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서 자유주의, 독일식 사민주의와 자유주의의 화학적 결합

2015-07-31     프랑수아 드노르 외 | 사회학자

 그리스 건과 관련하여 도날드 투스크 유럽연합 정상회의 상임의장은 자신이 ‘전후 독일의 질서자유주의자에 가깝다고 느낀다’고 밝혔다. 80년 전 독일에서 탄생하고 유럽식 신자유주의 모델인 질서자유주의(ordo-libéralisme)가 그 여세를 넓혀가고 있다.

 
2015년 7월 6일, 주간지 슈피겔의 웹사이트는 그리스 국민투표 결과가 발표된 직후 분노에 사로잡혀 “만약 누군가가 근대 민주정의 운영에 국민투표가 미치는 위험의 증거를 여전히 보길 바란다면, 바로 이것이 그 증거”라고 단언했다. 국민투표의 ‘노(NO)’가 독일에 가져온 충격은 경제학과 공적업무의 두 가지 개념 간의 충돌로 설명된다.
우선, 그리스 지도자들이 구현한 접근법은 정부의 순전한 정치적인 방식을 반영하는 것이다. 회계규정보다는 국민투표가 우선하며, 규범의 수정 여부를 선출된 권력이 결정할 수 있다. 이와는 정반대되는 접근법은 정부가 질서를 엄격하게 준수하는 것이다. 틀을 벗어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정책들이 자유롭게 작용할 수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틀은 사실상 민주적 논의에 붙여지지 않는 것이다. 볼프강 쇼이블레 독일 재무장관은 바로 이러한 접근법의 화신이라고 할 수 있다. 야니스 바루파키스 그리스 전 재무장관은 “쇼이블레에게 규범은 신적인 성격을 띤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 독일식 이념은 ‘질서자유주의(ordoliberalism)’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다. 질서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은 국가가 시장의 작용에 개입하는 것을 꺼린다는 점에서는 영미권의 자유방임주의 신봉자들과 마찬가지이지만, 그들과 달리 자유경쟁은 자발적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고 판단한다. 국가가 자유경쟁을 설정하고, 시장의 법률적‧기술적‧사회적‧도덕적‧문화적 기틀을 구축하며, 규범이 준수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질서정책’(Ordnungspolitik)이다. 이러한 자유주의적 개입주의의 역사는 지금으로부터 80년 전 두 세계대전 사이의 격동기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 2012년 8월, 쇼이블레 장관은 경제위기로부터 교훈을 이끌어내며 자신의 신상에 관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나는 프라이부르크에서 태어났다. 그곳에는 프라이부르크대학교라고 불리는 곳이 있는데, 질서자유주의, 그리고 발터 오이켄(Walter Eucken)(1)과 관계가 있는 곳이다.”
스트라스부르 대성당과 스위스 은행들로부터 멀지 않은 부유한 도시 프라이부르크임브라이스가우는 슈바르츠발트 산맥의 발치에 자리해 있다. 가톨릭교와 보수주의의 세력권인 이곳 프라이부르크도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1929년 대공황의 여파를 입었다. 1933년 3월의 선거에서 약 36퍼센트의 득표율로 나치당이 승리하게 되는 것이다. 바이마르 공화국이 몰락하던 그때, 세 명의 대학교수들은 미래를 사유하고 있었다. 경제학자 발터 오이켄(1891~1950)은 그의 연구를 철학적으로 재정립하길 열망하고, 법학자 프란츠 뵘(Franz Böhm, 1895~1977)과 한스 그로스만데르트(Hans Grossmann-Doerth, 1894~1944)는 독점과 카르텔이라는 첨예한 문제들에 덤벼든다.(2) 그리고 이들의 만남은 기이한 화학작용을 만들어내기에 이른다.
이들은 함께 질서 개념에 역점을 둔 연구계획을 구상한다. 이 질서의 개념은 하나의 경제구조인 동시에, 시장경제의 규범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들에 따르면 카르텔을 무력화하고 경제전(經濟戰)의 발발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국가가 필요하다. 오이켄은 “국가는 경제적 조직들, 제도적 기틀, 그 안에서 경제가 작동할 수 있는 질서를 의식적으로 확립해야 한다. 그러나 경제과정 자체를 이끌어서는 안 된다(3)”고 적고 있다.
전통적 자유주의자들과 달리, 질서자유주의자들은 시장 혹은 사유재산을 자연의 산물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낸 취약한 개념으로 본다. 또한 경쟁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국가가 이를 재구성해야 하고, 근로자 교육‧인프라 건설‧저축 장려‧재산권‧계약법‧특허법 등 경쟁에 긍정적인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경제적 기틀과 경제과정 사이에는 화폐가 끼어든다. 오이켄은 사후유작 <경제정책의 원리(Die Grundsätze der Wirtschaftspolitik, 1952)>에서 ‘화폐정책의 우위’, 그리고 정치와 여론의 압력으로부터 벗어나야 할 필요성을 강조한다. 좋은 ‘화폐구조’란 인플레이션을 피해야 하지만 “경쟁질서와 마찬가지로, 최대한 자동적으로 작동하게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해단체들과 여론에 대한 무지와 나약함”(4)이 화폐정책담당자들을 그들의 신성한 목표인 안정성에서 빗나가게 할 것이다.
프라이부르크에서 질서자유주의자들의 작은 모임은 점차 덩치가 커지기에 이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명성이 도시의 범위를 벗어난다. 특히 이들의 연구는 빌헬름 뢰프케(Wilhelm Röpke, 1899~1966)와 알렉산더 뤼스토브(Alexander Rüstow, 1885~1963)라는 두 경제학자에게 영감을 주는데, 이들은 질서자유주의 경제이론에 역사적‧사회학적 준거와 상당량의 보수주의를 덧붙인다. 나치 정권에 반대하던 두 학자는 경제위기의 진원지가 경제계 자체가 아니라 방임주의로 야기된 사회질서의 해체라고 보았다. 근대성이 비인간화된 무산계급, 비만해진 국가, 집단주의적 열정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뢰프케는 ‘대중의 궐기’에 맞서서, 자신의 소명을 ‘엘리트의 봉기’라 불렀다.(5) 근로자들에게 잃어버린 존엄성을 되돌려주기 위해서는, 민주주의 이전의 (가족, 마을, 교회 따위의) 자연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공동체에 그들을 재통합시키고 평등주의를 척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유주의를 추종하는 뤼스토브는 “사람들은 일반적인 차등(差等)의 원칙을 부정했고, 그 자리를 거짓되고 잘못된 평등과 부분적이고 불충분한 박애라는 이상주의에 내주었다. 실제로 대가족에서건 핵가족에서건, 형제 간의 관계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문화 전통의 흐름을 유지시켜 세대 계승을 보장하는 부모자식 간의 관계이다(6)”라고 적고 있다. 프라이부르크의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기독교 문화를 지닌 뢰프케와 뤼스토브는 성 어거스틴이 ‘공동생활의 규율적‧조직적 규범’이라고 정의한 의미를 질서의 개념에 부여한다.
신자유주의라는 명칭으로 1930년대에 전개된 자유주의사조 부흥의 전 세계적인 움직임 속에서 질서자유주의 역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한다. 이러한 움직임 속에서, 질서자유주의자들은 (루트비히 폰 미제스와 그의 제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같은) 자유방임주의의 향수에 젖어 있는 이들과 대치를 이루는데, 뤼스토브는 이들이 “전통적 자유주의에서 비판하거나 바꾸어야 하는 핵심사항들을 하나도 잡아내지 못한다(7)”고 맹비난했다.
1930년대 말에도 질서자유주의의 척후병들은 여전히 비주류에 불과했다. 이들은 나치 치하 독일에서 할 일이 거의 없었지만, 그래도 그중 몇몇이 정부의 경제구상모임에 참여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루트비히 에르하르트와 알프레드 뮐러아르마크의 경우로, 빛나는 미래가 보장된 이 두 경제관리들은 “나치 정부와의 협력 차원에서 경공업의 이름으로 참여해(8)” 1941년 처음 만난다. 경제학자 프랑수아 빌제는 질서자유주의는 태동하자마자 “일종의 ‘추방’을 당하거나, ‘지하묘지’ 속에 삶이 놓이게 되었다. 국가사회주의체제가 도래하면서 두 명의 주요한 독일 자유주의자 뢰프케와 뤼스토브는 은퇴해야 했으며, 다른 이들은 생각을 온전히 말하길 포기하고 교수업을 계속하거나 아예 다른 일을 이어나갈 수밖에 없었다”(9)고 지적한다.
나치 정권의 붕괴 시점이야말로 질서자유주의자들이 판을 장악할 타이밍이었다. 서독은 프랑스‧이탈리아‧영국과는 달리, 사회민주주의보다는 자유주의를 기반으로 하여 재건을 실시했다. 가장 영향력 있는 열강인 미국은 대다수가 열망했던 국유화를 저지하고,(10) 오히려 완벽한 수출 집합소가 될 수 있도록 개방경제에로의 이행을 시행했으며, 새로운 동맹국들의 국가부채를 절반으로 줄여주는 행보를 보였다.(11)
이러한 환경들은 1948~1949년부터 질서자유주의와 기독교 교리를 하나의 ‘사회적 시장경제’로 융합하려는 체제의 확립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사회적 시장경제’는 만족스러운 표현이지만, 여기에 붙은 ‘사회적’이라는 형용사는 눈속임이다. 이 표현을 만들어낸 장본인인 뮐러아르마크는 1948년에 “사회적 시장경제의 ‘사회적’ 성격이란, 시장경제가 다양한 소비재를 대중에게 제시하며, 소비자가 수요를 통해 이 소비재의 가격 결정에 기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한다”(12)고 설명하니 말이다. 비스마르크 시대부터 이어진 사회보험제도의 유지, 소득세, 주택보조금, 중소기업 원조 등은 경쟁식 모델이 야기하는 불평등을 보상하기 위한 일련의 정책인 셈이다. 즉, 여기서의 ‘사회’는 국가가 그에 해당하는 사회를 만들어내야만 시장경제가 돌아간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독일식 신자유주의의 실험을 주도적으로 이끈 이는 루트비히 에르하르트로, 미국과 영국의 경제적 통합점령지역 비존(Bizone)의 화폐개혁준비특별기구 의장이었다가 1949년부터 1963년까지 콘라드 아데나워 행정부의 경제상, 그 이후 1963년부터 1966년까지 마침내 총리를 역임한 인물이다. 전시기간 동안 질서자유주의로 개종한 그의 지휘 아래, ‘라인강의 기적’에 관련된 경제구조개혁의 대부분, 특히 물가 자율화가 시행되고, 1948년 6월 20일에는 모두의 기억 속에 하나의 재건으로 새겨진 독일마르크화의 도입이 시행되었다.
 
사회적 시장 경제 개념을 창출한 질서자유주의
 
국제무역 개방화와 민영화의 선구자인 에르하르트는 자신의 행동을 하나의 은유로 요약하기를 좋아했다. “심판이 경기에 참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국가는 경기장에서 배제된다. 제대로 된 축구경기에는 늘 불변하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그 경기를 주관했던 구체적인 규칙이다. 나의 자유주의정책이 겨냥하는 바는 바로 경기의 규칙을 만들어내는 것이다.”(13) 1951년 기업 내 노사공동결정제도의 도입은 아데나워 총리의 강요한 이유도 있었지만 노조가 그것을 임금정체에 대한 보상책이라고 본 이유도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오이켄의 가르침에 따라, 에르하르트는 경제적 손실효과의 완화를 위한 국가 개입을 혐오했다. 그의 제자 중 하나이자 훗날 유럽중앙은행(ECB) 총재의 자리에 오른 한스 티트마이어는 “에르하르트는 완전고용의 목표에 집중하는 경기정책은 화폐안정성에 피해를 입히며 최소한의 개인적 책임감과 맞바꾸어 시행된다는 점을 우려했다”고 설명한다.(14)
질서정책은 1957년 에르하르트가 두 가지 결정적인 법을 통과시켰을 때 절정을 맞이한다. 이 두 가지 법 중 하나는 분데스방크(독일중앙은행)의 독립에 관한 법이고 다른 하나는 화폐 안정성과 왜곡 없는 경쟁을 보장하는 경쟁 제한 금지법이다. 프랑스 고위공무원 크리스토프 스트라셀은 “사회적 시장경제 모델에서 이 두 가지 정책은 일반적인 민주적 논의의 범위를 벗어나는 셈”이라고 분석한다.(15)
물론 경제부 홀로 행동에 나선 것은 아니다. 1948년 이래로 에르하르트는 뵘이나 오이켄, 뮐러아르마크처럼 비존의 학술위원회에 힘을 쏟은 여러 질서자유주의 전문가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경제부가 그들의 전용구역이 된 것이다. 또한 질서정책을 옹호하는 수많은 교대조가 생겨나게 되는데, 질서자유주의 학술전문지 <오르도(Ordo)>가 1948년 8월 창간호를 발간하고, 사회적 시장경제의 촉진을 장려하는 압력단체인 ‘사회적 시장경제를 위한 행동단체’가 1953년 발족되었다. 그 업적이 특히 <프랑크푸르터알게마이네자이퉁>을 비롯한 각종 언론으로 끝없이 쏟아져 나왔으며, ‘사회적 평등의 향상을 위한 단체’를 표방하는 가톨릭 기업운동인 ‘디 바게(Die Waage, 저울)’가 총선 이전 10년간 여론 캠페인의 재원을 조달하기도 했다.(16)
그러나 질서자유주의가 국회에 자리 잡는 데 성공한 것은 가장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질서자유주의는 사회적 시장경제 개념과 ‘만인을 위한 번영’이라는 슬로건으로, 신생당인 독일 기독교민주동맹(CDU)에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세력권에게 반격을 날릴 기회를 제공한다. 선거에 승리한 CDU는 1949년부터 “자유를 통해, 그리고 ‘사회적 시장경제’ 안에서 진정한 경쟁과 독점 통제를 통해 표현되는 약속 준수에 의해 질서가 실현되는”(17) 사회상을 내세운다.
사회민주당(SPD)의 몇몇 지식인들 역시 이 매혹적인 메시지를 지각했다. 1955년 카를 쉴러가 발간한 저서 <사회주의와 경쟁(Socialisme et concurrence)>에는 그 유명한 격언 “최대한의 경쟁, 필요한 만큼의 계획화”가 등장한다. 이는 SPD의원 대다수가 생산수단의 사유화와 시장경제를 인정한 1959년 11월 바트 고데스베르크 특별당대회에서 채택한 문장이기도 하다.
만약 질서자유주의가 날 것 그대로의 상태로 독일 사회에 강요되었다면 이러한 근대화는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에 있어서, 독일의 사회적 시장경제는 오이켄과 비스마르크의 이종교배 형태, 즉 프라이부르크에서 이론화한 회계규정과 19세기 말 아돌프 히틀러가 설립한 사회보장제도의 만남으로 이루어졌다. 1966년 에르하르트의 몰락으로 인해 1969년 사회민주주의자 빌리 브란트가 총리로 취임하며 강화된 ‘사회적’ 노선으로의 변경에 방점이 찍히게 된다. 질서자유주의와 비스마르크적 영향에 케인스적 관점이 더해지는데, 중기적 계획화, 임금 인상, 노사공동결정 강화, 교육 및 보건 투자가 바로 그것이다. 이렇게 해서 1970~1980년대의 독일은 사회적 시장경제에 대한 충성을 부르짖지만 전통적 개입주의를 상당히 포함한 ‘독일식 모델’로서 수정되었다.
1982년의 정권교체는 기독교민주당의 헬무트 콜 총리에게 판을 끝낼 기회를 제공했다. 이념적 저울이 흔들렸고, 이제는 예산 균형을 회복할 때가 된 것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 동안 독일통일의 과정에 들어간 어마어마한 비용은 근본적 질서자유주의로의 복귀를 저지하는 역할을 했으며, 1998년 취임한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노동법의 대규모 규제 완화와 사회보장제도의 감축을 통해 1950년대의 질서를 회복하게 되었다. 오늘날에 들어서는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이 정책들을 공고히 했는데, 메르켈 총리는 지난 2014년 1월 “사회적 시장경제는 하나의 경제적 질서이자 사회적 질서 그 이상이다. 그 원칙들은 시간을 초월한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창시된 지 80년이 되는 오늘날, 독일에서 질서자유주의는 (1957년에 설립된) 카르텔근절사무소와 경쟁문제에 관해 정치권에 조언을 제공하는 독점위원회, 혹은 전 연방 및 주(州)의 단위로 적자 0퍼센트의 ‘황금률’ 준수를 감시하기 위해 2010년에 설립된 안정성위원회 등에서 존속하고 있다. 그러나 독일의 정치경제적 논의에 있어 이 정신은 각자 제 입맛에 맞게 해석 가능한 공통의 문화적 재산처럼 스며들어 있는 상황이다.
SPD와 독일을 위한 대안 정당(AfD, 쾰른 대학에서 뮐러아르마크의 조교수였던 경제학자 요아힘 스트라바튀가 공동 창당자 중 하나이다)(18), 녹색당을 포함한 모든 보수당과 자유당을 막론하고, 독일 정당들은 자신들을 오이켄의 후계자로 여긴다. 모두가 자신의 적들이 이러한 전통을 악용한다고 비난한다. 2005년 녹색당 하원의원이 된 게르하르트 시크는 “나는 질서자유주의자이지만, 좌파”라고 공언한다. 경제학박사 학위 소지자이며 발터 오이켄 연구소의 전 연구원 출신인 시크 의원은 그렇지만 “나는 신자유주의자는 절대 아니다. 녹색당원들 사이에서 ‘사회적 시장경제’라는 용어는 합의가 된 용어이다. 물론 거기에 ‘환경적’이라는 용어를 덧붙이기는 한다. 나는 시장 조정에 관한 질서자유주의적 분석에 동의한다. 그리고 경쟁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국가가 규칙을 제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고 말한다.
수년이 흐르며 상당히 개입주의적인 질서자유주의 사조가 수면 위로 부상했다. 녹색당의 영향력 있는 하인리히 뵐 재단 랄프 퓍스 이사장은 “닫혀 있는 학설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책임감’이라는 질서자유주의적 원칙은 금융시장과 환경세의 조정뿐 아니라 역내 부채의 상호부조 거부 역시 정당화할 수 있다. 퓍스 이사장은 “질서자유주의는 방임주의와 국가주의 사이의 제3의 길이다. 녹색당에 있어 이는 전통적인 좌파적 이념과 신자유주의 모두와 차별화되는 매우 흥미로운 포지션”이라고 평가한다.
2005년부터 2010년까지 독일 좌파당 의원을 지낸 헤르베르트 슈이 전 경제학교수는 “사회적 시장경제는 일종의 제안적 개념이다. 이는 국민을 사회주의 이념으로부터 떨어뜨리기 위해 전후에 창설된 이론으로, 사회적 시장경제의 공식은 일부 좌파들마저 빠져들게끔 작동한다”고 강조한다. 사회적 시장경제의 공식이 유연하지만 굉장히 적법한 레퍼런스를 야기하는 이유는 프랑스의 드골주의와 마찬가지로 재건 구상에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독일 노동조합총연맹(DGB)은 사회적 시장경제 개념을 1996년에 도입했다. DGB의 창립강령은 ‘사회적 시장경제는 상당 수준의 물질적 번영을 이루어냈으며 야만적 자본주의에 맞서서 이룩한 위대한 역사적 진보를 상징한다’고 밝히고 있으며, 이는 그 이후로 바뀌지 않은 채 남아 있다. 그렇지만 동시에 이 제도가 ‘대대적 실업도, 자원 낭비도 방지하지 않았으며 사회적 평등을 이룩하지도 않았음’을 인정한다.
독일의 일부 좌파들이 질서자유주의를 신자유주의에 대립되는 개입주의의 한 형태로 보는 반면, 경영주 측에서는 이를 완전히 자유로운 시장경제 개념과 연관짓는다. 이러한 관점을 공유하는 일련의 기관들은 질서자유주의 사상에 대해 다채로운 목소리를 내는 반향실 역할을 한다. 새로운 사회적 시장경제를 위한 이니셔티브, 최근 티트마이어가 주관한 싱크탱크, 재생에너지 공적원조 반대운동, 재산세 반대운동, 혹은 2015년 초에 도입된 법정최저임금 반대운동 따위가 그것이며, ‘사회적 시장경제를 위한 행동단체’는 창설된 지 60년이 된 오늘날에도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다. 더 최근의 예로, 사회적 시장경제의 쇄신을 목표로 하는 이에나 연합은 ‘질서정책 쇄신상’을 제정하여 이를 해마다 수여하고 있으며, 시장경제를 지향하는 재단의 지원을 받는 경제학자모임인 크론베르거 크라이스는 “불가피한 개혁에 대한 사유”를 정부에 제공하고 있다고 자부한다. 질서자유주의 세력은 심지어 교회 내부에도 존재하는데, 독일주교회의 의장 라인하르트 막스 뮌헨주교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질서자유주의의 가장 영향력 강한 목소리는 정부의 선택을 인도하고자 1963년 에르하르트가 설립한 독일경제정책자문위원회일 수밖에 없다. 위원회의 회원 다섯 명 중 오직 페터 보핑거만이 케인스주의자이다. 그는 “무슨 주제이든 간에 나는 늘 1:4이다”라고 유감스러워하며 (<이코노미스트>, 2015년 5월 9일) 나머지 회원들은 그 무엇보다도 실용성을 우선시한다. 예컨대 이 ‘석학’ 중 한 명이자 발터 오이켄 연구소장인 라르스 펠트 프라이부르크대 교수는 “우리는 질서자유주의 개념의 이점을 발견하지만,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개념은 매우 불균질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고 설명한다. “질서자유주의 그 자체가 긴축과 반드시 합치되는 것은 아니다. 2008년, 우리는 경제위원회의 동료 클레멘스 퓌스트와 함께, 금융위기 이후 경기부양을 위한 경제대책을 마련하라고 정부에 권고했다. 그렇지만 ‘만일 이 정책이 금융시장에서 독일의 리파이낸싱 조건을 악화시킬까 봐 우려된다면, 채무 규제를 도입하라’고 덧붙였다.” 이것이 바로 예산의 황금률인 셈이다. 정부는 두 가지 권고를 문자 그대로 따랐다. 경제학자이자 질서자유주의 전문가 랄프 프타크는 “독일인으로서, 나는 경제적 사유의 관점으로 볼 때 우리나라가 이렇게 경직되어 있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다”고 고백한다.
상당히 타락한 버전의 독일식 적용을 넘어서서, ‘질서’ 이념은 화학적으로 순수한 상태로 유럽연합 구조 내부에 옮겨졌다. 옌스 바이트만 분데스방크 총재는 “마스트리히트 조약의 모든 기틀은 질서자유주의와 사회적 시장경제의 핵심원칙을 반영한 것”이라고 인정한다.(19) 2009년 말 이후 발효된 리스본 조약의 2조3항은 “균형 잡힌 경제성장과 물가 안정성, 경쟁력 높은 사회적 시장경제에 기반을 둔 유럽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호소하고 있는데, 이는 에르하르트의 담화를 그대로 베낀 듯 보인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EU집행위원회의 첫 번째 위원장인 발터 할슈타인 위원장에서부터 리스본 조약의 교섭위원 뮐러아르마크를 거쳐 한스 폰 데어 그뢰벤 EU경쟁위원(1958~1967)에 이르기까지, 1950년대의 공동시장 구축에 참여한 독일인 대부분이 오이켄의 사상에 동조했기 때문이다. 유럽연합 안에서 비주류에 불과했던 이 고위인사들은 점령 당시 독일연방의 에르하르트 및 경제정책자문위원회의 전략을 유럽연합의 차원에서 재현해냈다. 적법성 없는 기관의 관계자였던 이들은 냉전 동안 확립된 열강들이 부차적 문제로 판단한 경쟁의 법적 기틀 및 화폐 안정성의 확립에 치중했다.
 
유럽에 스며든 질서자유주의
 
그렇지만 이들이 아직 승리를 이룩한 것은 아니었다. 1950년대에 유럽은 서로 다른 두 가지 사상적 지주를 골조로 하여 건설되었다. 하나는 프랑스의 개입주의적이고 계획주의적인 사상으로, 경쟁구조 안에 보조금을 이용한 대규모 예외 구역(공공농업정책 혹은 ‘국가적 챔피언[내수시장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점하고 그 분야의 해외 경쟁자들을 저지하도록 정부가 선별한 특정 기업을 가리킴-역주]’ 관련 정책)을 마련하는 것에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이 사상은 유럽의 내수시장 정책을 전 세계 자유무역주의에 대한 일종의 보호책으로 본다. 다른 하나는 질서자유주의로, 이 사상은 역내 단일시장의 건설뿐 아니라 ‘자유로운 세계’의 차원에서 관세장벽의 철폐를 진행하도록 교역국들에게 압력을 가한다. 1956년 이후로 에르하르트 총리는 범대서양 차원의 대규모 시장을 구축하길 주장해왔다.(20)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주류를 이뤘던 프랑스식 접근법은 예산긴축과 경쟁력을 전제로 하는 국제무역의 규제 완화 흐름에 더 이상 버텨내지 못했다. 1983년 3월 23일, 프랑수아 미테랑 전 프랑스 대통령이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어준 단절정책을 고수하길 포기하면서 유럽통화제도와 독일마르크화에 고정된 프랑화를 유지하기로 결정했을 때, 프랑스는 상징적 왕좌를 내어준 것이다. 이러한 선택은 좌파 정부에 의한 긴축정책의 실행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이는 2015년 7월 알렉시스 치프라스 그리스총리가 인가할 수밖에 없었던 긴축정책과 상징적으로 비견될 만하다. 1983년 2월 19일 미테랑 대통령은 “나는 두 가지 야망 사이에서 혼란스럽다. 하나는 유럽의 건설이며 다른 하나는 사회적 정의의 건설”(21)이라고 토로했다. 같은 식의 대안이 그리스 지도자에게도 강요되었는데, 물론 헬무트 콜 총리와 자크 드롤 프랑스 경제부장관의 압력은 그리스를 향한 성난 최후통첩에 비해서는 훨씬 덜 강력했던 것이 사실이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25년 후, ‘질서’ 사상은 EU경쟁위원회 전반에 스며들어 있으며 1998년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상의 수상자인 벨기에의 카럴 판미르트 혹은 이탈리아의 마리오 몬티를 비롯한 수많은 EU위원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그러나 질서자유주의의 가장 강력하고도 난공불락인 세력권은 유럽중앙은행이다. 마리오 드라기 현 ECB 총재는 “ECB의 화폐구조는 ‘질서자유주의’ 원칙에 굳건히 의거해 있다”고 말한다.(22) 운영방식이나 민주적 기관들에 대한 독립성이나, 혹은 물가 안정성 유지라는 유일한 목적에 있어서나, ECB는 분데스방크의 복사판이다. 2003년 (9월 19일), <레제코> 지는 장클로드 트리셰 ECB퇴임총재가 (ENA 출신에 프랑스인이지만) “1949년에 창설된 이후 유로화를 도입하기까지 분데스방크가 구현했던 정신 및 실천의 가장 진정한 대표자”라며 경의를 표했다.
이제 전투는 경쟁자가 없는 관계로 중단되었다. 유럽에서 국민주권의 기조가 썰물처럼 빠져나가자, 유럽연합의 기관들과 유럽중앙은행에 끈기 있게 자리 잡은 자동적 경영구조의 냉철한 효율성이 드러나 보이게 되었다. 마스트리히트 조약 덕분에 민주적 무중력 상태에서 배치된 지수들(그 유명한 3퍼센트의 적자율), 2012년 3월 회원국들에 대해 예산적자를 제한하는 독일의 ‘황금률’ 도입이 그것이었다.
그리스 국민투표가 시행된 지 열흘 후, 독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경제학자이자 재무부 고문 및 질서자유주의의 단호한 대표자인 한스-베르너 진은 우리에게 이렇게 단언했다. “질서자유주의 기틀은 케인스식 정책들로 위기에 대처하는 방안을 배제한다.” 이제 오이켄의 기틀은 철창으로 바뀌어버렸다.
 
 
번역·박나리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1) Wolfgang Schäuble, 프랑크푸르트 담화, 2012년 9월 5일
(2) David J. Gerber, 「Constitutionalizing the economy : German n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