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자랑’ 국립미술관은 누굴 위한 곳인가?

“경고합니다. 여섯을 셀 때까지 저 바닥의 가방을 치우세요!”
“당신은 공공장소에서 경비원을 모욕했으니 당장 나가세요!”

2009-08-07     존 버거/소설가 겸 화가

난 2008년 부활절의 금요일에 런던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안토넬로 다메시나의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보기 위해 아침 일찍 영국의 국립미술관으로 향했다. 이 그림은 내가 경험한 가장 고독한 장면을 담고 있다. 작품에는 은유가 담겨 있다. 40점도 안 되는 안토넬로의 작품 속에는 모든 질서에 도전하고, 절제와 보호를 거부하는 시칠리아인들만의 불굴의 감성이 배어 있다. 수십 년 전 다닐로 돌치(1)가 팔레르모 해안에서 한 어부로부터 들은 일화만 봐도 알 수 있다. “나는 가끔 밤에 별을 보곤 해. 특히 장어 낚시를 나갈 때 그래. 그리고 나는 머릿속으로 ‘세상이라는 것이 정말로 존재하는 것일까?’라고 스스로 묻곤 해. 난 그걸 믿을 수가 없어. 난 평온할 때면, 예수를 믿어. 자네가 예수를 비난하면 난 자네를 죽여버릴 거야. 하지만 가끔은 신조차 믿지 못할 때가 있어. 만약 신이 정말 존재한다면 왜 내게 평화를 주지 않고, 왜 내게 일자리를 주지 않는 걸까?”

현재 스페인 마드리드의 프라도 박물관에 있는 안토넬로의 그림 <피에타> 속의 한 천사는 죽은 그리스도를 필사적으로 부축하며 자신의 머리를 그리스도의 머리에 기대고 있다. 천사의 그림 중 가장 애처로운 장면이다. 시칠리아섬은 열정을 허락하지만 환상은 내치는 곳이다.

미술관은 항상 영감을 채우는 공간

난 국립미술관을 가기 위해 트래펄가행 버스를 탔다. 전에 나는 이곳 미술관의 계단을 수백 번 오르내렸다. 미술관에 들어서기 전, 계단 꼭대기에서 아래쪽을 내려다보면 분수가 눈에 들어온다. 이 광장은 이름이 무색하게도 여타 도시의 유명한 사통팔달 광장들, 이를테면 파리의 바스티유 광장과 달리 역사와 무관하다. 추억이나 희망의 흔적도 배어 있지 않다.

1942년 이곳 미술관에서 열린 미라 헤스의 피아노 연주회에 가려고 이 계단을 오른 적이 있다. 당시, 독일군의 공습을 피해 대부분의 그림들을 치운 탓에 미술관은 텅 비어 있었다. 그녀는 바흐를 연주했다. 콘서트는 정오를 조금 지난 시간에 열렸다. 청중은 벽에 걸린 몇몇 그림들처럼 조용히 연주를 들었다. 피아노의 음계와 화음은 마치 죽음의 가시철사로 묶은 꽃다발 같았다. 우리는 빛나는 꽃다발만을 받고 가시철사는 무시했다.

같은 해, 아마 여름이었을 것이다. 런던 사람들은 독일군에 포위당한 레닌그라드에 헌정한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심포니 7번을 처음으로 라디오에서 들었다. 쇼스타코비치는 런던이 침략당하고 있던 1941년, 이 곡을 작곡하기 시작했다. 우리 중 일부에겐 이 심포니가 예언처럼 느껴졌다. 이 곡을 듣는 동안, 우리는 레닌그라드의 저항운동과 그 뒤를 잇고 있던 스탈린그라드의 저항운동이 붉은 군대로 하여금 독일군을 패퇴시킬 수 있게 할 것이라고 서로 얘기했다. 그리고 그렇게 됐다. 신기했던 것은 전쟁 중에도, 음악은 어느 누구도 파괴할 수 없는 드문 것들 중 하나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그리다

나는 미술관에서 눈높이에 맞춰 홀 입구 왼쪽에 걸려 있는 안토넬로의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쉽게 찾았다. 만약 그림 속 머리와 몸이 충격적이라면, 그것은 단지 머리와 몸의 단단함 때문이 아니라, 그것에 압박을 가하고 있는 주위 공간을 그리는 방식과 그 압박에 저항하는 머리와 몸의 방식 때문일 것이다. 이 압박감이 그림 속 인물들의 존재를 또렷이 부각시키고 구체화시켰다. 한참 그림을 감상한 후, 난 그리스도의 얼굴만 담은 그림을 그려보기로 결심했다.

입구 근처 복도 오른쪽에 의자가 하나 있었다. 모든 홀에는 의자가 하나씩 놓여 있다. 방문객을 감시하고, 이들이 그림에 너무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고, 이들의 질문에 답변하는 경비원들이 쓰는 의자다. 가난한 학생인 난 종종 어떻게 경비원들을 채용하는지 궁금했다. 나도 지원할 수 있을까? 아니다. 이들은 모두 나이가 꽤 있었다. 여성도 일부 있었지만 거의 모두 남자들이었다. 은퇴 직전에 있는 시 직원들에게 제공하는 일자리일까? 이들은 자원했을까? 어찌됐든, 이들은 일부 그림을 자기 집 뒤뜰 정원처럼 훤히 알고 있다. 대화 소리가 들렸다.

“저 실례하지만, 벨라스케스의 작품들이 어디에 있죠?”

“네네. 스페인학파요. 32번 홀입니다. 똑바로 가시다가 끝에서 오른쪽으로 돈 뒤, 왼쪽에서 두 번째 홀입니다.”

“저희는 그의 사슴 그림을 찾고 있습니다.”

“사슴요? 수사슴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두상만 있는 거요.”

“박물관에는 펠리페 4세의 초상화가 두 개 있는데, 그중 하나는 그의 멋진 콧수염이 뿔처럼 위로 구부려져 있죠. 근데 전 사슴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이상하군요!”

“말씀하시는 사슴은 아마 마드리드에 있을 겁니다. 여기서 꼭 보셔야 할 것은 마르타의 집에 있는 <그리스도>입니다. 그녀는 생선과 함께 먹을 소스를 만들려고 마늘을 도가니에 넣고 방아로 찧고 있죠.”

“저희가 프라도 박물관에도 들렀는데, 그곳에도 사슴이 없던데. 정말 안타깝네요!“

“그리고 <로크비 비너스>(Rokeby Venus)도 꼭 보세요. 왼쪽 무릎 뒤에 무언가가 있거든요.”

경비들은 언제나 두세 개의 홀을 오가며 감시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옆에 있는 의자는 현재 빈 상태다. 난 크로키 수첩, 펜, 손수건을 꺼낸 후 멜빵 달린 작은 가방을 의자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놨다.

난 데생을 시작했다. 그리고 틀린 부분을 하나씩 수정했다. 핵심적인 문제는 페이지 안에 십자가를 어느 정도로 그리는가였다. 만약 이게 올바르게 그려지지 않는다면 주위의 공간은 아무런 압박도 가하지 못할 테고, 어떠한 저항도 못 느낄 것이다. 난 잉크로 그림을 그리며 검지에 침을 발랐다. 시작부터 그르쳤다. 난 페이지를 넘겨 다시 시작했다.

난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진 않겠지만, 물론 다른 실수는 하게 될 것이다. 나는 그리고, 수정하고, 또 그렸다.

안토넬로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총 4점 그렸다. 그러나 자주 등장하는 장면은 가시면류관을 쓴 그리스도다. 본시오 빌라도에 의해 풀려난 그리스도를 본 군중은 그를 조롱했고, 유대인 목자들은 그를 십자가형에 처하라 했다. 작가는 이 장면을 여섯 가지 다른 버전으로 그렸다. 그림 모두 고통받는 가운데서도 꿋꿋한 그리스도의 머리를 선명하게 그린 초상화들이다. 굳은 결의가 얼굴과 초상화에 배어 있다. 이처럼 시칠리아의 전통이 담긴 그림에서는 감상과 아첨이 아닌 명료함이 묻어나 있다.

로봇처럼 감정이 없는 경비원들

“의자 위에 있는 가방, 혹시 당신 건가요?”

옆을 보니 무장한 보안요원이 인상을 찌푸린 채 손가락으로 의자를 가리켰다.

“네, 제 건데요.”

“의자는 당신 게 아니죠!”

“알아요. 아무도 앉아 있지 않아서 올려놨는데, 당장 치우죠.”

난 가방을 들고 그림에서 왼쪽으로 한 발자국 이동해, 가방을 발 사이에 내려놓고, 다시 내 그림을 쳐다봤다.

“가방을 바닥 위에 놔도 안 돼요.”

“가방을 뒤져보세요. 여기 지갑하고 그림 그리는 데 쓰는 물건들 빼곤 아무것도 없어요.”

난 가방을 열어놨다. 그가 등을 돌렸다. 난 가방을 내려놓고 다시 데생을 시작했다. 단단한 몸임에도 십자가 위에 있는 몸은 너무도 빈약했다. 데생을 시작하기 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빈약했다.

“경고하는데, 저 가방 바닥에 놔두시면 안 돼요.”

“전 오늘이 부활절 금요일이기 때문에 이 그림을 그리러 왔어요.”

“안 됩니다.”

난 그림을 계속 그렸다.

“계속 고집을 피우시면 상관을 부르겠습니다.” 보안요원이 말했다.

난 그가 볼 수 있게 그림을 들어올렸다. 그는 40살쯤 되어 보이고, 작은 눈을 가진 건장한 사람이었다. 혹, 그가 머리를 앞으로 내밀어서 눈이 작아 보였는지도 모른다. 난 애걸했다.

“10분만요. 곧 끝낼게요.”

“지금 당장 상관을 부르겠습니다.”

“잠깐만요. 만약 누군가를 부르셔야 한다면 미술관의 직원 중 한 분을 불러주세요. 운 좋으면, 그가 아무 문제 없다고 말해줄 수도 있잖아요.”

“미술관 직원과 우리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우린 독립적이고, 우리 업무는 보안입니다”라며 그가 투덜거렸다

“이봐요! 씨…!” 욕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지만 참았다.

그는 보초병처럼 천천히 왔다갔다 했고, 나는 그렸다. 내가 발을 그리고 있을 때 그가 말했다.

“여섯까지 센 뒤, 호출합니다.”

그는 휴대전화를 귀에다 댔다.

“하나!”

난 회색을 만들기 위해 손가락에 침을 발랐다.

“둘!”

손가락으로 종이 위에 잉크를 칠한 다음, 두 손 중 한 손에 난 깊은 구멍을 표시했다.

“셋!”

그리고 다른 손에 난 구멍을 그렸다.

“넷!”

그가 큰 걸음으로 내 쪽으로 걸어왔다.

“다섯! 가방을 어깨에 메세요.”

난 그에게 내 크로키 수첩의 크기 때문에 가방을 멘다면 그림을 그릴 수 없다고 했다.

“가방 메요!”

그는 가방을 집어들어 내 얼굴 위로 들이댔다. 난 펜 뚜껑을 닫고, 가방을 챙긴 후 큰 소리로 욕을 했다.

“미친놈!”

그는 눈을 크게 뜨고 미소짓고 고개를 저으며 내게 말했다.

“공공장소에서 외설적인 모욕은 심각한 겁니다. 상관이 오실 겁니다.”

힘을 빼고 그는 천천히 방을 돌았다. 난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펜을 꺼내들고, 그림을 다시 봤다. 땅과 하늘 사이에 경계가 있어야 했다. 난 몇 번의 터치로 땅을 표시했다. 안토넬로의 <성모영보>(聖母領報)에선 성모마리아가 선반 앞에 있고, 그 위에는 성경이 펼쳐져 있지만 천사는 없다. 마리아의 머리와 어깨를 그린 초상화다. 그녀의 가슴 위에 올려놓은 두 손의 손가락들은 예언서의 페이지들처럼 펼쳐져 있고, 그 손가락 사이로 예언들이 지나다니는 듯하다.

도착한 상관은, 내 뒤에서 뒷짐을 진 채 말했다.

“에스코트할 테니 미술관을 나가주셔야겠습니다. 당신은 근무 중인 제 부하 중 한 명을 공공장소에서 모욕했고, 외설적인 말을 했습니다. 당장, 우리 앞쪽에 있는 정문을 통해 걸어 나가주십시오.” 이들은 트래펄가 광장의 계단 아래까지 나를 데리고 갔다. 그리고 이들은 나를 그곳에 세워둔 채, 임무를 완수했다는 듯 총총걸음으로 힘차게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글 · 존 버거 John Berger
영국에서 활동하는 화가 겸 소설가이며 미술평론가. 저서 <A에서 X까지>(파리·2009)의 저자.

번역 · 조은섭 chosub@ilemonde.com
파리7대학 불문학 박사로 알리앙스프랑세즈에서 강의하고 있다. 주요 역서로 <착각>(2004) 등이 있다.



<각주>

(1) Danilo Dolci, Sicilian Lives, Random House, New York, 19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