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 민족주의와 이슬람주의 갈림길에 서다

미국과 이스라엘, 정통성 없는 정권 지원 통해 아랍 분열 자극
‘제3의 민족주의’, 아랍 세계의 독립과 정의를 위한 연대투쟁

2009-09-03     히참 벤 압달라 엘 알라우이|국제문제 전문가

2차 세계대전의 종식 이후, ‘민족주의’와 ‘정치적 이슬람주의’라는 두 물결이 동시에 아랍 세계를 휩쓸었다. 이 두 흐름은 각 국가 간의 분파주의에도 불구하고, 독립 욕망, 외국 간섭 거부, 더욱 공정하고 정당한 발전에 대한 열망 등 동일한 목표를 지향했다. 그러나 이 목표들은 달성되지 못했다. 제3세력의 등장이 교착상태를 벗어나게 해줄까?

 

아랍 세계에서는 세계경제의 충격적 변동이 지난 수십 년 동안 잠복해 있던 정통성의 위기를 부채질하고 있다. 신식민주의, 불충분한 민주화, 혹은 문화와 종교 갈등 등에서 비롯된 정통성의 위기 때문에 정책 결정자들의 문제 해결 시도는 그들의 성향과 상관없이 모두 무산됐다. 사실, 아랍 세계에서 통치자와 국민, 세속인과 종교 원리주의자, 가난한 서민과 엘리트 계층 간의 깊은 갈등과 부조화는 바로 정통성 부재에서 기인하는 측면이 크다. 경제침체의 위기 속에서, 정통성의 부재는 예측 불가능한 위험한 연쇄 폭발로 이어질 수 있다. 이런 위험을 피하기 위해 우리는 다시금 우리 자신의 역사에서 몇 가지 교훈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아랍 민족주의’라는 기치 아래 영웅주의적인 단결과 성공을 수없이 경험했다. 아랍 민족주의는 이 지역을 변화시킨 수많은 운동과 주체들을 정의하고, 자극한 용어였다. 식민주의를 뿌리 뽑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아랍 민족주의는 식민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우리가 ‘제3세계’라 부르는 신흥국들 간의 유대관계 형성에도 도움을 주게 된다. 이 아랍 민족주의 운동도 여타 개혁 운동과 마찬가지로 완벽하진 않았다.

그러나 아랍 민족주의는 민족자결을 위해 투쟁하는 국민에게 개인적·종파적·국가적 이해관계를 넘어 아랍 통합의 전망과 비전을 제시하고, 나아가 아랍인들의 단결과 행동을 촉구하는 프로젝트를 제공했다. 2008년 12월~2009년 1월경 이스라엘의 폭격으로 점철된 가자지구 분쟁 때, 아랍의 통합적인 희망을 담은 이 프로젝트는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지속적인 시위로 표출되기도 했다.

아랍의 단결은 서구에 대한 반발

서구 사회가 아랍 지역 국민들 간의 분쟁을 조장하려고 ‘친서방 국가’들에 압력을 가했지만, 종교와 세속 사회, 수니파와 시아파, 아랍과 페르시아, 마그레브에서 걸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공동체들은 한결같은 팔레스타인 지지 시위 속에 지속적으로 하나로 뭉치고 있다.

또 이 통합의 열망은 다양한 형태의 이슬람 근본주의, 정적주의(靜寂主義), 경건주의에서부터 이슬람 근본주의 성향의 살라피즘(Salafisme) 지지자들에서도 나타난다. 이런 흐름은 서구는 물론 세속적인 아랍국들한테까지 두려움을 주긴 하지만, 통합의 의미를 찾아주고, 통합국가 탄생에 대한 열망을 구현해준다. 정치적 상상이긴 하지만, 만약 경건한 움마(oumma·이슬람교 신앙 공동체)가 아랍 통합국가를 대체하고, 또 이슬람이 아랍 민족주의의 손아귀에서 저항의 깃발을 되찾았다는 것을 우리가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더라도 우리는 놀랄 필요가 없다. 이슬람은 험난한 역경을 겪었고, 무슬림 신앙 또한 언제나 역사의 흐름 속에서 우리 사회에 깊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두 성향은 상호 보완 혹은 대립 방식으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는 것이다.

아랍 민족주의는 전성기에 초민족주의(Supra-nationalisme) 형태를 띠었다. 식민주의에서 벗어나기 위한 투쟁이 아랍 국민들 간의 다국적 연대감을 이끌어냈고 성숙시켰다. 아랍 국민들은 이를 통해 팔레스타인 문제와 서방에 의한 경제적 종속 같은 문제들과 맞서 싸우게 됐다. 아랍 민족주의는 불안한 과정을 겪었다. 아랍 민족주의는 1956년 이집트가 미국과 소련의 지원으로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 연맹의 수에즈운하 재정복 시도를 저지했을 때 급부상했고, 1967년 6월 6일 전쟁 이후 현격하게 침체했지만, 1973년 10월 이스라엘과 아랍 간의 전쟁 및 석유 금수 조처를 거치며 재도약했다.

요컨대 다양한 해방 운동들은 순전히 어떤 한 나라의 국가 프로젝트 차원에서 이뤄졌다. 그래서 해방운동은 한 정당이나 혹은 1인 ‘평생 지도자’가 통치하는 국가로 화석화돼버렸다. 지역 패권을 손에 넣기 위해 아랍 국가들은 서로 치열한 패권다툼을 벌였다.

국민 열망을 저버리는 아랍 해방운동

하지만 국민들은 끊임없이 공통의 이슬람 문화유산으로 상징되는 다국적 아랍 사회를 열망했다. 그리고 이슬람 정치가 확장됨에 따라 종교와 무관한 이웃사촌의 입장과 교훈도 어쩔 수 없이 수용하고 동화해야 했다. 시아파 헤즈볼라가 레바논에서 성공을 거둔 것은 이들이 종파를 초월한 국가 독립을 열렬히 지지하는 옹호론자들처럼 행동하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아랍 민족주의와 이슬람 운동은 일부 원칙을 공유했다. 통합된 집단의식, 아랍 언어와 문화의 부흥 그리고 2차 대전 이후 생긴 반제국주의 등이 그 예다.

1920년대, 압델크림 알카타비의 지휘로 모로코 리프산맥에서 봉기한 저항세력은 샤리아(이슬람교의 법)를 식민주의 반대 이데올로기의 무기로 활용해 이슬람 민족주의의 캠페인을 벌였다. 1952년, 이집트에서는 가말 압델 나세르가 지휘한 ‘독립장교단’이 ‘무슬림형제단’의 지원으로 권력을 장악했다. 알제리 민족해방전선(FLN)은 농촌 사람들을 상대로 지하드(성전) 및 무자히드(전사) 같은 용어들을 거리낌없이 사용하며 민족주의를 설파했다. 또 1973년 중동전쟁 때는 이집트를 대표로하는 아랍 민족주의와 사우디아라비아가 진두지휘한 보수 이슬람 왕정이 동맹을 맺고 석유 금수조처를 강행했다. 한편 이라크의 바스당은 움마 개념을 빈번하게 사용해 이라크가 아랍 국가임을 상기시켰다. 바스당 창립자이자 종교와는 무관한 민족투사 미첼 아플라크는 “이슬람과 아랍 민족주의 간의 관계는 다른 종교와 또 다른 민족주의 간의 관계와는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다음과 같이 예측했다. “민족주의자들이 유일한 이슬람 옹호론자가 되는 날이 도래할 것이다. 만약 이들이 아랍 국가가 살아남도록 좋은 구실을 찾고자 한다면, 이슬람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야만 할 것이다.”(1)

아플라크가 예견한 그날이 도래했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로 이슬람주의자들이 유일한 민족주의 옹호론자들이 되었다. 이제 이슬람주의가 어떻게 민족주의의 주제들을 동화해 자신을 마치 서구의 지배에 맞서는 반대세력인 것처럼 혹은 문화와 민족의 독립을 확신하는 세력인 것처럼 소개하고 있는지 설명하는 것은 전혀 새롭지 않다.

아이러니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서구와 아랍의 저항 정부들이 보수 이슬람 세력의 비위를 맞추고 자극함으로써 민족주의와 이슬람주의 간의 골을 증폭시켰으며, 또 이를 이용해왔다는 점이다. 특히 이슬람과 ‘서구의 지배세력’ 간의 역사는 ‘순수’한 관계나 단순한 관계와는 거리가 멀다. 영국 비밀경찰은 가말 압델 나세르에 대한 저항세력으로 이집트의 무슬림형제단을 이용했고, 과거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에서 이들의 후계자인 하마스를 지원해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를 견제했다. 또 ‘아프가니스탄 아랍인들’은 미국을 위해 ‘무신론적인 공산주의’와 맞서 싸웠다. 이슬람주의자들은 수차례에 걸쳐 외세로부터 원조를 받았고, 이들과의 동맹을 통해 지역 패권을 노렸다.

서구와 이슬람주의의 ‘추잡한 거래’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승리와 소련군의 철수에 힘입어 범아랍 민족주의가 생겨났고, 이것이 곧 범이슬람주의가 됐다. 전통적인 민족주의의 약화에 직면한 이슬람주의자들은 종교적인 영감의 힘을 내세울 수는 있었지만, 이들이 이것을 마치 성공 모델처럼 소개할 수는 없었다. 서구와의 동맹에서 가장 이득을 본 자들이 이슬람주의자들 아니던가? 그 증거로, 전직 중앙정보국(CIA) 요원은 워싱턴의 ‘추잡한 작은 비밀’이라며 당시 “무슬림형제단은 침묵의 동맹자, 바로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비밀병기였다”고 증언했다. 그는 “우리로서는 알라가 우리 편에 서서 싸워준다면 잘된 일이었다”고 언급했다.(2) 이슬람주의자들은 그 반대였다. “만약 미국이 우리 편에 서서 싸워준다면 잘된 일이었다.” 요컨대 이슬람주의자들의 ‘추잡한 작은 비밀’은 마치 비종교적인 민족주의자들이 그렇듯, 정치에서는 아무도 ‘순수’할 수 없으며, 외세와 기회주의적 공모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서로 무시무시하게 비난했던 기억을 잊어야만 한다. 그 상호 비난의 기억과는 달리, 정작 아랍과 서방국가들은 항상 야합의 춤을 추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야합의 춤은 알제리와 이집트에서 대민족주의 운동의 정통성을 부패시키고 훼손했으며, 이슬람을 분리의 교리로 왜곡해 비종교인과 이슬람주의자들 사이에 그리고 아랍 지역과 세계 다른 지역 사이에 도랑을 파놨다. 또 이 춤은 이슬람의 광기 어린 담론과 행위에 자양분을 공급해, 이것들이 괴물 프랑켄슈타인처럼 죽지도 않고 서방국가를 겨냥하도록 했다.

이런 야합 전략의 마지막 구현 목표는 수니파와 시아파 간의 오래된 신학 및 사회적 다툼을 아랍 세계와 이란 간의 지정학적 분열로 변환하는 것이었다. 이스라엘과 미국의 신보수주의자들이 추진한 이 작전은 단기적으로는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아랍 민족주의를 견제하려고 이란 정부를 지지했던 이 두 나라의 과거 전략을 안다면 냉소하지 않을 수 없다. 1960년대와 70년대, 이란은 이스라엘과 미국이 뒷배를 봐주는 아랍 지역의 유일한 맹주였다. 1979년의 이슬람혁명을 계기로 이란은 이 두 나라에 ‘가장 혐오스런 짐승’이 됐다. 하지만 미국은 2003년 이라크를 침공해 아랍 민족주의의 가장 강력한 보루를 파괴하고, 그 지역에서 이란의 입지를 단박에 강화해놨다.

이런 작전들 탓에 수니파와 시아파, 아랍인과 페르시아인들 사이에는 긴장이 높아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이 긴장이 서구의 발명품은 아니다. 이것은 초창기 이슬람 정복의 역사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일부 아랍인들은 머릿속에 정통 회교도(수니파) 민족주의를 재건하고 싶은 욕망을 숨기고 있다. 이슬람 신앙의 순결함과 아랍 민족주의를 하나로 묶는 살라피즘 교리(정통 회교도 민족주의)로 이교도적인 시아파의 교리와 페르시아 팽창주의자들을 상대하고 싶어한다. 이런 위험한 성향은 이라크와 중앙아시아에서 자신들을 알카에다라고 부르는 다양한 조직들의 지속적인 종파 간 폭력에서 엿볼 수 있다.

이런 전략은 일관성이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2003년 미국의 이라크 개입으로 이득을 본 극히 드문 나라 중 하나인 이란의 전략과 맞서는데다, 무슬림형제단의 수니파 회원들의 분신인 하마스를 테헤란의 시아파 비밀당원 조직으로 둔갑시키려는 시도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철저히 국가의 이익에만 초점을 맞췄던 과거 전략이 범아랍 민족주의를 파괴했듯이, 수니파와 시아파 간의 갈등은 반드시 범이슬람주의를 파괴하게 될 것이다. 여러 정권과 국민들은 이 전략을 거부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들이 우려했던 것이 뭐든 간에, 아랍 국가들은 이란의 핵 문제를 지역적인 맥락에서 해결하고, 이스라엘의 핵무기 문제도 협상 테이블에서 다루자고 주장했다. 수년 전부터, 대서양에서부터 걸프에 이르기까지, 각종 종파의 아랍인들은 헤즈볼라와 하마스를 지지하는 시위를 했다. 이들이 시아파나 수니파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공격에 저항하기 위해서였다. 시아파들은 하마스의 수장 이스마일 하니야를 지지하고, 수니파들은 헤즈볼라의 사무총장 하산 나스랄라 사진을 흔들어댄다.

존엄성에 대한 아랍인들의 순수 열망

이때 우리는 존엄성, 정의와 진정한 독립을 보장해줄 수 있는 범아랍 및 범이슬람계의 한 단체에 보내는 아랍인들의 강렬한 열망을 헤아리게 된다. 우리가 민족적 임무를 완수하겠다는 약속이 담긴 이슬람운동 사상을 거부하더라도,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이 운동이 이슬람 사상(존엄성, 정의 및 진정한 독립을 원하는 사상)을 강력한 저항정신과 집단 에너지로 세뇌시키고, 대중 감정의 중재자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실제로 이 운동들은 자주 이슬람 사상을 변질시켜 위험한 길로 인도했다. 그래서 이슬람주의자들은 자주 새로운 저항세력들을 주도하고 있음에도, 아마도 마지못해 아랍 민족주의를 부활하는 데 도움을 주는 듯하다.

또 옛 권위주의 정권 속에서 화석화되었던 포스트 식민시대의 민족주의와 이와 유사한 저항 형태들이 이슬람운동을 통해 제 목소리를 냈다. 게다가 다른 형태의 다국적 아랍 민족주의가 존재한다. 이 민족주의는 세속적이지만, 아랍과 이슬람의 정체성을 표방하며 세계의 문화 및 언어와의 혼합을 자랑스러워한다. 대부분의 아랍 젊은이들의 머릿속에 각인된 이런 형태의 의식은 새로운 국제적인 소통 방식(<알자지라>, 인터넷, 페이스북) 속에서, 혹은 분산된 장소들을 본국과 연결해주는 네트워크상에서, 또는 이 네트워크들이 허락하는 문화와 언어의 세속적인 형태 속에서 표출되고 있다. 담론 자체가 변했다. 사람들은 이제 단순히 팔레스타인이나 혹은 아랍인의 권리를 참조하던 것에서 벗어나, 국제법의 원칙, 즉 우리가 가자지구 연대시위 때 목격했듯, 일종의 보편성을 참조하고 있다.

새롭게 출현하는 ‘제3의 민족주의’는 정부나 정권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 민족주의는 범아랍 및 범이슬람주의 의식을 표출하고는 있지만, 그 어떤 정치적인 의제도 갖고 있지 않다. 이 세력은 지역의 권위주의와 부패를 규탄하고 민주주의와 법치의 확립을 갈망하며, 외국의 군사 개입을 단호히 거부하고 있다. 이들은 아랍과 이슬람의 정체성을 수호하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며, 지적인 현대사상 및 문화적 다양성을 표방하고 있다. 이들은 아랍 무슬림 세계의 독립과 정의를 위한 투쟁에 연대한다. 특히 팔레스타인 저항세력과 연대한 이 세력은 아랍과 서양의 정치운동들의 성공과 실패에 대해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이들은 민족주의의 아버지와 이맘(이슬람 성직자)들의 아버지를 퇴출시켰을까?

그런 말을 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이 새로운 민족주의가 아직 정치적 효과를 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정치적 일관성과 조직의 형태를 찾고 있다. 이들은 국가가 하는 정치적인 막연한 말들과 이슬람주의자들의 설교 간의 시끄러운 대립 속에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설상가상, 이 지역 국민들은 1967년의 중동전쟁 패배를 시작으로 2003년 이라크 점령, 그리고 최근에 있었던 수니파·시아파 야당이 주도한 격화된 국론 분열 등 너무나 많은 역경을 겪은 탓에 심적으로 무력감에 빠졌다.

우리 사회 속의 이런 난관은 3자 간의 분열로 이어지고 있다. 즉, 국가와 그의 고객인 세속·진보 세력, 그리고 이슬람주의 세력 간에 분열이 생기고 있다. 이들은 서로 말은 하지 않지만, 한 지붕 밑에서 동거하고 있는 셈이다. 하여간 현재의 경제위기에는 불안정한 면은 있지만, 전례 없는 발전의 기폭제가 될 요인도 들어 있다. 이렇다 할 효율적인 경제 프로그램이 아무것도 없이, 사회적 현실의 심각한 악화에 직면한 이슬람주의자들이 지닌 응용 프로그램은 샤리아밖에 없다. 샤리아가 만약 범죄와 부패를 줄이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 질서와 안전을 유지하는 효과를 낸다면 매력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슬람적인 사회적 정의의 개념은 자선의 산물이지 정치적인 산물이 아니다. 구조적인 변화를 통해 빈곤층을 줄이기보다는 의연금을 통해 그들의 짐을 덜어주는 식이다. 이슬람운동 자체가 보수적인 부자들, 즉 사유재산의 구조 자체에 내재돼 있는 부당함에 도전하기보다는 세속적인 아랍 국가들의 신성모독에 대한 규탄을 선호하는 이들에게 자선을 촉구하는 성격을 띠고 있다. 이 부자들은 사회적인 반대파를 마치 피트나(fitna)(3), 즉 ‘무슬림들 간의 갈등과 사회적 혼란의 원천’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수만 명의 이집트 농민들이 나세르가 추진한 토지개혁 철폐 반대와 대지주들에 대한 토지반환 반대 시위를 했을 때, 무슬림형제단은 국가의 민영화 정책 뒤에서 뒷짐 지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2008년 봄(4), 나일강 삼각주 내의 노동자 파업과 시위를 촉발한 것도 독립을 지지한 진보 운동가들이었다. 노동자 임금 인상 및 국제인권 준수 투쟁이 대중적인 지지를 얻자, 무슬림형제단도 어쩔 수 없이 이들의 투쟁을 지지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이 투쟁이 자신들 탓도 아니고, 이들의 요구가 터무니없는 것이라 수용할 수 없다며 버티다 울며 겨자 먹기로 지지했다. 좌파세력이 주도하고 이슬람주의자들은 방관한 튀니지 가프사와 모로코 시디이프니 지역에서 있었던 기근 폭동과 임금 시위도 이와 유사하다.

사회적 권리 무시한 이슬람주의자들

이슬람주의자들은 이런 종류의 운동에 가담하는 것도 서툴고, 운동을 어떻게 주도해야 하는지도 모르기 때문에, 이들은 진보세력의 이런 시위 담론과 주제들을 놓친다. 그러나 이런 시위는 갈수록 필요하다. 이런 시위가 진보세력에게 정의와 사회적 권리(6)에 대한 이념을 추진할 수 있는 전례 없는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해의 소지가 있는 낙관론은 조심해야 한다. 진보세력의 시위는 드문데다 국지적이며 고립돼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국가적 혹은 지역적 차원에서 해결해야만 하는 현안이 있어도, 시위자들은 자신들 주택에서 불과 몇백km 떨어진 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아랍 정권들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이 운동들이 하나로 통합되지 못하도록, 그리고 이슬람주의와 동맹관계를 맺지 못하도록 차단하고 있다. 한술 더 떠 정권들은 강한 압박을 가하고 있다. 이들은 다시 문화와 국가의 정체성 찬양 같은 일부 종교적 주제들의 기치 아래, 아랍과 무슬림의 고유의 가치를 수호하자고 주장한다. 또 이들은 인권과 사회적 권리에 관한 담론을 마치 서양의 침투물처럼 소개하며 인권과 사회적 권리를 규탄한다. 이런 태도가 이슬람주의자들과 진보주의자들 간의 분열을 영속시키고, 후자를 ‘극이슬람주의 함정’에 빠뜨리는 데 한몫하고 있다. 이런 사례의 가장 좋은 본보기는 여성이다. 만약 여성 노동의 원칙을 광범위하게 수용한다면, 여성의 신체와 가정에서의 역할 때문에 유발될 저항들이 적지 않다. 여성 인권을 옹호하는 진보주의자들은 이슬람의 명예에 관한 도덕적인 이슬람주의 담론과 국가적인 담론 사이에 끼여 있는 셈이다. 이들은 문화적으로 항복했다는 비난을 살 때마다 자신들을 방어해야만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서구화에 대한 문화적인 저항처럼 소개되는 권위주의 구조(국가적인 것이든 종교적인 것이든 상관없이)의 유지를 옹호해야만 한다. 이 본질적 총체주의(identitaire essentialiste) 정책, 즉 극이슬람주의 정책은 우리 지역에서 반복되는 주제인 동시에 진정한 비극이다.

파키스탄에 잔존한 탈레반 세력은 계급투쟁 개념을 열광적으로 채택해, 우선 스와트 계곡에서 토지개혁을 지지했다. 그 결과, 파키스탄 준봉건체제 속에서 마치 보수적인 기부자들처럼 활동하던 일부 엘리트 부자 지주들은 즉각 토지를 빼앗기고 강제출국 당했다. 이와 관련해, 파키스탄의 한 대변인은 “탈레반들에게 음악이나 학교 교육을 추방하겠다는 것 이상의 약속을 할 수 있도록 허락했으며, 이들이 이슬람교의 정의, 효율적인 정부, 경제적인 재분배 등을 약속했다”고 주장했다.(7) 이는 비종교적인 진보 진영과 ‘온건’ 체제 진영에 보내는 분명한 메시지인 셈이다. 만약 당신들이 반복되는 부패, 빈곤, 불평등의 문제에 진지하게 당장 매달리지 않는다면, 당신들은 이런 것들을 실천하고 있는 이슬람주의자들한테 한참 뒤처지게 된다는 경고다.

아무도 진보와 이슬람 사이의 차이를 무시하지는 않는다. 이 두 진영 모두 ‘민주주의’의 확립을 진심으로 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몇몇 관점을 빼면, 이들은 분명 민주적 헌법국가를 세우고 보존하는 방식에서 근본적인 시각차를 보이게 될 것이다. 진보주의자들은 국제사회가 인정하는 법적·정치적 기준에 의거한 헌법이 정한 테두리 안에서 대중의 의지를 담아내는 주권을 확립하고 싶어한다. 이슬람주의자들은 신성한 텍스트의 구체적인 해설에 의거한 특정 종교의 이념을 담은 절대 주권을 확립하고 싶어한다. 우리가 이슬람주의자들이 자기 나라에서 벌이고 있는 내부 토론에서 봤듯, 요르단의 무슬림형제단이나 모로코의 ‘정의 및 개발당’은 점차 대중적인 주권을 확립하자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고 있다.

세계 경제위기 맥락 속에서 두 진영은 현실적인 동맹을 맺을 수도 있다. 두 진영 간의 동맹은 두 진영뿐만 아니라 이 지역 국민들에게도 득이 된다. 지역 차원에서 실업, 식량과 자원 부족 그리고 가격 인상 등을 규탄하는 파업과 시위가 열릴 예정이다. 국민들은 투명성을 요구하게 될 것이다. 국민들은 지도자에게 해명을 요구하며 강력한 부패 척결 투쟁을 당부할 것이다. 지역과 국제 차원에서 외국세력의 개입에 반대하고, 팔레스타인을 지지하고, 공정한 경제 질서와 국제법 적용을 바라는 운동들이 지속적으로 확장될 것이다.

향후 단합과 효율적인 행동을 취하는 데 필요한 원칙은 과거 우리의 역사적인 민족주의 운동에 생기를 불어넣었던 원칙과 비슷하다. 즉, 조국과 아랍 지역의 독립에 대한 열정, 지역 협력과 국제 업무에 대한 참여, 모두를 위한 정치적 자유와 법치를 수호하겠다는 시각을 지닌 정권, 우리 국민의 경제 및 사회 생활 향상을 목표로 하는 기반, 그리고 모든 민족과 종파들의 염원에 화답하려는 노력 등이다. 그러기 위해 진보주의자들은 투쟁에서 이겨 리더십과 영향력을 갖춰야 하고, 민주주의 건설과 인권 존중이 이런 모든 원칙들을 실천하는 데 필요한 효율적인 도구임을 보여줘야 한다.

우리는 이스라엘이 가자지구를 침공했을 때, 어떻게 위에서 거론한 도구들이 팔레스타인의 입장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는지 깨달았다. 하여 하마스는 신빙성을 얻었다. 이들이 부패와 싸우고, 이스라엘 침공에 지속적인 방식으로 저항하고 있어서만이 아니라, 이들이 국민투표로 합법화되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이스라엘은 유엔이 인정하는 인권, 법, 정치, 윤리적 기준 분야에서 수세에 몰리는 처지가 됐다. 이런 불법 행위들이 지난 수십 년 동안 ‘국제사회’가 이스라엘에 부여했던 면죄부를 재고하도록 하고 있다.

우리가 배울 게 많은 이스라엘 프리랜서 역사학자들은 물론이고, <알자지라>, 인터넷 및 글로벌 운동을 통해 수집한 정보, 분석, 역사적 지식 덕분에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은 2008~2009년 가자지구에서 목격한 것은 1947~48년 팔레스타인에서 자신들이 볼 수 없었던 작은 일부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라크나 레바논에 외국인이 개입할 때 그랬듯, 가장 거대한 도전에 직면한 민족주의자들은 역설적으로 동원, 단합, 다원주의와 민주주의 등 우리가 꼭 개척해야 할 공간을 만들어냈다. 이런 유토피아는 선례가 있다. 일련의 끝없는 유혈분쟁, 종교분쟁, 국가분쟁을 겪고 난 뒤에 비로소 유럽도 통합 과정을 밟았다. 그렇다고 국가의 독립 염원과 민족들 간의 문화 차이를 저버릴 수는 없다.
 

글·히참 벤 압달라 엘 알라우이 Hicham Ben Abdallah El Alaoui
스탠퍼드대(캘리포니아) 프리만 스포글리 국제연구소 연구원.

번역·조은섭 chosub@ilemonde.com
파리7대학 불문학 박사로 알리앙스프랑세즈에서 강의하고 있다. 주요 역서로 <착각>(2004) 등이 있다.

 


<각주>

 

(1) 1943년 4월 1일 다마스 강연 ‘아랍 예언자의 기억’.
(2) www.globalresearch.ca/index.php?context=va&aid&3109 참조.
(3) 아랍어로 ‘반란’을 의미함.
(4) Beshir Sakr et Phanjof Tarcir, ‘이집트 농부들의 계속되는 투쟁’,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7년 10월호 참조.
(5) Joel Beinin의 ‘굶주린 이집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8년 5월호 참조.
(6) 웹사이트 ‘Arabic Network for Human Rights Information’에 실린 <Egypt: Woman Detained for Promoting General Strike On Facebook> 참고, 2008년 4월 24일 카이로. http://allafrica.com/stories/200804241139.html, Laura Kasinof의 <Egyptians use facebook to deter censorship> 참고. <미들이스트타임스>, www.metimes.com, 2008년 4월 29일 참조.
(7) Jane Perlez et Pir Zubair Shah, ‘Taliban Exploit Class Rifts in Pakistan’, <뉴욕타임스>, 2009년 4월 1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