueil, ‘러시아와 IMF 사이에서 계산 복잡한 우크라이나(Aux racines économiques du conflit ukrainien)’,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4. 7.
(3) 1977년부터 소련과 중앙유럽에 SS20 중거리 핵미사일이 배치되자 북대서양조약기구는 신형 중거리 미사일 (퍼싱II와 크루즈)을 서유럽에 배치할 계획을 세우고 협상에 들어갔다. 하지만 협상이 결렬되고 1983년부터 유로미사일이 배치되었다. 로널드 레이건과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1987년 말 중거리 핵무기 협정을 채결하고 배치된 미사일을 해체시켰다.
(4) 빅토리아 뉴런드 유럽. 유라시아 담당 미 국무부 차관, 상원의원 존 매케인, 귀도 베스터벨레 독일 외무부장관.
(5) 읽어보기, Igor Delanoë, ‘평화와 전쟁 사이에 선 우크라이나(L’Ukraine entre guerre et paix)’,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5. 3.
(6) 라퐁텐의 우화를 예로 든 것에 독자들의 이해를 구한다. 라퐁텐의 우화는 지금도 우리가 사는 세상을 풍자하고 있다…
(7) 베를린 연설, 2014. 11. 9.
(8) Bundesnachrichtendienst, 독일연방정보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