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루포비아’, 불온한 진실

위험성은 낮으나 정치사회적 충격은 커
공포감 확대 뒤엔 음모론과 반성론 교차

2009-09-03     드니 뒤클로 | 인류학자

 

세계보건가구(WHO)에 따르면 지구 북반구 국가들은 이미 10억 개 이상의 인플루엔자A(H1N1) 백신을 제약업체에 주문했다. 하지만 가을 초까지 공급 가능한 물량은 한정돼 있다. 선진국은 저마다 전염성이 높지만 발병률은 낮은 신종 플루 바이러스가 경제 및 보건에 미치는 영향을 억제하기 위해 예방 조처를 잇따라 내놓고 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정치권과 언론이 지나치게 호들갑을 떤다며 비판하는 목소리도 높다. 객관적 사실과 위험성을 동등한 차원에서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오늘날 기술·외국인·테러리스트·질병 등의 위험성에 대한 대형 공포들이 갈수록 늘고 있으며, 이를 부추겨 이익을 챙기는 이들도 나타나고 있다. 사실 치안 당국에서부터 제약업계에 이르기까지 불안감은 하나의 시장을 형성하고 있다. 따지고 보면 신종 플루가 유발한 패닉은 사회를 들여다보는 거울 구실을 한다. 이제 모든 것은 ‘계속되는 불안감을 과연 어떻게 원천적으로 피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로 귀결된다.

 

 

 

 

   
 

지금으로부터 26년 전, 신종 유행병인 에이즈(AIDS·후천성면역결핍증)가 인류를 위협하며 확산됐다. 그 뒤로도 가장 최근 발생한 신종 인플루엔자A(H1N1)를 비롯해 적어도 4개의 질병을 두고 대규모 경보가 발령됐다. 이들 질병에는 여러 가지 공통점이 있다. 우선, 알려지지 않은 전달 매개체(에이즈의 HIV 바이러스나 일명 ‘광우병’으로 알려진 해면상뇌증의 프리온 단백질)에 기인하거나 또는 알려진 바이러스의 예상치 못한 변형으로 발생한다는 점이다. 또한 이들은 전부 동물성 전염병의 일종이다. 끝으로, 모두 종 간 면역 장벽을 넘나드는 질병이며 인간끼리도 전염된다.

동시에 차이점도 많다. 에이즈는 1983년 이래 25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그중 3분의 2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발생했다). 반면 인간변종 광우병(1)으로 1996년 이래 사망한 사람은 214명(영국 168명)이며, 2003∼2009년에는 916명이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로 생명을 잃었다(대부분 동남아시아에서 비롯됐다). 또한 2008년 현재 조류독감으로 인한 사망자 수는 248명에 불과하며 그중 80%가 동남아시아에서 발생했다.

오늘날 세계 도처로 확산된 인플루엔자A의 경우(과거 발생한 다른 유행성 독감들과 마찬가지로 동물이 ‘매개’했으며, 이번에는 돼지가 그 역할을 담당했다) 8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겨우’ 1250명(확실한 수치는 아님)의 희생자가 나왔을 뿐이다. 즉, 계절 독감으로 인한 평균 사망자 수(매년 전세계에서 30만 명)에도 훨씬 못 미친다. 물론 독감 바이러스가 추위에 내성을 갖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인플루엔자A의 치사율이 겨울에 어떨는지는 모른다.

어쨌든 이 유행병들은 처음에는 대대적이고 지속적인 위험을 확산시킬 것으로 우려됐으나, 적어도 외견상으로는 미약한 잠재적 리스크 수준으로 떨어졌다. 이러한 변화는 이 질병들을 수용하는 태도에도 상당한 차이를 가져왔다. 에이즈와 광우병의 경우, 여론은 정부와 모든 관계 당국이 위험성을 과소평가했으며 근심스러운 현실을 은폐했을 뿐 아니라 주요 인사들이 연루된 파문 유발을 최대한 늦추는 데 급급하다고 우려했다.(2)

이와 대조적으로 사스, 조류독감, 인플루엔자A의 경우에는 반대의 상황이 벌어졌다. 보건 당국과 정부가 위험을 과장하고 있다는 의혹을 산 것이다. 사람들은 당국이 이를 악용해 경제위기에 대한 관심을 돌리려 하고 있으며, 대처 능력을 과시하는 한편 실제 위험에 비춰 도가 지나친 예방 활동을 펼치고 있다고 질타했다. 뿐만 아니라 이미 오래전에 로니 브로만(3)이 고발했듯 중상주의적·권위적·위생지상주의적 태도로 전세계 보건관리 기틀을 구축하려 든다는 비난의 소리도 있다. 말 많은 백신접종 의무화 캠페인을 굳이 빈곤국에서 실시하는 것이 대표적 사례로 지목된다.

실질적 위험과 허상 구분해야

이제 문제의 전염병을 과소평가하지 않는 동시에 맹목적 공포에 빠지지 않으면서 실질적 위험과 허상을 구분할 때가 온 것 같다.

신종 전염병들의 위험성은 갈수록 확대되고 있는 게 사실이다. WHO에 따르면 1967년 이후 발견된 병원체 수는 39개에 달한다. 인구는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으며(10년 사이에 약 10억 명이 늘어났다), 특히 유례없는 도시 집중화가 이뤄지고 있다. 전세계 인구의 50%가 넘는 약 40억 명이 도시에 살고 있으며, 25%는 대도시에 거주하지만 상당수가 최저생계 수준을 밑도는 생활을 하고 있다(10억 명의 도시인들이 열악한 주거 환경에 처해 있고, 8억6200만 명이 굶주림에 허덕이며,(4) 20억 명은 비타민·무기질 등의 영양소와 단백질 부족에 시달린다).

통신·유통·보급 수단이 크게 발달하면서 질병 매개체도 큰 폭으로 확산되고 있으며(이를테면 비행기에 숨어든 모기가 세계 곳곳을 여행한다), 그와 동시에 대응 방식도 더욱 효율화될 수 있었다. 이미 1918년에 발생한 스페인 독감(인플루엔자A처럼 H1N1 바이러스에 기인)만 해도 미군 부대가 중국에서 옮겨왔다는 설이 있으며, 불과 보름 만에 선박·버스·기차 등을 통해 미국 전역으로 확산됐고, 전쟁터 곳곳으로 퍼지는 데에도 2개월밖에 걸리지 않았다. 결국 스페인 독감은 전세계에 적어도 3천만 명의 희생자를 냈고 그중 절반가량이 중국과 인도에서 발생했다.

그렇다고 해서 상황을 무조건 잿빛으로 볼 것도 아니다. 의학 전문 역사가인 파트릭 질버만이 밝혔듯, “우리는 바이러스에 관한 과학지식(…), 항바이러스제, 백신을 보유하고 있다. 항생제 덕분에 중증 감염도 치료할 수 있다. 게다가 비록 완벽한 수준은 아닐지라도 1995년부터 전염병 감시 체계가 가동되고 전염병 대응책도 마련돼 있다.”(5) 20세기 초와는 달리 오늘날에는 경제위기 확대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반복적 기근이나 대규모 전쟁으로 인한 고갈은 겪지 않게 됐다. 따라서 면역 체계가 질병으로 인해 쉽사리 붕괴되지도 않는다. 비록 양적 격차는 있으나 대다수 인구가 물을 사용할 수 있게 됐다. 역사를 좀더 거슬러 올라가보면, 14세기 중반 창궐한 흑사병(5천만 명 이상 사망)에는 여러 요인이 결합돼 병독성을 악화했다. 이른바 보균을 지닌 애완용 동물의 대량 번식(나중에는 악령이 씌었다며 고양이를 몰살하기도 함), 인구 급증 및 도시 집중화가 발생했으며, 빈곤으로 사람들의 건강 상태가 악화됐을 뿐만 아니라 도처에서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오늘날에는 그런 요인이 대부분 사라졌다. 그 대신 이제 생명체의 원리에 따라 유발되는 질병들이 기술시대에 발맞춰 변화하는 바람에 종종 항생제나 의학 발전을 유명무실하게 만들어버리고 만다. 미국에서 발생하는 황색포도상구균 두 건 중 한 건에는 더 이상 이리트로마이신, 메티실린, 페니실린, 테트라실린이 듣지 않는다. 프랑스에서는 폐렴구균 발생 건수 중 절반이 페니실린에 내성을 보인다.(6) 이러한 현상으로 인해 독감 후유증에 딱 떨어지는 치료법을 내놓기가 더욱 어려워졌으며, 이는 또한 H1N1 바이러스의 치사율이 나라마다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 상황을 부분적이나마 설명해준다.

(백신 접종을 장려하고 실시하는 기관들이 실은 인명 살상 의도가 있다는 등의) 음모론까지 내세우지는 않더라도 한 가지 인정해야 할 것이 있다. 질병 퇴치는 인간에게 유익한 동시에 의학의 고귀함을 보여주는 인류의 목표다. 그런데 이를 달성하기 위한 전략이 수십억 년 전부터 계속돼온 세균 및 바이러스 변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탓에 난관에 봉착하고 말았다.(7) 일반인들, 그리고 그 바통을 이어받은 의사들의 항생제 남용에 제한이 가해진 것은 불과 얼마 전의 일이며, 그조차도 실질적이라기보다 이론적 수준에 그쳤다. 질병들의 내성이 증가하자 그제야 비로소 좀더 구체적인 행동지침들이 마련됐다. 인간은 도전에 맞서야 할 때를 맞은 것이다. (면역성을 강화하고 내성을 모르는) 백신으로 돌아가든, 유전자 치료법을 사용하든 말이다.

WHO가 1948년 창설 이래 줄곧 감시해온 독감의 경우, 변이 발생을 감안한 예측 덕분에 효능이 있는 백신들을 개발할 수 있었다. 신종 독감의 경우에도 변이 발생을 예측할 수 있다. 신뢰할 만한 여러 전문가들(로버트 웹스터, 가와오카 요시히로, 앨버트 오스터하우스, 클로드 하눈, 데스먼드 오툴리 등(8))에 따르면 농촌 지역 사람들이 돼지와 가금류를 고밀도로 집단 사육하며 부대끼고 사는 아시아 지역에서 발병한 신종 독감들이 정말 위험한 것은 H1N1 바이러스(전염성은 높고 치사율은 낮음)와 H5N1 바이러스(전염성은 낮고 치사율은 높음)가 결합할 경우다.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실현될 경우 두 바이러스의 특성이 동시에 작용해 많은 사람들을 사망에 이르게 할 수 있으며, 특히 동남아시아인들의 피해가 클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자국 국민 보호가 최우선의 임무인 각국 정부의 우려가 점점 더 커지는 것이나 (상시 운행 항공 편수가 5천 대에 달하고 수억 명의 어린이가 학교에서 수업을 받고 있음을 감안할 때) 질병의 급속한 확산을 걱정하는 국제기구들이 갈수록 단호한 목소리를 내는 것은 모두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이러한 책임 분담 자세는 높이 사야 하나, 여기에는 필연적인 문제점도 있다. 우선 세균이나 독감, 혹은 위험한 수준으로 발전한 일상적 감기의 확산을 저지하려면 검역, 국경 폐쇄, 집회 금지, 외출 금지, 치료 의무화 등 일련의 제약적 조처들을 실시해야 한다. 그런데 서구 국민은 총동원 따위의 대규모 강제 조처에 이제 더 이상 익숙하지 않으며 집단적 행동 규제를 개인의 자유 침해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또 다른 차원의 문제는 당국이 신종 질병 출현 가능성이 높은 환경을 미연에 억제할 능력을 갖추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대신 사후약방문 격으로 검역을 강화하거나 자발적 혹은 강제적으로 백신 접종 캠페인을 펼치는 게 고작이다. 이처럼 문제의 근원을 해결하지 못하는 상대적 무능함은 비단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과거에도 유럽과 미국 당국이 수혈 관련 제품의 제조 기술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에이즈 확산을 방치한 바 있다. 뿐만 아니라 소가 동물성 사료를 먹을 경우 다른 종 동물들이 지닌 변형 단백질 프리온에 노출돼 광우병에 걸릴 위험이 있는데도 당국은 동물성 사료 제조의 안전을 보장해주지 못했다.

최근 있었던 세 차례의 질병 발생 경보를 살펴보면 모두 조류와 돼지 사육의 산업적 확대와 해외 이전에도 불구하고 그에 걸맞은 예방학적 조처(9)가 시행되지 않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는 중국·멕시코·말레이시아 등지뿐만 아니라 선진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런데 돼지(프랑스에서는 멧돼지 수도 급증)는 조류 바이러스와 인체 바이러스 수용체를 지니고 있어 이 둘의 결합 장소 구실을 할 수 있다. 실제로 1957년과 1968년에 맹위를 떨친 조류 전염병(각각 A/H2N2와 A/H3N2 바이러스에 의해 발생)도 돼지에서 비롯됐으며, 모두 15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프랑스의 경우 1968년 3만2천 명이 사망했으며, 이는 2003년 폭염으로 인한 희생자 수의 두 배에 달한다.(10) 이는 전반적으로 낮은 예방 수준에 기인한 바 컸으며, 1980년대에 팽배했던 자유주의적 사고방식과 방임주의가 상황을 악화했다.

전염병 전문가로 프랑스 의학아카데미 회원인 마르크 장틸리니 교수는 분개하며 이렇게 밝혔다. “전세계 위생 실태를 감안해보면 현재 인플루엔자A에 두는 무게는 적절치 않다. 부적절함이야말로 유행병처럼 번지고 있다. 지구 곳곳의 상황을 볼 때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인플루엔자를 피한답시고 감행하는 모든 조처들이 부끄러울 지경이다.”(11) 이와는 대조적으로 지금도 말라리아는 “거의 모든 이들의 무관심 속에” 100만 명씩 희생자를 내고 있다. 당뇨 같은 질병은 말할 것도 없다. 이는 ‘리스크학’(Riskology)에서 정말로 위험하지만 일반인은 잘 모르는 경우로 언급되는 전형적 사례다. 매년 약 4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이 병의 치사율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으며, ‘현대적’ 생활 방식이 주범으로 지목되고 있다.

 

   
 

공포의 저울 위에서 모든 질병이 같은 무게를 갖는 것은 아니며, 그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이 띠는 중요성도 다르다. 왜 유독 조류독감과 돼지독감을 두고 보건담당자들이 그토록 애를 쓰는 걸까? 빈곤국에서는 매년 세균성 혹은 바이러스성 위장염으로만 어린이 약 100만 명, 성인 60만 명이 숨지지만 그렇게나 걱정하기 좋아하는 이들도 이러한 상황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수백만 명이 죽는 병엔 무관심

이러한 가운데 과학계와 보건 분야 책임자들은 아직까지는 잠재적 수준인 독감의 위험성에 대해 국민에게 공포를 조장하는 담론을 펼치는데, 이는 부정적 결과를 초래한다. ‘교육적’ 수단들을 총동원해 반복하는 이들 담론은 불안감을 유발하는 온갖 추세와 맞물려 결국 피해망상을 유발하는 표현들이 난무하도록 한다. 이러한 일탈에는 공포심을 악용하는 이들이 끼어든다. “살려주세요, 플루가 오고 있어요!” 프랑스 건강잡지 <상테 마가진>의 2008년 12월 12일치 기사 제목이다. 어느 플루 대비용 마스크 제조업자는 “꾸물대다가는 늦습니다!”라는 인터넷 광고를 내보내고 있다.

하지만 지구의 종말이라도 되는 듯 위험을 지나치게 강조할 경우 귀 얇은 이들의 불안감만 가중하며(각종 조사 결과를 보면 간부급들보다 서민층이 인플루엔자A를 더 두려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12) 최악의 상황에 대한 상상만 부추길 따름이다. 공포를 조성하는 온갖 담론이 기승을 부리고 이단종파들은 이를 이용해 ‘세계 지도자’들이 치료를 핑계 삼아 실은 우리를 병들게 할 작정이라고 서슴지 않고 비난한다.(13) 예를 들어 조지 W. 부시 제1기 행정부에서 주택담당 차관보를 지낸 캐서린 오스틴 피츠는 ‘솔라리닷컴’(solari.com) 사이트에 “인플루엔자와 백신이 ‘통제 불가능한’ 인구를 감소시키기 위해 이용된다”고 주장하면서 통탄해 마지않는다.(14)

자율적이든 강제적이든 백신 접종은 이미 19세기 초부터 대중적인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백신이 많은 이들의 목숨을 연장하거나 살린 것은 사실이지만 동시에 다른 모든 의료 기술과 마찬가지로 의사의 의료 행위에 의해 병이 생기는 의원성(醫原性) 질환을 유발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매번 끔찍한 공포심이 등장하곤 했다. 이를테면 전자 마이크로칩 피하 이식은 ‘악마의 표지’로 취급받는다. 실제로는 그것의 사용이 드물 뿐만 아니라, 아예 배제되고 있는데도 말이다.(15) 그럼에도 인터넷에서는 악마 같은 국제사회가 지구의 인구를 줄이고 예속하려 든다며, 이에 대한 반발로 백신과 마이크로칩을 같은 선상에 놓고 거부하는 경우를 찾아볼 수 있다. 성경의 종말론을 배경으로 삼아서 말이다.(16) 백신과 마이크로칩의 경우 허상의 핵심을 구성하는 것은 둘 다 피부를 꿰뚫는다는 점이다(반면 구강으로 투여되는 항생제에는 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유언비어를 위한 변명

그러나 따지고 보면 정작 큰 위험은 사람이 생각하는 곳에 도사리지 않는 경우가 많다. 안전강박증에 빠져 빚어지는 우리 사회의 파행도 일례가 될 수 있는데, 그 실태가 심각한 수준이다. 무엇보다 합리적 보건정책 일체가 이로 인해 차단된다. 보건정책에 대한 불신 풍조가 널리 퍼져 전염병 상태와 치료법, 위생 감시 캠페인 등에 대한 가감 없는 정보 전달이 어려운 형편이다. 이러한 어려움 때문에 어처구니없는 유언비어들이 유포되기도 한다. 근거가 전혀 없지만은 않은 일반인의 감정과 불안함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가운데 이들이 합리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자신의 의견을 형성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시급하다. 그 시급성이나 보건의 민주주의 측면에서 볼 때 ‘힘으로 과학을 밀어붙이는’ 이들을 두둔하기는 어렵다. 사람들의 허상도 ‘어느 정도의 진실’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이들도 부인할 수 없다. 인간 사회가 갈수록 늘어나는 유행병들을 담아내는 저장고 구실을 할수록 우리는 인간 종을 대표한다고 자처하는 권력과 상대하게 될 것이다. 어떻게 보면 미셸 푸코가 말한 것보다 더욱 명확한 보편적 바이오 권력이 그것이다.(17)

여기에서 인류가 감내해야 할 완고한 모순이 하나 등장한다. 바로 우리의 생물학적 현실을 인정하는 동시에 정치적·사적 주체이자 개별적 존재로서 존중받기를 요구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처럼 상반되는 두 가지 측면 사이에서 중재를 하려면 그 결과도 받아들여야 한다(간혹 치명적 결과도 있게 마련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모든 자동차에 전자통제 장치를 장착하느니 어느 정도의 교통사고를 감수하는 편을 택하는 것이며, 마찬가지로 겨울철 독감 같은 전염병 정도는 백신접종을 의무화하느니 그저 담대하게 맞설 수도 있다.

하지만 ‘백신 접종자 겸 독살자’(18)에 대한 피해망상적 불신을 키우고, 단순히 그 때문에 나이지리아에서처럼 소아마비가 다시금 만연하도록 방치한다면 참으로 안타깝고도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아울러 H5N2 및 H1N1 바이러스가 결합해 한창 나이의 인구 중 상당수를 죽음으로 내몰 때까지 마냥 수수방관하는 것도 합리적이지 못하다. 반면, 명확히 파악되지 않은 질병이나 전문가 간에도 의견이 분분한 기술의 경우라면 백신 접종 의무에 문제를 제기할 권리를 인정할 수 있다.

한편 바이러스를 더 치명적으로 만들기 위한 조작이 이뤄진다는 비난도 있는데(이를테면 민간 또는 국가 차원의 ‘바이오테러리즘’의 일환), 그 비현실적 성격을 먼저 지적할 필요가 있다. 이는 연구실에서 병원체 바이러스를 조합하는 것이 기술적으로 불가능해서가 아니다(차료나 실험 목적으로는 실제로 매일같이 행해지고 있다). 다만 그러한 조작을 통해 자연적 변이만큼 실효성을 거둘 가능성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인종 몰살 위해 병 퍼뜨려?

사실 변형 생체가 우발적으로 퍼지더라도 증식에 불리한 환경 속에서 소멸되는 게 일반적이다. 게다가 어떤 특정 단체나 테러국의 이익에 정확히 부합하는 질병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하려면 실제와 같은 조건에서 수많은 실험의 실패가 선행돼야 하며, 그 와중에 이미 전세계 정보기관들의 이목이 집중될 것이다. 요컨대 인구 과밀 상황에서 인간 종에 대해 부정적 의도를 품은 이가 있다면 무모한 시도에 몰두하느니 자연의 도움을 바라는 편이 낫다. 국가 또는 국제사회 관리들이 ‘잉여’ 인구를 줄이기 위해 제약회사들과 공모해 세계적인 인종 말살을 시행하려는 음험한 범죄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몰아세우는 것은 어불성설일 뿐만 아니라 증오를 유발하고 집단적 공격을 선동하는 것이다.

요즘처럼 전염병 관리가 까다로운 시기에 이 문제를 다루는 대다수 의료·연구진과 보건 공무원들은 인명을 보호하고 구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자신들의 일에 임하고 있으며, 또한 사람들이 비이성적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이들의 안전을 위해 가장 먼저 발벗고 나설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사람들의 허상을 단순히 공포의 관점에서 접근함으로써 유용한 의구심과 근거 있는 불안감, 납득할 만한 원망을 왜곡한다면 이는 실수를 저지르는 것이다. 이 허상을 차마 형언할 수 없는 욕구, 그런 만큼 쉽사리 적들의 몫으로 치부해버리는 욕구로도 바라볼 필요가 있다. 가령 ‘인구 과밀’과 관련된 인종 몰살 의도를 개탄하는 몇몇 블로그를 예로 들 수 있다.(19) 여기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어떤 공포의 대상이라기보다 ‘널리 퍼진 하나의 욕망’이다. 이 욕망은 위선적이게도 어떤 신화적 악인이 품고 있는 것인 양 포장돼 있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말마따나 이러한 욕망은 “각종 문제들이 갈수록 크고 복잡해지는데다 수적 포화 상태에 직면한 인류 내부에서 마치 해로운 물처럼” 솟아난다는 사실을 우리도 인정하자. “마치 소통의 증대와 더불어 물적·지적 교류가 증대하면서 빚어지는 마찰로 피부가 따끔거리기라도 하는 듯” 말이다.(20) 하지만 그렇다고 드디어 경제위기를 종식시켜줄 대대적인 ‘인구청소’가 ‘인플루엔자 한 방’의 결과로 자연스럽게 이뤄지면 좋겠다는 상상을 해도 무방하다는 얘기일까?

이와 같은 맥락의 주장들이 실제로 들려오기도 한다. 영국이 ‘의회의 어머니’라 불리며 근대 민주주의를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은 1350년 흑사병 창궐 이후 사회 여건이 급격히 개선됐기 때문이라는 얘기도 있다(생존자 임금 인상, 농노제 축소, 토지 임대료 인하 등). 하지만 이런 종류의 추론은 그 기저에 깔린 비인간적 냉소주의는 차치하고라도 여러 측면에서 유의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인구가 급감한다면 현재 진행 중인 경제위기를 곧바로 크게 악화해 생산·일자리·수입이 줄어들고 각종 강경책을 요하는 상황에 빠질 것이다. 따라서 ‘고약한 자본주의자들’의 목표가 이런 것이라 단정짓는 것은 어처구니없어 보인다. 오히려 이들의 목표는 어떤 유형의 성장이든 지속적으로 이룩함으로써 어떻게든 더욱 폭넓은 ‘경기 부양’을 달성하는 것이다.

건전한 의심의 권리를 위해

그러나 ‘인류를 구원하는’ 치명적 질병에 대한 욕구는 결코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 않는다. 엘리트나 혹은 세계적으로 알려진 새로운 상상 속 괴수이자 살인마 조직원들인 ‘일루미나티’의 풍자적 이미지에 빗대어 신성한 공포감을 담아 투사하는 경향이 있다. 한 예로 오스트리아의 여기자 제인 뷔르거마이스터는 박스터 AG, 박스터 인터내셔널, 아비르 그린힐 생명공학이 “조류독감을 전세계에 유행시켜 이익을 보기 위해 2008년 12월부터 2009년 2월까지 오스트리아 땅에서 대량살상 생체무기를 개발·제조·유포·확산시켰으며, 이는 조직범죄와 인종 학살에 관한 법 일반에 해당한다”며 이 업체들을 지난 2009년 4월 8일 비엔나 법원에 제소했다. 뷔르거마이스터는 또한 국제사회 책임자들과 정치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일루미나티’와 빌데르베르크 그룹도 고소했다고 밝혔다.(21) “수많은 사람들을 살상할 목적으로 조류바이러스와 돼지바이러스 ‘혼합물’을 투여하기 위해 실시하는 줄 알면서도 이들이 백신 접종 캠페인에 동의했다”는 것이 이유다.(22)

WHO, 버락 오바마, 데이비슨 록펠러, 조지 소로스 등을 마구잡이로 비난하는, 도무지 근거도 없고 광기의 극한으로 치닫는 유언비어들이 인터넷을 통해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이는 또한 (외국인과 이방인을 전염병의 주범으로 지목하는 등) 선동을 획책하고, 여론의 열광 또는 불신을 부추겨온 전통적 미디어의 무뎌진 역할을 인터넷을 통해 재현하고 있다.

음모론과 관련해 파스칼 프루아사르(23)가 밝히듯 “의심할 권리”는 중요할뿐더러 “건전”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행여 이 권리가 공포에 사로잡힐 의무로 변질된다면 새로운 논리, 즉 역사의 암흑기에 걸맞은 논리가 펼쳐질 것이다.

글·드니 뒤클로 Denis Duclos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소(CNRS) 수석연구원. 사회의 ‘대형 공포’를 주제로 연구하고 있다.

번역·최서연 qqndebien@ilemonde.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역서로 <텔레비전의 종말>(2007) 등이 있다.

 


 

<각주>

(1) 크로이츠펠트야코프병과 유사하다.
(2) 프랑스에서는 1984∼85년 수혈기관들이 HIV 바이러스 식별법을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도 이 바이러스에 감염된 제품을 혈우병 환자들에게 지급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큰 파문이 일었다. 당시 재임한 로랑 파비위스 국무총리와 조르지나 뒤푸아 사회부 장관은 1999년 ‘과실치사’ 무죄판결을 받았다. 이 밖에도 중국 등지에서 대규모 감염 사태가 발생한 바 있다.
(3) 1982년부터 1994년까지 ‘국경 없는 의사회’ 프랑스지부 회장 역임. ‘문명개화 임무, 인도적 개입’, <르몽드디플로마티크> 2005년 9월.
(4) 2008년 6월 3일 개최된 세계식량정상회담에서 자크 디우프 유엔식량농업기구(FAO) 사무총장의 연설.
(5) 파트릭 질버만, ‘2009년은 1918년과 다르다’, <르몽드> 2008년 5월 8일자.
(6) 미국 질병통제센터(CDC) 산하 국립병원감염 감시시스템, 프랑스 보건정책평가위원회 보고서 2006. 프랑스 병원감염 경보·조사·감시망 보고서 2006.
(7)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확산 방지에 효과적인 약품 ‘타미플루’에 대해서도 내성이 나타나고 있다. 2003년 네덜란드에서 발표된 한 연구는 어떤 치료법이든 미처 적용되기도 전에 늘 내성 균주가 발견된다고 밝혔다.
(8) 순서대로 WHO 인플루엔자 동물·인간 종간경계 연구담당, 미국 위스콘신대 바이러스 전문가, 네덜란드 로테르담 에라스무스연구소 소장으로 H5N1 바이러스의 인간 감염 가능성을 1997년에 밝힘, 프랑스 인플루엔자감시지역별그룹 창설자, 홍콩대 생물학 교수.
(9) 질병의 발현을 미리 막기 위한 일체의 행위. 예를 들어 손을 제때 씻을 경우 병원 내 감염 건수가 절반으로 줄었다.
(10) 전염병 전문가 앙투안 플라오, <리베라시옹>, 2005년 12월 7일자.
(11) <르몽드> 2009년 8월 6일자.
(12) 프랑스 여론조사기관 IFOP-주간지 <디망쉬웨스트프랑스> 공동조사(<렉스프레스>, 2009년 8월 1일자 인용).
(13) 인터넷 사이트(spreadthetruth.fr)를 통해 널리 확산된 주장이다.
(14) 하지만 이와 동시에 오스틴 피츠는 세계경제가 안정화되려면 인구가 5억 명으로 줄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15) 관련 업자들에 따르면 환자에게 피하 이식된 마이크로칩을 통해 신원과 병력을 확인하고 알레르기와 복용 중인 약물을 밝혀낼 수 있어 유용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실용성’에 대한 집착에 환멸을 느낀 나머지 인류의 상식을 더 이상 신뢰하지 못하는 이들도 있다.
(16) onnouscachetout.com, conspiration.com, dak.ministries.com, cheminementspirituel.cybetruc.com, chez.com, bethel-fr.com, bugbrother.com, freelights.net, cybertime.net, spreadthetruth.fr, singularityhub.com 등 참조.
(17) <앎의 의지>, 갈리마르, 파리, 1976.
(18) 콩고의 소아마비 백신 개발 당시 HIV 바이러스가 인간에게 전염됐다는 주장을 두고 영국 기자 에드워드 후퍼와 전문가들 간에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19) mondialisation.ca, spreadthetruth.fr, solari.com 등 참조.
(20)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슬픈 열대>, 1955.
(21) 빌데르베르크 그룹은 각국의 정치·경제·금융·언론·군·정보 당국 책임자들이 모여 영향력을 행사하는 조직이다.
(22) 루머 확산에 바바라 민튼이 기여. <Journalist Files Charges against WHO and UN for Bioterrorism and Intent to Commit Mass Murder>, www.naturalnews.com, 2009년 6월 25일자.
(23) 파리8대학 교수. 저서 <루머, 역사와 허상>(블랭·파리·2002).

 

※ 치명적 결합이란

헤마그글루티닌(HA)은 조류독감 바이러스의 표면 단백질로서 이를 통해 바이러스가 표적세포의 수용체에 자리잡는다. H1부터 H16까지 모두 16종류가 있다. 또 다른 표면 단백질인 뉴라미니다아제(NA)는 9종류가 있으나 타액 또는 장내 아밀라아제 같은 인체 당단백질 효소를 ‘닮은’ N1과 N2만이 인간에게 질병을 일으킨다. HA와 NA는 144가지 조합이 가능하지만 H1N1, H2N2, H3N2, H5N1을 비롯한 6가지만이 인체에 질병을 유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