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 흉악범죄 -“무장 괴한 두 명이 내게로 다가왔다…”

2015-07-31     세르히오 곤잘레스 로드리게스

 

   
▲ <소리(Red)>, 2009-카를로스 카펠란

 

7월 14일 프랑스대혁명 기념일 행사 참석을 위해 프랑스에 입국한 엔리케 페냐 멕시코 대통령의 내방 일정은 그를 향한 반대 시위로 얼룩졌다. 고문과 학살이 수없이 자행되고 실종 사건도 빈번히 일어나는 상황에서, 멕시코 정부는 과연 국민의 안전을 위해 무엇을 한 것일까? 수많은 단체들이 이에 대해 정부의 책임을 묻고 있는 가운데, 소설가 세르히오 곤잘레스 로드리게스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지면을 통해 멕시코의 암울한 현실을 조명하는 증언담을 전한다. 간혹 읽기가 불편한 부분도 없지 않다.

  

내 앞에는 화면이 나오는 스크린이 하나 놓여 있었다. 화면에선 누군지 모를 남자 하나가 고문을 당한다. 한 방송국에서 내게 차제에 편성될 정치 프로그램에 쓰겠다며 인터뷰를 요청한 것인데, 사무실 하나를 대충 무대처럼 꾸며놓고 카메라를 설치한 제작진은 내게 극한의 폭력에 대해, 조금 더 정확히는 범죄적 차원에서 행해지는 폭력에 대해 물었다.
 
 내가 개인적으로 ‘손택 명제’(1)라고 이름 붙여 내세우는 견해가 하나 있는데, 제작진의 질문에 대해서도 나는 이를 바탕으로 답변했다. 그렇다. 나는 잔혹한 이미지는 우리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계속 우릴 괴롭힌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장면들은 우리가 스스로에 대해 더욱 잘 알 수 있도록 해준다. 검열은 현실을 조작하는 행위이다. 당국의 무책임하고 비효율적인 면모, 어리석은 말과 행동, 남용 행태 등을 은폐하는 꼼수에 해당한다. 

제작진은 질문에 대한 답변이 끝나자, 내게 화면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 보라고 했다. 몇몇 장면을 보고 이에 대해 코멘트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내 답변을 촬영했던 카메라가 다시금 내 앞에 놓인다. 나는 분명 카메라를 거부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다큐멘터리 분야를 개척한 지가 베르토프 감독의 카메라아이(Camera eye: 카메라가 피사체를 포착하는 듯한 냉철한 관찰자적 시선 - 역주)와 함께 그가 남긴 가르침이 떠오른다. 객관성을 유지하며 대상의 자발적인 움직임을 담아낼 것, 정확하게 원형 그대로를 촬영하여 추후에 편집할 것. 그의 촬영 원칙을 떠올리며 나는 내게 주어진 시련을 감내한다. 영상을 보고 나면 한동안 괴로울 게 뻔했다. 내가 자리에 앉아 있는 동안 영상이 차례로 지나갔다.
 
나는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작품 <시계태엽 오렌지>에 나오는 주인공 알렉스가 된 기분이었다. 영화에서는 폭력을 일삼던 주인공에게 극도의 폭력적인 장면을 강제로 보여줌으로써 폭력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 반응을 일으키게 하려는 치료법을 행하는데, 내가 딱 그 꼴이었다.
 
나는 영상에 나오는 장면들을 유심히 살펴봤다. 어딘지는 잘 모르겠지만 크고 환한 어떤 곳에 누군가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체격으로 보건대 남자가 분명했다. 남자의 온 몸이 비닐이나 회색 천으로 뒤덮여 있었으며, 두 발과 무릎, 허리, 목 등은 은색 테이프로 묶여 있었다. 군복 같은 느낌의 제복을 입은 청부업자 여섯 명이 그를 둘러싼다. 손에는 무기를 들고 있었고, 얼굴을 다 가리는 검은 모자를 보란 듯이 뒤집어썼다. 고문이 시작되길 기다리는 이들에게, 대장으로 보이는 한 사람이 행동을 지시한다. 녹화본의 음질이 좋지 않았는데, 최악의 상황을 직감한 남자는 절망 속에서 발버둥 치며 비명과 신음 소리를 냈다.
 
내 눈은 이 장면을 영원히 기록한 카메라로 대체됐다. 관찰자로서의 나를 촬영하는 카메라가 녹화하는 것은 카메라의 시각에서 현장을 바라보는 내 눈이었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바라보고 있는 이 진짜 같은 가짜 시선. 청부업자 무리의 우두머리는 검은 두건 대신 흑백의 무시무시한 가면을 쓰고 있었다. 마블 코믹스에서 만들어낸 안티 히어로 ‘퍼니셔(응징하는 자)’의 가면이었다. 퍼니셔는 악인을 위협하거나, 갈취하거나, 감금하거나, 고문하거나, 죽이는 크라임 파이터다. 매서운 고양이 눈매로 눈 부위가 뚫린 해골 가면을 쓴 퍼니셔는 굉장한 무예 실력을 숨기고 있다. 무기 다루는 능력은 물론 대테러 전술과 군사 지략도 뛰어난 그는 자신의 가족을 죽인 살인자들에게 복수를 하고 다닌다. 내 눈앞에 펼쳐진 이 실사판에는 그 어떤 특수 효과도 적용되지 않았다.
 
청부업자 우두머리의 곁에는 또 다른 한 명이 근엄한 태도로 그를 보좌하며 커다란 칼을 휘둘렀다. 두 사람이 남자의 급소 부위로 다가간다. 거세가 시작되고, 남자는 격하게 몸부림을 친다. 그의 비명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오고, 사형집행인들은 잘려나간 부위를 바닥에 내던진다. 가해자들이 고문에만 정신이 팔려 자기네들끼리 왈가왈부하는 동안 피가 떨어지며 사방으로 튄다.  
 
카메라는 내 반응을 포착하려 했다. 나는 카메라가 뭘 원하는지 알고 있었다. 나는 눈 하나 깜짝 않은 채 부동자세를 유지하며 오로지 화면에만 집중했다. 나는 영상 속에 들어가 있었다.

   

***

  

나는 멕시코에서 감금된 뒤 고문을 당했던 그날 밤 일이 떠올랐다. 당시 나는 멕시코와 미국 사이의 국경에서 일어난 여성 살인 사건에 대한 취재를 하고 있었는데, 한 범죄 집단이 내게 구타와 협박을 가하며 취재를 못하게 방해했다. 필자의 저서 <사막의 유해>(2)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1999년 6월 15일 저녁, 집에 가기 위해 택시를 탔을 때 사건이 벌어졌다.
 
집으로 향하던 중, 어떤 길모퉁이에서 갑자기 택시가 멈춰 섰다. 무장 괴한 두 명이 다가와 택시 뒷좌석으로 난입하여 나를 사이에 앉히고 두 눈을 감으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다시 택시에 시동이 걸렸다. 알고 보니 운전사도 공범이었다. 나는 묻는 말에 고분고분 답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내 신분증을 뒤져 신분을 확인했다. 내가 바로 그 기자임을 확인한 것이다.
 
  놈들은 내게 욕설을 퍼부은 뒤 총구를 들이밀며 가슴과 얼굴, 머리를 가격했다. 이어서 수도 남부에 위치한 어떤 공터에서 나를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버릴 것이라고 예고했다. 얼마 후 택시가 다시 멈춰선 뒤, 한 사람이 내리고 ‘대장’이라 불리는 자가 올라탔다. 이 자는 팔꿈치와 주먹으로 거의 한 시간 정도 내게 구타를 가했으며, 나를 강간하고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그러고는 얼음송곳 같은 것으로 내 허벅지를 할퀴었다. 
 
우리가 있는 곳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순찰차가 지나갔다. 눈을 가리고 있었지만 순찰차의 경광등이 돌아가는 것은 느껴졌다. 경찰은 내 옆의 치한들에게 더러운 짓거리 좀 그만두라고 만류했다. 괴한들은 내게 얼굴에 흐르는 피를 닦으라고 한 다음, 나를 납치했던 동네의 어느 인적 없는 거리에 내버렸다. 이어서 내게 조용히 입 다물고 있으라고 지시한 뒤, 자기네들을 고발할 생각 따위는 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나는 몸을 추스르는 대로 이들을 고소하러 갔다. 당국은 어떤 조사도 실시하지 않았다. 
 
납치된 그 순간, 내 삶에는 틈이 하나 벌어졌다. 불가피하게 늘 거기에 존재하고 있었으나 사건을 계기로 되살아난 틈새. 범죄의 표적이 되었다는 것은, 그리고 학대와 폭력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은 누군가의 삶에 있어 되돌릴 수 없을 만큼 뚜렷한 각인을 만들어내고, 이는 죽을 때까지 평생 흔적으로 남는다. 한 사람의 평온한 일상이 폭력으로 깨지고 나면 이 사람의 삶은 서서히 무너지며 타락한다.  
 
괴한들의 습격 이후, 나는 구타의 후유증으로 기억력도 감퇴하고 말수도 적어지기 시작했다. 병원의 진단으로는 뇌와 두개골 사이에 혈종이 생겼단다. 나는 긴급히 외과 수술을 받았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다음, 나는 취재를 재개했다. 그리고 몇 달 뒤, 다시금 괴한에게 납치되어 비슷한 협박을 받았다. ‘사령관’이라는 사람은 내게 조심하라고 충고했다. 그게 무슨 뜻인지는 나 역시 무척 잘 알고 있었다. 괴한들은 “우리가 당신을 구타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린 마약은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다만 이들은 “사령관께서 당신한테 조심하라는 말을 전하라고 지시했다. 이게 무슨 뜻인지 알겠나?”라고 끊임없이 반복하며 심리적인 고문을 가했다. 이 같은 협박은 한 시간 이상 계속됐고, 이어서 내게 되돌아보지 말라고 지시하며 어떤 거리에 나를 풀어주었다. 
 
하지만 이후에도 나는 국경 근처 지역의 범죄 세력과 정부 권력, 공무원, 경찰 사이의 공모 관계를 고발하기 위한 취재를 이어갔다. 멕시코 당국은 관련 정보에 대한 조사를 거부했다. <사막의 유해>가 출간되자 나는 또 한 번 실종과 살해의 위협을 받았다. 그 모든 협박과 납치에도 불구하고 내가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운이 좋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2000년 이후 멕시코에서는 기자 84명이 살해됐다. 이들의 죽음은 무관심 속에 외면당했고, 범죄는 여전히 처벌되지 않은 채 계속됐다. 희생자에 대한 이 같은 무례함을 보고 있자면 나라의 근간이 되는 부분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으며, 기자 없이는 언론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떠오른다. 이들의 삶에는 보다 값진 무언가가 있다.

 

  
   
▲ <보잉!2>, 2009-카를로스 카펠란
 
  

***

  

멕시코에서는 마약 퇴치 전쟁으로 실종되거나 사망한 사람들의 수가 7만 명에서 12만 명에 이른다(희생자의 수치가 정확히 집계되지 않고 있다는 점 또한 멕시코 사태가 안고 있는 문제 중 하나다). 이로 인한 희생자 한 사람 한 사람은 ‘변질’의 개념에 대해 나름의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내가 계속해서 주의 깊게 관찰하고 있는 고문은 문학과 하등 상관이 없다. 나는 복수심을 드러내며 공포감을 조장하는 야만적인 행태를 눈앞에서 목격한다. 내 곁에 있는 촬영기사는 자신의 도구를 조작하고, 그 같은 낌새를 챈 나는 시선 처리를 위한 계획을 세운다. 
 
나는 냉정을 유지한다. 스크린에 띄워진 화면에서는 사형집행자들이 절단기를 가지고 피해자를 참수한다. 그의 몸은 이제 경련을 일으키는 살덩어리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살인자들은 몇 초 만에 일을 마무리하고, 피해자의 참수된 머리를 카메라 앞에 내보인다. 목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진다. 화면이 페이드 아웃되어 완전히 검은 색으로 바뀐다. 적막이 내려앉고, 마침내 고통의 시간도 다 끝난다. 나는 이 순간을 스스로가 피해자가 되었던 때로 기억한다. 

<머리 없는 남자>(3)라는 책에서 나는 참수 전문 청부업자와 진행한 인터뷰 내용을 기술했다. 그와의 만남이 성사될 수 있었던 건 함께 알고 있던 사람의 소개를 통해서였다. 그 결과, 나는 놀라운 증언을 입수했다. 이단 종교 산타 무에르테의 비호 아래 폭력이 의식적 용도로 쓰인다는 것이었다. 산타 무에르테는 변두리의 빈민들과 소외된 사람들, 범죄자, 군인, 마약 밀매자 등이 믿는 민중신앙이다.  

내게 이야기를 들려준 청부업자의 경우에도 ‘산타 무에르테에게’ 의식을 위한 봉헌물로 사용하기 위해 범죄 조직의 수장과 함께 참수를 시행한 이후 혈액의 일부를 채취하여 병에 담아놓는다고 했다.

   

***

  

2014년 10월에 한 신문 가판대에서 잡지 하나가 눈에 띄었는데, 표지에는 ‘심장 약한 사람은 보지 말 것’이는 문구가 있었다. 나는 한 권을 집어든 뒤 사무실에 가서 잡지를 펴 보았다. 그러자 극도의 폭력을 담은 장면들이 페이지를 수놓았다.
 
치와와주(州) 시우다드 후아레스시(市)에서 남자 세 명과 여자 한 명이 대로변에 쓰러져 있고, 그 주위를 법의학자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모렐로스주의 쿠에르나바카시에서는 한 남자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는데, 얼굴과 손은 투명 테이프로 칭칭 감아둔 상태였다. 하나로 합장한 듯한 두 손의 모양이 기도하는 손동작과 닮아 있었다. 미초아칸주 우루아판시의 경우에는, 도로 근처의 한 산비탈 위에 유혈이 낭자한 시신 십여 구가 인간 무덤을 이루고 있었다. 시날로아주 쿨리아칸시의 한 인도 부근 계단 위에는 남자 두 명이 쓰러진 채로 발견됐다. 자세로 보아 도주를 시도했다는 걸 알 수 있었으며, 커다란 총알에 맞아 살점이 떨어져나가 있었다. 베라크루스주의 보카 델 리오시에서는 이십 여명의 남녀가 처형됐다. 시신은 한 대로 위에서 발견되었는데, 옷이 반쯤 벗겨졌거나 알몸 상태였으며 손과 발은 투명테이프로 묶여 있었다. 코아우일라주 토레온시에서는 참수된 두상 네 개가 자동차 보닛 위에 나란히 올려졌다. 유카탄주 메리다시에서는 참수된 시신이 무더기로 발견됐는데, 참수된 시신과 모포로 감싼 또 다른 시신들이 한데 뒤섞여 있었다. 희생자들의 문신이 천의 장식 문양과 헷갈려 보였다. 오악사카주 오악사카시에서는 인도교 한 가운데 어떤 남자의 두상이 내걸렸는데, 참수된 두상 위에는 상대 패거리를 위협하는 글귀가 쓰여 있었다. 살점은 다 찢겨져 나가고 피가 흘러내렸다. 절단된 시신은 처참한 모습이었다. 

범죄 조직과 마약 밀매단 상호 간의 복수가 불러온 극도의 폭력 사태는 부패나 무능, 실정, 무책임 등 멕시코의 국가 자체가 지닌 하위 폭력 문화와 관련이 깊다.

  

***

  

내가 이 모든 부분에 대한 생각에 잠겨있을 때, 언론에서는 멕시코가 지금과 같이 ‘변질’된 근본 원인으로 추정되는 세 가지 사실을 거의 동시에 일제히 보도했다. 
  

1) 2014년 6월 30일과 7월 1일, 멕시코주 틀라틀라야시에서 범죄자로 추정되는 22명과 멕시코 치안군의 대치 과정에서 최소 15명이 처형되는 사건 발생. 조사는 (연루된 일곱 명 가운데) 병사 세 명과 장교 한 명에게 책임이 있는 쪽으로 진행됨.
 
2) 2014년 9월 26일과 27일, 게레로주 이구알라시 아요치나파 사범대학생 여섯 명의 납치와 고문, 살해 사건 및 대학생 43명 실종 사건 발생.(4) 지역의원들과 결탁한 범죄집단 및 경찰의 소행으로 밝혀짐. 

3) 2014년 여름, 수도 근처인 멕시코주 에카테펙 운하 배수 작업 중 시신 마흔 여섯 구 발견. 그 중 열여섯 명은 여성의 시신으로 확인됨. 이 사실을 알게 된 당국은 사건을 축소시키거나 묵인하려함. 
 
각각의 사례 별로 특징적인 면이 있어 간략히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멕시코의 군대는 상습적으로 고문을 자행하고 인권을 유린하기 일쑤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국제조직 및 시민단체에서도 규탄하고 나선 바 있다. 군인은 범죄자로 추정되는 무리에 총격을 가할 수 있으며, 무력 대치 결과 사살하게 되었다고 말하면 그만이다. 이들은 희생자의 손에 무기를 쥐어주고 시신을 옮기는 등 범죄 현장을 조작할 뿐 아니라, 생존자나 현장 목격자를 죽이겠다고 협박하기도 한다.
 
벽에 튄 혈흔이나 총구로 가격한 흔적은 처형 상황을 드러내주고, 생존자의 증언은 사실 관계를 확인시켜준다. 참다못한 사람들은 조용조용히 혹은 단호하게 저들의 죄를 규탄하며, 아무 소리 못하고 죽어간 희생자나 사랑하던 사람의 처참한 죽음 앞에서 망연자실한 가족을 대신해 목소리를 내주기도 한다. 

변사체가 생기면 우리는 특히 사건의 잔혹함에 주목한다. 대개는 이를 회피하려 하고, 이에 대해서는 보지도 듣지도 않으려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검열과 침묵, 그럴싸한 가림막으로 잔혹함을 감추려는 진부한 수법을 사용한다. 그렇게 윤리적이고 심미적인 원칙을 따르려다 보면 결과적으로는 잔혹한 범죄가 지속될 수 있도록 도와주며 이에 동조하는 격이 된다.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튄 핏자국은 벽이나 바위에 각인된 채로 지나가는 세월을 견뎌내며 오래도록 지속된다. 아무리 이를 닦아내려 해도 피의 흔적은 결코 지워지지 않는 묘한 자국으로 남는다. 천둥이 치면 먼지가 흩어져 없어지고 빛도 사라지지만, 피는 인간의 기억과 그 모든 자연 속에 배어들어 영원히 간직된다.  

무고한 사람에 대한 폭력과 고문, 납치, 실종, 게레로주 사범대 학생들의 살해 사건 등이 일어났을 때, 나는 특히 훌리오 세자르 푸엔테스 몬드라곤의 사례에 관심이 갔다. 자신에게 총을 겨누는 경찰들과 그 옆에서 전투 무기를 든 동료를 보고 겁에 질린 이 청년은 있는 힘을 다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결국 또 다른 경찰 무리의 손에 붙잡히고 만다. 

그의 시신은 몇 시간 후 이구알라 공업단지에서 발견된다. 놈들은 그의 얼굴에서 눈알을 뽑아내고 피부를 다 벗겨냈다. 사인은 두개 골절이었다. 여기서 ‘변질’은 이해하기 힘든 야만적 일탈이 된다. 제물을 죽이는 성직자와 그 희생양의 출현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나는 네가 나를 보지 못하도록 네 눈을 뽑아버리리라. 내가 너를 어찌하였는지도 보지 못하게 할 것이며, 너는 네 마지막 순간에조차 네 모습을 볼 수 없을 것이다. 내가 너를 처단하는 순간에도 내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리라. 너에게 나는 익명의 존재이니, 나는 너에게서 네 얼굴을 떼어내고 너를 나 자신으로 변모시키리라.’ 
 

***

  

몇 년 전부터 멕시코의 공공기관들은 정치권력과 경제적 이권을 기반으로 하는 비열한 구조로 돌아가고 있다. 현재의 위기는 1980년대 국가와 경제의 근대화에서 기인한다.(5)  

1982년 초, 수도 근처의 이달고주에 위치한 툴라 강 하수처리장에서는 시신 열두 구가 발견됐다. 희생자들은 모두 콜롬비아 지하조직에 속해 있던 사람들로, 이 조직은 은행 강도질을 하며 멕시코에서 코카인 밀매를 하고 있었다. 

시경 총감의 지휘 하에 연방경찰과 동일한 형태의 교육을 받은 요원들이 스무 명의 범죄자를 체포했다. 그 가운데 여덟 명은 뇌물을 주고 풀려났으며, 나머지 열두 명은 수일 간 구타와 고문을 당한 뒤 처형되어 폐수에 시신이 버려졌다.  

그로부터 30년의 시간이 흐른 뒤, 멕시코에서는 매일같이 똑같은 수법의 만행이 자행된다. 멕시코 국민들이나 다른 중미 지역 이민자들을 포함하여 1만 2천 명의 사람들이 실종됐음에도 당국은 정식 문건조차 작성하지 않았다. 멕시코의 이 ‘비열한 구조’는 희생양들을 끌어들여 이들을 앞세운 다음 파멸로 몰고 간다. 그리고 대개는 최소한의 흔적조차 남기지 않은 채로 이들의 존재를 완전히 말소해버린다. 국가기관과 범죄조직 사이의 유착 관계로 모든 것이 말살된다. 심지어 기억마저도. 

2014년 여름 운하 배수 작업 당시 시신 마흔 여섯 구가 발견된 사건은 이에 대한 확신을 심어준다. 최근 경찰과 법조계 내에서 변화의 조짐이 일긴 하였으나, 잔혹한 범죄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책임자에 대한 처벌이 이뤄지지 않을 경우, 사회는 잿빛이나 암흑으로 물들어가게 마련이고 인권 유린은 끊임없이 지속된다.(6)

  

***

 

 멕시코의 상황은 선악을 대비시키는 범죄영화가 아니다. 경찰은 착한 편, 범죄자는 나쁜 편으로 나뉘어 선이 악을 물리치는 영화 속 상황은 멕시코의 실제 현실과 다르다. 멕시코에서는 국가기관 전체가 연루되어 있으며, 지도층이나 여러 지식인들은 외면하고 싶겠지만 세대 전체에 심각한 영향력을 미친다.  

 혈흔과 총격, 전쟁, 경찰, 군대, 살해자, 실종자, 죽음, 위험, 악, 공포, 야만적 행위 등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단어들이 다시금 우리 입에 오르내린다. 다들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추락한 현실에서 극심한 고통을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과거 정신적 외상을 입을 만한 사건을 겪은 적이 있으며, 실의에 빠져 암울한 나날을 보내게 되는 시기도 가진 바 있다. 이러한 애도의 시기는 두 가지 측면으로 나타나는데, 그 중 첫 번째는 모든 희망이 사라졌으며 끝없는 환멸을 느끼게 되리라는 확신을 갖는 것이다. 현대적인 국제도시라든가 조화롭고 아름다운 사회, 차별 없는 사회 같은 환상은 이제 남의 일이 돼버렸다. 그리고 두 번째는 모순된 현실에 적응하는 과정이다. 바람직하지 않은 그 현실에, 당혹스러운 그 현실에 서서히 적응해나가는 것이다. 

멕시코의 시인 하비에르 시실리아는 2011년 조직범죄단의 손에 살해당한 아들 후안 프란시스코에게 작별 인사를 하면서 더 이상 시를 쓰지 않기로 결심한다. “더는 할 말이 없다/ 더는 이 세상에 걸맞은 말이 없다/ 저들은 안에서부터 우리의 말문을 막아버렸다/ 저들이 네 숨통을 끊어놓았기에/ 저들이 네 폐를 갈기갈기 찢어놓았기에/ 고통이 내 곁을 떠나지 않는다/ 세상은 이제 한줌의 의인 덕분에 살아남을 수밖에 없다/ 후아넬로/ 너와 나의 침묵 덕분에 이 세상은 돌아간다” 이 시는 최후의 참극을 피하는 창세기(18장 28절 및 이하) 의인들의 일화를 우의적으로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아울러 아우슈비츠 이후 시를 쓰는 것은 불가능하게 됐다던 테오도르 아도르노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는 지극히 주관적인 하나의 대응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문자 그대로만 봤을 때에는 그 모든 야만적 행위에도 살아남는 말의 중요한 초월적 가치에 대해 부인해버리는 격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2014년, 게레로주의 지하 범죄 소굴에서는 백여 개의 유골이 발견됐다. 그리고 2015년, 아카풀코시의 버려진 한 화장터에는 시신 60여구가 부패 상태로 있다는 게 알려졌다. 

이 두 사건을 보고 있자면 멕시코 정부와 국가가 그 모든 한계를 넘어섰다는 것에 대해 다시금 재고하며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정부는 조직범죄를 허용하고 이를 등한시한데다 국민들이 죽어나가는 꼴을 보고도 저들에게 관용을 베풀기 때문이다. 2012년 이후 멕시코에서는 두 시간마다 한 명씩 사람들이 사라진다. 

문화는 곧 시간과 기억의 문제다. 21세기 초 전쟁과 폭력으로 얼룩진 몇 년 동안 실종되거나 처형된 수천 명의 사람들은 당연히 그 처참한 죽음을 당한 사실에 걸맞게 전 세계적 차원에서 밝혀져야 한다.  

앞으로도 이 극악무도의 범죄가 만들어낸 모든 희생자에 대한 기억이 결코 소실되지 않는다면, 이들에 대한 이야기나 시론, 증언, 소설, 수필, 시, 영화, 사진, 음악 등은 늘 있을 것이다. 이 모든 예술 작품과 출판물은 개인의 비극이자 사회의 비극인 이 사태를 상기시키기 위한 필수적 증거 자료로 격상된다. 안타깝게 고인이 된 희생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재를 기억해내는 것은 미천하나마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의무이다. 이들의 존재를 지속적으로 기억하지 않는 한, 우리 모두에게 있어 미래란 존재할 수 없다. 그리고 일단 현재로서 우리에겐 삶이 필요하다. 그리고 죽기 살기로 삶을 지켜내야 한다.
 

글‧세르히오 곤잘레스 로드리게스Sergio González Rodriguez

  

* 이 글은 2015년 스페인 잡지 <카르타Carta>에 게재된 글 ‘La violencia extrema’를 본지에 맞게 각색한 것이다.

 

 
번역·배영란 runaway44@ilemonde.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피에르 라비의 자발적 소박함> 등의 역서가 있다.

 

 
 

(1) 수잔 손택Susan Sontag, <타인의 고통>, 이재원 역, 이후, 2004.

 

(2) 세르히오 곤잘레스 로드리게스Sergio González Rodríguez, <사막의 유해 (Des os dans le désert)>, Passage du Nord-Ouest, Albi, 2007.

 

(3) 세르히오 곤잘레스 로드리게스Sergio González Rodríguez, <머리 없는 남자(Homme sans tête)>, Passage du Nord-Ouest, 2009.

 

(4) 라파엘 바라하스Rafael Barajas, 페드로 미구엘Pedro Miguel, ‘마약국가
멕시코의 잔혹한 학생 학살(Au Mexique, le massacre de trop)’,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4년 12월호.

 

(5) 장 프랑수아 부아예Jean-François Boyer, ‘미국 덫에 갇힌 나라, 멕시코 (Et le Mexique cessa d’être indépendant’), 르노 랑베르Renaud Lambert, ‘멕시코 부의 귀재, 카를로스 슬림(Carlos Slim, tout l’or du Mexique)’, 마르코스Marcos 부사령관, ‘제4차 세계대전은 시작됐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1년 3월호, 2008년 4월호, 1997년 8월호. 

(6) 장 프랑수아 부아예, ‘마약과의 전쟁, 뒷걸음질 치는 멕시코(Mexico recule devant les cartels)’,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2년 7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