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으로 배척된 몽펠리에의 이슬람교

2015-07-31     피에르 돔

이슬람교는 때로는 국가 정체성에 대한 위협으로, 때로는 호전적 이데올로기로 묘사되면서 언론과 정치인들로부터 끊임없이 공격을 받는다. 그러나 일상적으로 행해지는 종교로서의 이슬람교에 관심을 갖는 이는 많지 않다. 이민자들과 그 자녀들에 대한 차별이 만연하는 사회에서 이슬람 신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과연 어떠한 의미일까? 몽펠리에 시의 사례를 살펴보자.

6월의 어느 금요일 저녁, 몽펠리에 시내의 분위기는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코메디 광장 주변의 테라스는 어느덧 사람들로 가득 찬다. 사람들은 로제 와인, 생맥주, 또는 페리에 레몬을 주문한다. 저마다 들떠있는 사람들. 갈색 피부색을 지닌 젊은이들이 많이 보인다. 파란색 바탕에 흰색 새들이 그려져 있는 1호선 시가전차(tram)는 서서히 광장을 벗어나 터널로 진입했다가 곧 터널 밖으로 나온다. 시의 서쪽 끝에 위치한 라 모송(La Mosson)까지 운행하는 시가전차다. 총 운행 시간은 40분. 시내에서 벗어날수록 탑승객들의 분위기가 바뀐다. 대부분 북아프리카 출신으로 보이는 얼굴에, 여성들은 머리카락을 가리기 위해 히잡을 둘렀고 옷차림은 허름하다. 종점에 도착하니 대략 오후 6시이다. 막 퇴근한 (가족수당기금, 구청, 시립 도서관, 경찰서 등의) 관공서 직원들과 학교 교사들이 사람들이 빠져나간 빈자리를 메운다. 그리고 전차는 다시 반대 방향으로 출발한다.
라 파이야드(La Paillade)시의 주민들도 이 무리에 속해 있다. 15,000명에 이르는 이 곳 주민들은 대부분 과거에 프랑스 식민지였던 국가들 출신이다. 그중에서도 모로코 남부에서 온 사람들이 가장 많다. 2000년 6월, 1호선 시가전차 개통식에서 당시 시장이던 조르주 프레슈(2010년 사망)는 다음과 같은 농담으로 시의원들을 웃겼다. “(코메디 광장 끝부분에 위치한 지하 터널을 가리키며) 이 터널은 세상에서 가장 긴 터널입니다. 터널에 들어갈 때는 프랑스 땅이지만 터널 밖으로 나올 때는 모로코 땅이니까요.” 그리고 이 농담을 인종차별주의적 발언으로 느꼈을지도 모를 사람들을 위해, 그는 히잡을 두른 이슬람 여성을 가리키며 이렇게 덧붙였다. “저 여성분에 대해서는 다들 너무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볼거리에 걸려 얼굴 주변을 스카프로 감싼 것이라고 하네요.”
다시 6월의 금요일로 돌아가 보자. 이번에는 낮 시간의 모습이다. 젤라바(djellaba, 아랍권 남성들이 입는 두건 달린 긴 상의-역주)와 카미즈(qamis, 이 옷도 아랍권 남성들이 입는 것으로 어깨부터 발목까지 한 벌로 되어 있다-역주)를 입은 남자들이 하나둘씩 그랑멜(Grand Mail), 즉 임대주택구역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인도로 모여들기 시작한다. 이 길은 길이가 500m에 이르며 길 중간에 예배소가 4곳이나 있다. 예전에 은행, 상점 등으로 사용되던 건물을 예배소로 개조한 것인데,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가장 최근에 만든 예배소는 미세리코르드(Miséricorde) 사원으로 오르튀스(Hortus) 사원으로도 불리며, UOIF(프랑스 이슬람단체연합)에 소속된 한 협회의 소유이다. 과거 정육점이었던 자리에 들어선 이 예배소는 최대 600명의 신자를 수용할 수 있다. 오후 1시 30분이 되어 금요일 합동 예배(salat el-joumoua)를 드릴 시간이 다가오자 긴 매트들이 사원 4곳의 바깥쪽인 그랑멜 인도 위에 빠르게 펼쳐진다.(2) 수백 명의 남자들이 빽빽하게 줄을 지어 서로 몸을 부대끼며 인도 위에 몸을 구부려 무릎을 꿇고 땅에 입을 맞춘다. 그리고 이맘(이슬람 성직자-역주)이 낮은 목소리로 운율에 맞추어 설교하는 것이 사원의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진다. “알라후 아크바르...(Allâhou akbar...)”
“물론 이것은 명백한 공공장소의 불법 점유에 해당합니다. 게다가 예배를 드리기 위해 인도를 점하다니요.” 에로 지역 도지사 사무실 책임자인 프레데릭 루아조도 인정한다. “하지만 제가 무엇을 할 수 있겠어요? CRS(프랑스 보안 기동대)를 출동시켜 절하고 있는 사람들을 끌어낼까요? 말도 안 되지요. 이 지역 주민들의 절대 다수가 이슬람 신자들인 만큼 사람들은 여기에 대해 크게 불만을 갖지 않습니다. 우리의 주된 관심사는 ‘함께 더불어 살아가기’ 입니다. 따라서 지역 주민들이 특별히 민원을 제기하지 않는 한 문제는 없다고 봅니다.”
사실 ‘함께 더불어 살아가기’라는 말이 무색하게 몽펠리에에서의 이슬람 종교 활동은 철저하게 제한된 지리적 공간, 즉 4개의 서로 인접한 구역 내에서만 이루어진다. 라 파이야드와 그 옆의 오 드 마산느(Hauts de Massane)(10,000명 거주), 프티 바르, 세벤느(6,000명 거주)가 그곳이다. 몽펠리에 시의 북서쪽 가장자리에 위치한 이 4개 구역에는 약 37,000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이는 몽펠리에 시 인구의 15%에 해당한다.
사회통합부서의 의뢰로 2012년 라 파이야드에 관한 연구를 진행한 두 사회학자 브뤼노 카를롱과 코린느 드시는 “정부의 이민 정책에 따라 재정‧문화‧사회 등 모든 면에서 열악한 환경에 놓여 있는 인구들이 점차 서로 모여 살게 되면서 사회적 분리 현상이 심화”되었다고 분석하였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여러 가지 수치들을 내놓았다. 라 파이야드 구역의 경우 거주민들 중 외국 국적을 가진 비율은 33%이고(몽펠리에 시는 11%), 실업률은 36%이며(몽펠리에 시는 18%), 가구당 연평균 소득은 6,377유로이고(몽펠리에 시는 15,287유로), 15세 이상 인구 중 대학을 졸업하지 않은 비율은 55%이다(몽펠리에 시는 19%).(3)
“라 파이야드는 마치 거대한 감옥 같아요. 사람들이 모두 자기 방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는 점만 빼고요.” 트레이닝복 차림에 가방을 어깨에 비스듬히 둘러맨 로메오 아센조가 말한다.(4) 그는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길거리에서 보낸다. 이 구역의 모든 사람들은 임대주택 보급에 있어서의 ‘민족별 할당 비율’과 ‘채용에 있어서의 인종차별’에 불만을 갖고 있다. 프티 바르 구역의 학교에는 이민자 가정 출신의 자녀들이 지나치게 집중되어 있어, 학부모들이 ‘민족적 다양성’을 보장해 달라며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5) 이렇듯 몽펠리에 내 이슬람교 신자들이 모여 사는 구역의 사회적 고립 정도는 심각한 수준이다.
“여기서는 모두가 이슬람 신자에요!” 올해 25세의 무라드 쿠알라니는 전문대학을 졸업한 후 현재 공사장 관리인으로 일하고 있다. 그는 프티 바르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로, 종종 한밤중에도 일어나 사원에 기도를 드리러 갔다 오곤 한다. 이 4개 구역들을 하루종일 다녀본 결과 그의 말이 과연 사실임을 알 수 있었다. 라 파이야드, 프티 바르, 세벤느에서는 정말 모든 사람들이 이슬람 신자로 보였다.(6) 더구나 젊은 세대는 윗세대가 해오던 전통적인 종교 생활을 그대로 이어가고 있고, 오히려 이슬람교를 자신의 정체성과 연결 짓는 성향은 윗세대보다 좀 더 강해졌다. “만약 우리가 이슬람 신자가 아니라면, 우리는 무엇일까요?” 그랑멜에서 친구들과 시간을 죽이고 있던 카멜 타리프는 묻는다. 옆에 있던 친구는 좀 더 공격적으로 나온다. “절대로 우리에게서 이슬람교를 빼앗아갈 수 없을 거예요. 이미 우리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갔는걸요.” 이야기가 여기까지 이르자, 무엇이 하람(금지된 것)이고 무엇이 하람이 아닌 지에 대해 앞다투어 설명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모두 입을 모아 말한다. “지하디스트들은 이슬람 신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슬람교에서는 살인이 금지되어 있어요.”
 
고립된 지역에 모여
예배를 보는 이슬람신자들
 
모두 이슬람 신자이긴 하지만, 사람들에 따라 몇 가지 사항들을 스스로에게 허용하기도 한다. 바로 담배, 대마초, 섹스 등이 그 예다. “여자와 딱 한번 잔 적이 있어요.” 살림 우아클라니가 말한다. 그는 프티 바르 협회에서 활발히 활동 중인 27세의 젊은이다. “하지만 곧 죄책감을 느꼈어요. 그래서 매일 기도합니다. 그 행동을 후회하고 있어요.”
이 구역들의 공공장소에는 온통 남성들뿐이다. 여성은 카페테라스에 감히 앉을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이곳은 완전히 남자들 세상이에요. 그랑멜을 지날 때마다 저를 미친 여자처럼 바라보는 수십 명의 시선들이 느껴져요.” 고등학교 여학생인 한나 부그쉬슈가 신경질적으로 토로한다. “T팬티를 입은 글래머러스한 여자가 지나가면 당연히 시선이 갈 수밖에 없죠!” 소피안 야필이 말하자 옆의 친구들이 킥킥대며 웃는다. “그렇지만 히잡을 두른 여자가 지나가면 보지 않아요.” 그의 친구가 거든다. “여자를 만나고 싶으면 코메디 광장으로 가요.” 라 파이야드에서는 연인끼리 스킨십을 하려면 공원이나 깊은 덤불이 있는 곳, 혹은 강기슭으로 가야 한다.
이곳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이슬람교의 의무를 따른다. 술을 파는 상점들은 몇몇 있지만 맥주나 로제 와인을 야외 테라스에서 마실 수 있는 장소는 없다. 카페, 스낵바, 레스토랑에서는 아예 술을 판매하지 않고, 라마단 기간 중에는 낮 시간 동안 모두 커튼을 내리고 영업을 하지 않는다.(7) “그래요? 정말 그런가요?” 구강외과를 전공 중인 26세의 대학생 하산 무사위가 놀라며 되묻는다. 그는 이슬람교가 ‘프랑스 사회에 완벽하게 녹아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입장이다. “코란에는 종교가 어떠한 구속도 할 수 없다고 쓰여 있어요.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행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의 친구 마루안 엘 모카뎀은 의견이 조금 다르다. “라마단 기간 중에도 카페 문을 열 수는 있어요. 하지만 손님이 한 명도 없겠죠. 채산이 맞지 않기 때문에 문을 열지 않는 겁니다.” 사실, 라마단 기간 중에 라 파이야드나 프티 바르에서는 누군가가 길거리에서 먹고 마시는 장면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이슬람교의 의무를 따르느냐 따르지 않느냐의 문제일 뿐이에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그러나 마드지드 아부는 그렇게 단순한 문제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사회적 압박감 때문에 마음대로 행동할 수가 없어요. 여기는 작은 마을과 같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너무나 잘 알아요. 만약 제가 무언가 나쁜 행동을 하면 누군가가 그걸 저희 부모님께 말씀드릴 것이고, 그러면 상황은 걷잡을 수 없게 심각해지는 거죠.” 인터뷰에 응한 사람들 중 단 한명, 프랑스인과 모로코인 부모를 둔 19세의 사라 엘 우리아만이 라마단 기간 중에 금식을 하지 않는다고 털어놓았다. “당신에게만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곳 사람들에게는 절대로 이런 얘기를 하지 않아요. 쓸데없이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는 않거든요.”
집이나 직장을 얻을 때는 소리 높여 비판하던 ‘사회적 분리’를, 결국 신앙생활에 있어서는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셈이다. 도지사 사무실 책임자인 루아조가 그렇게 강조했던 ‘함께 더불어 살아가기’를 이루기 위해서는 오히려 ‘따로 살아가기’가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젤라바를 입고 매트를 가져와 코메디 광장에 엎드려 기도를 하는 모습을 상상이나 할 수 있으세요? 사람들이 모두 겁에 질려 아우성을 치지 않을까요?” 모하메드 알라미가 웃음을 터뜨리며 말한다. “적어도 여기서는 우리들이 마음 놓고 기도를 할 수 있어요.”
이슬람 신자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의례이자 정신을 재정비하는 기간인 라마단은 이슬람 신자들이 자신의 신앙심을 표현하는 일종의 수단이다.(8) 따라서 이 기간은 프랑스에 살고 있는 이슬람 신자들의 삶이 겉으로 가장 많이 드러나는 시기이다. 6월 말 라마단 기간 중의 밤 시간, 금식을 깨는 식사인 프토르(ftour)를 하는 오후 9시 반경이 되면 그랑멜은 텅 빈다. 모두 이 소중한 시간을 가족과 함께 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식사가 끝나면 길거리가 다시 활기를 되찾는다. 남성들, 여성들, 그리고 아이들이 너도나도 아름다운 젤라바를 갖추어 입고 거리로 나선다. “그랑멜은 마치 중동 버전의 코메디 광장 같아요.” 몽펠리에의 배달차 운전사인 파이살 제르구앙이 너털웃음을 치며 설명한다. 그리곤 다시 정색하며 말한다. “시내는 전혀 이런 분위기가 아니랍니다.” 이슬람교 신자들에 대한 적대감과 거부감이 만연해 있는 상황 속에서(‘여성 이슬람교 신자들이 히잡을 두르고 코메디 광장에 가면 모욕을 당한다’는 식의 말을 자주 듣는다), ‘이 구역은 이슬람 신자들에게 장애이고 구속인 동시에, 자신들을 기꺼이 받아주고 이해해주는 따뜻한 피난처, 자신들과 닮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일종의 연대감이 형성되어 있는 곳’이라고 카를롱과 드시 두 사회학자는 정리한다.
라마단 기간 동안 코메디 광장의 밤 풍경은 연중 다른 날들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마치 완전히 다른 장소가 된 것 같다. “저는 그냥 그 광장에 거의 안갑니다.” 라힘 타르주가 씁쓸한 어조로 말을 시작한다. “저는 하루 종일 이곳에만 있어요. 왜냐고요? 프랑스인들이 우리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그래요, ‘프랑스인’이요. 저는 프랑스에서 태어났고 신분증도 멀쩡히 가지고 있는 엄연한 프랑스 국민입니다. 하지만 프랑스에서는 이슬람교 생활을 하는 이슬람 신자들을 좋지 않게 바라봐요.” 그의 옆자리에 앉아 벽에 몸을 기대고 있던 카멜 드주데르가 덧붙인다. “저는 시내에 나갈 때마다 경찰에게 조사를 받아요. 그래서 차라리 안가고 말죠.” 프티 바르에서 만난 남성인 아흐메드 엘 킬라니는 33세의 정보처리기술자로 세 자녀를 두고 있다. 그도 마찬가지의 감정을 느낀다고 한다. “코메디 광장이요? 저는 거기 안갑니다. 샤를리 에브도 테러 사건이 있은 후 1월 11일에 코메디 광장에서 대규모 시위가 있었어요. 제가 거기에 왜 갑니까? 1년 내내 우리들을 홀대하다가 명목상 아랍인들이 필요하니 시위에 참여하라니요.”
밤 11시 30분, 7월 초의 어느 여름날 밤이다. 더운 열기가 가시고 있다. 전문대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했지만 현재 실직 상태인 25세의 청년 압델말렉 입탈렙은 프티 바르의 이슬람 사원에서 막 기도를 마쳤다. 그는 이 구역에서 태어나 여전히 부모님과 함께 이 구역에서 산다. 그는 코메디 광장으로 가는 시가전차의 막차를 기다린다. “거기서 친구들을 만날 거예요. 시샤를 피울 수 있는 좋은 바가 하나 있거든요.” 이 바에는 여성은 출입할 수 없고 술도 팔지 않는다. 바 안에는 그와 세 명의 친구들, 그리고 시샤 연기 뿐이다. 새벽 3시가 되자 그의 친구 한명이 그를 프티 바르 구역에 내려준다. 그는 간단히 요기를 하고 이슬람 사원에 기도를 하러 잠시 들렀다가, 집으로 돌아가 늦은 잠을 청한다.
 

 

글‧피에르 돔Pierre Daum

 

 
번역·김소연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1) <조르주 프레슈, 통제 불가능한 혼란 속의 나날들>, 리베라시옹, 파리, 2006년 2월 28일
(2) 이슬람 신자들은 흔히 예배소를 지칭할 때 ‘모스케(이슬람 사원)’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반면 프랑스 당국(도청, 시청)은 협회에 의해 운영되는 예배소에 한해서만 이 단어의 사용을 허용한다. 따라서 ‘모스케’는 웅장하고 우아한 건물뿐 아니라 신자들이 구멍가게를 개조해 만든 작은 예배소도 의미할 수 있다.
(3) <라 하이야드 거주민들의 ‘분리 현상’에 관한 보고서>, 2013년 5월 24일, www.montpellier-journal.fr
(4) 거리에서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명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5) <몽펠리에의 프티 바르 구역 : 학부모들이 이슬람신자들의 집중거주지역을 더 이상 고립하지 말고 민족적 다양성을 보장해 달라고 외치다>, 2015년 5월 8일, www.midilibre.fr
(6) 프랑스에는 약 4~5백만 명의 ‘이슬람권 출신’이 거주하고 있다. 2011년 IFOP가 일간지 <라크루아(La Croix)>와 함께 진행한 조사에 따르면, 이슬람 신자들 가운데 ‘이슬람교를 믿는다’고 답한 비율은 75%, ‘이슬람교를 믿고 신앙생활을 한다’고 답한 비율은 41%(가톨릭의 경우 16%), ‘이슬람교를 믿지만 신앙생활은 하지 않는다’고 답한 비율은 34%(가톨릭의 경우 57%)였다.
(7) 2015년에는 라마단 기간이 6월 18일부터 7월 17일까지이다.
(8) ‘이슬람권 출신’ 가운데 71%가 라마단 기간 중에 금식을 한다고 대답하였다. ‘프랑스의 라마단 기간, ‘이슬람 신자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이슬람교에 대한 애착을 표현하는 수단’’, <르몽드>, 2015년 6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