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 유럽의회가 해법인가?

2015-07-31     수전 왓킨스

유럽통합을 지지하는 자들에게는 민주주의 결함의 문제를 추궁당할 때마다 제시할 수 있는 모법 답안이 있다. 바로 ‘공동결정’(2009년 리스본 조약 이후 유럽의회의 권한을 강화하기 위한 조처로 유럽의회는 유럽연합집행위원회가 유럽이사회와 공동으로 제정한 입법안을 수정하고 거부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니게 되었다-역자)의 주역인 유럽의회가 있는 것이다. 특히 유럽연합집행위원회의 특권이 강화될 때마다 ‘공동결정’ 절차의 우수성을 칭송하는 목소리가 높아진다. 공동결정 절차는 본래 유럽연합집행위원회(유일하게 유럽연합 지침 및 규정을 발의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닌 기구)와 유럽의회(법규를 개정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닌 기구), 그리고 마지막으로 유럽이사회(의사결정권을 지닌 국가 간 기구)의 합의 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한 취지에서 도입됐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유럽의회가 누릴 수 있는 선택권은 단 두 가지뿐이다. 수락 가능한 개정안을 발의하던가, 아니면 그냥 무시당하는 것에 만족하던가.

공동결정 절차를 지휘하는 사령탑은 주요 정치 그룹의 지도자들이다. 대표적인 예가 유럽국민당(EPP, 중도 우파)과 사회민주주의진보연합(S&D)이다. 두 정치 그룹은 유럽의회의 과반수 의석을 너끈히 넘긴다. 그러니 두 정치 집단이 동의한 법안은 일사천리로 통과가 되기 십상이다. 말하자면 그들의 회의가 사실상 유럽의회를 지휘하는 진정한 구심점 역할을 하는 셈이다. 가령, 집행위원회의 지침을 수정해 새로운 개정안을 만들기 위해 모인 20개 유럽의회 산하 위원회(어업, 축산업, 경쟁, 재정, 경제 위원회 등)들의 회의 일정도 주요 정치그룹의 대표들이 회의를 해서 결정한다. 그럼에도 그들 역시 다국적기업이나 때에 따라서는 노동단체 및 비정부기구(NGO)의 로비에서 실상 자유롭지 못하다.
유럽의회 산하 위원회들이 일단 합의를 본 개정안은 의회에서 통과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다. 정당 대표들은 일단 이렇게 합의한 개정안을 최종 합의를 위해 유럽연합집행위원회와 유럽이사회에 제출한다. 사실 이처럼 개정안이 술술 통과되는 데는 각자의 처세술도 어느 정도 작용한다. 가령, 유일하게 개정안에 반대할 수 있는 전략은 어떻게든 회의를 질질 끄는 것뿐인데, 교양 있는 자들이 모인 이 좁은 바닥에서는 그런 상스러운 행위를 끝까지 고수할 만한 강심장은 없다.
EU 정치 무대에 다양한 정치세력이 등장하자(1980년대에는 좌파와 녹색당, 1990년대에는 EU 회의론자들) 그들에게는 온갖 자금과 사무실과 인력이 지원됐다. 그 이유는? 숫자가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는 EU 정치판에 이 신규 세력을 포섭하기 위한 목적이다. 그런 방식을 통해 저항 세력은 조용히 정당의 중립화, 탈정치화 메커니즘에 흡수된다. 아마도 이탈리아의 지식인 안토니오 그람시(1)가 이 모습을 지켜보았다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으리라.
EU의 합의 도출 절차를 간소화하려는 시도는 1990년대에 등장했다. 당시 중도좌파는 60석 차이로 EPP에 비해 (조금 더)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프랑스 사회당 출신의 대표 장피에르 코트(1994년에 이르러 영국 노동당 출신 폴 그린에게 자리를 넘겨준다)는 당시 의회 내 “다수 진보주의 세력”을 동원해 노동자 권익 보호에 앞장 서는 ‘사회적 유럽’을 건설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경영자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는 마스트리히트 조약의 수렴조건의 내재적 원칙에 부딪히면서, 그들은 이렇다 할 가시적인 성과를 이루지 못한다. 이어서 중도 좌파 정당들이 영국과 독일에서 집권에 성공하면서, 영국의 노동당과 독일의 사민당(SPD) 출신 의원들의 유럽의회 내 활동도 눈에 띠게 잠잠해진다. 결국 ‘사회적 유럽’을 건설하려던 야망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한 채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얼마 뒤 녹색당이 부정부패에 연루된 중도좌파 소속 유럽연합집행위원들을 감싸고 돈 것이 화근이 되어 1999년 3월 결국 자크 상테르가 이끄는 유럽연합집행위원회가 사퇴하는 처지에 이른다. 1999년 선거에서 EPP가 유럽의회 내에서 다시 다수당으로 등극하고, 이어 2004년 대연정(Grosse Koalition) 체제가 복권한다. 당시 대연정 체제는 한 EU 고위공직자의 허울 좋은 표현을 빌리자면 다시금 의회를 “통치 가능한” 상황으로 되돌려 줄 유일한 수단처럼 인식됐다.(2)
주요 정당들이 거의 엇비슷한 정책을 표방하면서, 각 회원국의 의회들도 국민의 목소리에 점차 폐쇄적인 상태로 변한다. 그러나 불투명성에 있어서라면 사실 유럽의회가 개별국의 의회보다는 확실히 한 수 더 위다. 유럽의회는 절대 시민이 아니라, 오로지 다른 EU기구들과의 관계에 대해서만 ‘책임’을 질뿐이다. 가령 유럽의회의 개정안도 유럽연합집행위원회나 유럽이사회가 합의해야만 비로소 효력을 발생할 수 있지 않은가. 한편 정치그룹의 지도자들도 절대 자기 당의 당원들에 대해 보고할 의무를 지지 않는다. 즉 보고를 하지 않더라도 결코 해임을 당하거나 의석을 박탈당하는 법이 없다. 요컨대 그들이 누리는 정당체제는 20세기 대중을 위한 정당이라기보다는 19세기 유력자들을 위한 정당에 훨씬 더 가까운 셈이다.
 
EU의 저항세력이
탈정치화 메커니즘에 흡수되다
 
유로존 위기가 발생했을 때 유럽의회가 보여준 역할은 이런 정당의 변화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당시 대연정 체제를 이끈 조제프 돌과 마르틴 슐츠는 유럽의회가 가장 전제적인 권력 형태의 출현을 지지하며 치욕스러운 정책들이 통과되도록 만드는 데 일등공신으로 활약했다. 그런데도 이후 그들은 EU 지침의 일부 결함을 비판하거나 은행가들의 고액 보너스 규제에 앞장서면서 오히려 민중의 수호자로 인식되었다. 이를테면 그들의 행보가 권력의 시녀가 된 언론을 대신하는 상당히 용기 있는 태도로 칭송받았다.
EU의 중추적 기구인 유럽의회에는 모두 751명의 의원들을 위한 의석이 마련되어 있다. 브뤼셀에 1백만m2에 이르는 부지 위에 세워진 이 의회는 모두 1만 명에 달하는 공무원, 자문관, 통번역가들을 고용하고 있다. 한편 유럽의회의 관료적인 업무가 확대되면서, 다른 기구들이 그렇듯 의회도 오로지 두 가지 과제에만 전력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영토 확대와 세력 증강이다. 가령 유럽의회 산하 헌법위원회(AFCO)에 소속된 원로 공직자들은 사실상 외부적으로는 제대로 목소리도 내지 못하면서, 별로 하는 일 없이 그저 자리 보전을 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경제위기 이후 유럽이 갑작스럽게 전제적 행보에 나선 것은 유럽의회의 수호자들이나 의원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황금 같은 기회였다. 말하자면 유럽의회가 ‘트로이카’(3)의 권력과 집행위원회의 위상 강화, 초헌법적인 특권을 누리는 독일 총리의 패권을 견제하기 위한 거의 유일한 합법적 기구로 인식되기에 이른 것이다.
2014년 장클로드 융커를 집행위원회위원장에 앉히기 위한 선거전에서도 이런 영향력 확대를 위한 싸움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아마 이때만큼 유럽의 법률이 심각하게 유린된 적도 없을 것이다. 본래 EU 조약에 따르면 집행위원장 선출은 이사회의 몫이고, 의회는 이에 대해 승인하거나 거부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니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유럽의회 내 정치 그룹 대표들은 유력후보 시스템(Spitzenkandidaten)에 따라 집행위원장을 뽑기를 원했다. 2014년 선거에서 가장 많은 표를 득표하는 정치그룹의 후보가 집행위원회를 이끌 적임자라는 논리였다(2014년 선거에서 처음으로 주요 정치그룹이 집행위원장 후보를 함께 세워 선거전을 치렀다-역자). 물론 중도좌파(M. 슐츠), 자유당(기 베르호프스타트), 녹색당(다니엘 콘벤디트)의 대표들도 융커에게 러브콜을 보내기는 마찬가지였지만, EPP의 입지가 워낙에 우세했다.
2014년 3월, 더블린에서 열린 경선에서 EPP는 자신들의 집행위원장 후보로 융커를 지명했다. EPP는 옛 동지에게 집행위원장 자리로 보답을 하려던 셈이었다. 정실정치의 대가인 클로드 융커는 경제위기가 발생한 동안 유로그룹(유로존 재무장관 협의체-역자)의 의장직을 맡았고, 거의 20년 동안 관대한 금융시스템과 다국적기업에 대한 법인세 인하의 천국으로 유명한 룩셈부르크 대공국의 총리를 역임했다. 그러나 2013년 7월 룩셈부르크 국가정보기관(SREL)의 추잡한 비리를 덮으려 한다는 비판에 휘말리면서 결국 그는 총리직을 내놓았다. 당시 SREL은 불법사찰, 상업적 목적의 비밀정보 유출 등 과거 글라디오(4)에 버금갈 정도로 온갖 체계적인 부정부패와 음모에 가담한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1980년대 중반, 공관을 표적으로 한 일련의 폭탄테러의 배후에 정치적 긴장감을 높이고 ‘적색’ 공포를 조장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리고 이 사건의 책임이 룩셈부르크 왕실일 수 있다는 가설이 제기됐다. SREL은 2000년대 초 융커 총리가 룩셈부르크 대공 앙리와 함께 동생 장의 테러 가담과 관련한 대화를 녹취한 테이프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2013년 초 유명 폭탄테러 사건(Bommeleeër, ‘폭탄설치자’라는 의미-역자)(5) 용의자로 지목된 젊은 경찰관들의 재판이 열리는 가운데 실시된 룩셈부르크 의회 청문회에서 전부 드러났다.
2014년 5월 선거 이후 한동안은 모든 게 불확실해졌다. 유럽의회는 끝내 EU조약의 규정을 무시한 채 끝내 이 후보를 승인하고 말 것인가? 그러나 이 문제를 심판할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조금의 의혹도 없었다. 2011년 탄생한 유럽 체제에서는, EPP가 내세운 이 유력후보(Spitzenkandidat)가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기구의 대표를 맡을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를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독일 총리뿐이었다. 유럽의 언론들은 굳게 입을 다물었다. 유럽연합 내에서 메르켈 독일 총리의 말이 법보다 앞선다는 사실에 경악하는 언론인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독일 총리의 선택이 독일 국익에 대한 염려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가령 당시 EU 회의론자들이 융커의 지명을 반기고 있는 상황에서, 독일은 (융커의 지명에 반대하는-역자) 영국이 유럽연합에 머물면서 곁에서 보수 세력의 힘을 더욱 실어주기를 원했다. 그러나 독일 총리는 기민당(CDU)의 입장을 고려해서 결국 융커를 선택하게 된다. 당시 독일에서는 거물 미디어 그룹 스프링거와 사민당(SPD), 프랑크푸르트 학파 2세대를 대표하는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 등으로 이뤄진 사상적 동맹체가 융커가 낙마한다면 그것은 아주 치욕스러운 일이 될 거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하버마스는 이 불명예로 얼룩진 인물을 집행위원장에 앉히지 않는다면 결국 “유럽통합계획은 사망”에 이르고 말 것이라고 주장했다(6). 메르켈 총리는 결국 요리조리 여론의 향방을 살피다, 결국 미디어 그룹 스프링거를 통해 선거에서 표를 더 얻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기존의 정치노선을 조정했다. 마침내 융커가 공식적으로 집행위원장에 추대된 것이다.
그러나 이후 융커 총리의 동의 하에 룩셈부르크가 유럽의 다국적기업들에 수십억 달러의 조세를 절감해주는 조세회피처가 되어 온 사실을 낱낱이 밝히는 중대 문건이 폭로됐다. 그러나 이번에도 유럽의회 의원들은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융커의 신임안을 통과시켰다. “우리에게는 융커가 집행위원장이다”라고 마르틴 슐츠가 선언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슐츠도 유럽의회 의장으로 재선됐다.
유럽의회의 초사법적 권한이 민주화의 일환이라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융커는 유럽의 유권자는 고사하고, 중도우파 후보를 선출한 유권자들을 상대로도 절대로 책무를 다하지 않는다. 그가 유일하게 책임을 다하는 대상은 그를 지명한 독일 총리뿐이다. 가령 신임 집행위원들이나 혹은 부집행위원장의 면면만 봐도 그런 사실이 여실히 드러난다. 사실상 부집행위원장들은 모조리 볼프강 쇼이블레 독일재무장관과 같은 열혈 긴축정책 지지자들로 채워지지 않았던가.
좌파는 알렉시스 치프라스를 유럽좌파당의 집행위원장 후보로 내세우며 이같은 선출방식을 합법화하기 전에 한 번 더 깊이 숙고했어야 했다. 선거절차에 참여하고 국가 간 연대를 위해 열심히 뛰어다니는 것과, 유럽의회가 유럽연합을 좀 더 민주적인 체제로 만든다는 생각에 힘을 실어주는 것은 별도의 문제다. 사실 유럽의회는 그럴 만한 능력이 없다. 만사가 공동결정절차를 중심으로 조직되는 이 유럽의회는 사실상 유럽에게서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가장 절실히 필요한 것을 박탈하고 말았다. 그것은 바로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능력이다.
 

글·수잔 왓킨스Susan Wakins

 

 
 
번역·허보미 jinougy@naver.com
서울대 불문학 석사 수료.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1) 안토니오 그람시는 ‘수동적 혁명’ 절차에 대한 이론을 정립했다. 이에 따르면 지배계급은 피지배자들의 대표를 선출함으로써 반대의견에 재갈을 물린다.
(2) Julian Priestley, Stephen Clark, <Europe's Parliament : People, Places, Politics>, John Harper Publishing, 런던, 2012년.
(3) 유럽중앙은행(ECC), 유럽연합집행위원회, 국제통화기금(IMF)
(4) 글라디오는 1948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 창설한 유럽의 비밀군대였다.
(5) Bommeleeër는 ‘폭탄설치자’를 의미하는 룩셈부르크어 표현이다. Cf. 'Luxpol : What led to early elections in Luxembourg?', 2013년 7월 17일, luxpol.wordpress.com
(6) Jürgen Habermas, 'Europa wird direkt ins Herz getroffen', Frankfurter Allgemeine Zeitung, 2014년 5월 2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