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국제 정치의 블랙홀' 되려나

데이튼 협정의 질곡에 빠진

2008-09-29     장-아르노 데랑 | 발칸통신 사이트 편집장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존립을 위협해
새로운 강자 도디크, 제2의 밀로세비치?

장-아르노 데랑 <발칸통신 사이트의 편집장>

지난 2006년 9월 말 총선거 며칠 전, 중부 보스니아의 작은 마을 카카니(Kakanj)에 근거지를 둔 정체불명 단체의 일부 조직원들이 사라예보에 집결했다. 행인들이 깜짝 놀라며 지켜보는 가운데, 그들은 대통령 관저 정면에 페인트 스프레이를 던졌다. 얼마 후 경찰이1) 출동해 매우 거칠게 그들을 제압했다. 그러나 이들의 절망적 행동은 사라예보 민주 진영에 일말의 동정심을 자아냈다. 다음 며칠간엔 경찰의 폭력성을 규탄하는 시위도 벌어졌다. 하지만 몇 백 명의 인원만 참가했을 뿐 그다지 호응을 얻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 사라예보의 민주주의자들은 이를 기화로 본격적으로 거리로 뛰쳐나왔다. 이는 2007년 겨울과 이듬해 봄에 걸친 시위로 이어졌다. 당시 시위는 본래 전철에서 벌어진 한 청소년에 대한 야만적인 살인 사건에서 비롯됐다. 이 비극적 사건은 시의회 지도자들의 무능과 무책임을 고발하는 빌미도 제공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특히 젊은이들과 퇴직자들이 시위의 전면에 나섰으며, 그중 일부는 티토 원수의 초상화를 열렬히 흔들기도 했다.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 이런 대중적 움직임은 혼수상태에 빠져있는 정치권과는 대조를 이루었다.
 

  지난 2006년 10월 1일 총선거는 보스니아 현대사에 또 하나의 획을 그었다. 유고연방이 해체되던 1990년에 생겨난 민족주의적 낡은 조직들인 '민주행동당(SDA)', '세르비아 민주당(SDS)'과 '크로아티아 민주공동체(HDZ)'가 무대의 전면에서 물러난게 그 대표적 변화였다. 그러나 정치적 다양성과 소통의 폭을 그 만큼 넓히진 못했다.

 이에 앞서 '보스니아 이슬람'의 주요 정당인 SDA(민주행동당)는 국가 합의체 대통령 후보로 술레이만 티히치(Sulejman Tihic)를 내보냈으나, 카리스마 넘치는 하리스 실라이지치(Haris Silajdzic)에게 패배했다. 내전 당시 수상이었던 실라이지치는 본래 SDA의 반대파다. 그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당(SBiH)은 '개별 지방정부가 존재하지 않는, 다시 말해 단일 국가 형태로 조직된, 하나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지향한다. 이런 입장 때문에 반민족주의 성향의 민주 진영은 오래전부터 실라이지치에 호감을 가져왔다. 이같은 실라이지치의 승리 요인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이슬람 최고 권위자인 무스타파 에펜디 세리치(Mustafa Efendi Ceric)가 그를 공개적으로 지지한 사실로도 뒷받침된다.
 

  세르비아계 진영에선 밀로라드 도디크(Milorad Dodik)가 이끄는 '독립사회민주당(SNSD)'이 기존의 SDS(세르비아 민주당)를 누르고, 주도권을 확보했다. 내전 당시 보스니아의 세르비아 의회 의원이었던 도디크는 라도반 카라지치의 SDS가 주도한 권력행위에 직접적으로 참여한 적이 없다.
 

  라도반 카라지치는 13년 간 은신하다 지난 6월 체포되어 국제유고전범재판소로 이송되었다. 이에 반해 도디크는 평화가 회복된 후 상대적으로 정치적 순수성을 인정받는 대중적인  '민주주의자'로 부각되었다. 그를 세르비아 민족주의의 대안으로 삼고자 했던 서구, 특히 미국 역시 그를 선호하며, 지지한 것으로 전해졌다.
 

  내전 직후 몇 년 간 도디크는 민주 진영 야당들과 가깝게 지냈다. 1998년에서 2001년 기간엔 사업에 손을 대 적지않은 어려움도 겪었다. 그러나 2006년 선거에 그는 다시 나서 정치적 목적 달성을 위해 어떤 방안도 주저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스르프스카 공화국의 자치권을 요구하는가 하면, 이 문제에 대한 국민투표를 보장하라는 보스니아의 세르비아계 민족주의 진영의 요구도 받아들였다.
 

  이 전략은 성공했다. SNSD는 유례없는 권력 집중을 실현했다. SNSD는 스르프스카 공화국 의회의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도디크는 그 정부를 도맡았다. 나아가 보스니아 국가 의회의 제 1세력을 형성하게 되었고, 이를 토대로 보스니아 정부도 이끌게 됐다.
 

  그러나 보스니아의 새로운 강자 도디크는 사라예보에 거의 들르지 않으며, 스르프스카 공화국의 수도인 바냐루카(Banja Luka)의 자기 '영지'에 머물기를 선호한다. 실라이지치가 국가 내 개별 지방정부의 소멸을 주장하는 반면, 도디크는 개별 지방정부에 더 많은 권한을 줄 것은 물론, 스르프스카 공화국의 분리까지 요구하고 있다. 보스니아의 정치 국면은 이처럼 극명하게 대립된 주장을 펴는 실라이지치와 도디크의 정면 대결양상을 띠게 된 것이다.
 

  이같은 긴장된 대립은 결과적으로 다른 정치조직들, 특히 정치적 역량이 뒤떨어진 사회·민주조직들을 주변화시켰다. 인구수가 많지 않아 정치적 영향력이 거의 없는 크로아티아계 공동체도 마찬가지로 소외되었다. 크로아티아계는 내전 이전엔 인구의 17.5%를 차지했으나 현재는 10~11%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한편 상대적으로 번영을 구가하는 크로아티아는, 몇 년 후 유럽연합에 가입하게 되면 그 위상이 더 높아질 것이란 전망이다. 반면에 보스니아 크로아티아계 정치세력의 지도부는 부패스캔들로 그 힘이 약화되고 말았다. 부패사건은 HDZ의 수많은 간부들에게 타격을 주었고, HDZ가 결국 두 분파로 갈라지게 했다. 이런 상황에서 보스니아의 크로아티아계 정당들은, 비록 연방의 몇 개 '코뮌'들을 독자적으로 장악하긴 했어도, 연방 차원에선 주변적 정치 인자에 불과하다는 평가다.
 

  이런 현상을 두고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헬싱키위원회 의장인 스르디안 디즈다레비치(Srdjan Dizdarevic)는 실라이지치와 도디크 양자 구도의 현실을 꼬집기도 했다. 그는 "실라이지치와 도디크는 자신들만의 두 공동체를 동원하기 위해, 널리 알려진 '공포에 대한 충동'을 이용한다. 두 사람은 프라니오 투즈만(Franjo Tudjman)과 슬로보단 밀로세비치 커플처럼 작동하고 있다"고 비유한 것이다.

  한편 단일 연방국가로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존립이 크게 위협을 받는지도 의문이다.  코소보 독립을 전후해 베오그라드의 지도자들, 특히 당시 수상인 보이슬라프 코스투니차(Vojislav Kostunica)는 "만약 코소보가 독립된다면 스르프스카 공화국도 같은 길을 갈 것"이라고 '협박'했다. 도디크도 "코소보의 알바니아 사람들에게 허용한 것을 보스니아의 세르비아계 사람들에게 무슨 연유로 금지할 것인가"를 따지며 같은 주장을 폈다.
 

  그러나 지난  2월 17일 코소보가 독립을 선언한 후, 정작 바냐루카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일부 세르비아계 마을에서 온건한 소규모 시위만이 일어났을 뿐이다.
 

  사실 도디크는 세르비아계 개별 지방정부의 독립을 내심 반기지 않는다는게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그는 공인되지 않는 세르비아계 개별 지방정부의 독립은 되레 진퇴양난의 결말을 초래할 것임을 잘 알고 있다. 게다가 (대)세르비아에 병합되는 것은 자신으로서도 이로울 게 전혀 없다. 그렇게 될 경우 유고의 지도자들과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는 그로선 한낱 지방의 백작 정도로 전락할 것이기 때문이다 2).
 

  오히려 코소보 독립은 도디크에게 아주 좋은 소식이었다. 코소보 독립은 그가 즐겨 써먹는 '스르프스카 분리론'의 위력을 한층 높여준 결과가 됐다. 서구 진영을 대상으로 '분리'를 내세운 협박조 언사를 구사하는 한편, 자신에게 협력할 경우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임을 약속함으로써 그들을 안심시키는 양면 전술을 쓰곤 했다.
 

  이를 통해 그는 서방 진영으로부터 두 가지를 얻어냈다. 자신이 발칸반도의 '안정'에 불가피한 인자라는 점, 그리고 자신이 연루된 부패사건이 너무 부각돼선 안된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각인시키며 협상 국면에서 자신의 입지를 강화한 것이다. 서방 국가들로선 신뢰할 만한 대안 정치세력이 없는 점을 이용, 자신의 정치적 헤게모니를 철저히 구축한 셈이다.
 

  이 와중에 도디크가 권력으로 확보한 부패 시스템은 그에게 엄청난 경제·사회적 과실을 가져다 주고 있다. 특히 지난 2년 동안 그는 스르프스카 공화국에서 사익을 위한 제도적 방안을 확보하는데 급급했다. 그 가운데 매우 불투명한 방식으로 이루어진 이동통신업체 3)와 브로드(Brod)의 정유공장 민영화는 도디크와 당, 그리고 그의 친구들에게 직접적인 부를 안겨주었다. 그는 또 각종 미디어에 대한 지배력도 강화했다. 공공 텔레비전 방송국들 외에도, 스르프스카 공화국의 양대 일간지인 <글라스 스르프스케(Glas Srpske)>와,  본래 독립적이었던 <네자비스네 노비네(Nezavisne Nobine)>도 결국 장악하고 말았다.

  바냐루카의 언론인 슬로보단 바스코비치는 이를 두고 "도디크의 부패 시스템은 라도반 카라지치의 그것보다 더 악랄하다."며 "절도와 협박을 정책 수단으로 삼는 것이 이들의 실체"라고 맹공을 퍼부었다.
 이런 부패 시스템은 특히 도디크와 직접 연관된 십여 명의 사조직이 좌우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바냐루카에서 10여 킬로미터 떨어진 그의 고향  라크타시(Laktasi) 출신들이다. 이른바 '충복'으로 알려진 그들은 특히 '인테그랄 엔지니어링(Intergral Inzenjering)'이라는 회사가 통제하는 기업들의 조직도 곳곳에 그 이름이 등장한다. 1990년대 초 도디크가 창립한 '인테그랄 엔지니어링(Intergral Inzenjering)'은 그가 권력을 잡으면서 모든 공공사업을 휩쓸었던 기업이다.
 

   언론인 바스코비치는 "국제 공동체는 자신들이 도디크를 만들어냈으나, 이젠 오히려 새로운 밀로세비치를 만들어냈다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달은 셈"이라며 "다만 밀로세비치의 문제가 이데올로기나 민족주의라면, 도디크는 권력과 돈이란 점이 다를 뿐"이라고 꼬집었다. 그러나 도디크가 언론을 장악한 현실에선 슬로보단 바스코비치(Solvodan Vaskovic) 기자 같은 비판의 목소리를 듣기조차 어려울 전망이다.

보스니아, 지역균형의 받침대 흔들
젊은이들'미래 발전 꾀하기엔 너무 지쳐'


 도디크는 비즈니스를 위해선 다른 정치적 적수들, 심지어 실라이지치와도 타협을 마다하지 않는다. 예컨대 주요 에너지 사업에서 두 사람은 때로 동업자이자 경쟁자로 각자 몫을 챙기고 있다.
 보스니아는 천연의 담수가 매우 풍부해서 수력발전소 건설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댐을 여러 개 쌓는 것은 만성적인 에너지 결핍으로 고통 받는 현실을 타개하는 유력한 방안이기도 하다. 비록 환경문제를 내건 대규모 시민운동 탓에 바냐루카 상류에 있는 브르바스(Vrbas)와, 보스니아 국경선과 몬테네그로 사이에 있는 타라(Tara) 지역의 댐 프로젝트가 저지되긴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댐 프로젝트는 여러 곳에서 검토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 나라 경제는 가히 답보상태라고 해야 옳다. 실업률이 경제활동 인구의 40% 이상에 달할 정도다. 그나마 최근에 있은 유일한 투자는 아르셀로미탈(ArcelorMittal)사(社)가 크로아티아·이슬람 연방의 제니카(Zenica) 제철소를 매입한 게 고작이다.
 

   노동 운동 역시 있으나마나다. 각 민족별 노선에 따라 나뉘어진 노동조합들은 대안을 제시하거나 노동자들을 보호할 만한 의욕이나 능력이 없다. 그나마 지난 수년간 벼랑 끝에 몰린 농민들이나 퇴직자들이 몇 주 동안 사라예보 국회 앞에서 철야농성을 하는 등 간헐적 시위를 벌였을 뿐이다.
 

  역설적으로 도디크의 부패 시스템은 정치·경제·사회적으로 그 기능이 정지된 덕을 보고 있는 셈이다. 예컨대 최근의 경찰 '개혁'이 그 대표적 사례다. 1995년 이래 경찰력은 실질적으로 개별지방정부에 종속되어 있어, 오히려 국가의 분리를 유발하고 지속적인 범죄 수사를 불가능하게 했다. 경찰개혁과 경찰통합 문제는 여러 해 동안 보스니아 정계의 핫 이슈이자 정치적 갈등의 요인이 됐다.
 

  도디크는 "경찰력이 분리되어 있지만 '협력'구조는 이루어져야 한다"는 하나마나한 개혁 방안을 받아들였다. 이런 '사이비 개혁'을 거부했던 SDA와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근본주의'로 비난을 받았다. 반면에 국제기구의 고위 관계자들과 서방 국가의 지도자들은 보스니아가 실행한 커다란 '진전'이라며 흡족해했다. 보스니아는 6월 16일 안정과 협력 협정에 서명 받음으로써 보상받았다.
 

  유럽연합의 어느 누구도 최종 순간에 이루어진 이 타협의 기만적 성격을 모르진 않는다. 그러나 이는 보스니아에서의 국제정치 목표가 '안정'임을 감안하면 어쩔 수 없는 현실이기도 하다. 코소보의 독립 선포에도 불구하고, 보스니아가 봉기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의 '발칸 체제' 고착을 위한 서방 각국의 외교적 노력도 같은 맥락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도디크는 오히려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무력화'한 공로가 인정된, 이상적인 인물이다.
 

  1995년 12월 데이튼 협정이 체결되었을 때, 낙관론자들은 시간이 흐르면 내전의 상처들이 아물게 될 것이고, 정지된 정치 기능이 회복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혁신적 계획이 부재한 만큼 보스니아는 계속 침체될 수 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애초부터 서방 진영은 조속히 크로아티아를 통합하고, 지역균형의 받침대로 간주되는 (대)세르비아의 통합을 가속화하는 구상을 갖고 있었다. 이는 보스니아, 코소보 혹은 마케도니아 같은 '주변 희생국들'을 무시하면서 추진돼왔다. 그 와중에서 그나마 마케도니아는 2005년 유럽연합 후보 지위를 공식 획득하는 개가를 올리기도 했다.
 

 이런 비극적 현실에도 불구하고 사라예보의 거리를 걷는 방문객은 보스니아가 겪은 전쟁 4) 의 끔찍한 상흔을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난 평온, 그 이면엔 전혀 다른 현실이 숨겨져있다.

  사라예보에는 내전 이전과 같이 약 50만 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지만, 인구 구조는 완전히 달라졌다. 본래 5만 명이에 달했던 세르비아인은 이제 2만 명에 불과하다. 나머지 수많은 도시민들 역시 내전 기간이나 그 후에 살던 도시를 떠났다. 그들은 스르프스카 공화국에서 쫓겨나거나, 혹은 시골이나 작은 마을에서 떠밀리다시피 이농해온 다른 주민들에 의해 대체되었다. 개중엔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사이에 위치한 보스니아인 거주 지역 산디아크(Sandjak)에서 유입되기도 했다. 시민들간의 강한 일체감은 사라지고, 이젠 '예전 도시민들'과 유입된 새로운 도시민 사이의 이질감과 잠재적 갈등만이 남아있는 실정이다.

  3년 전, 유엔난민 고등판무관실(HCR)은 "난민들과 이주민들이 100만 명 이상 귀환했다"고 의기양양하게 공표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는 대부분 사실과 다른 것으로 밝혀졌다. 실제 자신들의 소유지를 되팔기 위해서 그 것이 위치한 지역을 다시 찾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 소유지들은 예전 자신들의 공동체가 이젠 소수가 되어버린 지역이나 도시에 있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헬싱키 위원회는 이와 관련된 자산의 교환을 언급한 적이 있다.
 '인종청소의 마지막 국면'을 소개하기도 했던 이 위원회는 보스니아 중부의 도니 바쿠프(Donji Vakuf)라는 마을의 예를 들었다. 이곳에선 이런 자산 교환에 의해 크로아티아 사람들과 보스니아 사람들 사이에 '코뮌'의 영토분할이 완전히 이루어지기도 했다 5).
 

 한편 민족주의 정당이나 집단들은, 앞으로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형성하는 여러 단일민족 소수'코뮌'을 계속 장악할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내전의 후유증에도 불구하고, 나름의 번창과 성취를 구가하는 한편, 공식적으론 유럽통합이란 목표에도 공감하고 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자신들이 획득한 부나 권력, 특권을 문제 삼지 않는다는 전제 조건이 따른다. 그렇다 보니,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수구적 선택을 하게 되고, 혁신과 발전을 바라는 사람들은 절망에 빠질 수 밖에 없는 현실이다.

  결국 서방 각국 또한 전략 부재에 처하게 되고, 보스니아는 점점 더 변화가 요원한 국제정치의 '블랙 홀'이 되고 만다. 그런 와중에 국제 신탁통치가 한 방법으로 떠오르지만, 순기능보다 역효과가 더 부각되고 있는 형편이다.6) 이는 보스니아 위정자들의 진지한 소명의식을 빼앗고, 대중에겐 그 의미가 불투명한 우민정치의 편리함을 강요하는 것이란 비판을 사고 있다. 그럼에도 이 지역에선 새로운 위기가 매번 일어나기 때문에 신탁통치가 불가피할 수도 있다는 전망이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젊은이들은 대부분 정치에 무관심하다. 25세 이하 젊은이 10%이상이 투표소에 거의 가지 않는다. 오는 10월 예정된 시의회 선거 역시 젊은층의 높은 관심을 끌 것이라고는 예상하기 어렵다. 고등 교육을 받은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앞다퉈 고국을 떠날 꿈을 꾼다. 한 젊은이는 "새로운 격렬한 모험에 뛰어들기엔 지난 내전의 충격이 너무 심하다"며 "그 충격에 나라가 너무 짓눌려 있고, 진정한 변화를 시도하기엔 시민들이 너무 지쳐있다."고 털어 놓았다.

 <번역 : 고광식 kokos27@ilemonde.com>


 

1)오늘날 통용되는 학술용어에 따르면, 'Bosnjak'라는 용어는 이슬람을 믿는 보스니아 사람을 가리키고, 'Bosanac'이라는 용어는 보스니아의 모든 주민들을 가리킨다. 불어로는 이 용어들을 각각 'Bosniaque'와 'Bosnien'으로 번역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그러므로 '보스니아의bosnien'라는 형용사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라는 국가의 공통제도들에 속하는 모든 것에 적용된다.
2)현재 그는 어쨌든 간에 보리스 타디치(Boris Tadic) 세르비아 대통령과 상당히 좋은 관계를 맺고 있다.
3)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서는 모든 공공서비스가 영토 내 개별 지방정부의 층위에서 관리되고 있다. 유선 및 이동통신에서는 보스니아, 세르비아, 크로아티아라는 세 가지 종류의 망이 존재하고 있다.
4)'사라예보 연구·문헌센터(IDC)'의 최근 자료에 따르면, 1992~1995년 전쟁에서 확인된 희생자 수는 대략 10만 명에 이르는데, 당시 인구수는 450만 명이었다.
5)니드자라 아흐메타세비에(Nidzara Ahmetasevie), '보스니아 인종청소의 마지막 국면', <발칸통신>(
http://balkans.courrier.info), 2006년 9월 6일, 참조.
6)유럽통합전략센터 같은 몇몇 '아이디어 뱅크들'은 여러 해 전부터 이런 신탁통치의 효과를 규탄하고, 민주주의에 '적응시키는 것'을 옹호한다. 이 적응에 의해 지역 책임자들은 그들의 책임을 떠맡게 되고 진정한 개혁의 길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www.ceis_eu.org/index.htm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