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르 드 프랑스’에 얽힌 도핑, 스캔들, 상업주의…

황금알 실어나른 자전거 경주 대회, ‘스포츠 정신의 실종’
사이클 대회에 흥미 잃은 젊은이들의 관심 돌리기가 관건

2009-08-06     다비드 가르시아/기자 겸 작가

오랫동안 침묵 속에 있던 도핑 사건이 ‘투르 드 프랑스’(프랑스 일주 자전거 경주)의 마크가 됐다. 암 투병 중인 로랑 피니옹이 사건의 규모를 감안해 폭로했다. 하지만 어둠 속에 방치돼 있는 여타 스캔들, 가령 투르 드 프랑스의 소유주인 아모리 일가가 투르에서 챙기는 기록적인 수익이 말해주듯, 스포츠 윤리 위반에 대해서는 관대하다. 투르 대회와 수익을 지속적으로 챙길 모든 준비가 돼 있다. 랜스 암스트롱의 복귀가 이를 어떻게 설명해줄까?


앙투안 블롱댕은 “‘투르 드 프랑스’의 장점 중 하나는 1년 내내 세상을 뒤흔드는 사건들의 규모와 반향이 어느 정도이든 그것을 잊게 해준다는 것인데,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귀를 쫑긋 세우고 투르 드 프랑스를 헐뜯을 구실만 찾는다”며 안타까워했다.(1) 그를 화나게 할 얘기겠지만, 여름마다 유독 투르 드 프랑스만 몰매를 맞고 있으니 사실이 그렇지 않은가! 지나친 언론 플레이, 황금만능주의, 연이어 터지는 도핑 사건…, 노동계급의 전통적 휴가철인 7월의 대축제(투르 드 프랑스)가 일부 개인들의 탐욕에 의해 몰수된 채 거대한 광고 이벤트와 돈벌이 비즈니스로 전락해버렸다.

투르 드 프랑스가 “돈 찍어내는 기계”인가? 투르 드 프랑스의 전 대회장 장마리 르블랑의 측근이자 <사이클의 영광> 시리즈물의 발행인인 크리스토프 프노는 “‘7월의 꿈’의 의미를 깎아내리기 위해 단순히 돈 찍어내는 기계로 정의해버리는 것은 기업의 행보를 전혀 모를 뿐만 아니라, 오픈 마인드가 부족해서”라며 격한 반응을 보였다. 그에 따르면 이 축제를 완벽하게 조직하려면 비용이 필요하다는 데 모든 사람들이 동의하고 있고, 위험부담을 떠안는 프로모터들이 수익 배당금을 챙기는 것은 당연지사다. 물론 그 배당금이 클 수도 있으나 이것이 경제 교류를 바탕으로 하는 사회에서 게임의 규칙이라는 얘기다. 하지만 게임은 기득권을 톡톡히 누리는 투르 드 프랑스의 소유주인 아모리(Amaury) 일가가 매번 이기게 돼 있다.

예컨대 ‘아모리스포츠 기구’(ASO)가 벌어들이는 수입의 70%는 투르 드 프랑스에서 나온다. 이 회사는 정기적으로 대회 수익의 20%를 챙기고 있다. 2007년 아모리그룹이 거둔 3천9백만 유로의 수익 중 2천9백만 유로를 ASO가 올렸다. 이 푸짐한 배당을 챙기는 주인공은 개인재산이 2억2천8백만 유로(2)에 이르고 프랑스 부자 순위 166위에 올라 있는 그룹 회장 마리오딜 아모리 여사다.

스포츠 대회의 ‘순수치 못한’ 사유화

아모리 일가는 이 문화 유산이 100% 사유재산이라며 고까운 눈길을 피하고 있다. 한편 1998년 프랑스 주간 풍자신문 <카나르 셰네>(Canard encha?n?)는 “아모리 일가가 경주 수익과 도시 구간 사용료를 챙기고 있다. 1992년부터 투르 드 프랑스사는 회계장부 공개는 물론 낭테르 상사법원의 기록보관소에 장부를 제출하는 것도 거부하고 있다”고 폭로했다.(3) 2년 후, 릴 지방법원 또한 페스티나 사건(4) 판결 당시, 아모리그룹의 제도적 허점을 지적하며 수익 공개는 법적 의무라고 못박았다. 이를 위반하면 예외 없이 벌금 1500유로가 부과되며, 재범 땐 3천 유로를 부과한다고 상법에 명시돼 있다. 이 액수는 단순 벌금으로는 다섯 번째로 크지만, 별반 효과는 없다.

원칙적으로 투르의 공적 후원자들이 나서 민간 파트너인 아모리스포츠기구 쪽에 해명을 요구해야 한다. 그러나 이들은 입을 꼭 다물고 있다. 프랑스 도의회협의회(ADF) 의장 클로디 르브르통은 투르 드 프랑스의 탄탄한 재정 상태를 모르고 있다는 듯 마지못해 “만약 아모리사가 이익을 내고 있다는 판단이 서면, 우리는 그 결과에 대한 해명을 요구할 수도 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투르가 흑자를 낸다는 것은 그가 이사회 의장으로 있는 코트다르모르 지방을 비롯한 모든 지역에서 공공연한 사실이다. 자고로 확실한 금전관계가 좋은 친구를 만든다. 아모리스포츠기구는 프랑스 도의회에 임대료 명목으로 연간 27만 유로를 지불하고 도로를 임대받아 투르 드 프랑스의 사적인 용도로 쓰고 있다. 소소한 금융 지원 말고도, 도(道)들은 3주간의 홍보를 거의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예스러운 머리에 얇고 섬세한 안경을 끼고 다니는 세련미 넘치는 60대, 르브르통은 사회·공화주의 의원 국민연맹의 의장직도 맡고 있다. 그는 1995년 자신이 사랑하는 코트다르모르가 투르 드 프랑스에 참가해 경제 효과를 톡톡히 봤다며 자랑이 여간 아니다. “경기 일주일 전에 호텔과 식당이 꽉 찼다. 방문객이 4500명에 달했다. 이들이 평균 150~200유로를 썼다. 계산해봐라….” 간단히 말해 “투르는 아주 멋진 소통 매개체다. 텔레비전 캠페인과 비교해 품질과 가격 면에서 비교할 수 없다. 수익성도 월등하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투르 드 프랑스를 계속 유치할 것이다.” 예컨대 법을 위반하는 아모리스포츠기구를 눈감아주겠다는 뜻이다.

 


운영 투명성 요구하는 목소리

 

또 다른 사회주의자인 브르타뉴 출신의 에드몽 에르베 전 렌 시장은 약간 더 세게 나왔다. 그는 부드러운 말투로 “정말 투명성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모든 도시가 투르 드 프랑스사와 협상하는 데 동의해야 한다. 프랑스시장연합과 ADF가 이 문제를 다뤄야 한다”고 주장했다. 말은 쉽지만, 힘의 역학관계에서 아모리그룹이 우위를 차지하고 있어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2009년, 아모리스포츠기구는 250곳으로부터 투르 구간 후보 참가 신청서를 받는 신기록을 세웠다. 인상적인 건 대도시들이 다시 투자에 나선 것이다. 2007년 투르 출발지로 선정된 런던이 1억7200만 유로라는 막대한 수익을 올리고, 아모리스포츠기구가 경기 서비스 제공료로 150만 유로를 챙기자, 그 영향을 받아 유럽의 대도시들이 투르 구간 참가에 군침을 흘렸다. 이 중에는 부다페스트와 로테르담(2010년 투르 출발지)이 포함돼 있고, 카타르, 퀘벡 그리고 일본 등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

2006년 렌시는 투르 구간을 유치하기 위해 아모리스포츠기구에 7만6천 유로를 지불했다. 투르 드 프랑스의 위원장 크리스티앙 프뤼돔은 이는 위장 보조금과 무관하다며 “애걸복걸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도시들이다. 우리는 그 도시들에 서비스를 제공하고 대가로 도시들이 우리에게 돈을 지불하는 것뿐”이라고 주장한다. 자신들의 경쟁자가 이 돈 바구니를 챙길까봐 지레 겁먹은 시의원들은 아모리그룹이 강요하는 계약 내용을 논의도 거치지 않고 수용했다. 아모리스포츠기구는 지자체들이 행여 이 축제에서 부스러기 수익이라도 챙기지나 않을까 해서 수익을 철저히 감시한다. 모든 종류의 광고 경쟁이 협정에 따라 금지돼 있다. 출발지에서부터 도착지까지 전 구간에서 오직 투르 드 프랑스사의 파생상품(모자·티셔츠·운동화)만 배포할 수 있다.

25년 전만 해도 열렬한 사회주의 운동가였던 에드몽 에르베 렌 시장은 “우리가 투르를 개최한 1977년만 해도 비즈니스 업계에서 스포츠는 뒷전이었다. 선수들은 10분만 볼 수 있고, 광고 행렬을 3시간 동안 보기 위해 20만 프랑씩이나 비용을 퍼부었다”고 맹렬히 조롱했었다. (5) 당시까지만 해도 좌파 정부는 스포츠에서 이익 추구를 배제하겠다는 야망이 있었다.

투르 드 프랑스 부위원장을 거쳐 위원장(1975~89)을 지냈던 그자비에 루이는 끔찍하고 혼란스러운 여담을 상세히 들려줬다. 1981년 5월 사회당 의원 에드위주 아비스는 체육부 장관으로 임명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투르 드 프랑스의 우파 편향 고위직에 반대하면서, 투르 운영에 대한 광고주들의 지나친 개입을 비판했다.

본질을 망각한 광고주들의 지나친 개입

투르의 전 공동위원장 펠릭스 레비탕의 오른팔인 그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당시 상황을 묘사했다.

“아비스는 우승자의 영광을 위해 연주하는 프랑스 국가를 부동산업자인 메를랭(6)이 후원한 것은 스포츠에서는 적절치 않다고 믿었다. 선수들에게 광고용 유니폼을 입히는 것은 ‘인간 광고판’을 내세우는 것과 같다. 그보다는 광고와 스폰서 명단을 경기장이나 물건에만 허용하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7) 하지만 현실적으로 투르에 대한 광고주들의 영향력을 규제하는 법을 제정할 수는 없다. 극좌파 공산당에서 극우파 국민전선에 이르기까지, 좌파신문 <뤼마니테>에서 우파신문 <피가로>에 이르기까지, 당파의 차이를 넘어 투르 드 프랑스를 숭배한다. 조직위원, 미디어, 정치권의 신성한 단합이 철저히 “투르는 문화 유산에(8) 속한다”는 지배적인 의견을 영속시키는 데 한몫하고 있다. 투르를 마치 에펠탑처럼 취급하지만, 개인이 투르 드 프랑스의 이득을 다 챙기고 있다는 것은 짚고 넘어가야 한다.

하지만 아모리그룹은 손해를 감수하며 자신들 소유의 다른 사이클 대회, 특히 파리·니스, 플레시 발론, 리에주~바스톤~리에주 대회를 금융지원하는 공적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고 자랑한다. 투르 드 프랑스의 전 사장 장마리 르블랑은 아모리스포츠기구가 사이클 분야에 배분하는 수익 비율에 대한 일간 <뤼마니테>의 질문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채, 투르 드 프랑스와 파리~루배 투르를 제외한 여타 경기에서는 투르사가 단 한 푼도 수익을 내지 못한다고 답했다. 그는 수치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없이 “내가 백번 양보해도 수익이 별로 안 된다. 아무튼 커 보이지 않는다. …자금 손실을 봐가며 수백만 유로를 후배들과 주니어 선수들에게 쏟아부을 수야 없지 않은가! 어쨌든 정황을 참작해 투르의 책임감을 상대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사이클연맹을 대신해 모든 일을 처리하지는 않는다. …그러면 사람들은 우리를 제국주의자들이라 비난할 테니까”라고 했다.(9) 피에르 발레스테르 기자에 따르면(10), 아모리스포츠기구가 사이클 대회 증진 및 발전을 위한 사이클연맹 프로젝트에 내는 기금은 대략 120만 유로다. 하지만 투르 드 프랑스의 파이에 탐욕스런 눈길을 보내는 프랑스사이클연맹(FFC)은 가엾은 욥처럼 굴며, 절대로 언성을 높이는 법이 없이 아주 예절 바른 소시민같이 행세하고 있다.

투르 창설은 언론과 정책의 합작품

투르 드 프랑스의 노란 유니폼 셔츠(마요 존·maillot jaune)의 스폰서 은행인 크레디리오네에서 커뮤니케이션을 담당했던 니콜라 셴은 결코 이런 상황을 고발할 위인이 아닌 듯싶었다. 그러나 그는 은행을 그만두기 전날 “물론 내가 아모리스포츠기구의 내 친구들을 비난하는 일을 없을 것이다. 난 그들을 무척 좋아한다. 하지만 그들이 수익을 조금 덜 과다하게 챙기는 대신 선수들이 조금 더 챙기게 해주거나 젊은 선수들 훈련에 더 나은 금융 지원을 한다면, 난 그들을 그만큼 더 좋아할 것이다!”(11)라며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었다.

이런 식의 악의적인 반응에 전·현직 투르 책임자들은 발끈한다. 이들은 여러 해 고생 끝에 기업인으로서 보상받고 있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누누이 강조했고, 최근까지만 해도 사이클 대회 상황이 월말을 나기 어려울 정도로 힘들었지만 투자자들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1903년, 스포츠신문 <로토>(L‘Auto)는 일간 스포츠신문 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경쟁 신문 <르벨로>( Le V?lo)를 견제하기 위해 섹션 ‘사이클 경기’ 담당 기자 제오 르페브르의 제안에 따라 ‘투르’를 고안해냈다. 결과는 관리인 빅토르 고데와 투르 드 프랑스의 창시자로 간주되는 사장 앙리 데그랑주의 기대치를 뛰어넘었다. 1903년 7월 <로토>의 일일 판매 부수는 3만 부에서 6만5천 부로 상승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스포츠 일간지 <스포츠 세계>(Le Monde sportif)와 <레스포츠>(Les Sports)는 경영 악화로 폐간됐다. 일간 <로토>가 시장을 독점하는 상황이 됐다. 피에르 샤니 기자는(12) “투르 드 프랑스의 아버지(13)와 그의 후임들은 이런 인과관계를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전쟁 이후 <로토>의 상속자이자 빅토르의 후손 및 앙리 데그랑주의 정신적 아들인 자크 고데 또한 일간 <레퀴프>를 가지고 <로토>만큼 실적을 내는 데 성공한다. 물론 투르 드 프랑스를 되찾기 위해 싸워야 했다. 독일 강점기에도 지속적으로 발간됐던 <로토>를 해방 정부가 청산하고 투르 드 프랑스를 기탁관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46년, 국가는 투르 드 프랑스를 경쟁입찰에 부쳤고, <레퀴프>와 일간 <공산당 스포츠>(l##e quotidien d’ob?dience communiste Sports)가 입찰에 응했다. 투르 드 프랑스가 대중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인식하게 된 ‘공산당원들’은 투르에 대한 자신들의 비판적 시각을 전쟁 이전에 비해 누그러뜨렸다. 1920년대, <뤼마니테>는 앙리 데그랑주 사장이 사이클 경기 선수들을 착취하고 있다고 규탄했다. ‘사장들의 몽둥이찜질 아래에서’란 기사를 통해 대부분 농부와 노동자 출신인 선수들이 박봉과 초인적인 행군에 시달리고 있다고 고발했지만, 당시만 해도 말에 책임지는 일은 없었다.

자크 고데는 에밀리앵 아모리의 지원 덕분에 입찰을 받는다. 드골 진영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일간 <파리지앵 리베레>의 사장 에밀리앵이 독일 협력자로 의심받던 자크 고데를 감싸고 돌며 보증을 섰다. 하지만 이런 하해와 같은 은총은 그 대가를 치러야 했다. 고데는 투르 드 프랑스의 지분 50%를 자신의 은인에게 바쳐야 했다. 남은 지분 반은 1965년 <레퀴프>와 동시에 아모리의 지갑 속으로 들어갔다.

새 사주의 수족인 <파리지앵 리베레>의 스포츠 담당 펠릭스 레비탕은 1962년부터 투르 공동위원장으로 승진해, 회사의 지시 아래 투르를 가내공업 수준에서 산업시대 수준으로 변화시킨다. 여름철에만 신문 판매에 박차를 가하는 것이 성에 찰 리 만무했다. 에밀리앵 아모리는 투르 경기 자체에서 수익이 나길 원했다. 그래서 1973년 모든 면에서 상징적인 ‘투르 드 프랑스 운영회사’가 탄생한다. 회사명이 너무 눈에 띈다고 생각한 펠릭스 레비탕은 1980년 회사명을 ‘투르 드 프랑스사’로 줄였다. 전 사이클국제연맹 회장 하인 페르브루겐은 “레비탕이 없었다면 투르 드 프랑스는 지금처럼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스폰서 체결 및 구간 도시들과의 협의 그리고 텔레비전 중계의 경제적 잠재력을 촉진시켰다”며 그를 두둔했다.

유료 채널들은? 스포츠 분야에 매달리는 기자가 프로그램 편성 기자보다 더 많았다. 자크 고데는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투르사는 1979년 채널 TF1과 첫 투르 ‘TV 방영권’을 계약료 250만 프랑에 체결했다.

되찾기 힘든 스포츠 축제 정신

1987년 레비탕은 꺼림칙한 회계 조작 사건에 연루돼 해고됐다. 그 후임들은 투르의 변화를 시도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작은 가족 기업은 다국적기업처럼 운영되며 그룹으로 변신했다. 투르 드 프랑스의 축제 정신인 동반자 정신은 실적과 마케팅 문화에 치여 자취를 감췄다. 엄격한 정장 차림이 요구되며 폴로 티셔츠와 캐주얼 셔츠가 블레이저 넥타이로 대치됐다. 재단장된 내빈 의전 단상과 함께 ‘출발지 마을’이 TV에 소개됐다. ‘일반인’의 출입을 막는 바리케이드 안쪽, 폐쇄된 공간에는 출입증을 목에 건 ‘VIP’와 엄선된 초대손님들이 거닐었다. 투르 드 프랑스의 전신이라 할 ‘미래의 투르’(Tour de l‘Avenir)의 창립자인 자크 마르샹은 이런 사이클의 파생사업에 대해 “투르의 사업이 지나치게 상업적으로 변질됐다. 물론 사업 측면에서야 효과를 보겠지만, 사이클 측면에서 보면 비이성적인 행태다. …명문 국립행정학교(ENA) 출신 전문가들처럼 행세하는 사람들이 스포츠를 침탈해 이를 황폐화시키고, 스포츠에 엄청난 타격을 주고 있다”고 지적했다. 마르샹은 88살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투르의 불합리성을 규탄했다.(14)

TV 방송사들에 이어, 후원자들도 소액 기부금을 냈다. 투르사의 임시 본부장 장피에르 쿠르콜은 1989년까지만 해도 투르사와 계약한 자동차 회사는 경주 기간 동안 공식 차량만 제공하면 됐지만, 이제 “그걸로는 불가능하다”며 불쑥 목소리를 높였다. 푸조의 스포츠 담당 장 토드는 기부금을 더 내라는 소리를 농담으로 알고, 연간 50만 프랑(2000년 기준/1유로=6.56프랑) 이상은 못 내겠다고 버텼더니, 액수가 충분치 않다고 판단한 투르사의 사장이 프랑스 피아트 사장을 찾아갔고, 피아트에서 600만 프랑을 제시하자 이를 즉시 수락했다고 전했다.

투르 드 프랑스의 주가는 페스티나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 계속 상승했다. 1970년대 홍보기업의 세계적 리더인 아바스(Havas)에서 교육받은 광고인 장피에르 쿠르콜이 1990년 아모리그룹의 회장으로 임명되며 자신의 특기를 발휘했다. 그는 철저한 준비 끝에 스포츠 이벤트 조직을 담당하는 자회사를 세워, 투르를 핵심 사업이자 보석으로 키웠다. 1992년에 등장한 아모리스포츠기구는 스포츠 옹호론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스폰서들의 권력 행사를 승인했다. 이후, 투르 드 프랑스의 위원장은 재계 출신 회장 아래로 편입됐다. 스포츠 담당 기자 출신의 자크 고데 전 투르 위원장이 자신의 합법적 후계자로 내세운 <레퀴프>의 사이클 대회 담당 기자 장마리 르블랑은 장클로드 킬리 회장과 함께 의논을 해야 했다.

사리사욕을 채운 실무책임자들

킬리는 1968년 그로노블 동계올림픽 알파인스키 3관왕 출신으로서, 손댄 사업마다 모두 성공한 사업가로 명성이 자자했던 인물이다. 25살에 스키 선수 생활을 그만둔 뒤, 세계 주요 스포츠 마케팅 회사 중 하나인 IMG를 창립한 미국인 마크 매코맥 자동차 레이싱팀에 입단한 킬리는 캐논·시보레·롤렉스 등을 광고하며 미국에서 광고계의 아이콘이 된다. 킬리는 자신의 이미지를 비싼 값에 팔아 돈을 챙긴 초기 챔피언들 중 한 명이다. 1969~70년에 그의 은행 계좌에는 꽤 큰 돈인 200만 달러가 예치돼 있었다.(15) 아모리스포츠기구 회장으로 임명되기 전날 킬리의 재산 평가액은 1억2천만 프랑(1830만 유로)에 달했다.(16) 이후 킬리는 제너럴모터스 홍보 대리인, 유나이티드항공 마케팅 자문위원, 겨울 스포츠복 벨레다(Veleda)의 디자이너, 국제 롤렉스 자문위원 등을 거치며 대기업 총수로서의 모든 면모를 갖추게 된다. 게다가 킬리는 대중적 인기와 상업적 성공을 거둔 전 알베르빌 올림픽(1992년) 조직위원회 공동위원장을 지낸 덕분에 많은 정치인들과도 교분을 쌓았다.

냉혹한 협상가인 아모리스포츠기구의 사장 알랭 크르첸토우스키와 그의 저돌적인 단짝 본부장 장클로드 블랑은 그룹이 낼 수 있는 수익성의 한도를 높여갔다. 이들은 TV 채널 <앙텐2>(Antenne2)에서 연간 3200만 프랑이던 방영권료를(17) 두 배 올려 6천만 프랑(910만 유로)을 받아냈다. 전 마케팅 분야의 부책임자 장클로드 에로는 “아모리스포츠기구가 분명 킬리 시대에 차원이 달라졌다”고 지적했다. 1993년 3천만 프랑이던 회사 수익이 두 배로 증가했고, 7년 후 이 세 사람은 노다지를 챙겨 회사를 떠났다. 동전의 이면처럼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나눠가질 수는 없는 모양이다. 투르 이사회에서 5년간 일하다 1993년 토사구팽당한 장피에르 카랑소는 “TV 방영권료가 급상승하며 일부 협상할 수 없었던 부분을 선수들에게 줘야 했지만, 킬리가 끝까지 못 주겠다고 버텼다”며 치를 떨었다. 그는 심지어 킬리가 “자네가 무슨 말을 하건 난 오직 돈 생각밖에 없다”는 말을 했다고 털어놨다.

모든 열정과 마찬가지로, ‘돈’에 대한 사랑이 일부 월권 행위로 이어질 수 있다. 페스티나 사건으로 투르 드 프랑스가 발칵 뒤집혔을 때, 킬리는 코카콜라 이사회 참석을 위해 이 회사의 세계본부가 있는 애틀랜타로 훌쩍 떠났다. 그가 투르를 사랑했다면 주주총회 참석 배당금에 목을 매진 않았을 것이다. 2003년 잡지 <기업>으로부터 기업가정신상을 받은 그는 도핑 사건 이후 두문불출했다. 그는 스캔들 냄새를 맡고 덤벼드는 언론들을 장마리 르블랑에 떠맡겨 혼자 처리하도록 한 뒤, 언론과 두어 번에 걸친 짤막한 인터뷰에서 이 사건이 스포츠 ‘사건’의 역사에서 가장 큰 도핑 사건 중 하나라는 확인만 해줬다.(18)

프랑스 남동부의 사부아를 고향처럼 여겼던 그는 2000년 협상을 통해 아모리그룹과 결별하며 손해보상금으로 5천만 프랑(750만 유로)을 챙겨 보란 듯이 회사를 떠났다. 그의 수족인 알랭 크르첸토우스키는 회사를 떠나며 ‘단지’ 3200만 프랑밖에 챙기지 못했다. 그러나 운명의 장난처럼, 떼려야 뗄 수 없는 이 두 사람은 사주인 아모리 여사의 요청에 따라 2008년 업무에 다시 복귀했다. 판매량 감소에 긴장한 그녀는 TV 시청률 감소가 증명하듯 추락하고 있는 투르 드 프랑스의 유명세를 회복시킬 방안을 모색하라고 직원들을 닦달하고 있다. 1997년만 해도 평균 510만 명의 프랑스 시청자들이 월드컵, 올림픽게임 다음으로 세계에서 세 번째로 많은 국가들(170개국)에서 방영되는 이 스포츠 대회를 시청했다.(19) 10년 후에는 그 수가 360만 명에 그쳤다. 도핑 사건과 사이클 대회에 흥미가 없는 젊은 세대가 늘면서 투르 드 프랑스의 쇠퇴를 막는 데 총력을 쏟고 있던 필리프 아모리의 미망인은 최고의 미디어 스타 랜스 암스트롱의 경기 복귀를 대환영할 수밖에 없었다. 투르 드 프랑스의 7회 우승자인 암스트롱이 관행적으로 도핑을 했다고 <레퀴프>(20)가 앙케트를 통해 구체적인 물증을 제시했지만 부질없었다.

글 · 다비드 가르시아 David Garcia
<위대한 사기>의 공동 저자(장피에르 드 몽드나르와 공동 집필), 출판사 <위고>, 파리, 2009

번역 · 조은섭 chosub@ilemonde.com 



<각주>

(1) 앙투안 블롱댕, <투르 드 프랑스에 대해서>, La Table ronde 출판사, 파리, 1977.
(2) 잡지 <Challenges>, 파리, 2008년 7월 10일~8월 27일.
(3) 주간 <Le Canard enchaîné>, 파리, 1998년 11월 11일.
(4) 1998년 투르 드 프랑스 대회 기간에 터진 이 사건으로 앙도라 팀 내에서 조직적으로 이뤄진 마약 거래가 세상에 알려졌다.
(5) 1982년 6월 주간 <Le Canard enchaîné> 자료 참고.
(6) 당시 부동산업자 기 메를랭은 투르 드 프랑스 우승자에게 원룸을 제공했다.
(7) 그자비에 루이, <투르를 압시다!>, Prolongations 출판사, 이시레물리노, 2007.
(8) <뤼마니테>, 파리, 2003년 7월 5, 6일.
(9) Ibid
(10) 피에르 발레스테르, <투르에 불어 닥친 태풍>, Rocher 출판사, 파리, 2008.
(11) 피에르 샤니 및 티에리 카젠뇌브, <투르 드 프랑스의 놀라운 이야기>, Minerva 출판사, 파리, 2004.
(12) 크리스토프 프노, <투르 드 프랑스의 인사들>, Cristel 출판사, 생말로, 2003.
(13 )자크 마르샹, <벨로드롬>, Calmann-Leévy 출판사, 파리, 2008.
(14) 에릭 메트로, <스포츠와 TV>, Flammarion 출판사, 파리, 1995.
(15) 티에리 뒤사르, <장클로드 킬리>, Lattès 출판사, 파리, 1991.
(16) 2009년 프랑스 텔레비전은 투르 드 프랑스 방영권료로 ASO에 2300만 유로를 지불했다. 1992년보다 두 배 오른 것이다.
(17) 2009년 ASO는 300만 유로를 투르에 참가한 팀에게 돌려줬다.
(18) 채널 TV <프랑스2>, 1998년 7월 10일.
(19) 피에르 발레스테르, 앞의 책 참고.
(20) <암스트롱의 거짓말>, 2005년 8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