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전진과 굴절’의 역사와 일치한 일대기

분단과정과 역순으로 ‘민족→국토·국가’ 통일 모색
대중경제 접고 신자유주의 수용한 건 시대의 불행

2009-09-03     강만길 | 고려대 명예교수·한국사

어느 민족사회를 막론하고 공화주의 시대의 각 정권에 대해 역사적 평가를 하는 경우, 그 기준은 당연히 정치·경제·사회·문화적 민주주의 발전 정도에 두게 마련이다. 그러나 한반도 지역의 경우 우선 공화주의 시대로 들어서는 역사 과정 자체가 험로 중의 험로 그것이었다.

한반도 주민 정도의 문화 수준에 있는 민족사회가 아시아 지역의 식민지 분할이 끝난, 그리고 바야흐로 공화주의 체제로 전환해야 할 20세기 초엽에 와서, 식민지 확보에 선진적인 유럽 제국주의 세력도 아닌 동일 문화권 내 후진 제국주의 세력의 식민지로 전락함으로써 20세기 전반기 내내 제 역사를 스스로 운영하지 못하는 불행을 겪고 말았다.

이 불행한 역사의 결과로 20세기 후반기에 공화주의 시대로 들어서긴 했으면서도 역사시대 이래 수천 년간 함께 살아온 민족사회가 남북으로 분단되어 서로 다투게 되는 한편, 문민독재와 군사독재를 잇달아 겪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 과정에서 정권이 수평적으로 교체되는 수준의 민주주의조차 누릴 수 없었다.

즉 초대 이승만 문민독재 정권은 4·19 ‘혁명’으로 무너졌고, 짧았던 장면의 민주정권은 5·16 군사 쿠데타로 무너졌으며,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은 ‘10·26 안가 살해사건’으로 무너졌다. 그 후의 전두환·노태우 등 후속 군사정권은 물론 김영삼 문민정권도 여당 내의 교체로 성립되었을 뿐이다.

제15대 김대중 대통령 때에 와서야 비로소 선거에 의한 수평적 정권 교체로 민주정부가 수립될 수 있었으니 공화주의 역사 꼭 반세기 만이었다. ‘반만년’의 역사를 말하는 문화민족 사회가 식민지 시기를 겪고 분단된 상태에서 가지게 된 공화주의 시대의 역사가 그만큼 험난했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김대중 정부 성립의 역사적 의의가 최초의 수평적 정권 교체에 한정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 배경에는 김대중 개인의 30여 년간에 걸친 끈질긴 민주투쟁이 있었으며, 그 과정은 군사독재 정권에 의한 납치 살해 기도와 사형선고와 긴 영어 생활, 그리고 세 번에 걸친 대통령 선거 낙선 등 험난한 투쟁과 고통의 연속이었다.

지금은 김대중 정부의 임기가 끝나고 후속 노무현 정부의 임기도 끝난 시점이라 김대중 정부도 별수 없이 역사 속으로 들어가야 할 계제가 되기도 했지만, 특히 대통령책임제하의 집권자가 고인이 된 시점을 계기로 해서 ‘초벌적’으로나마 김대중 정부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있을 만도 하다는 생각이다.

5·16 핵심세력과 연합한 태생적 한계

우리 현대사, 즉 우리 공화주의 역사 위에서 김대중 정부에 대한 평가는 지금 시점에서- 물론 관점에 따라 다를 수도 있겠지만- 우리 생각으로는 크게 보아 여섯 가지를 들어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 첫째는 30여 년간의 민주투쟁 끝에 성립된 김대중 민주정부였지만, 우리 사회의 민주 역량만으로 성립되지 못한 제약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앞선 김영삼 문민정권이 ‘12·12 신군부’ 세력과의 합당을 통해 성립되었고, 뒤이은 김대중 민주정권은 ‘5·16 구군부’ 핵심 세력과의 연합으로 성립될 수밖에 없었다.

오랜 투쟁 끝에 이루어진 민주화지만, 그것은 군부독재 세력을 혁명적으로 극복하고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군부 세력과의 ‘합당’이나 ‘연합’을 통한 타협적 방법으로 될 수밖에 없는 제약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김영삼 문민정부나 김대중 민주정부 때도 행정부 쪽은 민주 세력이 어느 정도 장악할 수 있었다 해도, 의회 쪽은 여전히 친군부 세력이 다수를 점하고 있었다. 그래서 독재정권에 의해 제정된 국가보안법 같은 것이 온존할 수밖에 없었다.

김대중 정부에 대한 두 번째 평가는 김영삼 정부 말기에 빠져버린 ‘국제통화기금(IMF) 체제’에서 예가 드물 만큼 신속하게 벗어난 사실들 들 수 있다. 그러나 ‘IMF 체제’에서 벗어나는 과정이 별수 없이 신자유주의적 방법에 한정됨으로써 엄청난 희생을 낼 수밖에 없었던 점은 불행한 일이었다.

야당 지도자 시절의 김대중은 국민·기업·노동자의 경제운영 공동 참여, 공정한 소득분배 등을 골자로 하는 ‘대중참여경제론’을 주장했다. 시장원리에 입각한 자유경제 체제를 보장하면서도 노사 간 소득분배의 불균형을 해결하고 분배정의를 실현하려는 경제정책이었다. 그러나 ‘IMF 체제’에서 벗어나는 과정은 별수 없이 신자유주의적 방법에 한정됨으로써 실업자와 노숙자를 양산하는 불행한 결과를 빚고 말았다.

그럼에도 30여 년에 걸친 군사독재와의 끈질긴 투쟁 끝에 성립된 김대중 정부는 셋째로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각 분야의 민주주의를 어느 때보다도 크게 신장시켜 외침과 문민 및 군사독재로 이어졌던 한국의 20세기 역사를 청산하고 21세기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계기가 되게 했다.

국가인권위원회를 발족시켜 군사독재 시기의 잔재를 청산하고 한국을 국제 수준의 인권국가로 발돋움하게 하는 한편, 행정부에 여성부를 신설해 여권신장에 획기적인 기여를 했다. 또 대통령 직속기관으로 위원회를 두어 군사독재 정권 아래서 발생한 각종 의문사의 진상을 밝혀냈고, 특히 교원노동조합의 단결권과 단체교섭권을 인정했다.

넷째, 김대중 정부는 21세기로 들어서는 시점에 맞추어 한국이 정보통신 분야에서 단연코 선진국 대열에 서게 되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 전국에 초고속 광케이블을 설치한 한편, 정보통신·반도체·우주·생명공학·화학·환경 등 12개 분야 39개 기술을 중점 개발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아시아·유럽 63개국이 참여한 세계 최장의 ‘제7국제해저케이블’(SEA-ME-WE3)을 가동시켰다.

다섯째, 세계사가 두 번의 파멸적 대전과 동서냉전을 겪어야 했던 20세기를 넘기고 21세기를 맞으면서 평화주의를 강화해 민족국가의 벽을 넘어 지역 공동체를 발전시키려는 데 발맞추어 김대중 정부는 동아시아 공동체를 성립시키는 문제에도 적극 앞장섰다.

김대중 정부는 21세기의 세계평화 및 지역평화 발전에 공헌하기 위한 동아시아 공동체 성립 문제에 적극적 관심을 가지고 ‘동아시아 비전그룹’(EAVG)의 설치를 제안하기도 했고, ‘동아시아 스터디그룹’(EASG) 설립을 적극적으로 제안하기도 했다.

‘통일철학’ 가진 유일한 대통령

김대중 정부는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가는 세계사적 발전 방향에 맞춘 정책을 적극 추진했다는 점에서도 그 업적이 높지만, 여섯째로 민족사 내적으로도 한반도의 남북 대립과 분쟁의 20세기적 역사를 21세기의 남북 화해와 협력의 역사로 바꿔놓았다는 점에서 특히 평가되어야 한다.

20세기 한반도 역사의 전반기는 일본의 강제 지배를 받음으로써 민족적 주체성을, 스스로의 역사 추진력을 완전히 상실한 시기였다. 그 후반기는 남북으로 분단되어 6·25 전쟁이란 처절한 민족상잔을 겪고도 통일되지 못하고 남북이 계속 대립과 분쟁을 계속해온 불행한 세기였다.

이같은 20세기적 민족사의 불행을 극복하고 21세기의 새로운 길을 열어가는 첫째 요건은, 6·25 전쟁을 통해 불가능함을 이미 알게 된 베트남식 전쟁통일이나, 결과가 전쟁통일과 다르지 않은 독일식 흡수통일이 아닌 ‘우리식’ 평화통일을 남북 사이의 화해와 협력을 바탕으로 실천해가는 일이었다. 김대중 정부가 비로소 그 옳으면서도 어려운 길의 문을 연 것이다.

제15대 대통령 김대중은 야인 시절에 이미 자기 나름의 민족통일 방안을 가지고 있었다. 저서로 발표된 그의 3단계 통일안의 첫째는 남북의 국가연합 단계이고, 둘째는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남북연방을 구성하는 단계이며, 셋째는 앞 두 단계의 발전을 바탕으로 하여 1국가를 이루는 완전 통일 단계다.

우리 민족은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생긴 몇 안 되는 불행한 분단민족의 하나였고, 따라서 그같은 민족사회의 경우 정치건 외교건 경제건 문화건 그것이 지향하는 가장 요긴한 문제가 민족통일의 달성에 초점을 맞춰야 했다. 특히 그같은 불행한 민족사회의 최고 통치책임을 진 대통령의 경우 반드시 스스로의 ‘통일철학’을 가져야 했지만, 통일 문제에 대한 공개된 저서를 가지고 대통령을 지망한 사람은 김대중이 유일했다.

대통령에 당선된 김대중의 ‘통일철학’에 북녘 통치권력이 호응함으로써 2000년의 제1차 남북 정상회담이 이루어졌고, 거기서 6·15 남북 공동선언이 생산되었으며, 그 정책 노선을 이어받은 노무현 정권 시기를 통해 금강산·개성의 육로 관광길이 확대되고 개성공단이 조성되고 남북 철도가 연결되었다. ‘우리식’ 통일이 이루어져가고 있는 것이다.

흔히 한반도의 분단 과정은 1945년에 38도선이 그어짐으로써 먼저 국토가 분단되고, 1948년 남북에 두 개의 국가가 성립됨으로써 국가가 분단되었으며, 1950년 6·25 전쟁의 발발로 남북 주민이 동족이 아닌 적이 됨으로써 민족이 분단되었다고 말한다.

‘인류사 발전’ 시대정신과 동행

그러나 통일 과정은 순서가 바뀌어 6·15 공동선언 후 남북이 화해·협력해감으로써 먼저 민족이 통일되기 시작했고, 육로 관광길이 열리고 철도가 연결되고 개성공단이 조성됨으로써 국토가 통일되기 시작했다. 이같은 민족통일과 국토통일이 충분히 추진되면 따라서 국가통일이 이루어질 것이다.

오랜 분단 시대를 통해 서로 적이요 원수였던 남북의 사람들이 이제 동족으로 변해가는 과정과, 목숨을 걸지 않고는 넘나들 수 없던 휴전선이 관광버스를 타고 예사롭게 넘나들 수 있는 단순한 경계선이 되어가는 이 과정이야말로 바로 평화통일의 과정이며, 그것은 곧 남쪽의 경우 김대중 정부와 후속 노무현 정부의 역사적 공적이다.

   
▲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
1998년 발족해 2002년에 끝난 김대중 정부는 절대연대상으로도 용케 20세기와 21세기에 걸쳤다. 그리고 그 정권의 역사적 성격도 한반도의 20세기적 역사를 청산하고 21세기적 역사를 출발시킨 정권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공화주의 정권으로서는 필수 요건인 독재체제를 청산하고 민주주의를 획기적으로 발전시켰으며, 분단민족 사회의 정부로서 시대정신과 세계사적 추세에 맞추어 평화통일의 문을 열었다는 점에서 김대중 정부는 인류사 발전 과정의 한복판에 선 한국의 정부였다. 김대중대통령이 우리 민족사회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받은 일이 그것을 증명해준다.

글·강만길
굴절된 현대사를 새롭게 해석하고 집대성한 한국 역사학계의 실천적 지식인. 현재 고려대 한국사학과 교수로, 상지대 총장,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 광복6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주요 저서로 <분단시대의 역사인식> <한국민족운동사론> <통일운동시대의 역사인식> <20세기 우리 역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