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리즘에도 철학이 있나?
9 ·11 그 후 14년
2015-08-31 위르겐 하버마스
테러리즘과 반테러리즘이 우리의 지구적 공동체를 붉은 피로 물들이고 있다. 미국의 심장부인 뉴욕을 공격한 이슬람 과격분파의 9‧11 테러가 발생한 지 14년. 당시 부시 미 대통령이 테러와의 전쟁을 부르짖으며 ‘21세기판 십자군전쟁’을 이끌었지만, 과격파들의 테러 행위는 전혀 그치지 않고 있다. 알카에다를 이끈 오사마 빈 라덴 사후, 이슬람국가조직(IS)이 미국 등 서방국가들의 독선과 배제에 대한 근본 이슬람주의자들의 불만과 반발에 편승해 세력을 확대하고 있다. 테러리즘에도 철학이 있을까, 아니면 신념의 발로인가? 본지는 우리시대의 현인이라 불리는 위르겐 하버마스와 자크 데리다(2004년 작고)가 ‘9.11’ 사건 후에 철학자 지오바나 바라도리와 가진 인터뷰와 노암 촘스키의 강연 내용을 게재, 테러리즘의 철학적 담론을 짚어보고, IS 전사들의 ‘신념’을 분석해본다. <편집자주>
바라도리 - 당신에게 테러리즘이란 정확히 무엇입니까? 국내 테러리즘과 전 지구적 테러리즘을 이치에 맞게 구별할 수 있습니까?
하버마스 - 어떤 의미에서 팔레스타인의 테러리즘은 고전적 유형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죽이고 살해하는 것이지요. 그 목적은 여자와 아이들까지 가리지 않고 맹목적으로 적들을 무력화시키려는 데 있습니다. 말하자면 생명 대 생명의 대결이지요. 이에 반해 9‧11에서 그 정점에 달했다고 할 수 있는 전 지구적 테러리즘은, 어떤 하나의 목적을 달성한다는 실용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절대로 무너뜨릴 수 없는 적을 상대로 하기 때문에, 무기력한 저항에서 나오는 무질서하고 혼란스런 특성을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테러리즘의 유일한 효과는 그 나라의 국민과 정부에 충격과 불안을 안겨주는 것뿐 입니다. 기술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복잡한 현대사회는 파괴에 매우 취약한 탓에, 테러리즘은 최소한의 수단으로 최대의 피해를 야기함으로써 사회에 파열음을 크게 낼 수 있는 ‘이상적인’ 기회입니다. 전 지구적 테러리즘은 이처럼 두 가지 양상을 극한으로 추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현실적인 목적이 부재하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복잡한 시스템에 취약한 현대사회의 약점으로부터 최대의 효과를 뽑아낸다는 것입니다.
바라도리 - 정치적 테러리즘과 일반 범죄를 구별할 수 있습니까?
하버마스 - 글쎄요. 윤리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그 동기와 상황이 무엇이든지 간에 테러 행위는 어떤 식으로도 변명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 어떤 명분도 목적을 ‘중시’해서 타인의 고통과 생명을 위협하는 행위를 정당화할 수 있는 여지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모든 살해는 필요 없는 잉여의 죽음일 뿐입니다. 그러나 역사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테러리즘은 일반 형법이 관계되는 일상적인 범죄가 드러내는 것과는 매우 다른 맥락 속에 자리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 우리가 여기서 벌이는 대담도 아무런 의미가 없지요.
정치적인 테러리즘과 일반 범죄와의 차이는, 예전에는 테러리스트였던 자들이 권력을 쟁취해 그 나라의 존경 받는 대표자가 된 몇몇 체제의 경우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물론 이와 같은 극적인 정치적 변화는 테러리스트들만이 은근히 기대하는 것이죠. 일반적으로 그들은 이해할 만한 정치적 목적을 현실적으로 추구하여 자신들이 저지른 범죄행위를 의식하고, 이전의 부당한 상황을 구실삼아 정당화를 시도합니다.
바라도리 - ‘ 9‧11 ’이라는 테러리즘을 전쟁 선언으로 해석한 것은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버마스 - 9‧11 사건에 대한 미국의 대응을 놓고, “대테러 전쟁”이라고 명명한 부시의 결정은 분명 심각한 실수였습니다. 규범적인 관점에서도 그렇거니와 실용적인 측면에서도 그렇습니다. 규범적 관점에서는 사실상 이 범죄자들을 적국의 전사 반열로 승격시키는 격이며, 실용적 관점에서는 만일 우리가 전쟁이라는 용어에서 정의되지 않는 (싸워야 할) 어떤 누구를 상정하거나 전 세계적으로 규정하기 어려운 어떤 네트워크를 겨냥한 것이라면 사실상 승리한다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바라도리 - 당신은 서구가 다른 문명과의 관계에 있어서 이해를 증진하고 보다 자기 반성적이어야 한다고 주쟁해왔습니다. 이 점에 관해서 당신은 ‘공통의 언어’를 연구하고 번역해야 한다고 말해왔는데 정확히 어떤 뜻입니까?
하버마스 - 9‧11 이후 나는 상당한 회의에 빠진 적이 있습니다. 그런 정도의 폭력을 보고서 내가 〈의사소통 행위 이론〉에서부터 전개한 행위에 대한 모든 사유들이 우스꽝스러워 졌다고 느끼기도 했습니다. 분명히 우리는 경제개발협력기구(OECD)에 속한 다소간 평화롭고 풍족한 사회에 살면서 일종의 “구조적인” 폭력에 익숙해 있습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모멸감을 느끼게 하는 사회적 불평등, 증가하는 차별, 빈곤, 소외와 같은 문제들 말입니다. 일상에서 타인들과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행동들은 우리가 문화적으로 자명하다고 인지하는 믿음과 요소들, 그리고 상호 이해를 기반으로 하는 굳건한 초석 위에 근거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통상적인 언어 유희에 의존하고, 동시에 우리의 언어 행위들을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여러 사회환경적 요소의 수준에 맞추면서 우리의 행위들을 조절합니다. ‘이것이 바로 다소간 좋거나 나쁘거나 간에 이성이라는 공공의 장을 구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다른 한편으로는 두 번째 사실을 함축합니다. 만일 (의사) 소통이 교란되거나 (상호) 이해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거나 빈약하게 이루어질 때, 그리고 여기에 기만이나 사기가 개입하게 될 때에는 갈등이 발생하며 그 결과는 상당히 고통스럽습니다. 이는 우리가 이미 법정이나 심리치료의 경우에서 알고 있는 바와 같습니다.
폭력의 악순환은 통제하지 못한 상호 불신을 거쳐 소통의 단절에 이르게 되는 소통 교란의 반복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소통 교란에 의해 일단 폭력이 발생하면 그 다음에 비로소 무엇이 비뚤어졌고 무엇이 복구하는 방향으로 가는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매우 평범한 관점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당신이 말한 그 갈등에 이 관점을 적용할 수 있다고 봅니다. 물론 사건은 훨씬 더 복잡할 것입니다. 한 단체나 가정, 혹은 한 정당 안에서는 소통이 원천적으로 교란될 때만 폭력이 발생하지만 상당히 거리가 있는 나라들과 그 나라들의 문화의 유형이 충돌하는 경우에는 많은 것들이 서로에게 매우 이질적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문명의 충돌” 뒤에 감추어진 것들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서방세계의
물질적 이익입니다.
게다가 국제 관계에 있어서 우파 매체들은 그 기능이란 것이 폭력을 조장하는 데 2차적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문화 교류의 관계에 있어서는 예컨대 유엔에서 조직한 인권에 관한 비엔나 회의처럼 형식적으로나마 상호 이해를 찾는 것을 목표로 한 제도적 범주를 만들어 냅니다. 이 같은 형식적인 만남들은 인권을 해석하는 다양한 수준의 담화들에 있어서, 그 자체만으로는 고정된 틀을 바꾸기에는 역부족입니다.
열린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관계를 자유화하고 불안과 압박을 공개적으로 해소함으로써만 가능합니다. 일상적인 소통에서부터 신뢰를 구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합리적인 이해가 미디어와 학교와 가정을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이어지기 위해서는 이 신뢰가 먼저 구축되어야 합니다. 또한 관련 있는 정치‧문화계에서도 해결되어야 할 전제이기도 합니다.
우리로서는 우리가 타문화를 염두에 두고서 우리 자신에 대해 규정한 규범적 틀도 마찬가지로 이런 맥락에서 중요한 요소인 것입니다. 만일 서구 세계가 자신들의 이미지를 다시 검토하려고 한다면, 자신들의 이미지가 “문명화된” 접근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하나의 권력으로 인정받도록 그 정치를 바꾸어야 한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만일 오늘날 한계도 국경도 없는 자본주의를 정치적으로 순화시키지 못한다면 세계 경제를 유린하는 계층을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경제개발의 이면에 숨겨진 것은 단지 다른 문화와의 관계에서의 차별이나 모멸, 파괴만은 아닙니다. 우리가 감추고 있는 것은 (예컨대 석유 자원을 임의로 사용하려 한다거나 에너지원으로서 석유의 비축을 도모함으로써) 명백하게 드러나는 서구 세계의 물질적 이익의 추구입니다.
위르겐 하버마스(1929- )
독일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 심리학자이며 언론인. 비판이론의 영역에서 큰 기여를 한 것으로 유명하다. ‘소통 행위 이론’에서 ‘공공 영역의 개념’을 도출해낸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1964년부터 프랑크푸르트대 교수를 지냈고 현재는 같은 대학교의 명예교수로 있다. 하이델베르크대의 교수도 역임한 바 있다. 주요 저서로는 <의사소통행위이론1,2>, <공론장의 구조적 변동>, <현대성의 새로운 지평>, <소통행위이론> 등이 있다.
번역·이진홍
파리7대학 불문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