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리스트가 '투사'로 간주되는 이유?

9 ·11 그 후 14년

2015-08-31     자크 데리다

 

바라도리 - 9‧11이 중차대한 사건이든지 아니든지 간에 철학에 어떤 역할을 부여하시겠습니까? 우리가 이 사건을 이해하는 데 철학이 도움을 줄 수 있을까요?

 
데리다 - 분명 그 사건은 철학적 해명을 필요로 합니다. 그 이상이지요. 철학적 담론에 근거한 의미적 전제들을 철저하게 재검토해야 합니다. 대부분의 경우, 이 “사건”을 묘사하고 명명하고 범주를 규정할 때 그 근거가 되는 개념은 “도그마의 미망(迷妄)”의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새로운 철학적 고찰을 통해 그 사건을 새롭게 검토할 때에만 도그마의 미망으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언론에서 드러난 지금까지의 담화는 “전쟁”이라든가 (국내적 혹은 국외적) “테러리즘”이라는 개념에 너무 쉽게 의존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어요.
 
예컨대, 카를 슈미트(1)를 비판적으로 읽어보면 가능한 자세하게 전통적인 전쟁(유럽법의 위대한 전통에 따르면 두 적대국 간의 직접 충돌 혹은 전쟁 선언)과 ‘내란’ 그리고 ‘빨치산(파티잔) 전투’(현대적인 형태로 이 유형의 전쟁들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사이의 차이를 포착하는 데 매우 유용할 것입니다. 슈미트는 19세기 초부터 그 차이가 존재했다고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어지고 있는 폭력은 슈미트의 주장과는 달리, 전쟁의 본질을 띠고 있지 않다는 점도 인정해야 합니다(‘대(對)테러 전쟁’이라는 표현은 모호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런 표현으로 호도해서 얻고자 하는 이익과 그 모호함을 분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부시는 ‘전쟁’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누구에게 전쟁을 선언하고 그리고 누구에 대해 전쟁을 일으킨 것인지 규명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아프가니스탄의 민간인들과 그들이 소지한 무기는 미국인들의 ‘적’이 아니에요. 이는 수없이 반복해서 확인한 바 있는 사실입니다.
 
‘빈 라덴’이 존엄한 결정권자라고 가정해 봅시다. 그런데 그는 아프가니스탄인이 아니며 그의 조국으로부터도 (거의 예외가 없이 모든 나라와 모든 국가로부터도) 배척당하고 있으며, 그가 거물이 된 데에는 미국의 기여가 가장 크다는 사실 그리고 그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를 돕는 국가조차도 국가로서 그를 돕지 못합니다. 어떤 국가도 공식적으로 그를 돕지 못하고 있어요. ‘테러리스트’ 조직에 거처를 제공해주는 국가가 있다고 해도 사실을 확인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미국과 유럽, 런던과 베를린은 세계의 모든 ‘테러리스트’를 교육시키고 길러내고 정보가 유통되는 사원과 같습니다. 이 새로운 공격과 전파 기술의 본거지를 밝혀내려고 ‘테러리스트’들이 근거하고 활동하는 무대를 ‘지역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적절치 않은 일입니다(덧붙여 말하자면 테러리스트들의 이동 흐름이 너무 빠르고 잠시 머무르다 사라질 뿐이어서 위협을 추적하고 밝혀내기가 쉽지 않아요). ‘테러리스트’적인 유형의 공격이 더 이상 비행기나 폭탄, 혹은 가미가제 유형의 공격을 반드시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전략적 가치를 지닌 정보망에 교묘히 침투해 한 국가나 대륙의 정치‧군사‧경제적 자원을 충분히 마비시킬 수 있는 바이러스나 정보망 작동을 방해할 프로그램을 심는 것으로 충분할 수 있습니다. 이는 전 세계 어디에서나 얼마 되지 않은 비용, 최소한의 자원으로 가능한 일입니다.
 
이는 테러와 지역과의 관계가 변했다는 의미입니다. 지식, 즉 기술과학의 발전에서 기인한 상황입니다. 기술과학이 테러리즘과 전쟁 사이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든 것이에요. 이런 관점에서, 미래에 세계 정보망에서 파괴와 거대한 혼란이 일어날 가능성과 비교한다면 9‧11은 마치 상상력을 자극할 목적으로 자행한 폭력 같은 고풍스런 형태를 띠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미래에는 한 국가나 세계 강대국의 모든 삶이 의존하는 정보 네트워크를 보이지도 않게, 조용히, 훨씬 더 빠르게, 피도 흘리지 않고 공격하는 훨씬 더 심각한 사태가 올 것입니다.
어느 날엔가는 이렇게 말할 지도 모릅니다. “아 ‘9‧11,’ 그래도 전쟁기의 마지막 ‘호’시절 일이었지. 그때만 해도 눈에 확연히 드러나고 규모가 큰 것이 효과가 있다는 ‘거대함’의 논리가 먹혀들던 시절이었어. 그 크기, 그 높이를 생각해봐! 그 이후로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어. 기술이라는 것이 모든 분야에서 너무 강력하고 드러나지 않게 통제 불가능한 것이 되어 도처에서 쉽게 침투하는 것이 되어버렸지.” 미세한 것과 관련된 논리로 보자면 미생물이나 박테리아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무의식은 민감하기에 벌써 그것이 두려움을 준다는 것을 의식합니다.
 
이런 폭력은 국가 간 전쟁은 아니지만, 전국적 차원의 폭동, 더 나아가서 한 국가의 영토에서 권력을 쟁취할 목적을 지닌 해방운동(물론 빈 라덴 조직의 목표 중 하나는 미국의 불분명한 동맹국인 사우디아라비아를 불안정하게 만들어 거기에 새로운 국가 권력을 세우는 것이었지만 말입니다)이 아니라는 점에서 슈미트가 정의한 ‘내란’이나 ‘빨치산 전투’의 성격을 띠지도 않습니다. 비록 이것을 테러리즘이라고 부르지만, 이 경우 새로운 구별이나 개념을 규정해야 할 것입니다.
 
바라도리 - 그 구별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데리다 - 그 어느 때보다 어렵습니다. 언론이 지배 정치권력이 사용하는 표현을 양순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현재의 상황을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는다면 ‘테러리즘,’ 특히 ‘국제적인 테러’라는 단어를 신중하게 사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먼저 테러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무엇이 테러를 두려움이나 불안, 공황과 구별되게 합니까? 조금 전에 9‧11 사태는 의식과 무의식에 가하는 정신적 충격이 과거에 일어났던 것들과 비교되기보다는 더 위험한 미래의 정의되지 않은 위협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심각”하다고 우리는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우리는 테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두려움이나 불안 혹은 공황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테러에 대한 현재의 정의는 “국가가 저지른 테러”라는 개념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모든 테러리스트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그것에 응수하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홉스에서 슈미트 심지어는 벤야민에 이르기까지 두려움을 법의 권위와 권력의 존엄한 행사의 조건, 심지어 국가 정치의 조건으로 간주했습니다. 도발에 의해 발생했거나 조직되거나 제도화된 테러는 이런 두려움과 어떤 면에서 다를까요? 홉스는 〈리비이어던〉에서 단지 “두려움”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공포”도 언급하고 있어요. 벤야민도 국가에 대해 말하면서 국가는 협박을 통해 폭력을 독점적으로 사용하려는 경향을 갖는다고 지적했습니다. 확실히 테러에 대한 모든 경험으로 볼 때, 특수한 경우에 해당되는 테러라 할지라도 반드시 테러리즘의 효과만이 있는 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분명합니다. ‘테러리즘’이라는 단어의 정치적 어원도 국가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프랑스 혁명 당시의 공포정치에서 유래하는데, 이 공포정치라는 것은 국가가 폭력을 합법적이자 독점적으로 사용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만일 테러리즘에 대한 현재 통용되고 있는 정의나 법적인 설명에 준거하면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요? (국내법 혹은 국제법에) 위배되는 인간의 삶에 대한 범죄를 준거로 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에 역시 민간과 군대 사이의 구별(테러리즘의 희생자들은 민간인이라고 간주됩니다)과 (민간인인 국민들에게 테러[공포]를 안겨주어 그 나라의 정치를 바꾸거나 영향을 미치려는) 정치적 목적성을 지닌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테러에 대한 현재의 정의는 ‘국가에 의한 테러’라는 개념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모든 테러리스트들은 (자신들의 행위는) 다소 신빙성이 애매한 온갖 종류의 정당성을 내세우는 어떤 한 국가가 이전에 저지른 테러리즘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응수하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미국이 국가에 의한 테러를 부추기고 또 실행했다고 고발하거나 비난한 예들이 많다는 건 알고 있겠지요. 또한 오래된 유럽법의 관행에 따른 국가 대 국가 간의 전쟁 선포 이후 발발한 전쟁의 경우에도 테러리스트들의 활동은 빈번하게 있었습니다. 양차 세계 대전 이전의 폭탄 투여가 있었던 시기에도 민간인을 위협하는 것은 전통적 전략의 하나에 속했습니다. 수세기 전부터 말입니다.
 
또한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공식적인 정치 논평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국제적인 테러”라는 표현에 대해서도 한 마디 하겠습니다. 심지어 유엔의 수많은 공식적인 비판에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9‧11 이후 유엔 가입국의 대다수(제가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거의 만장일치라고 말해도 좋을 것입니다)가 마치 지난 몇 십년동안 한 것처럼 ‘국제테러’라고 부르는 것을 이미 보았을 겁니다.
 
그런데 텔레비전에 중계된 브리핑에서 코피 아난 전 유엔 사무총장은 비난 성명을 발표하기 전에 수많은 의견 조율이 있었다는 것을 상기했습니다. 그리고 그 토론 중에 몇몇 국가들은 국제테러라는 개념과 기준을 명확히 하는 데 상당히 유보적이었다는 것도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개념이 모호하면 모호할수록 그 개념은 기회를 잘 포착하고 그 개념을 사취해 자기 마음대로 사용하려는 권력에 더 양순해질 뿐입니다. 게다가 ‘국제테러’에 대한 철학적 토론도 없는 너무 섣부른 결정에 이어서 유엔은 미국이 앞서 언급한 ‘국제테러’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미국 행정부가 적합하고 또 적절한 시기라고 판단하면 ‘모든’ 수단을 사용할 수 있다고 허용해버렸습니다.
 
역사를 그다지 멀리 거슬러 올라갈 필요도 없습니다. 어느 한 시기에는 사람들이 테러리스트를 정당하게 생각했다는 점을 굳이 상기할 필요가 없겠죠. 테러리스트들은 (예컨대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비에트군의 점령에 저항해 싸웠던 투쟁이라는 맥락에서) “자유의 투사”로 칭송받았습니다. 그런데 다른 시기에는 (대개의 경우 오늘날에도 그때와 똑같은 전사이며 똑같은 무기를 사용하고 있는데) 테러리스트라고 비난받고 있습니다. 게다가 알제리, 북 아일랜드, 코르시카, 이스라엘, 팔레스타인의 역사를 기록한 테러리즘의 경우에 ‘국내’와 ‘국제’의 구별이 지극히 어렵다는 것도 감안해야 합니다.
 
1954년과 1962년 사이 프랑스군이 알제리의 폭동을 진압할 당시 국가에 의한 테러가 있었다는 것은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국가에 의한) 프랑스의 테러리즘이 국내 경찰 사건이나 국내 안전 문제로 간주되었던 것처럼, 당시 알제리의 반란자들이 행한 테러리즘은 알제리가 프랑스 국토의 일부로 여겨지는 한 오랫동안 국내사건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수십 년이 지난 1990년대에 이르러서 프랑스 의회는 연금을 요구하는 “아르키(프랑스를 위해 싸운 현지에서 충원한 알제리 보충병을 말한다 - 역주)”들에게 연금 지급을 허용하기 위해 이 갈등에 ‘전쟁’(그러므로 국제적인 충돌)의 위상을 부여했습니다.
 
어느 곳에서는 테러리스트이고
다른 곳에서는 자유와 독립을 위해싸운 투사이자 영웅이 됩니다.
 
바라도리 - (의회에서 제정한) 그 법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데리다 - 음… 그때까지는 알제리에서 ‘사태’(여론을 위한 부적절한 명칭입니다)라고 완곡하게 명명했던 사건의 명칭을 바꿔야 할 필요가 있고 또 그렇게 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국내 치안경찰의 작전과 국가에 의한 테러리즘으로서의 군대에 의한 진압이 갑자기 ‘전쟁’으로 바뀐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세계의 상당 부분에서 테러리스트들이 예전에도 그랬고 차후로도 자유와 국가의 독립을 위해 싸운 투사이자 영웅으로 간주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국가의 건립과 그 인정을 위해 싸운 무장 단체들의 테러리즘은 국내적인 것입니까 국제적인 것입니까? 그리고 오늘날의 팔레스타인의 다양한 테러 집단은요? 아일랜드는? 소비에트 연맹에 대항에 싸운 아프가니스탄은? 그리고 체첸은?
도대체 어느 시점부터 테러리즘이 합법적인 전투로 탈바꿈되는 것일까요? 그 반대의 경우도 가능할 것입니다. 국내와 국제 사이, 경찰과 군대 사이, ‘평화 유지’를 위한 개입과 전쟁 사이, 테러리즘과 전쟁 사이, 어떤 영토 내에서 그리고 어떤 ‘사회’의 잠재적인 방어와 공격을 보장하는 구조 내에서 민간과 국내 사이의 경계는 어떻게 설정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사회’가 어느 정도 조직적이거나 이미 조직되어있는 하나의 정치적 총체로서 국가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히 국가가 아니면서 잠재적으로 국가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팔레스타인 혹은 팔레스타인 당국이라고 부르는 것도 하나의 예일 것입니다.
 
 
자크 데리다(1930―2004)
 
알제리에서 태어나고 파리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였다. 1965년부터 모교인 파리고등사범학교에서 철학사를 가르치게 된다. 68혁명 때 프랑스 보수주의에 반기를 들었고 특히 철학에 대한 억압정책에 저항하여 철학교육연구그룹을 결성했다. 구조주의에 입각한 그는 전통적인 서구의 철학사상을 해체하며 읽으며 새로운 의미를 이끌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저서로 <누가 철학교육을 두려워하는가?>, <그라마톨로지>, <에크리튀르와 시차성> 등이 있다. 2004년 10월에 췌장암으로 사망했다.
 
번역·이진홍
파리7대학 불문학박사
 
 
* 저명한 두 철학자인 위르겐 하버마스와 자크 데리다가 테러리즘에 대한 질문에 답했다. 철학 교수인 지오바나 바라도리가 〈9.11의 “의미”, 뉴욕에서의 대화 (2001년 10-12월)〉(Galilée, Paris,2004)의 출간 즈음에 이들을 인터뷰했다.
 
(1) 칼 슈미트(Carl Schmitt), 1930년대 독일 법철학자, 맑스 베버의 제자. 나치의 일원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