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이 사라진 시대의 혁명

[Dossier] 착취와 억압을 넘어 혁명으로 6
민중저항에 맞선 지배권력 ‘수동 혁명’ 점철의 역사
학명 회피하는 냉소주의 넘어서 다중의 승리 꿈꿔야

2009-09-03     조정환|‘다중지성의 정원’ 상임강사

“젊었을 때 공산주의자가 아닌 사람은 바보요, 늙어서도 공산주의자인 사람은 더 바보다.” 이것은 칼 포퍼가 혁명으로부터 등을 돌리는 방법이었다.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원이었던 칼 포퍼 자신은 물론이려니와 김문수, 김대중, 심지어 박정희도 젊었을 때에는 혁명과 공산주의에 관심을 두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그럴듯하게 들린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늙어서 공산주의자인 사람을 찾기도 어렵지만 젊어서 공산주의자인 사람을 찾기는 더 어렵다. 혁명에 대한 관심이 청년다움, 지식인다움, 진지함의 지표였던 시대는 끝나버린 것인가? 운동에서 혁명이란 말은 봉기, 프롤레타리아, 레닌, 마오쩌둥, 로베스피에르 등과 같은 말과 함께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수만 년 전의 육식공룡 티라노사우루스란 이름보다 더 아득해질 정도로.

‘혁명’이라는 이름의 번성기

그런데 운동에서 사라졌던 이 말이 어느새 우리 곁에 돌아와 있다. 물론 다른 모습으로다. 과거엔 이 이름이 나직이 발음되었고 ‘R’이라는 은어로 쓰였지만 지금은 떠들썩하게 외쳐지고 또렷이 새겨진다. 산업혁명, 기술혁명, 금융혁명, 상품혁명, 광고혁명, 디자인 혁명, 출산혁명, 휴대전화 혁명, 카드혁명, 부동산 혁명, 자동차 혁명…. 혁명이란 말이 이토록 번성한 역사가 인류사에 또 있었을까? 운동이 혁명을 주저하며 샛길을 찾을 때, 자본은 매일매일 혁명에 여념이 없다. 신자유주의는 온갖 혁명들의 종합세트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혁명이다.

농담이 아니라 진지한 의미에서 그렇다. 신자유주의가 아래로부터의 혁명을 멈추게 한 후 위로부터 혁명을 계속하기 때문이다. 이런 혁명을 그람시는 수동 혁명이라고 불렀다. 반혁명이라고도 부를 수 있겠지만 이때의 ‘반’혁명은 혁명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 입장에서 계속하는 혁명으로 읽어야 한다. 실제로 신자유주의는 그랬다. 그것은 68혁명 당시 노동자들의 노동거부 운동을 노동 유연화와 정리해고를 통해 계속한다. 당시의 국제주의 요구를 세계화 정책으로 계속한다. 당시의 사회적 임금과 보편적 복지의 요구를 금융화와 신용대출을 팽창시키는 방식으로 계속한다. 권태에 대한 거부와 소통의 요구를 정보기술 및 정보산업의 발전을 통한 통신혁명으로 계속한다. 이렇게 신자유주의는 운동을 거꾸로 계속한다.

한국에서도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까? 물론이다. 한국에서도 결국 신자유주의적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없도록 강제한 것은 아래로부터의 저항이었기 때문이다. 1960~70년대에 경공업 부문에서 일어난 여성 노동자들의 저항은 저임금 장시간 노동체제에 대항하는 것이었고 이것에 박정희 정권은 중공업화로 대응했다. 세계적 신자유주의 파도 및 석유 위기와 맞물려 중화학공업화가 실패로 돌아가자 박정희 정권은 정리해고라는 신자유주의 방책으로 대응했다. 부마항쟁의 사회경제적 기폭제가 된 것이 이것이다. 이 항쟁은 강원도 사북·고한에서의 광산노동자 투쟁, 광주 민중의 항쟁과 이어졌는데, 이에 대한 전두환 정권의 대응은 철강·기계·전기·화학 등의 발전에 기초한 성숙 산업(특히 자동차 산업)으로의 전환이었다. 1987년부터 91년까지 이어진 장기 항쟁으로 한국의 민중은 저임금 장시간 체제를 최종적으로 종식시키고 집회·시위·결사·언론의 자유를 쟁취할 수 있었다. 오랫동안 운동의 초점이었던 임금인상 요구와 노동시간 단축 요구, 그리고 민주주의적 자유 요구에 대한 위로부터의 대응은 노태우의 무노동·무임금 정책, 김영삼의 세계화 정책, 김대중의 노동 유연화 정책, 노무현의 무역 자유화 정책으로 이어진 지난 20년간의 신자유주의 수동 혁명으로 나타났다.

MB 정권, 신자유주의 20년의 결론

이명박 정권은 이 수동 혁명 과정의 최근·최고의 국면이다. 이명박 정부 집권 1년 6개월은 무한 개방, 민영화, 유연화, 재개발로 요약될 수 있다. 이것들은 결코 돌출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지난 20년간 추진돼온 신자유주의화의 연속이자 결론이다. 물론 이명박의 신자유주의는 사회적 협의 형식을 걷어치우면서 일방주의적으로 강행되고 삶의 요구들을 철저히 외면하면서 자본의 전체주의적 독재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이전과는 다르다. 하지만 자유주의(루스벨트)는 전체주의(히틀러·스탈린)에 대립한다는 미국주의 이데올로기가 부시에서 파산했듯이, 이명박의 신자유주의도 “자유주의의 최종 결론은 전체주의”(아감벤)라는 명제를 한 번 더 입증한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수동 혁명이 모든 저항을 지워버릴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1996~97년 총파업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저항이 본격화되는 계기였다. 2000년 한국통신 계약직 노조의 517일간의 파업 투쟁, 2001년 대우자동차 파업 투쟁, 2002년 한라중공업 노조의 72일간의 파업 투쟁, 2009년 77일간에 걸친 쌍용자동차 파업 투쟁이 뒤이었다. 더 주목할 것은 신자유주의 수동 혁명이 저항을 지우기는커녕 그것을 공장 울타리 너머로, 사회 전체로 확산시킨다는 점이다. 2003년의 반전 투쟁, 2006년 방폐장 설치에 반대하는 부안 주민 투쟁, 2007년 미군기지 이전에 대항한 대추리 주민 항쟁, 재개발에 반대하는 철거민들의 투쟁, 작업장을 요구하는 가난한 예술가들의 점거 투쟁 등이 그 사례이다. 2008년 대도시 운동으로 폭발해 모든 운동에 새로운 영감을 불어넣은 촛불시위는 다양한 투쟁들의 종합 국면이었다. 그것은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투쟁의 새로운 대상, 동력과 주체성, 방향과 목표, 방법과 기술, 조직 형식, 그리고 폭력에 대한 관점과 태도 등에 관한 총체적 논쟁을 불러일으키면서 미래 운동의 혁신을 재촉하는 계기가 되었다.

눈에 띄는 주요한 점은 이 다양한 항의들이 국가권력에 무엇보다도 소통(‘먹통 대신 소통’)을, 대화(‘대화를 안 할 거면 차라리 다 죽여라’)를 요구했고 이윤에 앞서 생명(‘이윤보다 생명’), 사람(‘여기, 사람이 살고 있다’), 삶(‘함께 살자!’)을 고려할 것을 요청했다는 것이다. 촛불 봉기는 광우병 소의 수입으로 생명을 위태롭게 하지 말라는 요구에서 폭발했다. 그것은 각종 민영화(의료와 병원, 교육, 철도, 수도)를 통해 가난한 사람들을 더 가난하게 만들고 결국은 죽음으로 내몰 위험을 거부하는 운동으로 발전했다. 용산 철거민들의 투쟁은 상승하는 부동산의 가치(그것은 실제로는 사람들의 점증하는 소통과 연결의 효과다)를 권력과 자본이 강탈해가는 재개발 정책에 대한 항의였다.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점거 파업은 전반적 과잉 생산, 금융 투자의 실패, 연구·개발 투자의 부족 등에서 발생한 축적 위기의 책임을 노동자에게 전가하면서 정리해고를 통해 그 위기를 풀어나가려는 노동 유연화 정책에 대한 항의였다. 3대 지상파 방송 노동자들의 12년 만의 동시 파업과 언론노조 총파업은 재벌과 보수 언론의 방송권 주도를 가져올 방송 민영화에 대항하는 투쟁이었다.

그러나 모든 요구와 요청은 회피되거나 묵살되었다. 이명박 정부는 한편으로는 거짓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폭력으로 아래로부터의 요구들에 응답했다. 가난한 사람들의 목숨을 먹어치우면서 악어의 눈물을 흘리기를 거듭했고 거짓 사과는 시시때때로 반복되었다. 부자 정권이라는 비난 여론에 밀려 채택한 ‘친서민 행보’는 카메라를 통한 이미지 통치의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입으로 하는 거짓은 주먹으로 하는 폭력에 의해 보완되었다. 항의자들은 연행되고 구속되고 학살되었다. 삶의 활력을 빼앗긴 수많은 사람들은 자살을 택했다. 이 과정은 검찰·경찰을 정치 무대의 주인공으로 만들었다. ‘빡세게’를 외치며 도열한 전경 무리들, 광장을 에워싼 차벽, 색소물을 뿜는 대포, 사람들의 등·목·머리로 사정없이 휘둘러지는 방패, 시민들을 겨냥해 내리치는 장봉, 하늘을 날며 최루액을 뿌리는 헬리콥터는 오늘날 대한민국에서의 삶이 놓인 익숙한 풍경이 되었다. 거짓과 폭력의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합성은 경기도 평택시 칠괴동 쌍용자동차 공장에서 정점에 이르렀다. 언론은 도장공장으로 떠밀려 옥쇄파업을 벌인 노동자들을 좌익 폭도로 기호화한 후, 전남도청으로 떠밀려 옥쇄투쟁을 벌였던 광주 시민군의 좌익 폭도 이미지, 지리산으로 떠밀려 옥쇄항쟁을 했던 빨치산의 좌익 폭도 이미지와 겹쳐놓았다. 그런 후에 살상무기인 테이저건과 고무총이 그 이미지 위에 발사되었다.

혁명의 실패는 숙명?

혁명이라는 말 뒤에는 패배라는 이름표가 붙어 있다. ‘운동에 의한 국가권력 장악’을 혁명의 지표로 보는 눈에 역사상의 모든 혁명은 패배로 보인다. 파리코뮌은 3개월 만에 패배했고 1917년 혁명도 1991년(붕괴), 1928년(스탈린 관료주의 집권), 1922년(독일혁명의 패배와 유럽혁명 가능성의 좌절), 1921년(크론시타트 반란), 아니면 1918년(장악한 차르 국가권력의 파괴 아닌 현상 유지) 중 그 어느 시점인가에 패배했다. 이런 식으로 모든 혁명은 실패했다. 이에 따라 혁명은 허무하고 공허한 것이라는 포퍼식 냉소주의가 전염된다. 주류 여론에서는 물론이고 이제 진보적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그렇다. 혁명은 불가능하고 개혁의 축적을 통한 이행만이 가능하다, 이행은 불가능하고 내파(implosion)만이 가능하다, 내파는 불가능하고 자본주의가 인간의 얼굴을 갖게 하는 것만이 가능하다, 그것이 인간의 얼굴을 갖게 하려면 인문학에 재정을 대야 한다…. 혁명을 회피하고 피난처를 찾는 경향은 냉소의 철학들에 의해 일반화된다. 모든 혁명은 새로운 지배체제를 낳고 사라지는 소실점에 불과하다, 인간은 본래 벌거벗은 존재이며 권력 앞에 무력한 존재다….

결국 패배하는 건 수동 혁명

그러나 다르게 보자. 패배하는 것은 위로부터의 혁명이다. 모든 수동 혁명은 아래로부터의 혁명에 의해 중단되고 좌초되었다. 68혁명은 케인스주의 수동 혁명을 끝냈고 반신자유주의 투쟁들은 신자유주의를 끝냈다. 목이 잘린 오리가 몇 리를 더 달리더라도 목이 잘렸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위로부터의 혁명은 아래로부터의 혁명을 안정화하면서 동시에 부패시키지만 이것들조차도 혁명이 행진하는 계기들을 구성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혁명은 항구적 사건이며 역사와 삶 그 자체다. 승리(勝利)의 어원적 의미는 ‘여럿이 힘을 합쳐 변화를 이루는 것’이다. 패배(敗北)는 ‘서로 등져 무력해지는 것’이다. 혁명은 협력하는 다중들의 예술적 정치적 행동이다. 그렇기 때문에 혁명의 관심은 협력과 승리에 있지 등짐과 패배에 있지 않다. 반면 냉소는 패배에만 관심을 갖는다. 그것을 통해 냉소주의는 패배를 전염시킨다. 그것은 수동 혁명이 능동 혁명을 부패시키는 무기다. 삶에 관심을 기울이면 자유로울 것이요 죽음에 관심을 뺏기면 구속될 것이다. 냉소를 하면 패배할 것이요 혁명을 하면 승리할 것이다. 지금, 신자유주의 수동 혁명이 무너진 자리에 냉소주의적 공동묘지를 만들 것인가 다중의 혁명 도시를 만들 것인가는 우리 자신의 선택에 달렸다.

글·조정환
‘다중지성의 정원’ 상임강사. <제국기계 비판>(2005), <레닌과 미래의 혁명>(공저·2008) <미네르바의 촛불>(2009) 등 여러 권의 책을 쓰고 번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