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스스로 이방인이 되었다!

2015-07-31     피에르 돔

조르주 프레슈는 사회당 출신으로 1977년부터 2004년까지 몽펠리에 시장을 역임했고 이후 2010년 숨을 거둘 때까지 도의회 의장으로 활동하며 총 30년 넘게 몽펠리에 지역을 관리했다. 그런데 그는 생전에 이슬람 신자들을 식민지 원주민 대하듯이 했다. “이슬람 신자들을 대표하는 사람은 단 한 명, 바로 나다!” 2002년 몽펠리에 시의 첫 번째 이슬람 장례식장 개관식에서 그는 이렇게 외쳤다. 그는 이슬람 신자들이 정치적으로 미성숙하다고 생각했다. 그의 시각에서 이슬람 신자들은 두 개의 카테고리로 구분되었는데, 첫 번째는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는 이들이다. 이들에게는 아파트, 일자리, 예배소가 아낌없이 제공되었다. 두 번째는 자신의 영역에 편입되기를 거부하는 이들로, 그는 이들을 ‘빈 라덴의 추종자’로 취급하였다.(1)

조르주 프레슈는 첫 번째 카테고리에 속한 이들에게 2개의 대규모 ‘다목적’ 공간을 내주고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중 한 곳은 과거에 돈육 가공 공장이 위치해 있던 프티 바르(Petit Bard) 지역 내의 부지로, 부지 정비 공사비용을 100% 시의 예산으로 충당하였다. 또 다른 한 곳은 2004년에 지은 라 파이야드(La Paillade) 구역의 이븐 로쉬드(Ibn Rochd) 사원으로, 몽펠리에 시에서 가장 큰 사원이며(2,000명 수용 가능) 오직 예배를 목적으로만 사용된다. 이곳도 시의 예산으로 건설되었는데, 이 사원 때문에 조르주 프레슈는 정교분리원칙을 위배했다는 이유로 재판까지 받았다. 조르주 프레슈가 세상을 떠난 이후 이슬람협회들은 더 이상 사원 운영에 시가 간섭하지 못하도록 이 두 사원들을 매입하고자 했다. 그러나 조르주 프레슈의 뒤를 이어 몽펠리에 시장 자리에 올라 2004년부터 2014년까지 재직했던 사회당 출신의 엘렌 망드루는 이를 거부했다. 그는 2006년에 만든 법에 따라 이 두 공간을 적정 월세를 받고 장기 임대하였다.

두 번째 카테고리에 속한 이들의 대부분은 UOIF

(프랑스이슬람단체연합)에 속해 있는 UMH(에로 지역 이슬람 신자 모임)의 열성적인 회원이다. “우리는 공간을 살 수 있는 돈도 가지고 있었고 공사를 진행할 인부들도 확보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는 우리에게 공사 허가권을 내주지 않았어요.” 약학 박사이자 UMH의 핵심 인물로 활동 중인 압델카데르 엘 마라키는 말한다. “조르주 프레슈가 세상을 뜬 후에야 상황이 진척될 수 있었지요.” 2012년 라마단 기간 중에 UMH는 세벤느(Cévennes) 구역에 이슬람 사원을 열었다. 낡은 슈퍼마켓을 개조해 만든 이곳은 수용 인원이 800명이나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곧 사람들로 꽉 차기 시작하였다. 현재 몽펠리에 시에는 14곳의 예배소가 있는데 이중 대부분은 라 파이야드, 프티 바르, 세벤느에 집중되어 있다. 모두 쉽게 눈에 띄지 않는 장소에 위치한 탓에 몽펠리에 거주민들도 이들의 존재를 잘 모른다고 한다. 장소는 무척이나 비좁아 쾌적하게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여건은 아니다.

게다가 예배소 운영을 담당하는 협회들이 현재 다양한 이유로 종교적 이상과 경제적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문제의 심각성이 더해지고 있다. 루신 타리가 협회 회장직에 오르면서 이븐 로쉬드 사원의 이맘(이슬람 성직자)을 그만둔 모하메드 카타비는 2014년에 아이샤(Aicha) 사원을 열었다. 타리가 한탄한다. “간단합니다. 세벤느 사원과 아이샤 사원이 생기면서 저희는 신자들의 절반을 잃었습니다. 신자들의 헌금으로 생활하는 저희로서는 이대로 계속 가다가는 생필품조차 살 수 없게 될 겁니다.” 조르주 프레슈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타리는 말을 이어간다. “시는 아이샤 사원의 공사 허가증을 애초부터 내주지 말았어야 합니다. 저희는 중도파이고 프랑스 사회에 완벽하게 통합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달라요. 어떤 내용으로 설교를 하는지 외부인들은 모를 겁니다. 젊은이들이 왜 시리아로 떠난다고 생각하십니까?”(2) 설교 중에 이맘들은 ‘TV 프로그램에 출연하기 위해 히잡을 벗고 최신 유행하는 옷을 입는 가짜 이슬람 신자들’(모하메드 카타비의 말)이나 ‘술을 마시고 기도도 제대로 하지 않는 신 이슬람 사상가들’(엘 마라키의 말)을 공공연하게 비판하곤 한다.

내부적으로 분열을 앓는 몽펠리에의 이슬람교도들

이렇게 몽펠리에 이슬람 성직자들 간에는 교도를 중도파와 급진파로 양분하는 이분법적인 시각이 존재하며 내부 갈등이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프랑스 정부와 수많은 기자들이 이슬람 신자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리베라시옹> 지의 2015년 5월 25일자 기사 ‘몽펠리에 이맘의 24시간’을 쓴 특파원은 이븐 로쉬드 사원의 ‘중도파’ 이맘인 파리드 다루프가 “젊은 세대들 사이에 퍼져나가고 있는 종교적 급진주의에 맞서 고군분투 중”이라고 썼다.

에로 지역 도지사 사무실 책임자인 프레데릭 루아조는 ‘지하디스트는 이맘의 설교가 아닌 자신의 집 컴퓨터를 통해 지하디스트가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는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슬람 사원들을 ‘엄중히’ 감시하고 있다고 한다. “설교 내용이 프랑스 국가가 추구하는 가치에 완벽하게 부합하는지를 확인합니다.” 그렇다면 정확히 어떠한 부분에서 이 ‘부합성’ 문제가 제기되는 것일까? “학교 구내식당의 음식, 여성들의 수영 시간, 학교에서의 복장, 히잡 착용 등 모두가 아는 것들이요.” 그는 특별히 UOIF를 지목하며, 이 단체가 “정부의 결정을 따르지 않고 이슬람 원칙들에 맞추어 국가의 공공서비스를 왜곡시키고 있다”고 주장한다.(3)

“우리가 원하는 것은 우리를 프랑스 법에 따라 판단해 달라는 겁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요!” 엘 마라키가 반박한다. “프랑스 국민이라면 누구나 프랑스 정부에 기댈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한편, 라 파이야드의 모로코 이민자 가정 출신으로 경제학교수이자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는 33세의 엘리아스 우에즈디드는 이렇게 말한다. “공공 기관들의 주장 뒤에는 사실 이슬람교에 대한 무의식적인 거부감, 즉 자신들이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려고 노력도 하지 않으며, 또한 자신과는 관계가 없는 외국 종교에 대한 거부감이 숨겨져 있습니다. 표현을 하든 안 하든 프랑스 국민들 중에는 이슬람교에 대해 공포심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걸 무너뜨리는 것이 가장 시급합니다. 핵심 주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독실한 이슬람 신자들은 이슬람 성직자들을 분열시키고 있는 현재의 갈등 상황을 안타깝게 바라본다. 독재자에 가까운 일부 책임자들을 비롯해 협회 책임자들의 변하지 않는 지배체제를 그저 체념하고 받아들일 뿐이다. “게다가 이슬람 성직자들은 모두 우리 아버지 세대입니다. 이슬람 문화에서는 아버지를 거역할 수 없습니다.” 파티마 조라 벤 탈리브가 설명한다. 그녀는 중학교 프랑스어 교사로, 부모님을 따라 1970년에 모로코에서 프랑스로 이민을 왔다. 한편, 신자들의 경우 사원을 선택하는 기준은 전적으로 집에서 얼마나 가까운가에 따라서 결정된다. “저는 그냥 집 아래층에 있는 사원에 갑니다. 누가 사원을 운영하는지, 이맘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저는 관심 없어요. 사원에는 오로지 기도를 하기 위해서 갈 뿐입니다.” 이맘의 대부분은 아랍어 문어체인 포샤(fosha)로 설교를 하는데, 신자들은 이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설교 내용 역시 너무 교훈적이다. “우리를 어린애 취급해요. ‘이것도 하면 안 돼,’ ‘저것도 하면 안 돼’ 하면서요. 솔직히 이맘의 설교를 제대로 듣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프티 바르 지역 출신의 28세 청년 케이라 마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한다.

아이샤 사원의 이맘인 모하메트 카타비가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분위기 때문이었다. 그는 시가전차(tram) 차고지와 폐기물 처리장 사이에 위치한 거대한 헛간을 자신의 지지자들과 함께 개조해 아이샤 사원을 세웠다. “카타비는 주시할 필요가 있는 인물입니다.” 루아조는 알 수 없는 어조로 이렇게 말하며 더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 압델 메다위는 말한다. “저는 카타비가 좋아요. 적어도 그는 현실적인 문제들, 우리에게 직접 와 닿는 주제들을 이야기합니다. 인종차별주의, 시리아 전쟁, 팔레스타인 등이요.” 압델 메다위는 38세의 스포츠 강사로, 카타비를 따라 이븐 로쉬드 사원에서 아이샤 사원으로 적을 옮겼다.

모든 설교는 먼저 모로코 아랍어로 시작된 후 불어로 통역되는데, 주로 코란을 설명하고 시사 문제를 다루는 것이 일반적이다. 일례로, 5월 중순에 언론 매체의 1면을 도배한 두 가지 사건이 있었다. 베지에(Béziers) 시장인 로베르 메나르(프랑스 국민전선 소속)는 베지에 시의 학생들 가운데 이슬람 신자의 비율이 너무 높다고 주장했다가 학생들의 출신을 불법적으로 분류했다는 논란에 휩싸였다. 부쉬-뒤-론의 베넬(Venelles) 시장인 로베르 샤르동(대중운동연합 소속)은 “프랑스 내에서 이슬람교를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카타비는 사건 발생 후 이틀 뒤에 있었던 그의 설교에서 ‘두 명의 로베르’를 ‘인종차별주의자들’, ‘멍청이들’이라고 부르며 격렬하게 비난하였다. 그리고 헛간을 가득 메우고 과반수가 40세 이하인 500여명의 신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이방인이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를 이방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슬람 신자들은 오래 전부터 프랑스에 거주해 왔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러할 것입니다. 프랑스는 우리의 조국입니다. 프랑스가 우리의 집입니다. 저는 젊은 이슬람 신자들에게 언제나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들이 이방인이라는 생각을 버려라. 우리가 그런 생각을 가지는 것이 바로 그들이 바라는 바이다.’ 우리가 스스로를 이방인으로 느끼지 않아야 우리의 권익을 위해 당당하게 투쟁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정치적‧사회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세상이 바뀔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그들이 우리를 프랑스 사회의 일원으로 인정해줄 것입니다.”(4)

번역·김소연

 

(1) Cf. 리디 푸르니에, <몽펠리에의 이슬람교>, Dalloz, 파리, 2008.

(2) 2년 전에 이슬람교로 개종한 몽펠리에 출신 1명이 시리아로 떠나기는 했다. 군인이었다가 라 모송의 도의원이 된 알랭 자즐레는 ‘이 구역에는 지하디즘 관련 문제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3) 이는 주로 히잡 착용을 둘러싼 논쟁과 관련이 있다. 1989년 정부의 히잡 금지 조치와 2004년 제정된 ‘종교 상징물 착용 금지법’에 대해 몇몇 여성들이 소송을 제기했는데, 그 뒤에는 대부분 UOIF의 지원이 있었다.

(4) <어이, 두 로베르! 우리도 같은 프랑스 국민이라구!> (로베르 샤르동과 로베르 메나르의 발언에 대한 답변)>, YouTube.com, 2015년 5월 15일. 카타비는 자신의 모든 설교를 촬영해 인터넷 상에 배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