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내전에 접어든 리비아
2015-08-31 파트릭 하임자데흐
적대적 파벌들 간의 빈번한 폭력 속에 현 정권의 실력자인 칼리파 하프타르 장군이 이슬람세력을 억압하자, 리비아의 분열이 가속화되고 있다. 유엔의 권고 아래 평화협상이 계속 진행되고는 있지만, 그 결과가 불확실할 경우, 이슬람국가조직(IS)의 부상도 배제할 수 없어, 외국 군대의 개입이 현실화되는 시나리오도 나올 수 있다.
2011년 9월 15일 프랑스의 니콜라 사르코지 전 대통령과 데이비드 케머룬 영국 총리가 리비아를 깜짝 방문한 것을 누가 아직 기억하고 있겠는가? 벵가지시에 구름처럼 모여든 군중들 앞에서 프랑스 대통령은 “다시 한 번 새로운 용기를, 용서와 화해를 보여 달라”고 호소했다.(1) 프랑스 언론은 사르코지의 연설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 무하마르 카다피 친위대를 상대로 한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음을 표현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4년이 조금 지난 후, 상황은 환멸과 우려로 바뀐다. 불안정한 정치가 계속되고, 적대적인 파벌들 간 무력 충돌로 리비아는 폭발 일보 직전이다. 공공안전은 악화되기만 한다. 그래서 프랑스는 2014년 7월 특공대의 보호 아래 야밤을 이용해 대사관을 철수시켜야만 했다. 그 이후, 장이브 르드리안 프랑스 국방장관과 로베르타 피노티 이탈리아 국방장관은 IS에 충성을 서약한 집단들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다시 군사 개입을 할 수 있다고 주기적으로 발표하기에 이른다. 기자들은 비록 현장에 자주 들르지 못하지만 이 상황을 “혼란스럽다”고 표현하고 있다. 체제 반대 세력을 지칭하는 용어도 2011년에는 “독재에 대항하는 민주세력”, “민간사회의 민병대” 혹은 “자유주의의 이슬람” 등으로 오락가락하기만 한다. 이런 의미론적 혼란은 사건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거나 혹은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무능력을 나타낼 뿐이다. 동시에 현장에 개입하고 있는 활동 주체들의 정체성과 그들이 추구하는 전략의 논리적 합리성과 활동 방식을 고려한 논리적 분석이 부재하다는 것을 증명할 따름이다.
리비아의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서는 역사가들이 소위 공식적으로 표현한 “혁명”의 과정, 즉 카다피가 축출된 과정을 되돌아봐야 한다. 2011년 2월 벵가지를 포함한 몇몇 도시에서 혁명운동이 일어나고, 이어서 대중폭동이 발생하고, 곧바로 대중이 무장을 하게 되어 나라는 내전으로 접어들었다. 8개월 동안 동족상잔의 갈등이 지속되었으며, 이어서 외국 연합세력이 개입해 체제가 전복되기에 이르렀다. 당시 반란군들의 유일하고도 공통적인 정치적 목표였던 체제 전복은 좋게 말하면 “혁명적 대의”에서 나온 것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의 국가를 불안정한 상태에서 빠져나오게 할 수 있는 어떤 안정적인 사회정치적 질서도 없었다. 지역적으로 나눠져 타 집단에 대해 배타적인 집단들만이 존재했을 뿐이고, 여기에 다시 인종‧종족 별로 나뉘고 “근원적 정체성을 표방한” 집단들이 덧붙어 리비아는 각 세력의 각축장으로 변모하고 말았다.
지역주의와 지지세력 우대정책에 근거한 카다피 체제는 반제국주의적이고 국수주의적인 수사학을 사용하며 국가의 정체성을 세웠지만, 이 정체성은 내란 중에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체제가 전복되자 중앙과 지방 간의 뿌리 깊은 대립이 표면화됐고, 추가로 예전의 지역 경쟁세력들이 갈등상황을 틈타 속속 등장했다. 온갖 종류의 무기로 무장한 세력들은 과거의 관계를 청산하다는 명분으로 폭력을 자행해 상황을 악화시켰다. 카다피 체제에서 국가의 기간 세력으로 형성된 리비아 정규군은 이런 상황 속에서 소멸해 버렸다. 여기에 도시와 지역 간 대립으로 인해, 리비아 국내 차원에서 합법적인 ‘폭력’을 정당화할 수 있는 어떤 공식적인 주체도 나타나지 못했다. 이 세력들의 정치적 영향력은 오로지 집단의 크기와, 200명에서 500명 정도에 이르는 전투부대 단위인 ‘카티바’의 무장 수준에 따라 측정될 뿐이다.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는 리비아 내 파벌들
카다피가 죽은 지 불과 몇 주 후인 2011년 10월 20일, 수많은 소규모 전투가 전국에서 발발했다. 8만 명 정도의 ‘혁명 의용군’ 혹은 ‘혁명 후 의용군’들이 지역 패권과 국경을 장악하는 일을 두고 다투었다. 계속된 후임 정부들은 경찰권과 군대가 부재한 자리에 헌병연대에 의존해 얼버무리는 식으로 일시적으로 대처하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이 없었다. 그들은 지역 이권과 무관하고, 전투력이 뛰어난 연대를 현장에 파견해 폭력이 확산되는 것을 제한하려 했지만 성과는 미흡했다.
빈번하게 발발하는 이런 무장 지역의 갈등과는 별개로 2012년 7월 6일 결성된 트리폴리의 제헌의회에서는 또 다른 투쟁이 전개되었다. 점차 급진화되는 경향을 보이는 두 과격파들 사이의 분쟁이었다. 하나는 자칭 “자유주의적” 혹은 “국민적”이라고 주장하는 분파로서 서방 언론으로부터는 “비종교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집단이다. 이 파벌은 주로 2005년부터 카다피의 둘째 아들인 사이프 알-이슬람이 촉발한 “개혁”운동에 우호적인 구체제 하의 간부들과 사업가들 그리고 폭동이 일어나자 탈영한 장교들로 구성되었다. 다른 한 파벌은 반대파와 서방으로부터 “이슬람”이라고 불리지만, 이슬람의 영향권에만 한정되어서 활동하지 않는다.
즉 이 파벌의 활동 영역은 이슬람 율법에 근거한 헌법채택을 주장하는 정치적 운동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구체제에서와 마찬가지로 이슬람주의자들은 잘 조직된 파벌을 구축했다. 이 파벌 때문에 뿌리가 깊은 수많은 반대파들이 결집하고 있다. 혁명에 정당성을 부여한 도시 미스라타와(2) 자이오에트즈와라 같은 트리폴리 해안 교역도시들의 대표자들도 동참하고 있다.
종교인과 비종교인의 대립 말고도 분열의 또 다른 요인이 존재한다. 망명자들이 주를 이루는 민족주의자들을 포함하여 구체제 하에서 공직에 있었던 엘리트들과, 국내외의 새로운 이슬람 반대파들의 대립이 그것이다. 이 두 세력은 각기 강한 의용군을 보유하고 있다. 민족주의 진영에선 진탄 지역 민병대가, ‘이슬람주의파’에선 미스라타 민병대가 막강한 편이다. 군대식 조직체계를 갖춘 각 분파는 공항, 시내의 주요 교차로 혹은 공공건물이나 큰 호텔 같은 트리폴리의 전략 지점을 점령하고 있다. 이들은 이 같은 점령을 통해 과도정부와 국회의 의사결정에 압력을 가하고 있다.
2014년은 허약한 중앙과, 지역 논리가 팽배한 지방이 대립하는 극단의 상황에서 시작되었다. 국가가 지역위원회, 예컨대 민병대에 소속된 군사위원회에 의해 관리되는 수많은 통치기구들로 세분화된 셈이다. 또한 인종적으로는 남부의 투아레그족, 제벨 네푸사 지역의 베르베르족, 동중부의 투부족 등과 같은 큰 부족들은 자기들의 이익을 쫓아 활동하고, 때로는 2011년 내전 당시 그랬던 것처럼 자기들끼리 내부적으로 분열하기도 한다. 이렇듯 심각한 내부 분열과 지역 세력의 이해관계에 따른 이합집산의 결과 트리폴리의 정치 구도는 미세한 지방색에 따라 세포 분열하고 있다.
2011년처럼 세대 간 논리의 차이에 따른 분열도 존재한다. 예컨대 제벨 네푸사의 베르베르족 일파인 아마지히족의 한 마을에서는 원로들이 트리폴리의 경쟁에 끼어들어 어느 한 편을 지지할 생각이 없다.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아랍 부족들의 보복이 두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젊은 세대는 ‘이슬람계열’을 지지하는 강력한 전국단위 민병대에 가입하려고 한다. 이를 막을 방법은 없다. 이 젊은이들의 민병대 참여는 단지 한 이슬람 정치단체에 참여한다는 의의에 따라 이뤄진 것이 아니다. 제벨의 아마지히족과 바로 이웃 마을에 진탄시의 강력한 아랍족 마을이 있다는 대립적 상황에서 기인한 것이다.
분열은 이것만이 아니다. 베두인 원주민도 내부적으로 분열의 조짐이 일고 있는데, 이 또한 기존의 분열 상황을 가중시키고 있다. 베두인족은 내부적으로 장사를 하는 주민들과 도시에 거주하는 주민들로 나누어진다.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씨족과 부족의 전통구조가 더 강한 반면, 이슬람의 정치적 뿌리는 상대적으로 약하다. 그래서 이들은 대다수가 자연스럽게 ‘자유주의 성향의’ 분파 쪽으로 기운다. 반면에 장사를 하는 베두인족은 하나의 국가를 표방하는 이슬람 정치가 상대적으로 더 강하게 각인되어 있어 ‘이슬람’ 진영의 편을 든다. 이런 경쟁 구도는 때로는 동일 주거지역 내에서도 서로가 대립하게 되는 빌미를 제공한다. 예컨대 벵가지의 한 동네에서는 주민의 40%가 트리폴리타니아의 상업도시(미스라타, 자위야, 트리폴리) 출신이다. 60%는 베두인 출신인 동시에 스스로가 주로 사아디엔이라고 불리는 키레나이카족 출신이라고 믿고 있다. 출신 혈통과 정착 지역에 따라 결정되는 이런 분열은 베두인 전통을 주장하는 주민들로 하여금 미스라타 출신 주민들과의 경쟁의식 때문에 ‘민족주의’ 진영을 따르게 한다. 미스라타 출신 주민들은 대다수가 ‘이슬람’ 진영을 지지한다. 이와 같은 분열은 언제든 조그만 뇌관만 터지면 폭력, 경우에 따라서는 심지어 ‘인종청소’ 같은 심각한 수준의 폭력으로 변질될 위험성을 다분히 안고 있다.
이슬람세력을 ‘청소’하려는 칼리파 하프타르의 등장
이런 상황에서 72세의 한 퇴역 장군이 뇌관 역할을 했다. 카다피 군대의 전 장군인 칼리파 하프타르라는 이는 1983년 탈영해서 미국에 정착했는데 반란이 발발한 이후인 2011년 3월 리비아로 돌아왔다. 그는 압델 파타 엘시시가 쿠데타로 이집트 정권을 장악한 것에 고무되어 2014년 5월, 존엄이라는 뜻의 “알-카라마”라고 명명한 작전을 감행했다. 목표는 ‘이슬람 청소’였다. 그날 벵가지의 한 여단 주둔지를 폭격했다. 하프타르 장군은 벵가지 특수전투부대와 2011년 탈영한 구체제 간부들, 그리고 사아디엔 대부족과 키레나이카 자치주의자들에 소속된 ‘카티바’들로 구성된 공군을 동원했다. 공세는 다양한 이슬람계 분파와 관련 있는 민병대를 목표로 벵가지에서 시작되었다. 첫 번째 결과가 즉각 나타났다. 심지어 그때까지 정치적으로 경쟁관계에 있던 몇몇 민병대들은 공동의 적에 맞서기 위해 신성한 동맹을 제창했다. 트리폴리타니아에서는 진탄의 민병대들이 “존엄”작전에 동참해서 6월 18일 의회를 습격해, 2년 전부터 진행되어 왔지만 이미 약해질 대로 약해진 정치 복원 과정에 종지부를 찍어버렸다. 반(反)하프타르 진영도 이 공격에 대항해 재빠르게 움직였다. 제헌의외의 다수를 차지하는 ‘이슬람’계를 중심으로 발 빠르게 조직화되었다. 주로 벵가지‧트리폴리‧자위아‧즈와라의 ‘혁명군’을 재조직해 “리비아의 여명”이라 명명한 연합군부대를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지방에서는 정치적‧경제적 주체들이 자치공동체와 더불어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새로운 입장을 취했다. 진탄과 뿌리 깊은 반감이 있는 마카키아 부족은 ‘리비아의 여명’의 편을 들었다. 2011년 오랫동안 카다피의 보루 역할을 했던 트리폴리타니아의 (와카파나, 나윌, 시안 같은) 다른 부족들은 2011년의 반군과 충성파를 갈랐던 것과 같은 지역적인 이유로 하프타르 장군 진영에 합류했다. 남쪽 지역에서 투부족 일부는 하프타르 장군 편이고 몇몇 투아레그족 집단은 그 반발로 반대 진영에 섰다. 어느 한 편을 들기를 거부하는 시르테와 바니 왈리드 같은 예전 카다피의 보루였던 도시들을 제외하면, 분열을 의미하는 ‘피트나’는 이제 전국적인 현상이 되어버렸다. 이는 2011년 당시 많은 이들이 걱정했던 부분이다. 하프타르 장군이 질서를 회복하겠다는 처음의 공언과는 달리 국가를 또다시 ‘제2차 내전’으로 몰고 간 셈이었다. 2011년처럼 각자가 상대편에 대한 완벽한 승리를 목표로 할 뿐이었다.
하프타르 장군이 공격을 개시한 한 달 후인 2014년 6월 25일, 선거로 적법한 통치권한을 지닌 기구를 만들 가능성을 믿은 국제사회의 압력으로 입법선거가 실시되었다. 투표 참여율은 18%에 불과했다. 실제로는 그보다 더 낮았을 것이다. 애초에 벵가지에 설립될 예정이었던 새 의회는 하프타르의 영지나 마찬가지인 토부룩에 설치되었다. 정원 200명 안에서 선출된 198명의 의원 중 122명의 의원만이 8월 4일 열린 첫 회기에 참석했다. 장군과 반대 진영 출신 의원들은 의회 참여를 거부했다. 의회는 임시정부를 임명했으며 청사는 바이다에 자리했다. 바이다는 장군의 또 다른 보루지역이다. 마찬가지로, 2014년 8월 23일부터 ‘리비아의 여명’의 통제 하로 들어간 트리폴리에서는 전 제헌의회 의원들이 ‘국가의 구원’이라는 자신들의 정부를 임명하고 토부룩에 입성해 하프타르에게 가담한 의회는 정당성이 없다고 비난했다.
두 진영 모두 자신들만이 정당성이 있다고 주장하는 상황인 만큼 6월 선거는 위기를 악화시키기만 했다. 2011년처럼 서방 국가들과 하프타르를 지지한 아랍연맹은 재빠르게 진영을 선택했다. 5월 하프타르가 개시한 (벵가지에서 이슬람을 쓸어내겠다는) 이슬람 ‘청소’ 작전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오직 리비아주재 미국 대사만이 “민간인을 다치게 하지 말라”고 호소했을 뿐이었다. 게다가 앞서 언급한 나라들 전체가 8월 4일 부터는 토부룩의 의회만이 리비아 국민을 ‘정당하게 대표할 수 있는’ 의회라고 인정했다. 이런 편들기 때문에, 긴장이 고조되고 양 진영의 극단주의자들이 자극될 위험성이 농후해진다.
‘제2차 내전’이 시작된 지 10개월 후, 상황은 전혀 낙관적이지 않다. 전투 결과도 전국적 차원에서는 불분명하다. 벵가지 의료당국의 발표에 따르면, 2014년 8월 이후로 5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한다. 총 8만 명의 주민이 사는 도시에서, 필경 사망이 확실한 실종자 수까지 고려한다면 상당한 수치이다. 사망자 수치가 높은 것은 중화기를 동원한 민병대들 간 전투가 격렬하다는 것 이외에도, 폭력이 주민들이 거주하는 주택가 근처에서 발생하고 있다는 걸 입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유엔의 추정치에 따르면, 리비아 내에서 이동하는 피난민의 수는 약 40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IS는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고 있다. 2014년 가을 수많은 리비아 전사들이 하프타르와 싸우기 위해 시리아로부터 잠입해 데르나에 확실한 거점을 마련했다. 데르나의 지역 이슬람민병대가 벵가지로 싸우러 간 틈을 타 정착한 것이다. 예전 카다피의 보루였던 시르테 지역에서도 성공적으로 거점을 마련했다. 2011년 이후 시르테를 점령하고 있던 마스라타의 종족들이 떠난 이후에 시르테는 거의 비어있다시피 했다. IS은 아직까지는 리비아에서 매우 제한적인 사회적 기반만 구축하고 있지만, 이 상황을 이용해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 어느 쪽도 쉽사리 신속하고 완전한 승리를 거두기가 어려운 만큼, 갈등이 계속된다면 사회 기저층이 파괴될 것이며 결과적으로 리비아 국가의 미래는 위협받을 것이다. 비록 아무도 영토 분할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지만, 리비아가 어떻게 더불어 사는 계획을 재구축할지 의문이다. 혹자는 외국 군대의 재개입을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내전을 더 악화시킬 뿐이다. 다른 방도는 유엔이 파견한 리비아 특수지원단 대표인 베르나르디오 레온의 활동에 기대를 걸어 보는 것이다. 그는 유엔안보리가 부여한 위임의 범주 내에서 인내를 가지고 지역 주체들과 몇몇 민병대의 대표자들까지 포함한 모든 당사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리비아의 국내뿐 아니라 국외에서도 군사적 해결책을 시도하려는 주체들이 많아지고 있는 이 시점에, 이러한 외교적인 길은 정치적 해결책을 추구하는 데 힘을 보탤 것이다.
글·파트릭 하임자데흐 Patrick Haimzadeh
아랍과 리비아 전문가. 오래 동안 리비아에서 외교관 생활을 했다. 국제적 위기 때에는 분석가와 협상가로서 이집트‧이라크‧예멘‧오만 등지에서 프랑스와 유엔의 특사로 활동했다. 현재 파리에 거주하고 있다.
번역·이진홍
파리7대학 불어불문학 박사.
(1) 〈르몽드〉,2011년 9월 17일.
(2) 2011년 10월, 미스라타에는 총 30만 명의 주민 중 3만 6천명의 투사들이
있다. (2012년 6월 미스라타에서 가진, 2011년 전쟁 당시 이 도시 반란군의 사령관이었던 살렘 요하(Salem Joha)와 대담)
<박스기사1>
협상과 개입 놓고 엇갈리는 주변국들
“어떤 나라에게 군사적으로 리비아에 개입하라고 부추기는 것은 고려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의도는 리비아 형제들이 갈등을 끝내고 화합의 길에 들어서도록 돕는 것입니다. 그 반대로 하는 것은 무질서를 가중시키고 이 나라의 미래를 어둡게 하는 것일 뿐입니다.” 요지는 분명하고 오해의 소지도 전혀 없다. 익명을 요구한 알제리의 이 고위외교관은 알제리가 리비아 분열의 두 당사자인 트리폴리와 토부룩이 유엔의 후원 아래 이루어진 협상을 계속하라고 이끌고 있다고 판단한다. 알제리는 유엔이 리비아에 파견한 특별 대표인 베르나르디노 레온을 ‘상황을 만들 인물’로 간주하고 있다. 알제리 정부는 2011년 카다피 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한 북대서양조약기구의 리비아 공습도 반대했었다. 그래서 오랫동안 (카다피 체제를 전복하려는) 혁명파로부터 원성을 들었다. 그러나 오늘날 리비아의 양 진영 모두로부터 평화적 해결책을 추진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파트너로 간주되고 있다.
모로코 역시 만찬가지다. 알제리의 이웃이자 라이벌인 모로코는 3월 초 스키라트 해안에서 서방국가들이 인정한 정부 대표자와 ‘리비아의 여명’의 이슬람민병대에 가까운 제헌의회 대표자들 간의 간접대화를 주선했다. 제네바 대학의 교수이자 정치학자인 하스니 아비디는 “북대서양조약기구가 리비아에 또다시 개입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알제(알제리의 수고-역주)와 라바트(모로코의 수도-역주)는 같은 시각을 보이고 있다. 지역의 안정을 위해서는 매우 중요하다.” 오늘날 (사하라 사막 남쪽 가장자리의) 사헬 지역의 몇몇 나라들도 이러한 입장을 지지한다. 현재 서방 군대가 또다시 개입하면 그 결과로 현재 리비아에 있는 지하디스트 행동주의자들이 대거 자기나라 영토로 유입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마하마두 이수푸 니제르 대통령은 지난 12월 반대 의견을 제시한 바 있다. “카다피 전복 이후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군사적 개입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다에시(Daech)(*)를 우리 문 앞에 두게 될 것입니다.”(1)
지역적으로 신중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가운데 이집트도 진영을 선택한다. 군사‧경제적으로 아랍 에미리트의 원조를 받고 있고 사우디아라비아로부터 조금 더 적은 수준의 지원을 받는 압델 파타 엘시시는 카타르가 ‘리비아의 여명’의 적들에게 무기를 공급해주고 있다고 비난하면서도 하프타르 장군을 지지한다. 이미 이슬람민병대에 대한 공습, 특히 지난 2월 16일 데르나 지역 공습에 참여한 바 있는 카이로는 협상이 실패할 경우, 혹은 리비아 내의 두 진영의 협상이 지체될 경우를 대비해 규모가 큰 공습을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은 개입을 부인하고 있는 가운데 프랑스와 유럽 파트너 국가들, 특히 이탈리아와 영국의 입장에 대해서는 의문부호가 따른다. 금년 초, 프랑스 국방장관이 리비아 남부 지역을 두고 “테러리스트의 허브”라고 발언하면서 아프리카 연합과 유엔 그리고 이웃 국가들에게 “까다로운 이 문제를 진지하게 인지해 줄” 것을 요구한 적이 있다. 그러나 파리는 현재 테러단체와의 전쟁을 더 잘 조직할 능력이 있고 전 국가적 통합을 이룬 정부가 출현할 수 있는 “평화적인 해결”를 바란다고 한다.(2)
이런 접근은 알제리가 군사적 개입을 반대하고 있는 상황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말리가 안정을 이루고 IS와의 전투가 끝나려면 아직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프랑스가 또다시 새로운 전선을 열 수 없는 군사적 상황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글·아크람 벨카이드Akram Belkaïd
프리랜서 기자. 주로 〈르코티디엔 도란(Le Quotidien d'Oran)〉, 〈아프리카 메거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와 작업을 하고 있다. 최근 저서로는〈오늘날 아랍인으로 살아간다는 것(Etre arabe aujourd'hui)〉(Ed Carnets Nord, 2011)이 있다.
번역·이진홍
(1)〈Jeune Afrique (젊은 아프리카)〉, 파리, 2014, 12월 29일.
(2) 2015년 3월 18일, 프랑스 외무성의 대변인의 공식 브리핑
(*) 시리아·이라크의 이슬람 무장단체가 ‘칼리프(이슬람 지도자) 국가’를 선포하며 스스로를 ‘이슬람국가’라고 불렀지만, 소위 이슬람국가에 대한 명칭은 다양하다. 미국과 영국은 공식적으로 ‘이라크·레반트 이슬람국가(ISIL)’라고 부른다. ‘국가’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레반트’는 키프로스·팔레스타인·요르단·레바논·시리아 일대를 가리키는 말이다. 반면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미국 언론은 주로 IS 이전에 이 조직을 이르던 ‘이라크·시리아 이슬람국가(ISIS)’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영국 언론은 IS와 ISIS를 혼용해서 사용한다. 프랑스 정부는 다에시(Daech)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이라크·레반트 이슬람국가’의 아랍어 표기의 머리글자를 소리나는 대로 읽은 것이다. 특히 ‘다에시’는 ‘짓밟다’라는 뜻의 아랍어 단어와 발음이 유사해 IS를 경멸하는 사람들이 많이 쓴다. 일간지 르몽드는 IS의 프랑스식 표현인 ‘EI(Etat Islamique)’를 많이 사용한다.
이수푸 대통령이 ‘다에시’라는 프랑스식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의미가 없지 않다. 이 글의 저자가 이슬람국가라고 하지는 않고 굳이 ‘이슬람국가조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도 역시 의미가 없지 않다.(역주)
<박스기사2>
리비아의 4년간의 분쟁
2011년 2월 16일 벵가지에서 첫 번째 시위 발생.
2월 27일 과도 국가위원회 창설.
3월 19일 북대서양조약기구의 폭격 시작.
8월 21일 트리폴리 함락.
10월 20일 무하마르 카다피 사망.
2012년 3월 6일 시레나이크 국가위원회
창설과 이 지역 자치 선포.
4월 20일 쿠프라 지역에서
민병대 간 충돌 발생.
7월 7일 제헌의회 선출.
9월 11일 벵가지 주재 미국영사관 습격, 크리스토퍼 스티븐스
리비아 주재 미국대사 사망.
2013년 2월 7일 투부족과 주와야족 족장들
사이의 평화 협상이 트리폴리에서 열림.
10월 10일 알리 제이단 총리가
민병대들에게 납치되어 인질로 붙잡힘.
10월 24일 부족과 지역 민병대에 의해서 시레나이크 일방적인 자치 선포.
11월 16일 트리폴리에서 민병대의 폭력을 규탄하는 대규모 시위 발생.
11월 18일 미스라타, 가리안, 자두,
날루트, 라자반 민병대와 젠탄과
나와시 지역의 알-카아가와
알-사와익 무장집단이 정부에
무기를 반납함.
2014년 1월 18일 세바 주에서 경쟁
민병대 사이의 충돌 발생.
의회가 이 지역 비상사태 선포.
2월 20일. 국민의회 의원 60명 선출.
5월 16일 이슬람 분파에 대한
칼리파 하프타르 장군의 공세 시작.
6월 25일 국회의원 조기 총선.
7월 28일 안사르 알-사리아 무장집단이 벵가지 통제.
8월 14일 유엔 사무총장 리비아
특별대표 베르나르디노 레온 임명.
2014년 9월 17일 토부룩에 트리폴리 정부에
대한 반대 정부가 결성됨.
10월 4일 이슬람국가 조직이
데르나 장악.
2015년 1월 14일 제네바에서 두 개의
리비아 의회가 협상 시작.
2월 15일 이집트 공군이 이슬람국가
조직 거점 폭격.
3월 5일 토부룩과 트리폴리 의회 사이의 협상이 모로코에서 재개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