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의 왕, 파나이트 이스트라티!
2015-07-02 세바스티앙 라파크
그는 소외의 경계를 넘나들고 언제나 가난한 자의 편을 택한 희귀하고도 소중한 작가였다. 루마니아에서 태어나 독학으로 작가가 된 파나이트 이스트라(Panaït Istrati)는 프랑스 문학에 독특한 서정의 흔적을 남겼다. 대담하면서도 용감하고 그 어느 유파로 분리되기를 거부하는 그는 유년 시절에 새겨 둔 혁명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을 잃지 않았다.
한 작가가 지속적으로 어떤 정당이나 당파에 가담하지 않고 지냈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가 <해적의 글>에서 사용한 표현을 빌리자면 예술가는 “떼거리들의 품위 없는 윤리를 따르지 않아도 될 만한” 자격이 있지만, 그 어떤 것에도 신경 쓰지 않는 ‘뻔뻔한’ 고독은 특히 작가가 죽은 후에 그의 작품들에 대해 비싼 대가를 치르게 할 위험성이 있다. 수 년 동안 그 어느 출판사나 대학교수들도 그런 작가의 작품을 등한시 한 것에 책임을 느끼지 않으며 이 작가를 기리려는 전 세계의 어떤 단체나 유증자들도 나타나지 않는다. (1)
이것이 <키라 키라리나(Kyra Kyralina)>(1923), <앙헬 삼촌(Oncle Anghel)>(1924)과 <바라간의 엉겅퀴(Les Chardons du Baragan)>(1928)의 저자인 파나이트 이스트라티의 사후 운명이었다. 그는 1884년 8월 10일, 루마니아의 다뉴브 강 유역 삼각주 근처에서 태어났다. 그리스 밀수업자였던 아버지와 세탁소 일을 하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전 유럽을 편력한 유럽의 방랑자로서 주요 작품의 대부분은 프랑스어로 썼다. 그렇지만 그가 그리스와 터키, 레바논, 이집트 등 지중해 연안을 편력한 후 고국으로 돌아가 1935년 4월 16일 임종을 맞이했을 때 프랑스는 20세기 프랑스 문학사에서 그가 받아 마땅한 자리를 그에게 부여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의 후배들이라 할 수 있는 으젠 이오네스코와 에밀 시오란 등은 파리에서의 안락한 생활을 만끽하는 것에 안주해 그를 잊어버린 것이었다. 오늘날 이들은 차례로 플레이아드판 선정 작가로 인정받았다. 특히나 여기서든 저기서든 그를 추모하는 날을 정확히 지정할 수 없을 때, 불확실한 신상정보를 지닌 한 문필가에게 사후 평판이란 잔인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방랑자, 사교성이 부족한 자, 떠돌이, 무국적자들은 소위 문단에서 의미를 지니는 지역주의와는 반대편에 서 있는 자들이다. 특히나 이들이 아슬아슬한 경계선을 넘나들며 그 사회의 관습에 도전하려 할 때에는 “옳지만 혼자라는 것이 상당히 불행한 일이다.” 이 말은 알레시스 레이디에(Alexis Rédier) 출판사에서 1925년 출판한 그의 <헝가리 산적들 소개>의 한 등장인물인 엘리 르 사즈의 입을 통해 나온 것이다.(2) 루마니아의 역사에서 모티브를 취한 이 소설은 파리 비평계로부터는 문단의 새로운 별이 탄생했다는 칭송을 받게 했다. <키라 키라리나(Kyra Kyralina)>보다 2년 뒤에 쓰여진 독특한 이 실험소설은 로맹 롤랑의 감탄을 자아내기도 했다. “이 활기, 이 열정, 이 삶의 영혼은 현재 우리시대의 서구의 것이 아니다. 16세기나 엘리자베스 시대 연극의 호랑이를 생각하게 한다.”(3)
자신이 속한 전통과 선입견이 어찌되던 간에 이스트라티를 처음 접하는 독자들은 독학으로 자수성가한 이 독특한 작가,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혹은 1884년에 태어난 젊은 루마니아 왕국의 한 작가에게 박수를 보낼 것이다. 허약한 입헌군주제 국가였던 루마니아는 파시즘의 침략을 겪어야 했으며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독일제국과의 비밀스런 동맹협약에 서명하기를 거부하고 중립을 선언한 후 1916년 동맹국의 대열에 합류했다. 전통적으로 시민들이 파리에 대한 동경과 친 프랑스적 성향을 지닌 국가에서 온 이스트라티는 아직은 까칠한 성향의 정치적 작가로 간주되지 않았었다.
성장기(1896-1922)에 그는 건물 페인트 공, 항구와 역의 하역 작업 인부, 해양 작업장의 자재 배달원, 전신주 세우는 인부, 순회 사진사 등의 직업을 전전했다. 이러한 노동자로서의 경험은 그로 하여금 떠돌아 다녀야만 하는 ‘유랑의 힘’과 ‘하층민들’의 기대를 이해하게 했다. 잭 런던의 표현대로라면 “나는 언제나 빵을 만들기만 하고 먹지는 못하는 사람들 편으로 돌아올 것이다”라고 맹세했던 것이다. 이 최초의 계획에 충실하면서 이스트라티는 전기작가 모니크 쥐트렝(Monique Jutrin)이 ‘영광의 나날들’이라고 적절하게 표현한(4) 기간 동안 (1925-1927) 불의에 대한 투쟁을 잊지 않았다. 그 시기에 그는 자신이 40년 전에 태어났던 다뉴브 강가에서 하역장 인부들의 사무장으로 일했는데 이때의 경험을 조국의 구전 전통에서 영감을 받아 은유적으로 변형시켜 표현했다.
고국 루마니아의 환경에 뿌리를 둔 문학
문단의 풍토로 보아 그렇게 등장하는 혜성을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 1925년은 블레즈 상드라르(Blaise Cendrars)의 <황금>, 모리스 즈느부와(Maurice Genevoix)의 <하볼리오(Raboliot)>, 그리고 피에르 장 주브(Pierre Jean Jouve)의 <폴리나 1880>이 출간된 해였다. 그런데 당시 비평계와 독자층이 ‘소설의 해’라고 명명할 시기였던 만큼 놀랍도록 풍요로웠던 상상력에 의해서 감수성이 무뎌지지 않았다 해도, 음침하고 짜릿한 감동으로 가득 찬 <헝가리 산적들 소개>가 프랑스 문단에 더 가치가 있는 ‘명확한 선’을 긋게 한 것은 분명했다. 이 일련의 이야기들은 14세기에서 19세기 중반까지 계속된 터키와 그리스의 점령 하에 있었던 루마니아의 강도단에게 표하는 경의의 형태를 띠고 있다. “헝가리 산적들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걸 모른단 말이야? 그렇다면 설명하지. 그들은 박해도, 하인이 되는 것도 참지 못하는 사람들이지. 숲에서 살며 잔인한 귀족들을 죽이고 가난한 자들을 보호하는 사람들이란 말이야.” 이 작품은 이스트라티의 세계를 잘 알게 해주는 시범 작품이라 할 만 하다. 그의 세계는 서민의 기억에 충실하고 투박하고 토속적인 언어로 하층민 출신의 인물들을 주로 그리는 것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5)
이러한 토속적인 것에서 영감을 길어 올리는 점은 19세기 이래로 독일이나, 프랑스, 러시아 문학과 다른 변별력을 보여주려는 루마니아 문학의 특징이기도 하다. 이처럼 동·서양의 상반된 상상력을 보여주는 이 작가에게서 더욱 놀라운 점은 아마도 14세에서 17세 사이 루마니아어 번역본으로 읽어 참조한 발작이나 에밀 졸라의 문체를 사용했다는 점이다. 외국어를 사용해 저작 활동을 한다는 것은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스트라티의 뛰어난 상상력은 놀라울 만큼 풍부하여 그를 곁에서 지켜본 롤랑을 비롯한 여타 지인들은 1923년 그 결실이 드러날 때까지 그를 격려했다.
파리에서 경력을 시작해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서도 칭송을 받은 그는 1927년 모스크바의 혁명 10주년 기념식에 초대를 받았다. 정당 소속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확고한 공산주의자로 간주되었던 것이다.〈뤼마니테〉지에 보고된 바에 따르면 모스크바에 대한 그의 첫 인상은 열정적이었다. “나는 지난 십 년의 세월을 서방세계에서 희생했다. 그러나 그 어디에서도 희망을 가지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지 못했다. 그런데 여기야 말로 믿음과 모든 백성의 젊은 도약이 있는 것 같다.”(6) 이 신문에서 전해진 것은 너무 간단하다. 레온 트로츠키가 중앙위원회에서 축출된 지 몇 주 후, 소비에트 연방에서 긴장이 고조되었다. 당시 후일 <알렉시스 조르바>의 저자인 그리스 소설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와 함께 여행 중이었던 그는 소비에트에서는 정당 비판은 금지되며 반대파는 축출된다는 것을 차츰 이해하게 되었다.(7) 이 같은 실상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 것으로 간주된 빅토르 세르즈(Victor Serge)가 간단한 일화를 하나 소개한다. 당시 한 공산당 정당원이 이스트라티에게 공산당이 저지른 부정을 합리화하려고 “달걀을 깨지 않고는 오믈렛을 만들 수 없다”는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러자 이스트라티가 “아 그런가요, 좋습니다! 좋아요, 그런데 깨진 달걀은 분명 보았는데, 당신의 그 오믈렛은 도대체 어디에 있습니까?”(8)
이것이야말로 옳지만 혼자인 외톨이가 겪어야 하는 시련이다. “자신과 유사한 사람들과 감정적으로 불화를 겪는 사람들은 생이 저물어 갈 무렵 패배자가 되기 십상이다. 나는 그러한 패배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이는 모스크바에서 16개월을 보낸 후 고백한 기록이자 1929년 파리로 돌아와 발표한 씁쓸한 증언이다. 그러나 이스트라티는 완전히 외톨이는 아니었다. 빅토르 세르즈(Victor Serge)와 보리스 수바린느(Boris Souvarine)가 ‘소비에트 연방에서 보낸 16개월’이 게재된 <또 다른 불꽃을 찾아서>라는 잡지를 발간하는 데 익명으로 도움을 주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스트라티의 외로움은 이해할 만하다. 그와 그의 친구들은 너무 일찍 실상을 파악해버린 것이다. 그들은 편안함을 추구하려면 과거만을 고발하라는 말과 달리 ‘현재의 환상’을 고발한 것이다.
<또 다른 불꽃을 찾아서>의 유일한 발행인으로 남은 이스트라티는 공산주의 성향 언론의 집중 공격을 홀로 감당해야 했다. 친 공산주의 언론은 그를 파시스트라 비난했고 부르주와 비평계는 ‘전세계주의자’인 한 소설가의 사건에 무관심할 뿐이었다. 이때부터 이스트라티는 고립의 길로 접어들어 긴 방랑의 시기로 접어들었다. 친구들과의 연락도 끊었다. 심지어 롤랑조차도 그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이스트라티는 어린 시절부터 마음속에 새겨진 혁명에 대한 믿음을 상실했으나 애초의 의지는 간직하고 있었다. 1933년 4월 <새로운 문학(Les Nouvelles littéraires)>에 게재한 글에서 “사회의 거짓말이 모든 계층을 지배하고 매일 매일 머리 좋은 사람들이 거기에 휩쓸려 가고 있는 현실에서 아무런 유감없이 잔인하게 말하다”라고 적고 있다.(9) 그가 생의 마지막에 매달렸던 작품들은 매우 어둡다. 때로는 씁쓸하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간직했던 위대한 꿈에 충실하다. 그는 이 세상에 대한 근심어리고 명철한 통찰력을 보여주고 진실을 말하려는 능력 있는 자들에 대한 고집스런 믿음을 증명하고 있다.
세상에서 멀어진 만큼 삶에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된 그는 위대한 반항아의 열정을 잃지 않은 채, 고전적인 한 도덕주의자로서의 도약을 이룩한 것이다. “우리는 기독교교회의 위선자들과 공산주의라는 광기에 휩쓸린 자들을 몰아낼 것이다. 우리는 지속적인 삶과 순교자를 받아들일 것이다.” 그가 1933년 부카레스트 필라레트의 결핵 요양소에 머물면서 프랑수와 모리악에게 보낸 서신이다. 이스트라티는 어느 날엔가는 사람들이 자신의 작품과 삶을 이해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한 남자가 그 어디에도 가담하지 않고 살 수 있다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이 남자가 바로 “나는 오늘 내가 방랑했던 길에서 만난 수많은 부랑자들이라는 거대한 가정과 함께 오늘의 삶을 살아왔기에 가난했고 또 가난한 채로 죽을 것이다”라고 확인한 바로 그 사람이다.(10)
글·세바스티앙 라파크Sébastien Lapaque
번역·이진홍
파리7대학 불어불문학 박사
1) 현재는 파나이트 이스트라티 학회가 존재하며 2015년 5월 15일부터 17일까지 키롬보(Quilombo)출판사와 국제 대중문화 센터가 주최한 축제가 파리에서 조직되었다.
(2) 파나이트 이스트라티, 〈헝가리 산적들 소개 (Présentation des haïdoucs)〉, 시도니 메제즈(Sidonie Mézaize) 서문, 카르멘 오스지(Carmen Oszi) 후기, 레사페(L’Echappée) 출판사, 파리, 2014.
(3) 파나이트 이스트라티, 〈작품 1권〉, 린다 레(Linda Lê) 편집, 페뷔스 출판사, ‘리브레토’ 컬렉션, 파리, 2015.
(4) 모니크 쥐트렝, 〈파나이트 이스트라티. 뿌리가 뽑혀버린 엉겅퀴 (Panaït Istrati. Un chardon déraciné)〉, 레사페, 2014(1970년 초판 발행).
(5) 〈키라 키라리나(Kyra Kyralina)〉의 서문에서 롤랑은 이스트라티를 가리켜 발칸의 새로운 고리키라고 명명한 바 있다.〈작품 1권〉, 전게서.
(6) 모니크 쥐트렝, 〈파나이트 이스트라티. 뿌리가 뽑혀버린 엉겅퀴 (Panaït Istrati. Un chardon déraciné)>, 전게서.
(7) 장-아르노 데랑(Jean-Arnault Dérens), ‘세기의 밤(Minuit dans le siècle)’,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5월 2013.
(8) 빅토르 세르즈, <한 혁명가에 대한 기억>, 뤽스, 몽레알, 2010.
(9) 파나이트 이스트라티, <작품 1권>, 린다 레(Linda Lê) 편집, 페뷔스 출판사, ‘리브레토’ 컬렉션, 파리, 2015.
(10) <파나이트, 방랑의 작가Panaït Istrati, un écrivain vagabond>, 엘렌 리우(Hélène Lioult), 에렐 비디오, 엑-상-프로방스,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