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배설물'에 맞서는 교황

2015-08-31     장미셸 뒤메
   
▲ <사도>, 2014-기 페레

 쿠바와 미국의 관계를 개선시킨 가톨릭교회의 수장인 프란치스코 교황은 9월 이 두 나라를 차례로 방문할 것이다. 3세기만에 비유럽인으로서 최초로 교황에 선출된 프란치스코 성하(聖下, 교황을 높여 부르는 표현-역주)는 지난 2년 간 가톨릭교회로 하여금 관심을 전 세계로 돌리도록 하였다.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지속가능한 환경을 장려하는 이 아르헨티나 출신의 예수교 사제는 곧 유엔에서 세계인의 양심에 호소를 할 것이다.

 볼리비아의 경제적 수도인 산타크루즈 예수상 광장에 모인 수많은 군중 앞에서, 하얀 예복을 입은 교황은 ‘사람을 죽이는 경제’, ‘우상이 돼버린 자본’, ‘돈을 향한 고삐 풀린 야망’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7월 9일 가톨릭교회의 수장은 자신이 태어난 라틴아메리카 대륙뿐 아니라 전 세계를 향해, ‘악마의 배설물’(1) 냄새를 풍기는 자본의 ‘교묘한 독재’를 종식시키기 위해 연설을 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 자리에서 “우리에게 변화가 필요하다”라고 주장했고, 3일 후 파라과이에서는 “판을 뒤흔들어라”라고 젊은이들을 부추겼다. 교황은 2013년 브라질에서는 젊은이들에게 “혁명가가 되고, 시대의 흐름에 역행할 것”을 주문했다.

교황은 이곳저곳 순방을 계속하면서, 악화일로에 있는 사회적·환경적 현실을 비판하고 신자유주의와 기술 중심주의에 대해 반대를 표방하면서, 즉 문화의 획일화와 ‘무관심의 세계화’ 같은 해로운 결과를 초래하는 시스템을 비판하면서 점점 더 강한 논조의 담화를 발표하고 있다.

6월에 프란치스코 교황은 같은 맥락에서 “지구의 미래를 건설하는 방법에 대해 황급히 새로운 대화를 시작하자”고 국제사회에 제안했다. <찬미 받으소서> 라는 제목의 환경에 대한 회칙에서 교황은 신을 믿는 사람이건 안 믿는 사람이건 간에 모든 사람을 향해 혁명적인 행동을 해야 한다고 호소하고, ‘무역거래 시스템과 구조적으로 사악한 소유 시스템’을 비판했다. “신랄하면서도 동시에 부드러운” 이 텍스트가 “가난하지 않은 모든 독자의 마음을 뒤흔들 것이다”라고 <뉴욕 리뷰 오브 북스(New York Review of Books)>는(2) 평했다. 프랑스에서는 이 소책자가 6주 만에 10만부 팔렸다.(3)

교황은 심판의 날이 아니라, 바로 이승에서 지금 또 다른 세상이 가능하다고 확신하고 있는 듯하다. 교황 바오로 2세(1978-2005년)처럼 미디어에 자주 등장하는 이 슈퍼스타 교황에 대한 호불호는 극단적으로 양분된다. 나오미 클레인, 니콜라 윌로, 에드가 모랭 같은 환경주의자들과 대안 세계주의자들(4)은 ‘환경문제를 신성화한’ 교황을 신성시한다. 반면, 미국의 극우보수주의 TV 채널인 <폭스 뉴스>의 한 논평가가 교황을 풍자한 것처럼, 극단적 자유주의자들과 환경 회의론자들은 교황을 ‘지구상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로 악마화하고 있다.

기독교 우파들은 낙태에 대해 거의 말하지 않으면서 좌파적 담화를 쏟아내는 교황을 보고 걱정한다. 세속적 좌파 성향의 언론인들은 시리아 사람인 그레고리 3세(731-741년) 이후 최초의 비유럽인 출신 교황인 이 남미 남성의 혁명적 사상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다. 이 남미 출신의 교황은 이주민들의 불법거래에 대해 파렴치한 일이라고 규탄하고, 긴축정책에 반대하면서 그리스인들을 지지해주길 호소하고, 아르메니아 학살을 ‘집단학살’이라고 단정했다. 그리고 팔레스타인과 준(準)협약을 체결하고,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게 강요한 분리 장벽에 기도하는 것처럼 자신의 이마를 갖다 대고, 서구가 우크라이나 분쟁 때문에 러시아에게 제재를 가하는 시기에 시리아 문제로 블라디미르 푸틴에게 접근했다.

“그가 가톨릭교회를 국제적인 게임 속에 휘몰아 넣었다. 그는 대안세계주의의 챔피언이다! 현 교황과 비교할 때, 베네딕트 16세 교황은 순진한 소년에 불과하다”라고 잡지 <에튀드>의 편집장이었고 현재 로마의 예수회 잡지 <시빌타 카톨릭카>의 국제관계 전문가인 피에르 드 샤랑트네가 말한다.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는 인자한 아르헨티나 출신 교황에 비할 때, 신학적 논란 문제에 늘 반대 판결을 내리던 전임 교황은 흥을 깨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프란치스코 교황의 힘은 무엇보다도 우리의 사회시스템 전체에 대해 의문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강렬하다”라고 샤랑트네 사제가 평가한다.

남미 출신이면서 예수회 출신의 최초 교황인 프란치스코는 “인류는 지구환경파괴에 대해 책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평등을 확산시키면서, 동시에 ‘우리들 공동의 집’인 지구를 파괴하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시스템을 방치하고 있다”라고 정확히 말한다. 그러므로 교황 자신도 지적하고 경제학자인 가엘 지로가 말한 것처럼, ‘아담 스미스와 데이비드 리카르도 이후 시장을 조절한다고 여겨지는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환상에 의해 도덕적 문제가 배제되어 있는’ 파괴적인 경제와 인류가 관계를 끊어야 한다.(5) 인류에게는 ‘세계 차원의 정부’, 제약적 규범, 그리고 특히 대중의 지성이 요구되고 있다. 대중을 위해 조속히 경제체제를 대체하는 것이 적절하다. 왜냐하면 정치적 해결책이 ‘권력의 근시안적 논리’에 휘말리는 엘리트들 손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손 안에 있기 때문이다.

 

“혁명하라,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라!”

 

교황의 입장에서 볼 때, 환경위기는 우선적으로 도덕적 차원의 문제이고 고삐 풀린 인간 경제가 낳은 결과에 불과하다. 이러한 경제에서는 부자와 가난한 자, 북반부와 남반부, 젊은이와 늙은이 사이에서 불평등이 심화되어 간다. 그리고 그러한 경제에서는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 빈곤 경멸과 쓰레기 문화, 단기 전략주의의 전횡과 소비주의의 정신이상, 기후 온난화와 감정의 빙하기 같은 것들이 서로 연결되어 발생한다. 결과적으로 “진정한 생태적 접근책은 항상 사회적 접근책을 통해 이루어진다.” 냉정함을 되찾아야 하는 인류는 결과적으로 ‘국제 관계에 대한 새로운 도덕’과 ‘보편적 연대감’을 가져야 한다. 바로 이 점을 프란치스코 교황은 ‘발전을 위한 천 년의 목표들’을 발표하는 기회인 유엔총회에서 9월 25일 천명할 것이다.

그런데 교황이 말하는 내용이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라고 사람들은 생각할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잘 받들고 있다(바티칸 공의회는 1962년-1965년 사이에 개최되었고, 그 목적은 가톨릭교회를 현대 세계에 개방하는 것이었다)”라고 가톨릭교회 해외원조기구인 국제 카리타스의 사무총장인 미셸 루아가 확인해 준다. 사실상 교황은 복음서를 근거로 삼고, 산업혁명 시대에 만들어진 가톨릭의 사회교리를 재해석하고, 특히 바오로 6세(1963-1978년)의 신념을 따르고 있다. 샤량트네 사제는 바오로 6세를 현 교황의 ‘지적·정신적 스승’으로 보고 있다.(6)

개혁가인 교황 요한 23세(1958-1963년)의 후임으로, 대륙 간 여행을 실행한 최초의 세계화된 교황인 바오로 6세는 외형적으로 교황권을 이탈리아 밖으로 넓혔고, 추기경단을 국제화시켰으며, 교황대사직을 만들어 국가들과의 쌍무관계를 증진시켰다.(7) 바오로 6세는 또한 종교적 자유의 수호병이라는 제한된 권한을 가진 가톨릭교회의 권한을 확대해 ‘전체 인류의 고통과 번민에 동참하는’ 종교를 만들었다.(8) 바오로 6세에게 있어서 발전은 평화의 새로운 이름이었다. 평화라는 것이 정지된 현상으로 포착되는 것이 아니라, 공유된 부로 나아가는 더 인간적인 사회의 역동적 과정으로 포착되었다.

그러나 여기에 연속성이 존재한다고 해도, 심지어 몇몇 사람들에게는 1960년대에 시작된 가톨릭 혁명으로부터 이어지는 연속성이 존재한다고 해도, 아르헨티나 출신 교황이 전임자들과 확실히 다르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는 없다. 엄격한 교황들인 폴란드 출신 요한 바오로 2세와 독일 출신 베네딕트 16세 역시 반자유주의적 담론에 인색하지 않았다 해도 이들은 교리 정착에 더 힘을 쏟았다. 게다가 베네딕트 16세는, 특히 이탈리아 기업들과 맺은 계약에서 부패와 특혜가 있었다고 교황을 비난하는 비밀문서가 유출되는 바티리크스(바티칸과 위키리크스의 합성어-역주) 사건 같이 바티칸 행정부가 처리하기 곤란했던 몇몇 사건들로 인해, 오명을 얻었다.

현재의 가톨릭 부흥에 대해 두 가지 유형의 원인들이 개진될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 유형의 원인들은 상황과 연관되고, 두 번째 유형의 원인들은 교황이란 인물과 불가분하게 연관 된다. “도덕적·정치적 측면에서 보면, 프란치스코 교황은 국제적 차원의 빈 공간을 채우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사회적 교리의 근대화를 실행하면서, 모든 것이 어우러져 체계를 이루는 그런 체계적인 사상을 도입하고, 반체제적 흐름을 배려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라고 릴 폴리테크니크 대학연합의 정치학 교수이며 교황청 외교 전문가인 프랑수아 마빌이 확인해 준다. 요한 바오로 2세가 공산주의 말기의 교황이었던 것처럼, 프란치스코 교황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의 교황이다. “사태가 긴급했었고 교회의 시간은 더 이상 세상의 시간이 아니었다. 그런데 베네딕토 16세에게는 모든 것이 너무 빨리 진행되었다. 반응이 아니라 예측을 할 필요가 있었다”라고 마빌이 덧붙인다.

그러므로 교황은 세상을 뒤흔들러 가기 전에, 자신의 집을 신속하게 변화시켰다. 자신이 이름을 따온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처럼 검소함을 사랑하는 교황은 스스로 그 모델이 되고 싶은 ‘정상적인’ 교황정치를 만들어냈다. 그는 교황의 직위를 드러내는 영예로운 상징적 의복들을 옷장에 집어넣었고, 호화로운 교황의 거처보다 70제곱미터의 방 두 칸짜리 거처를 더 좋아해 거기에 머물렀다. 교황은 상징을 좋아하고, 말을 하면서 자주 제스처를 곁들이는데, 이런 행동은 이미지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처럼 교황을 전 세계인의 사제로 만들어주는 순박함을 무기 삼아, 교황은 직접적으로 그리고 자발적으로 등장해서, 얼마간의 외교적 결례를 감수하며 직설적으로 말한다. 그런 후에 대변인과 교황대사들이 바로잡기 위해 개입한다. 교황청을, 다시 말해 교황청 체제를 근본적으로 개혁하라고 동료들에 의해 지명된 교황은 과감하게 15가지 악을 리스트로 작성했는데, 이것이 사제 서임 제도에 충격을 주고 있다. 이 리스트 목록에는 ‘정신적 알츠하이머’도 포함되어 있고, 첫 번째 자리에는 ‘스스로를 꼭 필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들어 있다.(9)

프란치스코 교황은 통치를 제대로 하기 위해 현장을 중시하는 8명의 고위 성직자단에 의해 보좌를 받고 있다. 그리고 그는 재정 문제와 커뮤니케이션 문제를 원활히 해결하기 위해 여러 개의 위원회를 발족시켰다. 또한 자신의 행정부에 조언을 할 세속 전문가들을 임명했고, 소아성애도착증 사제들을 감싸주었던 주교들을 심판하기 위해 바티칸에 법정을 설치했고, 미래에 자신의 후임자를 선출할 15명 가량의 새로운 추기경을 단번에 임명했다. 다음 번 교황은, 베네딕트 16세가 자기 자신을 위해 다음 교황의 선출을 바랐던 것처럼, 현 교황이 살아있을 때 선택될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볼리비아의 에보 모랄레스와 에콰도르의 라파엘 코레아를 만나러가기 전에 이미, ‘평생을 지도자로 사는 사람들’에 대해 반대한다는 말을 여러 번 했었다.

 

‘해방신학의 거대한 유산’을 잇는 교황의 사상

 

교황은 새 추기경들을 뽑을 때 불법 이민자들의 섬인 람페두사가 속해 있는 교구인 아그리제토 같이 사회적 상처가 생생히 살아 있는 곳에서 곤란한 일을 떠맡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선택한다. 교황은 새 추기경들을 아시아, 오세아니아의 오지,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에서 찾을 것이다. 콘클라베(교황선거 회의)에서 유럽의 중요성을 그리고 유럽 내부에서 이탈리아의 중요성을 끌어 올리면서 대주교구 주임 사제들을 기계적으로 로마의 고위 계층으로 밀어 올리던 대주교구 제도에 종말을 선언한 것이다.(10)

“현 교황은 그리 조심하지도 않으면서 금기사항을 때려 부수고 혼란을 일으킨다. 교황은 자신이 국가수반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교황의 직무가 교황을 바로 잡아주는 것이다. 교황은 실용적이고 매우 정치적이다”라고 교황의 행동을 관찰하는 한 프랑스 외교관이 지적한다. 이 모든 것이 가톨릭교회에 영향을 미친다. 왜냐하면 ‘약간의 꾀바른’(교황 스스로 자신을 이렇게 정의함) 예수회 사제가 현명한 언행을 사용해 제도가 교황을 따라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상기시켰던 것처럼, 프란치스코가 바로 교회이기 때문이다.

또 한편 교황대사 관저의 한 교황 자문관은 “사람들이 교황을 보러 몰려든다”고 말하며 즐거워한다. 2년 동안 200명 이상의 국가수반이 바티칸의 영접을 받았다. 몇몇 국가수반은 교황의 중재를 요청한다. 미국과 쿠바는 교황의 중재를 통해 가까워졌다. 영해 접근권 문제로 갈등을 겪고 있는 볼리비아와 칠레뿐 아니라 콜롬비아 무장혁명군(FARC)의 유격대까지 중재를 요청했다. FARC는 교황이 쿠바를 방문할 때 그에게 중재를 요청한 것이다. 교황에게 요청하는 사례가 이렇게 엄청 나게 많아지자, 교황은 교황중재국을 로마에 다시 개설한다. 물론 중재가 꼭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2014년 6월 바티칸 정원에서 팔레스타인 수상 마흐무드 압바스와 이스라엘 대통령 시몬 페레스를 함께 기도하게 한 사건은 미디어의 관심을 엄청나게 끌었지만, 한 달 후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 대해 살상 공격을 하는 걸 막지 못했다.

본명이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글리오인 아르헨티나 태생의 프란치스코 교황은 “물질적 자산이든 상징적·종교적 자신이든 간에 남남(南南) 교류를 진정으로 이해한 최초의 교황이다”라고 국립과학연구센터의 ‘사회·종교·세속 그룹’ 멤버인 세바스티앙 파트가 평가한다. “교황은 아프리카 선교사들이 브라질 교회와 연관이 있고, 인디언 예수회 사제들이 아프리카 선교 미션을 위해 떠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는 영어를 말하지 않는 완벽한 라틴아메리카 사람이다”라고 카리타스의 루아 씨가 보충 설명한다. 피에몬테 이민자의 손자인 “교황은 미래가 없는 유럽을 떠나야했던 한 명의 유럽인 교황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이다”라고 프랑스 외교관이 다시 말한다. “솔직히 말해 교황은 세상에 대한 지리학적 시각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라고 루아 씨가 명확히 말한다. 게다가 그는 세상을 잘 모른다. 프란치스코는 교황이 되기 전에 여행을 한 적이 거의 없다. “교황은 우선적으로 개인의 승진에 그 기반을 두고 있는 물질주의적 시스템을 겨냥한다. 이 시스템은 전통적인 연대감을 파괴하고 가장 연약한 사람들을 빈곤에 빠뜨린다.” 교황 자문관이 볼 때 “교황은 경보 발령자다!”

그러나 예전의 부에노스아이레스 교외의 소년이었던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글리오는 공간에 대한 자신만의 지리학을 머리에 담고 있다. 그 지리학은 공간적이든(가난한 나라들, 교외들, 달동네들) 혹은 존재론적이든(불안정한 주민들, 소외된 주민들) 간에, 북반구와 대립되는 남반구의 지리학이 아니라, ‘주변부들’에 대한 지리학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북반구에도 수많은 주변부가 존재하고, 세계화된 회로에도 식민지적 모습들이 많이 존재한다. 교황은 바로 이곳들에서 자신의 교회가 우선적으로 일하길 바란다.

베르고글리오는 자신의 진영을 선택했다. 자신의 담화와 볼리비아의 산타크루즈에서 말한 것처럼, 교황은 ‘빈자들’과 ‘약자들’에게 친히 다가간다. 넝마주의, 쓰레기 줍는 사람, 행상인, 짐꾼, 소외된 노동자, 위협받는 농민, 억압받는 원주민, 박해받는 이민자, 대형 동업조합의 자동화 설비에 힘겹게 저항하는 어부 등이 바로 빈자들과 약자들이다. 사람들은 그가 아주 강력한 선교사적 애정을 지닌 사제라고 말한다. 외교관이 아닌 것이다. 그것이 문제가 되는가? 외교 분야에는 경험 많은 바티칸의 국무장관인 피에트로 파롤린이 지휘하는 수많은 외교관이 있다. 파롤린은 예전에 베네수엘라, 북한, 베트남 혹은 이스라엘에서 미묘한 임무를 수행했던 사람이다.

“교황은 미래가 현장에 있는 사람들에게 달려 있다고 확신한다”라고 루아 씨가 말한다. 교황은 조직들을 불신하는데 당연히 여기에는 자신의 조직도 포함된다. 교황이 생각할 때 조직들은 표류하게 되어 있어서 현실과 동떨어진 담론만 생산해낸다. 이런 생각 때문에 프란치스코는 밑에서 위로 올라가는 접근방식을 선호하는 지도자다. 반면에 그의 전임자들은 초월성에 의해 위에서 밑바닥으로 내려가는 수직 하향적 접근방식을 택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자신이 교황으로 선출된 날 역할을 뒤집어서, 성베드로 광장에서 신도들에게 본인이 신도들을 축복하지 않고 “나를 축복해 주세요”라고 말했다.

대중에 대한 애착으로 그는 대중 선동적 악센트를 터득하고(그는 페론주의 청년그룹과 가까이 지냈다)(11), 해방신학의 비(非)마르크스주의적 아르헨티나 지파인 민중신학에 개념적으로 입문했다.(12) 민중신학은 무엇인가? “민중에 의한 신학이 아니라 민중을 위한 신학이다. 교황이 해방신학을 대중적이고 문화적으로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그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샤랑트네 사제가 요약한다. 목소리를 낮추어 말하고 있지만 결국 해방신학을 복권한 것이다. 1970년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재정립된 교의를 라틴아메리카에 적용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해방신학은 마르크스주의식 접근 방식 때문에 요한 바오로 2세와 베네딕트 16세에게 박대받았다. 2013년 9월 프란치스코는 로마에서의 비공식 면담에서 저명한 해방신학 창시자 중 한 명인 페루의 구스타보 구티에레즈 신부를 맞이했다. 2015년 5월에는 1980년대 미사 중에 극우파 투사들에 의해 살해된 오스카 로메로 산살바도르 대주교를 시복했다. 전임 교황들은 그런 절차에 전혀 성의를 보이지 않았다. 브라질 해방신학의 우두머리 중의 한 명인 레오나르도 보프에 따르면, 프란치스코 교황의 관점은 ‘해방신학의 거대한 유산 속’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의 통치는 어쩌면 ‘제3세계 가톨릭의 부흥’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13)

 

교황을 배척하거나 비판하는 여러 흐름들

 

그러나 베르고글리오는 서슴지 않고 불협화음을 낸다. 그 자신이 가톨릭교회의 진정한 대표이고, 경영자적 교황이고, 교구를 넘는 지역 층위에서 구체적으로 책임감을 행사한 최초의 인물이라는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2005년부터 2011년까지 아르헨티나 주교회의 의장이었다.(14) 그래서 “그를 따르는 바티칸의 무리들은 아주 잘 조직화되어 있으며, 그의 인격, 그의 개인적 열정이 교황청의 외교를 재활성화시켰다”라고 한 로마인이 확인해 준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회를 이끌어가면서 공격 방향을 다국적기업으로 결정했다. 능숙하게 그는 목표에 따라 자유자재로 공격한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는 ‘가톨릭 국제주의’라는(15) 잘 알려진 노랫가락을 자신의 프로젝트 안에 집어넣는다. 가톨릭 국제주의는 국가들 사이의 관계를 중재하는 데 참여하고, 민주주의를 증진시키고, 국제 대화기구의 구성을 강조하고, 민중·군비축소·국제공동자산을 위한 법정 설치를 강조한다. 이 모든 주제들을 중시함으로써 가톨릭교회는 자주 순수한 비정부기구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내부적으로 아르헨티나 출신 예수회 수도사는 교황으로 선출되기 전, 자신을 선출하려는 추기경 동료들에게 당연히 세상의 복음화가 가장 중요하다고 상기시킨다. 또한 곧바로 ‘주변부’로 달려가기 위해 교회를 교회 자체로부터 그리고 ‘신학적 나르시시즘’으로부터 구출해야 한다는 점을 상기시킨다.(16)

상당수 추기경들은 누구에게 열쇠를 맡겼는지 헤아리지 못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 복음화라는 목적을 위해 프란치스코 교황은 요한 바오로 2세와는 달리 자신의 십자가를 흔들지 않기 때문이다. 바오로 2세는 첫 번째 강론에서부터 공격적으로 나서면서, “무서워하지 마세요! 모든 커다란 문을 그리스도에게 여십시오. 국가 간의 국경선들, 정치·경제 시스템을 개방하세요”라고 말했다.(17) 아르헨티나 출신 교황은 전임자들과 다른 정치적 감각을 가지고 있다. 그는 교회가 대중운동단체와 함께 일하는 것을 꺼려하지 않는다. 비록 그 단체들이 교황의 믿음을 전혀 공유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교황은 교회가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 해도, 바오로 6세가 묘사했던 것처럼 더 이상 세계의 중심이 아니라 기껏해야 ‘인간성 전문가’일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교황이 가진 이런 새로운 성향으로 인해 교황은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2013년 프랑스와 미국이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과 전쟁을 벌이려 했을 때, 프란치스코는 시리아에서의 평화를 호소하면서 중동에서 바티칸 외교를 재가동시켰다. 하지만 긴급 상황이 발생함으로써 교황청은 어쩔 수 없이 견해를 수정해야 했다. 1년 후 교황은 유엔에게 무장단체 IS(이슬람국가)의 폭력을 막기 위해 ‘모든 조치’를 취해달라고 요청했다. IS가 대량학살을 자행하면서 기독교인들을 집단으로 내쫓고 있기 때문이었다. 근본주의가 종교 간 대화를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발전의 광맥으로 여겨지는 지역인 아시아에서도 바티칸 외교가 진척되지 않고 있다. 베트남과의 관계는 개선되고 있는 반면, ‘중국가톨릭 애국연합’의 통제를 받고 있는 중국의 모든 가톨릭 분파는 여전히 로마의 대주교 손에서 벗어나 있다. 프란치스코는 특히 달라이라마와의 만남을 회피하면서 시진핑 주석의 환심을 사려고 애쓰고 있으며, 7월에는 3년 전부터 미뤄진 허난성 안양의 대주교 서품식을 인정해 주었다. 그러나 현실은 포교의 꿈과는 거리가 멀다. 올해 초부터 중국 당국이, 특히 저장성에서, 너무 눈에 띠는 10여개의 교회 십자가를 파괴해 버렸다. 마지막으로 인도에서는 인구의 2.3%에 해당하는 극소수의 가톨릭 신자들이 주기적으로 폭력을 당하거나 재산 피해를 보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입장에서 볼 때, 기독교화되지 않은 머나먼 땅에만 장애물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9월 24일 의회에서 교황이 발표를 하게 될 미국에서도 교황의 인기도가 곤두박질했다. 2월에는 호감도가 76%였는데, 산타크루즈의 담화와 회칙이 발표된 후인 7월에는 59%로 추락했고, 특히 공화당원 내에서는 45%로 추락했다.(18) 내용뿐 아니라 교황의 말투도 먹히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의 라틴아메리카식 성향을, 자본주의가 빈국들에게 가져다줄 수 있는 것에 대해 거의 고려하지 않는 태도를 혹은 아무런 해결책이 담겨 있지 않은 그의 강론들을 비난한다.(19) 좌파측 사람들은 교황이 더 싫은 일을 남에게 떠넘기기 위해 매력 공세를 펼치고 있다고 의심한다. 교황이 여전히 피임에 반대하고 있고, 에이즈 퇴치 투쟁에서도 콘돔 사용과 관련해 교회의 반대 의견을 바꾸지 않고 있다는 점을 사람들은 지적한다. 그는 또한 소비자운동만큼 해결하기 어려운 급증하는 인구 문제를 외면하고 있다. 반대로 그는 “인구 증가는 통합적이고 연대적인 발전과 완벽히 양립된다”라고 확신한다. 보수주의자들은 냉정하게 교황의 신학적이고 도덕적인 권한만을 인정한다. “나는 주교들, 추기경, 교황에게서 영향을 받아 나의 경제적‧정치적 방향을 선택하지 않는다”라고 20년 전에 가톨릭으로 개종한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 젭 부시는 선언했다. “교황에게서 해결책을 기대하지 마세요” 또는 “교회가 정치를 대체할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라고 말하면서 교황은 이런 반발에 대해 기분 나빠하지 않는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교황은 사회 문제들과 관련해 사람들의 기대를 받고 있다. 이 문제들에 대해 바티칸은 2년 전부터 은밀하게 작업을 하고 있다. 2014년 교황은 교구회의에 모인 주교들에게 가족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라고 요청하며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렸다. 이 작업은 올 10월에 끝날 것이다. 교황은 교회내부의 아주 민감한 문제인 영성체를 받지 못하는 재혼한 이혼자들의 문제 혹은 자신이 “내가 게이를 무슨 자격으로 판단할 수 있는가?”라는 말로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 동성애 문제에 대해 진전이 있어야 한다고 여러 번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 봄에 교황청에 의해 성적취향을 비난받고 있는 교황청 주재 프랑스 대사의 임명 절차 동결을 막지 못했다.

내부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반격할 기회를 노리고 있다. 교황은 로마 중심주의와 결별하고 싶고, 합의제를 발전시키고 싶고, 주교회의에 나름의 교의 권한을 부여하고 싶고, 각 지역문화에 맞춰 가톨릭의 복음 메시지 전파 방식을 더 탄력적으로 운용하고 싶다. 이런 것들로 교황은 자기 교회의 통합을 흔들고 있다. 그러나 그는 벌써 78세다. 그리고 현 교황에게 생소했던 세상인 교황청이 완강히 저항하고 있다. “교황이 헤쳐 나가지 못하고 있다. 쟁기가 척박한 땅을 갈지 못하고 멎어버렸다”라고 샤량트네 사제가 지적한다. 가족에 대해 교황은 ‘하나의 기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나머지 문제에서 혼란을 일으키는 교황이 성공할 것이라고 지금 당장에는 장담할 수 없다.

 

글·장미셸 뒤메Jean-Michel Dumay

1994년부터 <르몽드>기자로 활동중이며, 주요 저서로 <Le Procès de Maurice Papon>(모리스 파퐁 재판>, <L'école agressée, réponses à la violence>(공격당하는 학교, 폭력에 대한 응답) 등이 있다.

 

 

번역·고광식

 

 

(1) 교황은 여기서 가톨릭 교부들 중의 한 사람이며 사회 기독교주의 금욕주의의 선구자인 바실리우스 드 세자르(Basile de Césarée)의 표현을 인용하고 있다.

(2) 빌 맥기븐(Bil Mckibben), ‘교황과 지구’, <뉴욕 리뷰 오브 북스>, 2015년 8월 13일.

(3) 프란체스코 교황, <찬미 받으소서>, 공동출판사의 교황회칙. 프랑스에서는 바이아르, 아르테즈, 살바토르 등의 여러 출판사에서 3에서 4.5유로에 구입 가능하고, 인터넷에서는 무료다(www.vatican,va).

(4) 나오미 클렝은 교황의 회칙을 지지한다. 2015년 7월 2일, www.lacroix.com; 니콜라 윌로: ‘프란체스코 교황은 환경문제를 신성시하고 있다,’ <옵세르바퇴르>, 파리, 2015년 6월 25일; 에드가 모랭: “<찬미 받으소서>라는 교황의 회칙은 아마 새로운 문명을 위한 호소의 첫 번째 행위일 것이다”, <라크루아>, 파리, 2015년 6월 22일.

(5) <교황은 경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라크루아>, 2015년 7월 24일.

(6) <바오로 6세, 프란체스코 교황의 정신적 지주>, 에디시옹 살바토르, 2015년 9월 24일 출간 예정.

(7) 교황청이 관계를 맺고 있는 국가들의 숫자가 1963년 49개국에서 1978년 84개국으로 늘었다. 현재는 180개국에 이른다. 아프가니스탄, 사우디아라비아, 중국, 북한, 베트남이 교황청과 관계를 맺고 있지 않는 15개국 중에 포함된다.

(8) 필립 쉬노(Pilippe Chenaux), <바오로 6세>, 에디시옹 드 세르, 파리, 2015년.

(9) ‘프란체스코 교황이 말하는 교황청의 15가지 악’, <르몽드>, 2014년 12월 23일.

(10) 2013년 3월 프란체스코 교황을 선택한 114명의 추기경 중에서 55명이 유럽인이었고 그 중 23명이 이탈리아인이었다.

(11) 베르나데트 소바제, <프란체스코 교황의 눈에 비친 세상. 교황직의 역설>, 에디시옹 드 세르, 2014년.

(12) 후안 카를로스 스카노네(Juan Carlos Scannone), <민중의 교황. 아르헨티나 사람이며 예수회 출신 신학자 동료가 말하는 베르고글리오>, 베르나데트 소바제와의 대담, 에디시옹 드 세르, 2015년.

(13) ‘베네딕트 16세가 살아 있는 동안에, 프란체스코 교황이 나를 로마에서 접견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엘파이스>, 마드리드, 2013년 7월 23일.

(14) 그는 예전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Jorge Rafael Videla,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전직 아르헨티나 대통령) 장군 통치시절에, 자국 예수회의 젊은 교구장이었다. 근거가 확실한 논쟁은 아니지만 이로 인해 단호함이 부족하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15) ‘가톨릭 국제주의,’ <외교 대문서>, 4호, 파리, 2011년 8-9월.

(16) 2013년 3월 13일 현 교황을 선출했던 콘클라베가 열리기 직전에 개최된 전체 회의에서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글리오가 발언한 내용이다. 비밀에 부쳐졌던 이 텍스트는 몇 달 후 교황의 승인을 얻어 하바나의 대주교인 젬므 오르테가(Jaime Ortega) 추기경에 의해 발표되었다.

(17) 피터 해브리스웨이트(Peter Habblethwaite), ‘부활된 기독교세계에 대한 폴란드인의 꿈’, <르몽드디플로마티크>, 1998년 5월.

(18) 갤럽 여론 조사, 2015년 7월 22일.

(19) ‘교황이 세계 자본주의의 과도함을 맹렬하게 다시 비난하다,’ <인터내셔널 뉴욕 타임스>, 2015년 7월 13일.

(20) ‘젭 수시가 기후변화에 대한 교황의견에 반대하는 공화당의 반발 조류에 합류하다,’ <더 가디언>, 런던, 2015년 6월 17일.

 

<보충기사>

선교활동 전략의 변화

 

기독교는 심한 경쟁에 처해 있다. 인구 추정에 의하면 2050년경에는 현재 전 세계 인구의 31%를 차지하고 있는 기독교인들이 거의 30%를 차지하게 될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바싹 추격을 당할 것이다. 이슬람교도들의 수는 40년 동안에 아시아 시장에서는 두 배 이상 증가할 것이다.(1) 기독교인들 중에서 현재 12억 명으로 추산되는 가톨릭교도들은, 현재 4명 중 1명의 기독교인으로 평가되는 복음주의자들과 3명 중 2명의 프로테스탄트로 평가되는 교인들에 의해 자신들의 몫을 조금씩 갉아 먹힐 것이다.(2)

기독교 가족을 한데 모으기 위해 프란체스코 교황은 세계교회운동에 열정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그는 적절하게 정교회 신도들에게 자신을 단순히 ‘로마의 주교’로 소개했으며, 바티칸에 10여 명의 복음주의 목사, 펜티코스트파 목사를 초청한다. 그는 특히 자신의 교회 본당에서 전임자들이 추구한 목표들의 순위를 뒤집었다. 교회가 가장 활발히 활동하고, ‘시장의 가장 큰 몫’을 차지하는 라틴아메리카, 필리핀, 아프리카등의 지역 들을 더 높이 평가한다고 말한 것이다. 그는 더 이상 세속주의의 ‘어두운 밤’ 속에 갇힌 지역들에서 교회를 재활성화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유럽의 활력은 어디로 사라졌소?’, ‘유럽의 역사에 활기를 불어넣고 그 역사를 위대하게 만들었던 이상(理想)으로 나아가는 그 노력이 어디로 사라졌소?’라고 우리는 유럽 사람들에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교황이 2014년 가을 유럽위원회에서 말했다. 프란체스코 교황은 바람이 교회를 인도하는 곳으로 교회를 이끌고 간다.

아시아에서 교황은 필리핀(가톨릭 신자가 81%)뿐 아니라, 복음주의 교회들의 성장(18%의 프로테스탄트 신도, 11%의 가톨릭 신도)에 힘입어 기독교가 정착된 한국도 방문했다. 11월에 교황은 처음으로 아프리카(우간다, 케냐, 중앙아프리카)를 방문할 예정인데, 이곳 역시 선교 활동의 경쟁이 치열하다.

“같은 고객 중에서 사람을 모으는 복음주의 교회들이 가톨릭교회에 비해 앞서 있다. 복음주의 교회들은 식민주의에 발을 담그지 않았고, 그들의 제식은 아프리카 식으로 진행되고, 평신도들과 여성들의 진급을 보장해 주고, 훨씬 더 유연한 성관계를 보장하고, 지역에서의 실제적 연대감을 표방한다”라고 복음주의 프로테스탄트 전문가인 세바스티앙 파트가 말한다. 이런 경쟁에 대처하기 위해 프란체스코 교황은 낮은 태도로 임한다. “이 교황은 높은 곳에서 사람들을 맞이하지 않는다. 교황은 존경심을 드러낸다. 그는 일상의 문제에서 해결책을 찾아주는 교황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런데 아프리카 사람들은 정확히 기독교신앙이 바로 여기에서 지금 자신들에게 도움이 되기 바란다. 그들은 사회·경제적 문제와 동떨어진 복음을 원치 않는다”라고 파트가 지적한다.

가톨릭교회가 사회적 고통에 다가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교황은 동맹군들을 만들고 있다. 활기 넘치는 교회들을 멀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복음주의적 실천들을 내재화하고, 그것들의 유효성을 인정하는 교황의 전략은, 상당수 목사들의 과대 망상적 그리고 광신적 일탈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실망한 사람들을 되찾아오는 걸 목표로 삼고 있다”라고 파트가 다시 말한다. 교황은 물려받은 가톨릭보다는 개별적으로 적응하고 변화하는 가톨릭을 더 높이 평가하고 있는 것 같다.

 

 

글·장미셸 뒤메Jean-Michel Dumay

 

번역·고광식

 

(1) 비(非)신앙인의 비율은 21세기 중반까지 현재 16%에서 13%로 하락할 것이다. <세계 종교의 미래: 인구증가 예측, 2010-2050년>,

피우 리서치센터(Pew Research Center), 워싱턴 D.C., 2015년 4월 2일.

(2) CNRS 통계, 2014년 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