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드래곤과 현대미술, 아직 견고한 그들 각자의 세계

2015-07-02     김지연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하나의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 헤르만 헤세, <데미안> 중에서
 
 
미술관에 아이돌이 현대미술을 들고 나타났다. 지난 6월 9일부터 8월 23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피스마이너스원>, 일명 ‘지드래곤 전시’로 불리는 이 전시는 인기 그룹 빅뱅의 멤버 지드래곤의 세계관과 현대미술 간의 결합을 시도한 실험적인 형태의 전시로 막이 열리기 전부터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아무래도 기존 미술계에서는 따가운 시선이 느껴진다. 중견 미술 작가도 아닌 대중음악가, 그것도 인기 아이돌이 공공미술관에서 블록버스터급 현대미술 전시를 연다니, 그 전시의 내용이 어떻든 곱게 보이지만은 않을 것이다. 한편 지드래곤의 팬덤을 포함한 측에서는 실력 있는 뮤지션인 그의 세계를 다양한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며 반기는 눈치이기도 하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어떤 점에서는 분명히 문제가 많은 전시이다. 그러나 어떤 점에서는 의미나 가치도 존재한다. 때문에 그저 폄하하기 보다는 각계각층의 다양한 견해로 논란이 되는 만큼 다각도의 시선으로 바라볼만한 흥미로운 전시, 아니 ‘문화 현상’이라고 받아들이면 좋겠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공공미술관에서 열리는 현대미술 전시가 미술계 밖에서까지 이렇게 화제가 되는 것이 오랜만이니 말이다.
<피스마이너스원>에 가질 수 있는 일차적인 의문은 지드래곤이 과연 현대미술관에 입성할 만큼 뛰어난 예술성을 갖추고 있는지 여부이다. 사실 대중예술과 순수예술의 경계가 무너지기 시작한 지는 오래 되었다. 평면 작품이나 일부 3차원 작품에 머물렀던 예술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를 맞아 각종 장르와 매체를 넘나들기를 반복하여 때때로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매체로 세계를 표현해내 충격을 안겨주기도 한다. 물론 다양한 장르와 매체의 결합이 시도되고 그 경계가 모호해졌다고는 하나, 예술과 예술이 아닌 것은 구분할 필요는 있다. 아서 단토는 <예술의 종말 이후>에서,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예술은 이전 시대의 예술처럼 특정한 양식이나 규칙에 얽매일 필요가 없이 모든 것이 예술이 될 수 있다고 선언하였다. 현대의 예술이 예술인지 아닌지의 여부는 그 형식의 문제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철학과 개념의 문제라는 것이다.
때문에 작품 자체의 고유한 세계와 완성도가 담보된다면 그것을 표현하는 매체가 대중음악이라고 해서 예술이 아니라고 평가절하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영국의 국립미술관인 빅토리아 앤 알버트 뮤지엄에서 데이빗 보위에게 먼저 러브콜을 보내 그의 개인 아카이브 전시를 개최한 것도 그러한 맥락으로 읽을 수 있다. 지드래곤의 음악이 완성도가 얼마나 뛰어난지는 여기에서 판단할 수 있는 바가 아니지만, 비록 대형 기획사 아이돌인 그의 정체성이나 음악성에 대한 논란이 있을 수 있을 지라도 14년에 이르는 시간 동안 대중음악계에서 활동하며 특색있는 음악과 시각적인 이미지로 ‘지드래곤’하면 바로 떠오르는 고유의 아이덴티티를 구축해왔다는 점은 인정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일각에서는 1만 3천원이라는, 공공미술관으로서는 높게 책정된 관람료나 전시의 상업성에 관해 질타하기도 한다. 그러나 항간에 순수예술 전시라며 개최하는 수많은 대형 전시들이 1만 2천~1만 6천원에 육박하는 관람료를 받고 상업성 짙은 마케팅을 선보이는 것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므로 이것이 문제의 본질이라거나 크게 비난받을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관람료가 저렴해야만 현대미술과 대중이 가까워질 수 있는 것만은 아니다. 일례로 한 번에 한 공간에만 설치 가능한 미술 작품과 달리, 복사된 필름이 전 세계에 동시에 배급되는 영화는 늘 1만원 안팎의 관람료를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료로 개방되는 미술관보다 영화관에 관객이 몰리는 것만 보더라도, 관람료 몇 천원의 차이와 대중과의 거리가 늘 비례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오히려 미술관은 좋은 전시를 제공하여 시민들이 관람료를 기꺼이 지불하고라도 보고 또 보고 싶게 만들고, 그렇게 모인 관람료는 다시 미술관과 현대미술의 발전을 위해 쓰인다면 오히려 그것이 대중과 현대미술의 거리를 좁히는 길이고 미술을 위한 선순환이 아닐까 싶다. 그렇기에 전시의 질이 담보된 상태에서의 합당한 관람료라면 기존 전시들보다 관람료가 높다 하여 덮어 놓고 비난받을 만한 일은 아닐 것이다.
상업성 짙은 아이돌의 전시가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공미술관에서 열리는 것에 대해서도 같은 관점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서울시립미술관이 본래의 운영 방침과 전혀 관계없이 지드래곤의 콘서트나 팬미팅을 개최했다면 이는 응당 상업성 문제로 지탄받아야 한다. 그러나 미술관 측은 시민들이 현대미술을 더 편하고 가깝게 여겼으면 하는 취지에서 마련된 전시라고 그 기획 의도를 밝힌 바 있는데, <피스마이너스원>이 실제로 그 취지에 충실한 전시로서 의도한 효과를 성취하였다면 이는 나름대로 서울시 공공미술관으로서의 역할과 취지에 맞는 행보이니 그다지 문제되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관객은 현대미술을 본 걸까, 아니면 지드래곤의 흔적만을 본 걸까
 
여기까지 지드래곤의 자격과 전시의 상업성에 대한 비판을 조금 부드러운 시선으로 훑고 나면 남는 것은 이제 <피스마이너스원>, 전시 그 자체가 지닌 문제이다. 미술 전시는 그저 복수 작품의 나열이나 집합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이를 기획한 큐레이터가 일정한 시각을 가지고 엮어낸 하나의 이야기이다. 큐레이터가 만든 하나의 거대한 작품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래서 현대미술에서는 단일한 작품의 예술성도 중요하지만 현재 어떠한 전시담론이 생산되고 있는지도 상당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그렇기에 지드래곤과 서울시립미술관이 엮어낸 <피스마이너스원>이라는 작품의 완성도나 예술성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앞서 언급한 비판들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전제는 지드래곤의 예술 및 세계관과 현대미술의 협업이 성공적이라는 것이었다. 기획 의도에 따르면, <피스마이너스원>은 대중음악의 최전선에 있는 대형 기획사 출신 아이돌 그룹 멤버와 고상한 현대미술 작품을 전시하던, 그래서 난해하다는 비판을 면치 못하던 공공미술관이 만나면서 각자 가지고 있던 한계를 깨고 현대의 예술이 지향해야 할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는 데에 그 의미가 있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지드래곤과 서울시립미술관은 이번 전시에서 각자의 단단한 틀을 깨고 나왔는지, 온전히 마주하여 한데 뒤섞여 관객에게 정말 새로운 것을 보여 주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
대중예술과 순수예술의 협업이 환영받는 것은 그 도전적인 신선함 때문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는 무엇이든 예술이 될 수 있고 표현매체의 경계 역시 무너졌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이 가지는 역할은 존재한다. 예술은 기성관념에 대한 혁신과 도전, 체제의 전복을 통해 관객에게 현실 세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는 아방가르드로서 존재해야 하며 물론 그 자신에 대해서도 반복적인 혁신이 지속되어야만 한다. 우리사회에서 순수예술이 대중의 외면에도 불구하고 그 맥락을 이어갈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실험적인 시도를 통해 꾸준히 사회의 한 축으로서 기능해왔기 때문이다. 보기에 단순히 예쁘기만 한 그림이나 친숙한 이미지를 의미 없이 늘어놓는 것을 예술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 이다. 친숙하고 대중적인 이미지를 차용하는 팝아트가 예술이라고 불리는 것은 기존의 시선을 전복하는 실험적 도전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중예술과 순수예술의 협업 역시 우리가 ‘대중예술’이나 ‘순수예술’이라고 틀에 가두어 알고 있던 인식의 전복을 통해 신선한 시각을 제공하는 일종의 도전이기 때문에 같은 범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우리는 표현매체 간의 경계가 파괴된 것과 의미의 마지노선이 무너진 것을 구분하여 경계할 필요가 있다.
<피스마이너스원>이라는 전시 역시 이러한 목적의 실험적 시도라는 점은 분명하다. 또한 예술에 있어서 실험과 도전은 언제나 긍정적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획기적인 포스트모던적 실험이 되었다기보다는 아방가르드와 자본의 결탁 또는 현대미술과 대중의 거리 좁히기라는 그럴듯한 포장으로 단장한 키치가 아닐까 하는 공격적인 질문마저 떠올랐다.
‘지드래곤과 현대미술’이라는 거창한 슬로건과 ‘큐레이터로 변신한 지드래곤’, ‘지드래곤을 뮤즈로 삼아 작업한 현대미술작품’이라는 항간의 이야기들을 듣고, 지드래곤이라는 뮤지션이 조금 더 적극적이고 치밀하게 자신의 예술세계를 드러내길 기대한 것은 너무 큰 바람이었을까. 전시의 알맹이를 살펴보면 지드래곤의 역할은 분명치 않을뿐더러 기대와 달리 미약하다.
실제로 지드래곤이 주도한 공간은 전시의 첫 장인 ‘논픽션 뮤지엄’뿐이다. 지드래곤은 이 섹션에서 개인 소지품이나 수집한 가구와 예술품 등을 통해 자신의 미적 취향을 보여준다. 전시품들에 비해 공간이 작고, 전체 전시품들 간의 큰 맥락은 없지만 그의 취향을 가늠할 수 있을 정도이다. 그런데 그 후 이어지는 현대미술 작가들과의 협업전시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 모호하게 느껴진다. 지드래곤이라는 주제 아래 모였지만 그들이 같은 사람을 논하고 있는 것인지는 의문스러웠다. 일부 작가들은 지드래곤에게 영감을 받은 듯도 하지만 그와 관련 없이 벌여 놓은 판을 통해 그저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는 작가들도 있다. 지드래곤에 대해서 잘 알고 그의 세계에 대한 면밀한 파악을 통해 작품을 제작한 작가는 손에 꼽을 정도이다.
결과적으로 대중에게 친숙하게 다가간다고 하기에는 전시 자체가 난해한 작품이 되어 버렸다. 물론 현대미술은 작품 자체가 난해한 경우가 많지만, 그 난해한 작품들을 구슬을 꿰듯 잘 꿰어 이해하기 좋게 연결하는 것이 기획자의 역할이다. 그러나 <피스마이너스원>은 어떤 이유에선지 모르겠지만 작품 개개의 난해함을 떠나서 전체적인 맥락이 끊겨 관객으로서는 이해하기가 어렵다. 때문에 흥행을 위한 첨병으로 지드래곤을 세워 놓았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려운 것이다.
현대미술과 대중음악의 가슴 벅찬 협업의 결과물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한 분야에서 14년 째 활동하고 있는 뮤지션의 예술세계의 맥락 정도는 조망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으나 이 전시에는 지드래곤이 없다. 전시 개막 전의 화려한 이야기들과는 달리 그는 작가, 뮤즈, 큐레이터, 콜렉터 중 어느 하나라고 규정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줏대 있게 전달하고 싶은 그만의 강령도 찾아내기 어렵다. 차라리 배우 하정우나 가수 솔비처럼 직접 그림을 그려 전시를 열었다면, 작품 자체만 보고 평가하면 되기에 이토록 곤란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드래곤이 자신을 통해 현대미술과 대중이 가까워지길 바란다며, 아직은 처음이니까 낯설어 보일 수 있다며 수줍게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저 예쁘고 멋진 것이 좋아서 보여주고 싶었다고 순진하게 말하기엔 그의 이름으로 벌어진 판이 너무나 크다.
물론 전시에는 메르스 여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어린 학생들과 젊은 여성 관객들이 몰렸으니 전시의 목적을 어느 정도는 달성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이 이 전시를 보고 현대미술을 이해했다고, 아니 최소한 감정적으로라도 가까워졌다고 단정하는 것은 무리이다. 그들은 현대미술을 감상하고 간 것일까, 아니면 지드래곤의 흔적을 더듬다 간 것일까. 서울시립미술관 1층에는 원로작가인 윤석남의 수십여 년간의 작품세계를 조망할 수 있는 전시가 무료로 열리고 있고, <피스마이너스원>과 연결되는 3층 전시실에서는 천경자의 상설전이 역시 무료로 개방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 전시장에서는 관객의 그림자를 찾아보기 어려웠던 것이 위 질문에 대한 답을 대신해줄 것이다.
 
 
 
 
지드래곤 전시의 의의
 
미술계는 지금까지 순수예술에 대한 철옹성을 단단하게 쌓아왔다. 그 벽이 너무도 견고한 나머지 대중은 등을 돌렸고, 일부는 고상한 척하는 예술을 비난했다. 대중예술과 순수예술의 경계가 모호해진 지금, 그 벽을 허물기 위해 대중예술에게 함께 앉을 자리를 내어줄 필요도 있을 것이다. 아니, 더 적극적인 협업을 통해 그 영역을 확장하고 사회의 공감을 이끌어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현대미술은 너무 외로웠다. 그런 관점에서 현 대중음악계에서 큰 영향력이 있는 지드래곤의 예술세계와 현대미술 간의 크로스오버가 이루어졌다는 것은 신선하고 놀라운 도전임이 명백하다.
앞서 잠시 이야기한 데이빗 보위의 전시도 맥락은 같지만, 보위는 자신의 예술세계와 관련된 자료들을 수집하는 개인 아카이브를 가지고 있고 이를 관리하기 위한 전문가가 상시 근무하고 있다. 그 방대한 아카이브에 미술관의 공연 전문 아키비스트들의 치밀한 기획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에 전시를 통해 보위의 예술세계 전체를 조망할 수 있었고 극찬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 비슷한 전시를 뉴욕현대미술관에서 열었던 아이슬란드 뮤지션 뷔욕은 그녀의 음악이 인정받아온 것과는 별개로 모호한 컨셉의 전시에 대한 비판을 감수해야 했다.
국립미술관인 빅토리아 앤 알버트 뮤지엄이나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전시를 여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대형 전시를 개최한다는 것에 대한 책임은, 신선한 시도 그 자체로 모든 것을 무마하기에는 적지 않은 무게이다. 때문에 지드래곤은 <피스마이너스원>이라는 전시명이 자신의 세계관을 의미한다고 했던 것처럼, 전시를 통해 조금 더 큰 목소리로 자신의 이야기를 했어야 한다.
물론 지드래곤은 소속사가 있는 가수이기에 이 전시의 주도권이 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지드래곤의 창작의 범위를 넓혀’ 가장 큰 상품인 그의 가치를 업그레이드 하고 싶은 소속사의 욕심과 그를 흥행 코드로 이용하여 대중이 더 찾는 미술관을 만들고 싶은 서울시립미술관에게 그 힘의 축이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어쩌면 두 주체의 욕심의 협업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을지도 모르겠다. 때문에 이 전시는 온전히 지드래곤의 것이기 보다는, 아무래도 소속사와 미술관이라는 대필가가 엮어 준 자서전의 흔적이 물씬 느껴진다. 이를 부정하기에는, 한 번의 유료 관람마다 8분의 1조각씩 제공되어 무려 8번의 관람 끝에 완성할 수 있다는 지드래곤의 포스터 조각과 분명 청소년 관람객을 겨냥한 것으로 보이는 종류의 아트샵 상품들이 민망할 따름이다.
물론, 예술과 자본을 떼어 놓고 논하기는 어렵다. 역사적으로 예술의 발전 뒤에는 늘 막강한 자본의 움직임이 존재해 왔기 때문이다. 자본이 무조건 예술에 해가 된다고 단정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겉으로는 자본주의를 멀리하는 척하며 사실은 속으로는 자본을 탐하는 것 아니냐며 예술을 가식적이라 비난하는 시선도 때때로 존재한다. 분명 자본을 탐하는 예술가들도 존재한다. 그러나 그런 부분이 존재한다고 해서 모든 예술이 대놓고 자본을 탐하기 시작하면 진정한 아방가르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예술은 구태의연해질 것이다. 예술이 의식적으로라도 자본에게서 고개를 돌려야 하는 이유이다.
물론 앤디 워홀이 그랬었고 제프 쿤스가 그러하듯이 상업성을 전면에 내세운 예술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작품은 상업이 그 본질이라기보다는 그러한 과정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 대량생산 사회를 풍자하는 데에 의미가 있다. 그래서 현대미술에서 상업성의 부각과 자본주의의 결탁을 곧바로 같은 것으로 이해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러면 다시 <피스마이너스원>으로 시선을 돌리자. 이 전시는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가. 무엇을 풍자했는가, 혹은 무엇에 도전했는가. 혹자는 현대미술과 미술관의 권위적인 모습에 도전한 것이라고 하나, 실제 전시의 속살은 그 기세가 너무도 약하다. 오히려 이 전시에 결부된 여러 이해관계들의 모습이 한 편의 풍자극이라면 더 어울릴 것이다. 진행 과정 전체가 하나의 예술작품이라면, 어쩌면 그들은 현대사회를 도전적으로 풍자하는 데 성공했는지도 모른다.
이 전시는 각자의 필요가 결합되어 나타난 결과물이다. 지드래곤은 예술성에 대한 공고한 인정이 필요했기에 아이돌이라는 세계를 부수고 나와 예술가가 되려고 했고, 반대로 대중의 관심에 목말라 있었던 현대미술은 자신이 쌓은 벽을 넘어서 새롭게 태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그들 각자의 세계는 둘 다 생각보다 견고하고, 이들이 세계를 파괴하는 방법은 아직 미숙하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실험적 시도라는 사실 자체는 여전히 긍정적이다. 그 혁신의 가치까지도 다른 부정적인 요소들과 함께 비판 아래 매몰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지드래곤은 이제 겨우 스물여덟 살의 뮤지션이다. 서울시립미술관은 최근 들어 대관 전시를 줄이고 자체 기획한 현대미술 전시를 통해 시민에게 다가가려고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현대미술은 세상 밖으로 나오기 위해 과거에도 현재도 자기 자신의 벽에 온 몸을 다해 부딪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벼이 관심을 거두지 말고 지속적으로 지켜보아야 한다. 이들이 각자의 알을 깨고 나와 새로운 세계와 마주하기를, 그리하여 서로의 세계를 넘나들다가 마침내 더 큰 세계를 만들어내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글·김지연
홍익대학교 예술학과를 졸업하고 경북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에서 법무석사를 받았다. 오랜 기간에 걸쳐(2006~2008년) 싸이월드 페이퍼와 올리브TV홈페이지 등에 미술에세이를 연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