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인슈타인·프로이트가 꿈꾼 국제연합의 가치

인류 평화 기원한 위대한 과학자와 사상가의 통찰력

2009-09-03     로무알드 시오라 | 영화감독

1945년 국제연합이 창설되기까지는 오랜 기간 수많은 장애물을 극복해야만 했다. 그 지난한 과정을 잘 보여주는 책 <플래닛 UN>이 9월 중순 출판을 앞두고 있다. 교정을 마친 인쇄본 일부를 발췌해 게재한다. 오랫동안 양식 있는 사람들은 오직 공동의 국제기구만이 세계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믿음을 공유해왔다.

 

“인류가 전쟁의 위협을 극복할 수 있는 수단은 존재하는가?” 1932년 국제연맹(1920년 창설)과 국제지식협력위원회가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에게 던진 질문이다. 아인슈타인은 이 질문이야말로 “문명의 질서에 있어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평가하면서, 프로이트와 마찬가지로 전쟁이 야기하는 폭력과 고통은 용납되어선 안 된다고 말했다.

아인슈타인과 주고받은 서신에서 프로이트는 우선 “인류 전체가 만장일치로 반대하는데도 전쟁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표시하며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인류가 합의를 통해 공동의 중앙권력을 제도화해 모든 종류의 이해 분쟁을 종식시키는 것만이 전쟁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다.” 이는 또한 국제연맹의 존재 이유를 간접적으로 인정한 셈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한계를 드러내고 있던 국제연맹에 대해 프로이트는 다음과 같이 갈파했다. “국제연맹은 자신의 무력을 소유하지 못한 까닭에 회원국들이 무력을 양도함으로써만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프로이트의 이러한 지적은 오늘날의 상황에 대해서도 통찰력 있는 예견으로 읽힌다. 이는 오로지 회원국들의 선한 의지에만 의존함으로써 활동에 제약을 받고 있는 국제연합의 현 상황에 대한 비판과도 맥락을 같이한다.

그렇다면 인류 역사에 끊임없이 등장하는 이 전쟁이라는 질병을 어떻게 치료할 수 있을까? 프로이트에게 보내는 1932년 7월 30일자 편지에서 아인슈타인은 이 질병이 “한 국가의 지배계급이 권력에 대해 갖는 무한한 욕망”에서 비롯됐으며, “이 소수의 지배계급이 다수의 민중을 고통과 궁핍만을 초래하는 전쟁에 동원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프로이트와 마찬가지로 아인슈타인도 다음과 같은 대략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국제 평화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각 국가들이 활동의 자유, 즉 주권의 일부를 양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길만이 인류를 공동의 평화로 이끌 수 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민감한 사안으로 논의되는 이 문제에 대해 그는 이미 대담하면서도 놀랍도록 현대적인 대안을 제시한 것이다.

문화, 전쟁을 종식시킬 수단

두 지식인 사이의 이 흥미로운 대화의 결말 부분에 프로이트는 다음과 같은 가설을 제시한다. “문화의 발전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은 동시에 전쟁의 종식을 위해 일하고 있다.”

문화는 전쟁 종식을 위한 으뜸 처방일까? 이 가설은 현대 역사에서 가장 왕성하게 전쟁 반대를 위해 활동했던 베르타 폰 슈트너가 1889년 했던 말을 떠올리게 한다. 그는 “만약 전쟁이 문화의 부정이라면” 문화는 전쟁을 종식시키는 수단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문화뿐 아니라 교육과 평범한 상식을 평화주의 사상의 기초로 삼았던 이 오스트리아의 남작 부인은 외교 무대에서는 잘 사용하지 않는 표현을 써가며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미래는 착한 마음에 달려 있다.” 알프레드 노벨이 막대한 유산을 기증하여 노벨상을 제정하면서 평화상도 제정해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을 때 그를 끈덕지게 설득한 사람도 폰 슈트너였다. 노벨의 우물쭈물한 태도를 못마땅하게 여긴 그는 1893년 2월 15일 노벨에게 보낸 편지에 화난 어투로 “평화에 대한 우리의 계획을 단지 꿈이라고만 생각지 마십시오”라고 쓴 후,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정의를 향한 진보는 꿈이 아니라 문명의 법칙입니다.”

알프레드 노벨이 노벨평화상을 제정하도록 설득한 폰 슈트너는 노벨이 사망하고 9년 후인 1905년에 그 자신이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노벨평화상을 받는다(1901년 최초의 노벨평화상은 앙리 뒤낭과 프레데리크 파시가 받았다). 폰 슈트너는 오랫동안 각 국가들이 스스로 평화를 위해 일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의심했다. “국가? 차라리 외교관이나 장관 나리들이라고 부르는 게 낫지.” 그의 유명한 소설 <무기를 버려라!>의 등장인물 프레드릭이 한 말이다.

“보통 사람들에게 물어보세요. 전혀 다른 답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평화에 대한 갈망은 가슴 깊숙한 곳으로부터 나온 진실한 희망입니다.” (군사주의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담고 있는 이 소설은 유럽에서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며 오랫동안 평화 교육을 위한 최상의 교재로 인정받아왔다.) 폰 슈트너 역시 분쟁과 고통을 종식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모든 국가가 공동의 문서를 채택하고 국제기구를 세움으로써 평화를 향한 실제적이고 굳건한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유럽의 문명화된 국가들은 왜 공동의 협약이나 공동체를 세우지 않는가? 그게 평화를 이룩할 수 있는 가장 쉬운 길이 아닐까?”

루스벨트 “평화는 반드시 찾아온다!”

1906년 4월 18일, 노벨평화상 수상식 연설에서 베르타 폰 슈트너는 검은색 옷을 입고 감정에 북받쳐 잠긴 목소리로 1904년 10월 17일 백악관에서 미국의 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를 만났을 때를 회상했다. 루스벨트는 그에게 “평화는 옵니다. 반드시 옵니다. 그러나 한 발짝씩 내디디며 옵니다”라고 말하며, 미국을 포함한 세계 각국 정부는 평화를 향한 그들의 임무를 알고 있으며 “무력이 더는 국가 간 분쟁의 해결사 구실을 하지 않는 시대를 앞당기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덧붙였다.(1)

되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막기 위해 여러 민족이나 국가들이 대화를 통해 서로 연합하거나 연맹을 구성해야 한다는 생각의 기원은 인류 역사의 여명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 시대부터 다양한 부족이나 사회집단은 적의 공격에 맞서 절멸의 위협에서 스스로를 지키려면 서로 연합하는 것만이 유일한 희망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수세기에 걸쳐 다양한 형태의 국가 간, 지역 간 연합의 시도가 있어왔다. 1648년 30년 전쟁을 종식하기 위해 최초의 현대적 국제회의에서 채택한 베스트팔렌조약이 그 좋은 예다. 이 조약은 최초로 온전한 의미의 영토국가 체제를 성립시킨 계기가 되기도 했다.

비엔나 회의 이후, 국제협력기구 등장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국가 간 협의체 혹은 국제협력 기구라는 개념이 등장한 것은 비엔나 회의에서다.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국가들은(2) 이 회의를 통해 자국의 국경선을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이전의 상태로 회복하고 같은 종류의 정복전쟁이 재발하는 것을 사전에 방지하고자 했다.

비엔나 회의 직후인 1816년 ‘라인강 항해를 위한 중앙위원회’가 최초의 국제기구로서 공식적인 업무를 시작했다. 1804년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 이뤄진 합의에 기초해 설립된 이 기구는 라인강과 그 주변의 항해에 관련된 제반 문제들을 평화적으로 해결한다는 매우 제한적인 목적에 따라 현재도 스트라스부르에 본부를 두고 활동 중이다. 뒤이어 1865년 만국무선전신회의(1932년 국제전기통신연합(ITU)으로 명칭 변경, 본부 제네바 소재)와 1874년 베른에 본부를 둔 만국우편연합(UPU)이 창설되었다. 두 기구 모두 나중에 국제연합 산하로 통합되어(ITU 1947년, UPU 1948년 통합) 현재도 계속 활동 중에 있다.

영국 하원의원이자 평화주의자였던 윌리엄 랜들 크리머와 국제평화동맹의 창시자인 프랑스 국회의원 프레데리크 파시의 주도로 설립된 국제의원연맹(IPU)은 국제연맹의 전신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기구는 제네바에서 베른으로, 나중에는 브뤼셀로 본부를 옮기며 현재까지 활동 중이다. 각국 국회의 지원 하에 설립되어 새로운 형식의 평화주의를 탄생시킨 이 기구는 최초의 진정한 국제정치기구로서 국제분쟁을 평화적으로 중재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각국 정부가 아닌 국회의 지원에만 의지해야 한다는 한계가 있긴 했지만 국가 간 대화와 국제적 문제에 대한 의식을 촉구하는 등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왔다.

1892년에는 베른에 본부를 둔 국제평화국(IPB)이 창설되었으며, 이 기구는 1910년 노벨평화상을 받기도 했다. 폰 슈트너는 1914년 사망할 때까지 이 기구의 부회장직을 지냈다. 1924년 본부를 제네바로 옮긴 이 비정부기구는 20여 개의 국제기구, 300여 개의 국가별·지역별 기구, 개인회원들을 아우르는 전 지구적 네트워크로서 평화를 모색하는 장이 되고 있다. 이 기구는 또한 무기 감축과 전쟁 종식을 위해 활발히 활동하는 압력집단으로 기능하고 있다.

비엔나 회의에서 시작된 평화를 향한 노력은 1899년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제창으로 26개국이 참여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서 빛을 발했다. 폰 슈트너와 다른 평화주의자들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참가한 이 회의에서 국제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국제중재재판소가 창설돼 오늘날까지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그러나 폰 슈트너는 회의 결과에 다소 실망했다. 그는 이 회의가 원칙적인 접근보다는 법적인 문제에 지나치게 집중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1907년에 열린 두 번째 회의에는 44개국이 참가해 각 주권 국가들 간의 평등이라는 원칙에 대해 토의했다. 만국평화회의 혹은 평화협약으로도 불리는 이 두 번의 회의는 1949년 제네바 협약이 체결되는 데 선구적 역할을 했다고 평가된다. 하지만 평화를 향한 이런 노력들은 그토록 피하려던 전쟁에 의해 일시적으로 중단되기도 했다.

윌슨, 국제연맹 창설 제안

베스트팔렌조약과 비엔나 회의가 종전 직후에 평화체제를 복구하기 위해 개최된 회의였다면, 비엔나 회의 이후에 정착된 ‘국제회의 시스템’은 호전적인 국가들을 협상 테이블로 불러 각국의 다른 이해관계를 중재함으로써 분쟁의 발생을 막아보자는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 회의들은 상당 부분 비공식적인 합의에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각 국가들의 이해 차이를 좁히고 국제기구의 활동이나 결정에 힘을 실어줄 수 있는 성문화된 문서나 헌법을 갖고 있지 않았다.

1918년 1월 8일 미국의 28대 대통령 토머스 우드로 윌슨은 미 상원에서 ‘민주주의 정착을 위한 세계 평화’라는 제목의 유명한 연설을 했다. 그는 이 연설에서 평화를 이룩하기 위해 필요한 14가지 조항을 차례로 제시했다. 미 상원과 미국 국민들 앞에서 미국 참전의 윤리적 필연성을 정당화하는 것이 이 연설의 목적이었다. 그는 14가지 조항의 마지막에서 국제연맹의 창설을 제안한다. 그는 “약소국과 강대국 모두에게 평등한 주권과 정치적 독립을 상호적으로 보장해줄 수 있는 전 지구적 국가연합을 창설하자”고 제안했다.

그로부터 11개월 후, 미국은 1918년 11월 11일 독일과 휴전협정에 서명한다. 처음에는 36일로 한정되었던 휴전협정은 계속 연장되다가 최종 평화협정으로 결실을 보게 된다.

그 후 1919년 1월이 되어서야 윌슨 대통령의 제창으로 파리 평화회의가 개최되었다. 패전국을 제외한 27개국이 참여한 이 회의는 네 개의 주요 회원국들(미국의 윌슨, 영국의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이탈리아의 비토리오 엠마누엘 올란도, 프랑스의 조르주 클레망소)에 의해 주도되었다. 각국은 이 회의를 통해 여러 가지 중요한 국제협약들을 채택했을 뿐 아니라 공동의 국제기구가 존재해야 한다는 원칙에도 합의했다. 이 합의에 따라 1919년 4월 28일 국제연맹헌장이 반포되기에 이른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날로부터 정확히 4년 후인 1918년 6월 28일 독일과 승전 연합국들은 윌슨이 제창한 14개 조항에 기초해 작성된 강화조약(베르사유조약)에 서명하게 된다. 이 강화조약의 첫 조항은 국제연맹의 창설을 공식화하고 있다.

글·로무알드 시오라 Romuald Sciora
베이루트대 영화학과 교수 출신의 영화감독으로, 뉴욕과 제네바에서 활동하면서 국제연합 관련 영화들을 주로 제작해왔다. 이 글은 그가 쓴 <UN Planet>(불어 원제: Planete ONU)을 발췌한 것이다(2009년 9월 발행 예정, 발문 이냐시오 라모네·노엄 촘스키, Tricorne, 제네바, 2009).

번역·정기헌 guyheony@ilemonde.com
파리8대학 철학과 석사 수료,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각주>

(1) 그러나 같은 해 루스벨트는 먼로 독트린에 입각해 미국의 패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남미의 지역 권력이 ‘잘못을 범하거나 힘을 잃었을 때’ 미국이 ‘예방적 개입’을 하는 ‘국제경찰’로서의 역할과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 오스트리아, 영국, 프러시아, 러시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