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 없는 세상엔 민주주의도 없다

[서평] ‘민중에서 서민으로’ (최장집 지음)

2009-08-06     최성진 <한겨레21> 기자

<민중에서 서민으로> / 최장집 지음, 돌베개 펴냄, 1만3천원

한국 사회에서 정치가 소비되는 방식은 어떻게 보면 편향적이다. 정치권은 언제나 이전투구의 장이고 정치인은 냉소와 조롱의 대상이다. 물론 정치를 조롱하고 혐오하는 것은 대중이 누려야 할 마땅한 권리일지도 모른다. 그에 따른 책임을 지는 것도 그들 자신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정치 혐오증의 기원이다. 마침 2009년 7월 31일치 <조선일보>에 이런 사설이 실렸다. “조석래 전경련 회장이 29일 제주도에서 열린 전경련 하계포럼에서 ‘정치가 얼마만큼 우리에게 도움을 줬느냐고 묻고 싶다’며 ‘우리 정치 상황을 보면 문제를 해결해주기보다는 문제는 만든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치권 어느 누구도 전경련 회장의 발언을 드러내놓고 반박하기 힘든 것이 한국 정치의 현실이다. 작년부터 올해까지 국회가 드러낸 추한 모습을 보아온 국민 대다수가 ‘이런 비판을 들어도 싸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작년 말부터 국회는 문만 열면 농성과 난투극이 벌어졌고, 단 한 건의 쟁점 법안도 협상이나 정상적인 표결을 통해 처리되지 못했다.”

현실정치 조롱 뒤에 숨은 이데올로기

조 회장이 전경련 포럼에서 정치권에 가한 비판을 요약하면, “정치권은 싸움만 일삼는 집단”이라는 것이다. <조선일보>가 정치권을 싸잡아 매도할 수 있는, 이런 좋은 소재를 놓칠 이유가 없었다. 굳이 <조선일보>의 의도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정치에 대한 비판은 그것이 누구의 입을 통해 나왔든, 무비판적으로 수용되는 경향이 있다. 일례로 1995년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이 중국 베이징에서 “우리나라 기업은 이류, 공무원은 삼류, 정치권은 사류”라고 내뱉은 발언은 한국 정치에 또 하나의 낙인으로 작용했다.

이건희 전 회장 자신이 불법 경영권 승계 및 조세포탈 혐의로 법적 공방을 벌이는 사실이나 금호아시아나그룹에서 벌어지는 구시대적 ‘형제의 난’이 한국 경제에 심각한 부담이 될 수 있다는 우려를 떠올린다면, 재벌 집단의 수장이자 이명박 대통령의 사돈인 조석래 회장이나 이건희 전 회장의 정치에 대한 비판이 얼마나 권위를 획득할 수 있을지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지만, 비판의 대상이 정치라면 언제나 오케이였다. 이유는 조석래 회장의 발언에 있다. ‘정치권은 싸움만 일삼는’ 불필요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정치는 개판’이라거나 ‘그놈이 그놈’이라는 식의 극단적 논리는 이렇게 탄생했다.

이렇듯 한국 사회에서 싸움, 특히 정치적 갈등은 늘 비생산적이고 부정적인 적폐로 묘사되기 일쑤였다. 그렇지만 정작 정치에서 갈등이 갖는 기능을 깊이 고찰하려는 시도는 정치권이나 언론계, 학계를 포함해도 그다지 많지 않았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가 <민중에서 시민으로>를 통해 가장 먼저 제기한 문제는 바로 이 대목이었다. 그는 한국 사회에서 갈등이 부정적으로 이해되는 이유를 이렇게 분석했다.

“이러한 관점은 서구의 유기체적 사회관과 유사한 것으로, 한국 사회가 물려받은 유교 문화적 전통과 냉전반공주의의 이데올로기적 영향, 그리고 권위주의 체제하에서 형성된 국가주의적·민족주의적·도덕주의적 사회관과 무관하다고 할 수 없다.”

갈등을 매도하면 권력이 웃는다

국론 통일이 됐든 총화 단결이 됐든, 요즘 유행하는 용어인 국민 통합이 됐든, 다양한 형식으로 갈등 없는 세상을 꿈꿀 수는 있다. 가령 노사 문제에서 노동을 생산 비용의 문제로 접근하면서 경제 성장의 가치를 최우선으로 삼는 신자유주의적 관점을 수용하거나, 반대로 자본가 없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체제를 지향할 수도 있다. 다만 기억해야 할 것은 “갈등의 문제가 없으면 권력의 문제도 없고, 권력의 문제가 없으면 정치의 문제가 존재할 이유는 없다”는 사실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정치권은 싸움만 일삼는 집단’이라는 비판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일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생각해볼 대목이 있다. 갈등이 발생하는 사회적 기반 내지 맥락이라 할 수 있는 사회 균열을 무시한 채, 갈등 자체를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집단의 의도다. 가령 언론 관련법의 경우 강행 처리를 주도한 한나라당과 이를 저지하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 민주당의 갈등이 일차적으로 부각됐다. 하지만 언론 관련법을 둘러싼 사회 균열의 중심에는 조·중·동을 비롯한 보수 언론 및 대기업과 기득권 강화 논리가 숨어 있다. 그럼에도 갈등 자체를 부정적인 것으로 매도해 논쟁을 원천 봉쇄한다면, 결국 그 이득은 보수 언론과 대기업에 돌아가게 된다.

그래서 최 교수는 “민주주의는 사회세력 간 갈등과 타협의 과정으로 정의할 수 있기 때문에, 갈등은 민주주의 체제의 핵심 가운데 하나”라고 정의했다. 더 나아가 그는 갈등이 억압되는 조건은 곧 정치가 약화되고 민주주의가 축소되는 환경을 말한다고 지적했다. 정치의 약화를 통해 갈등의 표출이 억압될 때, 갈등은 더욱 파괴적인 양상을 띨 수 있으며, 역설적으로 사회 통합의 가능성은 낮아지게 된다.

다음의 과제는 갈등의 긍정적 효과를 이해하고 실천하는 일이다. 이에 대한 우선적 책임은 정당이 짊어져야 할 몫이다. 과연 현실도 그러할까. 최 교수의 진단은 비관적이다. 2008년 여름 한국을 지배했던 촛불집회를 가리켜 “한마디로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에서 민주주의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 결의 결과이고, 그러한 현상을 표징하는 대표적 사건”이라고 지적한 문제의식에서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다. 당시 그는 촛불집회를 가리켜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서 “6월 항쟁에 비견할 만한 이정표적 사건”이라고 평가하면서도, “운동만으로는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발전시키는 일은 불충분하다”라며 ‘야박한’ 평가를 내렸다.

정당정치는 아래로부터 발전해야

촛불집회 등 운동에 대한 낭만적 기대에서 일정 부분 거리를 유지하는 대신, 현대 민주주의의 핵심 원리가 대의제 민주주의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기억해야 할 이유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민주주의는 결국 정당에 기반한 선거 경쟁을 통해 다수의 지지를 획득코자 하는 집단적 노력을 핵심으로 한다. 아무리 운동을 많이 하고 운동을 통해 집단의 열정을 아무리 많이 동원한다 하더라도 선거에서 패하면 권력을 가질 수도 정부를 운영할 수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유권자들을 동원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이를 위해 현재의 정당 체제로부터 배제되었거나 제대로 대표되지 못하고 있는 유권자들의 지지를 끌어내는 노력, 즉 차근차근 기초를 쌓아 아래로부터 정당을 발전시키는 일이 필요하다.”

최 교수는 이런 이유에서라도 민중 대신 시민과 시민권의 개념을 제대로 정착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민중 개념이 권위주의 정권이 지속되는 과정에서 갈등의 혁명적 해결을 상정하면서 그 혁명의 잠재적인 주체로 설정된 개념이라면, 시민은 정치·사회적 갈등의 시민화, 곧 민주적 해결을 위해 상정된 개념이다.

그가 말한 민중-시민 개념을 활용한다면, 언론 관련법의 강행 처리를 반대하는 시민은 굳이 한여름 땡볕에 거리로 나설 필요가 없다. 그들이 해야 할 일은 2010년 지방선거, 더 나아가 2012년 대통령 선거를 벼르는 것이다. 그것이 기득권층이 항상 주장하는 ‘법질서’ 테두리 안에서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인 동시에, 자신 스스로의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정치적 능력, 즉 ‘사회적 시민권’을 획득하는 방편이기도 하다.

글 · 최성진 <한겨레21> 기자 csj@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