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베라와 칼로, 뜨거운 멕시코의 색

2015-07-31     김지연


일요일 오후의 공원. 풍선꾸러미를 보니 축제인가 싶기도 하고, 시민을 위협하는 경찰의 매서운 눈초리를 보니 시위현장 같기도 하고, 그늘 아래에서 졸거나 담소를 나누는 이들을 보니 그저 평화로운 주말 오후인 듯도 하다. 그런데 그림(도판1)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범상치 않다. 멕시코 근대화의 아버지라 불리는 원주민 대통령 베니토 후아레스, 아즈텍의 마지막 왕 쿠아우테목 등 멕시코의 역사적 인물들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멕시코 문화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망자의 날을 상징하는 해골 여신이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길이 15미터, 높이 4미터의 이 거대한 그림의 색채는 멕시코의 채도 높은 자연과 뜨거운 날씨를 연상케 한다. 또한 멕시코 역사의 축소판인 이 그림은 멈추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로 역동적이다.

또 다른 그림(도판2)으로 시선을 옮기면 낯익은 얼굴의 여인이 슬픈 눈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해골 여신의 왼쪽에 서 있던 짙은 눈썹의 여인이다. 그녀의 머리에서부터 뻗어나간 식물의 잔뿌리는 마치 깨진 거울처럼 고통을 암시한다. 그리고 그 여인의 이마 한 가운데에는 무슨 사연인지 한 남자의 얼굴이 단단하게 새겨져 있다. 멕시코의 흙과 풀의 색채를 닮은 이 그림 속 주인공은 원주민의 전통의상을 입은 채 온 몸으로 멕시코를 드러낸다.
여인의 이름은 프리다 칼로, 그리고 그녀가 이마에 아로새긴 남자의 이름은 디에고 리베라. 첫 번째 그림을 그린 화가이다. 칼로와 리베라는 멕시코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들이자, 부부지간이었다. 단순히 부부라고만 칭하기에는 질기고 강렬하고, 심지어 고통스러운 인연이었던 이 두 화가가 올 여름 나란히 서울을 찾았다.
리베라의 작품을 이야기하자면 멕시코벽화운동을 빼 놓을 수가 없다. 새로운 근대국가정부가 수립되는 과정에서 수정된 국가관을 민중에게 효율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는 공공미술이 안성맞춤이었다. 1910년 멕시코혁명 직후, 당시의 정부 역시 혁명의 핵심 사상인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거대한 벽화를 이용하여 표현하고자 했다. 혁명의 예술적 변형과도 같았던 벽화운동의 이면에는, 11년간의 무장 갈등과 1백만 명 이상의 희생이 그림자처럼 존재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객관적 평가는 아직 논란이 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멕시코 르네상스’라고도 불리는 1920년대 멕시코 미술의 부흥기는 벽화운동을 통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 가치는 결코 부정하기 어렵다.
국가 정책으로 시작된 이 벽화운동에는 수많은 미술가들이 동원되었고, 그 주역이 바로 당대의 유명 미술가 오로스코, 시케이로스, 그리고 리베라였다. 그는 파리 유학 시절 이탈리아 르네상스 거장들의 거대한 벽화에 감명을 받았던 기억에 조국 멕시코의 민중혁명의식을 더하여, 마야문명의 신화와 멕시코의 역사를 담은 강렬한 색채의 벽화를 주로 제작하였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가 처음에 언급한 그림 <알라메다 공원의 어느 일요일 오후의 꿈>이다.
그는 뛰어난 예술적 재능과 동시에 여성 편력이 있는 것으로 유명했다. 21살이나 차이가 나는 프리다 칼로와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하였는데, 당시에 그는 이미 다른 연인과 아이들이 있는 상태였다. 칼로의 부모가 이들의 결혼을 두고 ‘비둘기와 코끼리의 결합’이라고 했을 정도로 실로 매우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그러나 결혼 후에도 이어진 수많은 여성과의 염문, 칼로와의 이혼을 겪은 후에도 리베라는 다시 칼로의 곁으로 돌아와 그녀의 마지막 생애를 함께한다.
칼로의 예술적 재능을 발굴하고 그녀를 혁명으로 이끌었던 리베라는, 그녀의 재능이 빛나는 것을 매우 자랑스러워했다. 영화 <프리다>에서 리베라는 칼로의 그림을 바라보며 말한다. “난 결코 이렇게 그릴 수 없어. 난 바깥세상에서 본 것만을 그려. 하지만 당신은 가슴으로부터 그리지. 정말 놀라워.” 실제로 리베라가 이렇게 말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리베라가 칼로의 예술을 매우 존중했음은 그들의 관계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그는 칼로의 불완전한 몸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낸 것처럼, 그녀의 재능을 찾아냈고 또 열렬히 사랑했다. 수많은 여성을 끊임없이 만났지만, 그와는 별개로 칼로라는 여성은 그의 삶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영화 속 리베라의 대사처럼, 칼로는 가슴으로부터 그림을 그렸던 여자였다. 18세 때의 전차 사고로 온 몸이 부서졌던 그녀는 누워서도 할 수 있는 일을 찾다가 그림을 시작했고, 세상 밖의 일을 경험할 수 없었기에 내면을 표현한 자화상을 주로 그렸다. 정규교육을 받은 적은 없지만 고통을 자양분 삼은 그녀의 강렬한 그림은 한 눈에 리베라를 사로잡았다.
리베라와의 결혼은 그녀에게 혁명관과 예술적 재능이 확장되는 기회를 주었지만 또한 수많은 시련을 안겨 주기도 했다. 산산이 조각난 육체와 온전히 소유할 수 없는 남자 리베라, 아이를 가질 수 없는 현실로 인해 끝없이 고통 받던 칼로는 리베라와의 만남을 두고 자신이 겪은 ‘두 번째 사고’라고 표현하였다. 하지만 그녀는 그 고통을 토양으로 삼아 리베라에게서 비롯된 예술과 혁명의 씨앗을 자력으로 싹틔웠고, 그 뿌리를 자신의 내면으로 더욱 깊이 확장해갔다.
기나긴 질곡의 시간 끝에 리베라가 칼로와의 재결합을 원했을 때 그녀는 경제적 독립과 육체적 독립을 조건으로 그를 다시 받아 주었다. 리베라는 그녀의 모든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정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그들의 관계를 지속할 수 있는 비결이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들은 칼로가 생을 마칠 때까지 14여년을 다시 함께 했지만, 서로 간에 긴장되고 독립된 관계를 유지하였다. 지금도 멕시코에 남아 있는 칼로와 리베라의 스튜디오는 독립된 두 건물로서 옥상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그들의 관계가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당대를 풍미했던 디에고 리베라의 그늘에 가려 그의 세 번째 아내, 혹은 원주민 복장을 입은 작은 여인 정도로 알려졌던 칼로. 코끼리 같은 리베라의 작은 비둘기였던 칼로는 지금에 이르러 리베라의 여자가 아닌 페미니즘 미술의 대표 작가, 혹은 멕시코를 대표하는 여성 화가로서 리베라보다 앞서 소개되기도 한다. 고통으로 배양한 자신의 세계를 딛고 스스로 우뚝 선 그녀는 아마도 작은 새가 아니라 한 마리의 맹수가 아니었을까.

 

 
리베라와 칼로의 공통된 세계는 멕시코 원시문화
 
칼로와 리베라의 작품은 그 시작도 담긴 내용도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멕시코 원시문화의 색채를 드러내고 있다. 이는 당시 라틴아메리카에서 발달했던 메스티소 모더니즘의 모습인데, 원시적 문화를 찬미하고 그것에서 조형적 발상을 했다는 점에서는 서구의 모더니즘과 같다. 그러나 기존 예술의 변화를 위해 고전적 선례와 양식을 의도적으로 거부하고 유럽 밖 타자의 문화를 찬미한 서구 모더니즘과는 달리, 메스티소 모더니즘은 유럽 예술의 지배에 맞서기 위해 내부 토착문화에서 조형적인 미를 찾아내고 고전적인 양식으로 회귀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단순히 예술 내부의 움직임이 아니라 멕시코 혁명 및 벽화운동과 관련이 깊다. 혁명 이후 멕시코 정부는 민족의 결속을 위해서 원주민들을 계몽하여 새로운 멕시코의 시민으로 통합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계몽의 방식으로서 선택된 벽화가 원주민들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기존 귀족들이 선호하는 유럽풍의 양식보다는 원주민들의 색채와 양식을 차용하는 것이 효과적이었던 것이다. 리베라는 그러한 벽화운동의 선봉장이었기 때문에 그의 작품에는 유난히 메스티조 모더니즘의 색채가 짙게 묻어난다. 또한 그는 어린 시절 우울증을 앓던 어머니 대신 그를 길러 주었던 원주민 유모나, 그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였던 원주민 모델 겸 가정부였던 히메네스라는 여인을 통하여 원주민의 문화를 가까이서 듣거나 체험하였고, 그러한 경험이 그의 다른 작품들에서 간접화법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한편 칼로는 벽화운동에 참여한 화가는 아니었지만, 리베라의 영향으로 인해 원주민 문화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다. 칼로의 자화상에서는 원주민 전통의상이 자주 등장하는데, 앞서 언급했던 자화상에서 착용한 의상은 그녀가 가장 즐겨 입었던 테우안테펙 지방의 것이다. 테우안테펙은 칼로를 이야기 할 때 꼭 언급되는 모계혈통 중심의 멕시코 남부 지방으로, 그곳 여성의 전통의상을 테우아나라고 한다. 칼로는 테우아나를 자신의 ‘부재 중인 초상화’라고 칭할 정도로 단순한 옷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였고, 테우안테펙의 전통춤을 즐겨 추기도 하였다. 때문에 리베라의 여성편력으로 고통받았던 칼로가 그에게서 독립하여 강한 여성으로 거듭나고 싶은 마음을 여성중심 사회의 복식인 테우아나로 표현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그러한 칼로의 모습은 후에 그녀가 페미니즘 미술의 대표 작가로 발돋움 하는 데 큰 영향을 준다.
또한 칼로의 작품 중에는 그녀가 겪었던 고통을 서사적으로 표현하는 그림들이 자주 등장한다. 이는 멕시코의 전통 양식인 ‘레따블로’와 닮아 있다. 레따블로는 고통에서 구원된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자신이 겪은 고통을 표현한 그림을 교회에 바치는 일종의 봉헌화인데, 칼로 자신이 겪은 전차 사고나 유산, 리베라에 대한 고통 등을 원시적인 색채를 이용해 구체적 형태와 직설적 화법으로 표현하는 방식이 레따블로의 그것과 매우 유사하다. 칼로의 그림은 그리는 행위를 통해 고통의 해소를 구하려 한다는 점에서 구원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는 레따블로와는 그 의미의 맥락이 조금 다르지만, 형식적으로는 레따블로의 양식을 차용함으로써 멕시코 토착문화의 색을 강하게 드러낸다.
바깥세상을 그린 남자 리베라와 가슴 깊은 곳을 그린 여자 칼로. 그들의 작품이 기초한 세계는 달랐지만 조국 멕시코의 아름다운 색채와 뜨거운 혁명의 흔적이 담겨 있다는 데에서는 그 맥을 같이 한다. 리베라는 칼로에게 평생에 걸쳐 고통을 안겨주었지만 결국엔 다시 그녀의 곁으로 돌아왔고, 칼로에게 리베라는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존재이자 예술의 원천이었다. 이 부부의 관계는 때로는 강렬하고 때로는 잔인해서 개인의 삶에서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을 것이나, 오랜 시간이 흐르고 우리 앞에 남겨진 그들의 사랑과 예술은 고맙게도, 심지어 미안한 마음이 들 정도로 그 향기가 깊고 짙다.
서로에 대한 영향력이 유난히 강했던 칼로와 리베라, 그들의 작품은 작년 파리의 오랑주리 미술관에서도 합동전이 열렸고 올해는 나란히 서울을 찾았다. 비록 오랑주리에서와 같은 합동전은 아니지만 그들의 삶과 예술세계를 볼 때 같은 시기, 같은 도시, 그리고 다른 장소에서 각자의 전시가 열리는 것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된다. 뜨거운 이 여름, 두 화가가 서울에 펼쳐 놓은 멕시코의 색이 참으로 아름답다.
 
 
글·김지연
홍익대학교 예술학과를 졸업하고 경북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에서 법무석사를 받았다. 오랜 기간에 걸쳐(2006~2008년) 싸이월드 페이퍼와 올리브TV홈페이지 등에 미술에세이를 연재했다.
 
● 참고
르 클레지오, <프리다 칼로 & 디에고 리베라>, 다빈치, 2001
유화열, <라틴 현대미술 저항을 그리다>, 한길사, 2011
 
● 전시정보
<디에고 리베라_프라이드 오브 멕시코>展 / 2015.5.23.~8.16 / 세종문화회관
<프리다 칼로_절망에서 피어난 천재화가>展 / 2015.6.6.~9.4 / 소마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