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들루프, 설탕공장과 노예제도의 기억

2015-07-02     자크 드니
   
▲ 엘렌 발렌주엘라, 옛 설탕공장 다르부시에의 폐허. 지금 이곳에는 MACTe 기념관이 들어서 있다.

 

 카리브제도 과들루프의 푸앙타피트르시(市) 카레나주 지구에는 과거 대규모 설탕공장 자리가 있다. 오는 7월 7일, 바로 이곳에 카리브 지역 노예기념관(MACTe)이 문을 열 예정이다. 돌을 쌓아올린 공장 담벼락은 사라졌지만 이 장소, 그리고 이 지역 연장자들의 증언은 어떻게 과들루프의 산업개발이 노예제도의 연장선상에서 진행되기에 이르렀는지를 상기시키고 있다.

 

 과들루프의 푸앙타피트르시에는 만을 따라 총 길이 260미터에 달하는 웅장한 건축물이 길게 들어서 있다. 은색과 검은색으로 뒤덮인 외벽을 가로지르는 중앙 아치구조 너머로는 전시관이 연결되어 있다. 과들루프 출신 건축가 파스칼 베르틀로는 자신이 지은 이 건축물에 대해 “검은 함을 둘러싼 은색 뿌리들”이라고 요약하여 묘사하기도 했다. 이곳, 즉 카리브 지역 노예기념관 프로젝트는 유네스코에 의해 시작된 ‘노예의 길(slave route)’ 사업에 한 획을 긋겠다는 포부로 시작되었다. 노예기념관을 처음 구상한 것은 국제흑인위원회(CIPN)로, 해당 위원회의 창립자이자 과거 과들루프의 독립운동파 당원이기도 했던 뤼크 레네트는 지난 5월 10일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이 참석한 노예기념관 개관식에 불참해 프랑스의 영향력에 대한 거부 의사를 표명했다.(1)
베르틀로는 “검은 함이라는 것은 역사와 사실을 의미한다”면서 “과거 이곳에 있던 공장의 오랜 돌담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폐허가 된 공장부지 위로 생명이 태어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서구적’인 도서관이 아닌, 유기적인 뿌리줄기 구조를 통해 생명력이 있는 건축물을 짓고자 했다.” 처음 고려되었던 레제 공항 대신에 수십 헥타르에 달하는 다르부시에르 공장 터를 노예기념관 부지로 선정한 것은 굉장히 상징적이면서도 시(詩)적이고 정치적인 선택이었다. 3년 전만 해도 일부 벽면이 나무뿌리들 아래에 묻힌 채로 남아 이곳에 카리브 지역 전체를 통틀어 가장 거대한 설탕공장이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었다. 공장 터 내에는 풀과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 있었지만, 골격만 남은 화물차, 귀신이라도 나올듯한 기관차 레일, 텅 비어버린 사탕수수즙 저장고 등을 통해 옛 모습을 상상해볼 수가 있었다. 카레나주 지구 한복판에 위치한 이 설탕공장은 직원 수천여 명 규모의 공장으로, 1870년부터 1980년까지 한 세기가 조금 넘는 기간 동안 푸앙타피트르뿐 아니라 과들루프 전 지역에 걸쳐 경제적으로 허파 역할을 해왔다.
 
경제성장의 중심축, 사회문화의 도가니
 
다르부시에르 설탕공장의 역사는 1763년 이래로 과들루프의 경제적인 수도 자리를 지켜온 푸앙타피트르시의 역사 속에서 계속해서 메아리치고 있다. 푸앙타피트르는 여러 무역가들의 등장으로 급격하게 발전했다. 프랑스 몽펠리에 출신 무역가인 장 다르부시에르 역시 그들 중 한 명으로, 그는 푸앙타피트르에 와서는 도시 외곽에 있는 언덕을 구입해 자신의 이름을 붙였다. 이후 이곳은 소유주가 바뀌어가며 벌목지로 쓰이다가, 과들루프 출신 사업가인 에르네 수크와 파리 출신인 장 프랑수아 카일이 손을 잡고 설탕공장을 설립하면서 19세기 설탕산업을 꽃피우기 시작했다.
사탕수수 재배는 많은 일손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1848년 노예제도가 완전히 철폐되면서 오랜 세월동안 무보수 노동력이었던 노예들이 자유를 얻어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떠났고, 이에 농장 소유주들은 카포베르데 제도와 카리브 제도의 다른 지역에서 노동자들을 대거 데려왔다. 주로 타밀(남인도)민족으로 구성된 인도인 수천 명이 과들루프로 건너왔고, 초기에는 필요한 설비를 가동하기 위해 콩고 출신 노예들을 10년짜리 계약으로 다시 사들이기도 했다.
노예기념관에서 문화․과학 기획을 담당하고 있는 티에리 르탕은 “다르부시에르는 수많은 노동력이 모이는 곳이었는데, 어느 순간 전체 노동력 중 인도인 비율이 70%를 넘어서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또한 중국인 수백 명에 이어 일본인 450여 명이 들어왔고, 인도차이나의 수많은 지도층 인사들이 정권 붕괴 이후 정치 난민이 되면서 계약노동, 즉 강제노역에 동원되기도 했다. 결국 카레나주 지구는 마치 모자이크처럼 다양한 인종이 뒤섞인 곳이 되었다. 르탕은 이 공장에 대해 “크레올(유럽계와 현지인의 혼혈) 사회의 특징 중 하나인 차별 문제를 여실히 보여주는 일종의 투쟁 현장이었다”라고 표현했다. 실제로 이곳에는 가장 어두운 색부터 가장 밝은 색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피부색의 사람들이 모여 노예제도와 동일한 서열관계를 이루고 있었다. 실제로 생도맹그(현재의 아이티)에서는 흑인의 피부색을 미묘한 색조 차이에 따라 스물네 가지 등급으로 구분했을 정도였다.
카리브제도에 자본주의가 싹트기 시작할 무렵, 프랑스 식민지 국가들 안에서는 주인과 노예가 가까이 거주하며 사탕수수를 경작하고 설탕을 생산하는 대규모 농장 형태인 ‘아비타시옹(habitation)’의 비중이 점차 커졌고, 보다 효율적인 공장시스템의 정착으로 생산활동은 더욱 빠르게 발전하기 시작했다. 1880년대 과들루프에는 마르티니크와 마찬가지로 총 22개의 공장이 있었는데, 다르부시에르는 그 중에서도 가장 큰 규모의 설탕공장으로 연간 생산능력이 총 8천 톤에 달했다. 1848년 이전 아비타시옹의 생산량이 연간 50~75톤에 그쳤던 점을 감안하면 어마어마한 발전이 아닐 수 없다.(2)
그러나 경제적 해방은 여전히 상대적인 것으로 머물러 있었다. 르탕은 “아비타시옹은 미국의 플랜테이션 농장과 달리 주인과 노예 간의 관계가 더욱 가깝다. 농장 규모도 작고, 주인과 노예가 지속적으로 직접적인 관계를 맺어야 했기 때문이다. 주인은 노예를 직접 선택하고 사들였기 때문에 모든 노예들을 잘 알고 있었다. 각각의 아비타시옹은 의료시설을 갖춘 소규모의 자치공동체를 이루었고, 외부와의 교류는 생산품 유통을 위한 교류 정도뿐이었다”고 분석했다. 아비타시옹은 다양한 형태로 바뀌며 제2차 세계대전까지 지속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다르부시에르는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 손꼽힌다.
과거에 카레나주 지구는 사탕수수 수확기가 되면 3교대 풀가동으로 돌아가는 공장 가동시간에 맞추어 24시간 내내 활기를 잃지 않았다. 2015년 현재에도 과들루프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로 불리고 있고, 처음에는 습지였던 이곳에는 카리브 지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사람들이 배를 타고 오곤 한다. 카레나주 지구의 중심가이자 다르부시에르 공장 옆을 따라 나있는 라스파이가(街)에는 하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단골을 기다리는 아이티 매춘부들, 설교하는 종교인들, 온갖 마약을 취급하는 밀수꾼 등 다양한 사람들이 한데 섞여 살아가고 있다.
푸앙타피트르의 문화 및 문화재 정책을 담당하고 있는 조르주 브레당 부시장은 소설 <챔피언들의 거리(La Rue des champions)>를 집필하기 위해 카레나주 지구를 다시 찾았다.(3) 변호사이기도 한 61세의 브레당 부시장은 어린 시절을 다르부시에르 설탕공장 근처에서 보내곤 했다. “그곳은 그야말로 완전고용의 장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철저한 계급사회로 임직원들은 모두 백인, 현장감독들은 전부 카리브지역 출신이며, 나머지 노동자들은 계급 피라미드의 최하층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계급제도는 매우 훌륭했다. 노동자들이 마치 공무원이라도 된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회적 지위와 고용이 보장될 뿐 아니라, 퇴직금, 유급휴가, 복지 등의 혜택도 받을 수 있었다.”
이러한 사회체제 하에서 공장주들은 노동자들에게 준 자신의 돈이 공장 밖으로 벗어나지 않도록 머리를 쓰기 시작했다. 다양한 가게들과 제휴를 맺고 공장 주변으로 주거단지를 조성한 것이다. 또한 직원들의 단결력을 고취시키려는 목적으로 공장 내에 다양한 시설을 조성해, 당시 그 지역에 살던 아이들이라면 모두 공장에서 지은 수영장, 농구장 등에 다닌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한편 빠른 경제성장의 중심축이었던 다르부시에르 공장은 다양한 세대를 아우르는 사회문화의 도가니 역할을 하기도 했다. 수많은 과들루프 주민들을 고용하면서 거의 외부와 분리된 자급자족의 기능이 가능해졌던 것이다. 또한 공장 측은 대규모 사탕수수밭을 소작의 형태로 노동자들에게 지급하였는데, 카리브지역에서 시작된 이러한 방식을 통해 공장주들은 최소의 비용으로 자기 소유의 땅, 특히 경작이 어려운 땅을 개발할 수 있었다.
알퐁스 프랑수아 씨는 14살때 다르부시에르 공장에 들어가 노동직으로 일하다가 이후 회계부서에서도 근무한 경험이 있다. 많은 이들이 그러하듯 그에게도 다르부시에르 공장은 사회적으로 신분 상승을 할 수 있는 지름길인 동시에 순조로운 경작체제를 의미했다. 그가 “나는 회사(4) 측으로부터 밭뙈기 하나를 받아 사탕수수를 경작했다. 수확 이후 생산물의 절반은 내 몫으로 받고, 나머지 절반만 회사에 내면 됐다. 하지만 최종적으로는 이런 소작 형태가 그다지 이익이 되지는 못했고, 오히려 공장을 위해 뼈가 부서져라 일을 하게 됐다. 더 심각한 것은 회사 측에서 일방적으로 계약을 파기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우리가 착취당하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일이었다”고 이야기하자, 다르부시에르에서 일했던 운송기사의 아들이자 이제는 90대 노인이 된 에드몽 생실리 씨 역시 그의 의견에 동의했다.
 
“백인들이 떠나더라도 그들의 그림자는 그대로”
 
올해로 90세가 된 가스통 노베르카 씨 역시 정비공으로 일했던 자신의 아버지처럼 기계공으로 연간 계약을 맺어가며 다르부시에르 공장에서 일했다. 그러나 노베르카 씨의 첫째 아들인 위르뱅 씨는 이러한 계보를 이어가길 거부했다. “절대 싫었다. 내가 보기에는 노예제도나 다를 바가 없었다. 거꾸로 과거를 답습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부상자가 한 명도 없는 날이 없었고, 심지어 내 아버지는 부상으로 인해 한쪽 다리 전체의 기능을 잃었다. 게다가 이런 사람들에게는 임금도 제대로 주지 않았다. 회사는 노동자들의 단물만 빼먹을 줄 알았다.”
마찬가지로 89세의 폴 빌바 씨는 목공일을 한 아버지 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뒤, 그 역시 46년간 사탕수수즙을 끓이는 일을 했다. 그는 지금도 공장부지 근처에 위치한 흔들리는 판잣집에서 살고 있다. 작은 단칸방이 줄지어있는 판잣집은 이곳 거처의 불안정성을 여실히 드러내 보인다. 이 판잣집은 공장으로부터 제공되었던 곳으로, 공장 측에서는 이를 통해 자신들이 ‘모범’ 노동자들에게 ‘후한’ 대우를 한다는 점을 보여줄 수 있었다. 빌바 씨는 “의료시설, 주거지 임대, 대출, 체육활동 등 거의 모든 일을 이 안에서 해결할 수 있었다. 공장은 노동자들, 특히 설탕산업에서 주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기계 관련 종사자들에게 교육을 실시하기도 했다. 다르부시에르 공장은 일종의 정부나 다름없었다. 우리는 모두 한 가족이었다”라고 회상했다. 실제로 노동자들은 매년 12월 초, 생엘루아 축일이 되면 프랑스인 사장들과 함께 모여 그들이 주는 알록달록한 포장된 선물 상자들을 기다리기도 했다.
반면 이웃마을 출신의 70세의 에디 디에르르생 씨는 “속담대로다. ‘누더기라도 없는 것보단 낫다’고 하지 않았는가. 바꾸어 표현하자면 노예인 것보다는 다르부시에르에 있는 것이 낫다는 얘기다”라고 말했다. 그는 몇 해 전부터 망고나무 그늘에 과들루프 독립기(旗)를 걸어놓는 독특한 인물이기도 했다. “하지만 주의해야할 부분이 있는데, 사장이 부재할 때에도 공장은 엄격하게 운영되었다는 사실이다. 결국 백인들이 떠나더라도 그들의 그림자가 계속해서 드리워져 있었다는 것이다. 다르부시에르 공장은 결국 과들루프 사회를 계층화하는 시작점이었던 것이다.”
20세기를 지나면서 공장 소유주는 여러 차례 바뀌었지만, 공장의 온정주의적 자본주의는 계속해서 커져만 갔다. 그러던 중 1960년대 초에 국내외 정세가 변화하기 시작하면서 공장의 상황 역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카리브제도 전체에서 설탕산업이 점차 하락세를 타기 시작한 한편, 미셸 드브레 전 총리의 지시 하에 1963년에는 해외영토이민개발국(Bumidom)이 창설되었다. 드브레 전 총리는 이를 통해 해외영토의 젊은이들을 본국으로 이주시켜 공직을 맡을 수 있도록 하겠다는 정책을 내놓았으나, 과들루프 독립주의자들은 섬의 활력을 잃게 될 큰 손실이라며 이를 비판했다.
국제적으로는 피델 카스트로가 활약하고 곳곳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나면서 과들루프의 사회와 새로운 세대에 영향을 미쳤고, 젊은 세대들은 동화(同化)논리와의 완전한 단결을 주장하고 나서기 시작했다. 과들루프에서는 1967년 5월 여러 사건들이 일어나면서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고, 수차례의 인종차별적 모욕을 겪은 주민들은 마침내 일어나 시위에 나섰다. 어떤 사람들은 폭발물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 뒤를 이어 노조가 시위에 가담하기 시작했는데, 그러던 중 두 청년이 진압 과정에서 기동대에 의해 목숨을 잃으면서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비록 공식적인 역사 기록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지만, 바스테르부터 푸앙타피트르에 이르기까지 과들루프 전역에 걸쳐 일어난 무력진압은 많은 이들의 머릿속에 뚜렷하게 각인되었다. 결국 1960년대부터 독립운동조직들이 구성되기 시작해 프랑스 본국에서는 과들루프학생총연합(AGEG)이, 과들루프 섬에서는 과들루프조직그룹(GONG)이 결성되었다.
 
북치는 이 없는 라스파이 거리
 
여기서부터 긴 투쟁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1971년에는 대규모 총파업이 일어나 사탕수수 수확이 중지되었고, 2년 뒤 과들루프노동총동맹(UGTG)이 결성되어 다르부시에르 노동자들의 권리를 주장하고 나섰다. 디에르르생 씨는 “공장 소유주들은 바로 이때부터 내부 붕괴의 조짐을 느끼기 시작했을 것이다. 임종의 순간은 길었으나, 죽음이라는 끝이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고 설명했다. 같은 해, 설탕 가격의 폭락으로 공장들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으나 아직은 수익이 나오는 상태였다. 공장주들은 과거의 영광이 그대로 무너지도록 내버려두었고, 수순대로 1980년에 공장을 폐쇄했다. 1975~2002년에 노동총연맹 과들루프본부(CGTG) 대표를 맡았던 클로드 모르방 전 대표는 “공장 폐쇄는 사실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 프랑스 정부와 당시 공장 소유주였던 엉팽 남작 간의 합의에 따른 결과였다. 토지개혁, 설탕산업정비에 이은 국가 차원의 결정이었던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1946년 공장 맞은편에서 태어나 사탕수수 운반수로 일했던 아버지 밑에서 자란 모르방 전 대표는 자신이 처음으로 아르바이트를 했던 다르부시에르 공장이 폐쇄될 무렵 이 지역으로 돌아왔다. “공장이 폐쇄되면서 수천 개의 직․간접적인 일자리가 사라지고 말았다. 이에 대한 협상 과정을 통해 과들루프 상공업고용조합(Assedic)이 설립될 수 있었다. 그 전까지는 특수한 상황 하에 있었던 것이다.” 결국 바나나 공화국(외국자본에 의존하는 부패 정권)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그 이유로 1946년 전까지는 백인이 아닌 카리브제도 주민은 프랑스 국적을 가졌을 뿐, 프랑스 ‘시민’으로는 인정하지 않았던 점을 들 수 있다. 크레올 사회는 오랫동안 소외되어 왔고, 프랑스와 카리브제도 사이의 역사 중 수상쩍은 부분들은 전부 철저하게 지워지고 잘려나갔다. 이런 상황에서, 1802년 나폴레옹 군대가 섬을 점령하고 노예제도를 부활시키자 수천 명의 과들루프 주민들과 함께 반대하고 나섰던 자유로운 여인의 상징 ‘솔리튜드’의 이야기를 그 누가 알 수 있겠는가?(박스기사 참조)
노예기념관의 티에리 르탕은 “1848년, 노예제도가 두 번째로 폐지되자 사람들의 목표는 프랑스 시민이 되는 것에 맞춰졌다. 이후 1946년 과들루프 섬이 해외도(道)로 승격되면서 과들루프 주민들도 프랑스 시민의 자격을 얻게 됐다. 그런데 바라던 시민권을 가지게 되었지만, 오늘날 우리는 기억 없이 살아가는 데서 오는 공허함과 어려움을 느끼게 됐다.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면서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를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과거의 흔적을 항상 저 너머로 밀어놓을 수만은 없는 것이다”라고 이야기했다.
한편 푸앙타피트로시에게 있어 다르부시에르 공장 폐쇄는 곧 수년간의 시련을 의미했으며, 실제로 산업재전환과 독립 요구에 따른 난관이 이어서 발생했다. 카레나주 지구 역시 점차 나락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2015년 현재에도 라스파이 길은 변함없이 24시간 깨어있지만, 전통 타악기를 연주하던 유명악사 ‘벨로’는 세상을 떠났고, 관광객과 노동자들을 늘 맞이하던 작은 술집들은 ‘매음굴’에 가까운 주점으로 바뀌어 버렸다. 동네 전체가 빈곤해졌고, 지저분한 판잣집에 불이 나는 것은 예삿일이 되었다. 건물 사이마다 빈 공터가 생겨나면서 거리의 분위기는 실추되었고, 혹시나 있을지 모를 부동산 수요를 기다리며 공터들은 빈 채로 방치되었다. 하지만 푸앙타피트르시는 ‘비위생적 주거환경 해소법’에 따라 이미 임대주택을 여러 곳에 건설했다. 다르부시에르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100미터 세계기록 보유자 로제 방뷔크 전 프랑스 체육부 정무차관의 이름과, 사탕수수를 공장으로 운반하는 데 쓰인 두 증기기관차의 애칭인 ‘데가제’와 ‘루피티’를 따 임대주택 단지의 이름을 정하기도 했다.
 
“정체성의 위협”
 
지난 2002년, 푸앙타피트르시는 절대로 투기를 목적으로 사용하지 않겠다는 약속과 함께 약 천만 유로의 비용을 들여 다르부시에르 폐공장 부지를 사들였고, 그중 3분의 1을 이번 노예기념관 건립에 사용했다. 총 건축비용 약 8300만 유로(초기 예상비용은 약 4천만 유로)가 들어간 이번 노예기념관 프로젝트는 과들루프의 역사를 재조명하기 위한 활동의 일환이기도 하다. 실제로 이런 활동을 통해 밤마다 신나게 울려 퍼지던 과들루프의 전통 타악기 그오카(gwo-ka)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고, 과거에는 사용이 금지되었던 크레올어를 이제는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다.
이러한 과들루프의 역사에 새로운 획을 긋게 될 노예기념관은 푸앙타피트르 도심과 남쪽의 대학가를 연결하는 신설 도로의 중간에 위치해 있다. 그런데 이렇게 거대한 변화 속에서 지역주민들은 각자의 자리를 잘 지킬 수 있을까? 전 해외영토장관이며 이번 노예기념관 프로젝트를 주도한 빅토랭 뤼렐 과들루프 지방의회 의장은 “지역재개발과 관련해서는 푸앙타피트르시와 협의 체제를 구축했다. 이는 공공건축주가 주도하는 파트너십을 통해 건설 작업을 구상 및 실현하고, 투기위험을 제한하고자 하는 목적을 지니고 있다. 이곳은 푸앙타피트르의 새로운 중심지로 재탄생할 것이며, 가치기준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라고 단언했다. 그러나 주민들은 불만을 표출하기 위한 주민협회 등을 조직하고 있었다. 카레나주 지구 출신의 기타리스트 크리스티앙 라비조는 “이전에는 대가족과 이웃들의 손을 통해 아이들이 자라났고, 집집마다 문을 열어 놓고 지내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곳의 정체성이 위협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물론 잡초가 자라도록 내버려 두었다가 지금처럼 땅 전체를 뒤엎도록 놔둘 수도 있다. 그런데 이때는 뿌리 깊이 자리한 토대마저 모조리 없어질 위험이 있다. 전부 내버리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다르부시에르 공장은 결국 조각조각 해체되었고, 공장에서 나온 고철덩이들은 과거 소유주들이 가져갔지만 별다른 이득이 되지는 않았다. 역설적이게도 과거를 기억하기 위한 기념관이 과거 역사와의 단절을 완성시킨 셈이 됐다. 노동자들이 보름마다 급여를 타가던 공장 내 관리소만이 유일하게 국보로 지정되어 그 자리에 남아 산업발달의 과거사를 보여주고 있다. 현재 이 건물에 대해서는 현대미술전시관으로의 사용 여부를 놓고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진정한 시대의 변화가 아닐 수 없다. 한편, 물론 장 다르부시에르가 소유하고 있던 식초공장과 다른 언덕 역시 노예기념관 부지로 통합되긴 했지만, 공장의 담벼락 역시 전부 철거되었다는 사실 또한 놀랄만한 일이다.
그오카 연주자인 클로드 키아뷔에는 이에 대해 “과들루프에는 과거를 기념하는 곳이 거의 없다. 그러한 장소들이 좋지 않은 기억들을 떠오르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공장의 담벼락 역시 보기에는 좋았을지 모르지만, 우리에게는 고통을 불러일으키는 존재였다. 수많은 죽음과 눈물이 어려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라고 설명했다. 다르부시에르 공장에서 화학일을 하던 아버지를 둔 카이뷔에는 비교적 상징적인 활동들을 이어가고 있다. 수년 전에는 비어있는 한 폐공장에 백 명의 타악기 연주가를 모아 과거 노동자들이 겪었던 시련을 담은 ‘리진 탕부(Lizin Tanbou)’라는 음악 퍼포먼스를 선보이기도 했다. 노예기념관이 지닌 철학이 시사하고 있듯이 앞을 바라보려면 과거를 전부 지워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노예제도에 대한 국립연구소 설립을 위해 투쟁해왔던 수필가 에두아르 글리상은 <노예의 기억(Mémoire des esclavages)>(5)을 펴내면서 머리말 말미에 “결국은 늘 기억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 어두움과 그 용감함으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기록했다. 이는 2001년 5월 10일,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크리스티안 토비라가 ‘흑인들을 희생시켰던 노예무역 및 노예제도는 인도(人道)에 반한 죄’라는 내용의 법을 표결에 부치면서 주장한 ‘기억의 의무’를 떠오르게 한다. 국제흑인위원회 창립자 뤼크 레네트의 동생이자, 노예기념관 총괄책임을 맡은 피에르 레네트는 이 모든 기억들을 “감춰진 기억”이라고 불렀다. 어둡고 흐린 구멍들로 얼룩진 기억이지만 이제는 그 구멍을 메워야 할 때라는 것이다.
노예기념관을 통해 지난 과거와 마주할 때, 마침내 미래를 바라볼 수 있게 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런데 피에르 레네트는 이에 덧붙여 “이와 같은 교훈적인 작업은 감정적 분노 없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에두아르 글리상의 말처럼 우리는 과거를 곱씹을 것이 아니라 뛰어넘어야 한다. 이와 함께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다. 누군가는 우리가 진흙탕을 뒤지고 있다고, 노예제도는 다 지난 일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이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절대 타협하지 않을 것인데, 과들루프가 아직도 노예제도의 망령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이티와는 달리, 우리는 그러한 역사에 대해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지 않은가! 프랑스 역사는 잘 알고 있으면서도, 지금까지 우리를 이끌어온 우리의 역사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는 것이다.”
 
 
글·자크 드니 Jacques Denis
 
번역·김보희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1) ‘L’indépendantiste Luc Reinette à Paris pour expliquer son refus d’assister à l’inauguration du Mémorial ACTe à Pointe-à-Pitre’, FranceTV Outre-mer, 2015년 5월 5일자 (www.la1ere.fr)
(2) Pierre Dockès, <Le sucre et les Larmes. Bref essai d’histoire et de mondialisation>, Descartes&Cie, 파리, 2009
(3) Georges Brédent, <La rue des champions>, Jasor, 푸앙타피트르, 2002.
(4) 다르부시에르 공장이 20세기 초 에르네 수크에게 매각되면서 SIAPAP(푸앙타피트르 산업・농업회사)라는 회사가 설립되었다. 이후 1970년 프랑스 설탕회사와 합병되면서 SIS-SAG(과들루프 설탕산업・농업회사)로 바뀌게 된다.
(5) Edouard Glissant, <Mémoire des esclavages>, Gallimard, 파리, 2007
 
 
<‘솔리튜드’의 투쟁>
 
솔리튜드(solitude ‘고독’이라는 뜻-역주)는 앙드레 슈발츠 바르트의 소설 ‘고독이라는 이름의 여인’(1972)에 등장하는 여성의 이름이다. 이 소설은 1802년 프랑스의 압제에 대한 반란에 참여한 한 여성 노예의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실제로 푸앙타피트르 시내에는 솔리튜드 동상이 세워져 있어, 프랑스 본국의 역사책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어두운 이야기를 상기시키고 있다. 과들루프의 독자적인 정체성과 뿌리 깊은 시각차를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1802년 5월 28일, 마르티니크 출신의 루이 델그레 대령이 과들루프에서 나폴레옹 군대에 붙잡혀 처형당하던 날 남긴 말처럼, 솔리튜드 또한 ‘노예로 사는 것보다 죽음이 낫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솔리튜드는 프랑스 군대에게 붙잡힌 후에도 바로 죽임을 당하지는 않았는데, 이는 그녀가 임신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프랑스인들이 그녀의 뱃속에 있는 미래의 노예를 기다리기로 한 것이다. 결국 아이가 태어나고 이튿날인 11월 29일, 솔리튜드는 숨죽인 군중 앞에서 교수형에 처해지고 말았다. 그로부터 8년 전, 사실 프랑스는 이미 혁명을 겪으면서 식민지 노예제 폐지를 선언한 상태였다. 다만 한 가지 문제는 농장 소유주들이 로비를 통해 시민권 및 인권 선언이 흑인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결국 1794년 2월 4일, 국민의회에서 이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고, “식민지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들은 피부색의 구분 없이 프랑스 시민이며, 헌법에 의해 보장되는 모든 권리를 누릴 수 있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사람들은 북을 치며 이 기쁜 소식을 알렸고, 그 즉시 노예들은 농장에서 탈출했다.
150년 이상 이어져온 노예 학대의 역사에 마침표가 찍히는 순간이었다. 1685년 노예의 지위를 규정하는 ‘흑인법’ 제정 이후, 아비타시옹(기사참조)에서 노예들이 계속해서 겪어야 했던 이른바 ‘설탕귀족’들의 압력으로부터 처음으로 벗어나게 된 것이다. 실제로 흑인법 44조는 노예들을 ‘동산(動産)’이라고 규정하고 있을 정도였다. 1493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에 의해 ‘발견’된 이후 약 3세기가 지난 시점인 당시 과들루프에는 총 5천 명의 노예가 살고 있었다. 프랑스인들은 가나, 토고, 다호메(베냉), 코트디부아르, 나이지리아, 카메룬, 가봉, 콩고, 앙골라 등 여러 아프리카 국가들로부터 수많은 사람들을 끌어와 노예로 삼았다. 과들루프 그랑드테르에 위치한 그오카 기념관 맞은편에는 노예제를 상징하는 거대한 돌계단이 놓여있는데, 이곳에 적힌 수많은 국가들의 이름을 통해서도 그 다양성을 확인할 수 있다.
1772년 노예선에서 강간당한 아프리카 노예의 배에서 태어난 솔리튜드는 이후 과들루프의 아비타시옹에서 그야말로 지옥을 경험하며 성장했다. 목과 발을 옥죄는 쇠사슬, 수갑, 쇠고리, 탕개목, 철가면, 독방 감금, 폭행 등은 강제 수용된 노예들에게는 일상이나 다름없었다. 처음 노예제 폐지가 선언됐던 1794년, 솔리튜드가 곧바로 농장에서 도망쳐 언덕 위에 자리를 잡은 탈주노예 공동체에 합류한 것도 이러한 현실 때문이었다. 몇 년 후 군주제 전환을 앞둔 프랑스가 다시 과들루프로 쳐들어와 노예제를 부활시키자, 그녀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노예제 폐지론자인 루이 델그레 대령의 부대에 합류했다.
이후 약 일 년 이상의 시간동안 프랑스는 자유를 주장하는 반란 분자들에 대해 가혹한 진압을 이어갔다. 결국 모든 것이 원상 복귀되고 흑인들은 또다시 노예가 되었지만, 이미 모든 것이 이전과는 달라져 있었다. 과들루프 사람들에게 이 모든 비극이 일어났던 1802년은, 국회의원 빅토르 쉘셰르의 주도 하에 노예제도의 완전 폐지가 선포되었던 1848년 4월 27일만큼이나 지울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