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들은 이슬람국가(IS)로 떠나는가?

9 ·11 그 후 14년

2015-08-31     로랑 보넬리

 

스페인 공화국을 수호하기 위해 1936년 국제여단(스페인내란 당시 인민전선정부를 위해 싸우고자 각국에서 모인 좌파 연대 의용군으로 형성된 부대-역주)에 참여한 공산당 당원들과 이슬람국가(IS)조직에서 싸우러 개인적으로 떠나는 자들 사이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싸우는 목적에 있어서는 공통점이 아무것도 없다. 그럼에도 이들의 여정을 살펴보면 참여의 이유를 밝혀줄 몇 가지 유사성이 드러난다. 그리고 지하디스트(이슬람교의 성전을 위해 싸우는 전사-역주)의 경우, 그들이 조국으로 귀환하면 시민들에게 위험한 인물이 될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한다.

 
 
“얼마나 많은 수의 사람들이 돌아오게 될지 모릅니다. 또 그들 중 얼마나 많은 수의 사람들이 테러리스트로 변해 돌아오게 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수치로 보아 매우 우려스러운 것은 사실입니다.” 3,000명의 유럽인들이 이슬람국가나 자바트 알 노스라(시리아 반군 편에서 싸우는 이슬람 무장그룹-역주)에 합류해 이라크나 시리아로 싸우러 떠난 마당에, 유럽연합 대(對)테러본부의 질 드 케르쇼브 사무관의 심각한 어조는 해당 국가 지도자들의 고민을 잘 대변해준다.
 
 
 
케르쇼브의 말은 계속된다. “그 중 절반 정도가 돌아오고 이들 중 10%가 테러리스트로 변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렇다면 150명의 전사들이 무기와 폭발물 전문가가 되어 전 세계에 테러리스트 네트워크를 구축해 폭력에 대한 내성을 키울 수 있습니다. 느무슈 사건은 이런 위험성이 증가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될 것입니다.(1) 위험성이 너무 커 국가정보국의 책임자들이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입니다.” 사실상 이 조직들에 소속되었던 개인이나 소규모 집단이 유럽 영토에서 테러를 감행한다면 그 조직들은 군사적으로 성공한 셈이라고 할 수 있다. 2014년에는 브뤼셀의 유대 박물관에서, 2015년 1월에는 파리와 몽루즈에서, 2015년 2월에는 코펜하겐에서 테러가 있었다. 이 같은 상황을 심히 우려하는 발언들이 그치지 않고 있다. 심지어 프랑스 총리인 마뉴엘 발스는 6월 28일 유럽1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문명의 전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다.
 
의회 내에선 특위들이 생겨나고 있고 전문적인 보고서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국제 심포지엄들도 반복적으로 열리고 있고 유러폴(Europol)의 ‘트래블러’ 팀 같은 태스크포스도 많아지고 있다. 잠재적인 테러리스트로 간주할 수 있는 사람들의 출국이나 입국을 막는 다양한 조치들도 준비되고 있다. 전통적인 대(對)테러조치들을 보완하는 방법에는 국적 박탈, 위조신분증 몰수, 사회보조금 지급 정지, 심문, (인터넷상의) 선전 금지, 국경 검문 강화 같은 방법이 있다. 덴마크를 비롯한 몇몇 나라들은 귀국하는 자들을 ‘다룰’ 목적으로 일종의 ‘감화센터’를 설치하기도 했다. 곳곳에서 사회보장업무‧보건위생‧교육 담당 공무원들이, 심지어는 가족 구성원들이, 조금이라도 떠날 기미가 보이는 사람들을 신고하도록 동원되고 있다.
 
이 현상은 그 영향이 유례가 없이 클 뿐 아니라 전혀 새로운 것이기에 이에 대처하기 위한 조치도 전 국가적으로 행해지고 있다. 예컨대 자유로운 행동을 구속하는 일, 특히 이동의 자유를 구속하는 일이 불가피하게 여겨질 정도다. 스페인 내전에 참가한 국제여단 (1936-1939)에서부터 볼셰비즘에 대항해 싸운 프랑스 지원병들(1941-1944), 1948년 이스라엘 건국을 위해 싸운 해외 지원병들인 마할 전사들, 1979년 니카라과에서 산디니스타 혁명을 지원한 여단들, 혹은 아프가니스탄‧보스니아‧체첸 민병대에 이르기까지 시민이 조국과는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는 동시에 관심을 두지 않는 분쟁에 개인 자격으로 참여한 예는 무수히 많다. 미국의 정치학자인 다비드 말레는 1816년부터 2005년까지 발생한 전쟁의 20% 이상에서 이런 전사들의 개입이 있었다는 사실을 연구에서 밝혔다. 그 숫자는 불과 수백 명에서부터 시작해 수만 명에 이르기도 한다.(2)
 
그들 각자가 전투에 참여하는 동기가 된 역사적 경험과 판단은 다양하지만, 이와 별개로 이들을 나란히 검토해보면 공통적인 구조를 발견할 수 있다. 이 공통점을 보면 이들이 왜 가족과 친구, 자신들의 일상적인 삶과 일터를 내팽개치고, 용병들과 달리 보수 자체도 매우 불확실하고 때로는 주변인들이 배척하는 위험하고 모호한 명분을 쫓아 떠나는 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념을 쫒아서
 
첫 번째 가정은 가장 확실해 보이는 것으로, 바로 이념을 가리킨다. 전사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두 개의 서로 대립적인 세계관이 충돌하는 이야기가 증언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시리아로부터 돌아온 무라드 파레스는 설명한다. “이슬람에는 국경도 국가주의도 없습니다. 무슬림들은 단 하나의 동일한 공동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바로 마지막이자 세 번째 세계대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슬람에 대한 전 세계의 공격 말입니다.”(3) 이 같은 생각은 1944년 8월 앙리 뒤발이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를 상기시킨다. “런던에서 우리는 탐욕스런 국제 유대주의의 손에 좌우되는 야만스런 상황에서 자본주의를 구하려고 참전했습니다. 파리에서는 코뮌주의와 새로운 질서의 도래를 위해 싸웠습니다. 원망하지 마세요, 제가 선택한 것입니다. 지금은 볼셰비즘에 맞서 싸우는 프랑스 의용군 연대에서 싸우고 있습니다.(4)” 혹은 프랑스 공산당의 투사로 국제여단에 합류해 1936년 12월 스페인내란에 참가한 시몬 라귀나스의 회고를 연상시킨다. “우리가 실제로 체험한 것이지만 사람들이 결코 이해하지 못할 어떤 것들이 있습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파시즘에 맞서 싸우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이 시대의 사람들은 결속되었습니다. 반(反)파시즘에는 다양한 경향이 있지만, 모두가 파시즘이 확산되는 길을 막으려는 의지로 결속하고 있습니다(5).”
 
갈등을 해석하는 방식이 매우 진부하고 또한 상당히 느슨하다(파시즘과 반파시즘, 코뮌주의와 반코뮌주의, 신자와 비신자 등). 그런데 이렇게 갈등을 해석하는 방식이 애초에는 갈등에 직접적으로 연관되지 않고 멀리 떨어져 있던 잠재적인 전사들을 동원하는 요인이 된다. 한 진영 내부의 정치적이거나 전략적인 갈등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고, 특히 갈등을 개개인이 원래 속해 있던 집단에서 지지하는 정체성 탓으로 돌리는 일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예컨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전쟁 때(1992-1995) 많은 외국의 의용군들이 이 전쟁을 국가 간의 갈등(세르비아나 크로아티아 대 보스니아)보다는 집단 간의 갈등(이슬람교도에 대한 공격)으로 인식했다. 곧 잠재적으로 의용군이 될 만한 개인으로 하여금 감정적 대상을 넓히게 해 고통받는 사람들 측에 서도록 만든 것이다.
 
이시시(市)의 공산당 당원이며 철로에 못 박는 작업을 하는 노동자인 24살의 에마뉘엘 미냐르는 1936년 스페인으로 출발한 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주요 동기 말인가요? 나는 골수 당원도 아니었고 그 명확한 동기도 몰랐으므로 매우 모호했다고 말해야겠지요. 내가 확실히 알고 있었던 것은 거기에는 많은 노동자들이 있었고 나도 노동자였으며 착취당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만큼은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학살당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아무도 그들을 돕지 않는다는 것은 정상적인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정도는 거의 본능적으로 참전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동료인 마르셀 부르통은 “계급적 본능”이라고 덧붙였다. 시리아로 떠나는 무슬림들에게서도 유사한 원동력을 느낄 수 있다. 젊은 여자가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를 보자. “내가 내 형제나 자매들을 돕는 것처럼 나는 그들을 도와야 했어요. 우리가 무엇인가를 바꾸고자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바라만 보고 있으면서 그들이 이 모든 시련을 겪게 할 수는 없는 일이잖아요.”(6)
 
유토피아의 환상을 쫓아서
 
적대적인 세력의 연합에 의해 한 지역에서 위협받는 정체성을 전 지구적 차원의 정체성으로 확대시키려는 관점이 존재한다. 이런 식으로 지역적 갈등을 바라보는 것은 외국인 의용군들을 유인하는 강력한 추진체가 된다. 일부 세력(분명 가장 정치화된 세력일 것이다)에 있어서는 고통받는 사람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방어적인 관점이, 하나의 유토피아를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데 참여하고픈 욕망과 겹치기도 한다. 이런 유토피아는 사회혁명이나,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는 행위나, ‘유대’ 혹은 ‘이슬람’ 국가와 같은 형식을 띠게 된다.
 
무엇인가 변화시키겠다는 관점은 지금 이곳에서는 해당되지 않을 것 같지만, 전투가 벌어지는 곳에서는 가능할 것처럼 보인다. 이 경우 떠난다는 것은 하나의 선택이 될 수 있다. 1983년 니카라과 노동여단에 합류하기 위해 조국을 등진 한 스위스 전사는 이렇게 말했다. “감시 당하고, 경직되고, 핵무장 되었고, 편협한 개인주의에 갇혀 있는 우리사회에서 태양 아래 희망이라는 아련한 꽃을 간직하기가 점점 더 어렵다.” 그의 동료는 더 강조해서 말한다. “처음으로, 혁명에 성공한 국민과 만날 수 있었습니다.”(7)
 
어제는 스페인이나 팔레스타인이나 독일에서, 오늘은 이라크나 시리아에서, “모든 편협한 개인적 특수성을 초월하는 하나의 보편성과, 구체적인 ‘유토피아’를 지상에 실현할 수 있다는 희망이 결합”되면서 외국인 의용병들이 대규모로 결집하는 듯 보인다.(8) 이 의용군들은 “사건이 일어난 그곳에” 있었다는 데 만족감을 드러낸다. “그것은 역사의 한 순간이었고 그 순간에 내가 참가했다. 나는 (구원자인) 마흐디가 그곳에 나타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그곳에 있고 싶어졌다”고(9) 2013년 봄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시리아로 간 24살의 기계공인 술레이만이 단언한다.
 
이와 같은 해석들은 주로 출발국가의 지역 담당관 격인 정당, 유대주의나 이슬람 노동자 조직, 문화 혹은 구호단체 같은 조직이나 조직원들의 작업을 참조해 얻게 된다. 이념적 차원에서 갈등을 부추기고 전파하는 공간은 넘쳐나는 것이다. 그들은 행동을 부추기는 명분을 제공하는 것 이외에도, 기금을 거두어들이고, 지원자‧물자‧무기 등이 일정한 경로를 따라 모일 수 있도록 필요한 지원체제를 제공하거나, 개입할 갈등 지역을 설정함으로써 행동이 구체적으로 실현될 수 있도록 도움을 제공한다. 일부는 공개적으로 참전하기도 한다. 이스라엘에 있는 ‘자유팔레스타인 미국 연대’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의용군 연대에 합류한 자크 도리오의 인민당 같은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또 일부는 스페인 내란 때의 프랑스공산당처럼 보다 은밀하게 합류하기도 한다. 그리고 때로는 정부가 이들을 지원한다. 1980년대 말 미국중앙정보국(CIA)은 아프가니스탄으로 가는 지원자들을 모집하는 데 미국 이슬람사원 측의 적극적인 행동을 지원하고, 지원자들이 현장으로 투입되는 데 재정적으로 관여했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당국은 이런 사실을 부정한다.
 
인터넷과 새로운 정보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통신 수단을 활발하게 이용하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이들은 선전용 비디오를 사회조직망을 통해 유통하고, 지원자들의 일정을 짜고 그들과 접촉할 기회를 마련한다. 파레스나 오마르 옴센이라는 가명으로 더 잘 알려진 오마르 디아비는 시리아 분쟁에 관심을 갖는 프랑스어권 사용자들에게는 유명한 인물이다. 그러나 프랑스정보국 책임자에 따르면 “특히 포럼 같은 데서 얼핏 주워들은 이론을 실제 삶에서 실천하려고 하는 평범한 일반인들의 존재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리베라시옹〉, 2015년 7월 3일).
 
국제적으로 지원자들의 모집이 같은 반 동료들, 직장 동료들, 정치집단 동료들, 교회나 사원의 동료들, 심지어는 형제들 간의 경쟁심에 근거해 이뤄지는 만큼 중간 연결자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피에르 앙드리외는 다음과 같은 일화를 전한다. 스페인에 관한 모임이 끝날 무렵, 강사가 “누가 떠날 준비가 돼 있느냐?”는 질문으로 연설을 마감했다. 앙드리외는 “같은 분과에서 활동하는 친구인 조르즈 발레와 함께 참여했는데 그가 즉각 손을 들었다. 나는 그런 그를 보며 잠시 생각했는데 결국 나 역시 손을 들고 말았다”고 한다. 초기의 지원자들은 경로를 스스로 찾아 모여들면서 유용한 정보들을 지인들에게 전달한다. 어떤 경우에는 현장에서 그룹이 형성되기도 한다. 이런 식으로 시리아와 이라크에서는 에로 지방의 루넬 지역에서 온 20여 명의 젊은이들, 그리고 스트라스부르의 메이노에서 온 15명의 젊은이들이 집결할 수 있었다.
 
오로지 이념 때문에 자발적인 참여를 하는 건 아니라 해도, 대부분 외국인 전투원들의 증언에서 감지하는 바처럼 적어도 하나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만큼은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물론 그들이 전하는 이야기는 불완전하고 심지어 거짓일 수도 있다. 그런데 대개는 자기들을 면담하는 기자나 연구원이나 지인들 앞에서 자신을 소개하고 자신의 선택을 정당화하는 하나의 방식이 존재한다. 이때 가정문제, 애정문제,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 혹은 세상을 재발견하고자 하는 바람 같은 자명한 이유를 찾기가 쉽지 않다. 때로는 말하는 동기들이 조직에서 강조한 동기들과 중첩되어 작용해 명분이 적절하게 조합되는 경우도 있다.(10) 따라서 참여를 결심하게 된 개인적 또는 집합적인 이유를 명백히 밝혀내기 위해서는 그들의 고백이나 증언 이외에도 전투원들의 여정과 사회적인 특성을 검토해 봐야 할 것이다.
 
걸프만에서 온 “구찌” 병사들
 
다음은 젊다는 것이 그들의 공통적인 특징이다. 스페인에서 프랑스인들이 작성한 3,910개의 서류를 검토한 역사가 레미 스쿠텔스키의 조사에 의하면, 30세 이하가 전체의 60%이며 40세 이상은 4.4%에 불과하다. 2007년 10월 미군이 신자르(신갈)지역에서 노획한 “이라크의 외국인 전투원” 595명의 기록을 보면 절반 이상이 22세 미만이다.(11) 한편 카델바흐가 조사한 니카라과 연대여단의 235명 중 65%가 29세 미만이며 6.8%만이 40세 이상이다. 끝으로, 프랑스 의회의 조사를 믿는다면, 시리아로 떠난 지원자는 “대부분이 15세에서 30세 사이다”(12).
 
이들의 직업 분석이 난처한 작업이긴 해도 마찬가지로 공통적인 특성을 찾을 수 있다. 노동자와 그와 비슷한 계층의 참여 비율이 높다는 것이 그것이다. 스페인의 프랑스 여단 참가자 중 80%가 그러한 출신이다. 필립 카라르는 프랑스 의용여단에서 “공장의 직공, 피고용인, 농부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는 하층 소시민이나 룸펜 프롤레타리아 계층에서 모집이 우선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13) 한편 니카라과나 이라크에서는 학생들이 각기 20%와 43%로 다수를 차지했다.
 
이 같은 분석은 의미가 있지만 주석이 필요하다. 사실상 참여를 결심하게 된 주요 요인 중의 하나가 “당장 해야 할 일이 없다”(14)는 것이다. 소위 품위가 있고 안정적인 직업이 없거나 (특히 아이가 없는) 가정생활의 부재가 “아무것도 붙잡는 것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어 출발을 용이하게 한다. 당장 할 일이 없다는 것은 스스로가 ‘가처분’ 상태에 있다는 것을 말해주며 주로 학생과 젊은이들이 이런 상황에 처한다. 이별이나 사망에 의해서 혼자가 되었거나, 혹은 해고에 의해 직업을 잃은 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도 이 경우에 해당된다.
 
참여는 무엇보다도 일상과 결별한다는 걸 의미한다. 스페인내란 당시 테루엘 전투의 고참병이었던 무정부주의자 레오 볼린은 “주중에는 장거리 라디오 수신기를 제작하고 일요일에는 영화관에 갔다. 그러고는 다시 일을 시작하고 다시 영화관에 갔다. 당시에는 삶이란 것이 그랬다. 그런데 당시에 20대들은 ‘아니다. 이런 단조로운 삶은 더 이상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아마도 다른 많은 사람들도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라고 회상했다. 말레는 아프가니스탄에서 골프만의 부유한 가정 출신의 아들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마치 여행이나 휴가를 즐기는 것처럼 왔다갔다”하는 소위 ‘지하드 투어’를 하면서 “구찌 병사들”이라는 별명이 있는 전투부대에 합류하곤 했다고 전한다.
 
의용군을 끌어들이는 잘 알려지지 않은 요인에는 때로 자신의 가치를 높이려는 욕구가 포함되어 있는 경우가 있다. 특히 기술‧의료‧군대와 관련된 능력을 갖춘 사람들은 현재 조국에서는 얻을 수 없는 위상을 그곳에서 꿈꿔 볼 수 있다. 가령, 전 프랑스 외인부대 병사였던 한 프랑스인은 이라크 북부 지역에서 전투부대 대장의 임무를 맡았다. 최소한 자격에 준하는 대우를 받거나 봉급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조국에서는 잉여나 여분의 인간으로 간주되었던 자신이 무엇인가에 ‘쓸모가 있게’ 됨으로써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되찾기도 한다.
 
이런 현상은 특히 과거에 위법행위를 저지른 적이 있던 이들에게서 많이 찾아볼 수 있었다. 분명 법을 위반해 쫓기는 처지이거나 판결을 받을 일이 있을 때 출발 할 마음이 들 수도 있다. 게다가 무기를 들고 참전하는 것은 이전의 위험한 행위들(폭력, 도발, 마약투여)을 연장하는 것이다. 물론 참전의 경험이 자기 평가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가능성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 “사회적인 관점에서 볼 때, 스페인에 간 사람들 중에는 분명 암담한 처지에 있던 프랑스인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다시 일어섰고 국제여단의 활동과 정신에 잘 통합된 이들도 많았습니다. 그들은 문제가 많던 그 이전의 행위와는 완전히 다른 도덕적인 행동을 했습니다”고 노조원 프랑수아 마주가 증언한다. 무장 이슬람단체는 하나의 이상을 제공하며, 이 때문에 이름을 바꿀 때 생겨나는 것과 같은 일종의 부활의 효과가 있기도 한다. 부주의하게 사회적 네트워크에 유포된 전쟁 사진들을 보면 이러한 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 그러므로 외국에 참전하러 가는 것은 갈등을 이념적으로 표면화시키는 일과 개인적인 여건이 결합되어 이뤄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설명도 세 번째 요인이 없다면 완전하지 못하다. 세 번째가 가장 본질적인 것으로서 일단 현장에 도착하면 당장에 생겨나는 것이다. 당국의 검열을 피하거나 국경을 넘을 방법(대개의 경우 돈을 지불한다)을 찾아야 하는 등 기상천외한 여행이 끝나고 목적지에 도착하면 그들은 극도로 혼란스런 상황을 접한다. 한 도시 혹은 한 지역을 오늘은 어떤 한 진영이나 분파가 점유하는가 하면 내일은 또 다른 진영이 점유한다. 따라서 그들이 어떤 부대에 합류하게 되는가는 완전히 우연에 좌우된다. 스페인에서는 공산당 투사가 무정부주의자 부대에 배치되었다. 분명 이슬람국가나 자바트 알 노스라 조직과 합류하게 될 것이라고 자랑스러워했던 유럽의 젊은이들에게는 정말 황당한 일이 될 것이다. 그들의 지도자가 주장했던 것과는 반대로, 그 어떤 세력도 사실상 통일된 조직을 구축하지 못하고 있고 실제로는 전투부대(카티바)를 결집한 것에 불과하다. 부대 인원의 모집도 지역적으로 이루어지고 그 활동 무대 또한 지역적이다. 부대 인원은 이런저런 세력의 휘하로 이동한다. 시리아 분쟁을 어렵게 현장 조사한 로멩 위에에 따르면, 처음에는 ‘자유시리아군(ASL)’에 배치되었던 몇몇 전투원들이 세력 판도가 바뀜에 따라 충성해야 할 대상도 바뀌었다고 한다.(15)
 
핵심 전투에는 투입되지도 못하다
 
뿐만 아니라 새로 도착한 신참들을 훈련시킨 다음 이들을 전투에 참여시키는 일이 일정에 따라 순차적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충만한 의욕에도 불구하고 단 몇 주간의 훈련으로 효율적인 전투원으로 키우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시리아 출신인 프랑스인 정보기술자 아부 아자르는 ‘샴의 매(시리아 반군의 일파)’의 일원인데 “이 젊은이들은 우리에게 커다란 짐이 됩니다. 그들을 보호해야 합니다. 그들은 한 번도 무기를 들어 본적이 없거든요. 무자헤딘에 합류하기를 바라는 내 형제들이 있다면 그들에게 우선 경제적인 여건을 갖춰야 한다는 점을 충고하고 싶습니다.” 이런 관점은 스페인에서 국제여단의 총 감독관이었던 앙드레 마르티의 관점과도 동일하다. 그는 1936년 프랑스공산당 지도부에 편지를 보냈다. “우리가 오늘 아침에 받은 515명의 파견대는 전번 파견군보다 더 상태가 나쁩니다. 42% 가량이 군대 경험이 전무해요. 병자도 있고 퇴역 군인도 있습니다.”
 
(생필품‧무기‧탄약 등) 자원이 부족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조직은 보급품을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나 조직들에게 분배해 전략적인 필요에 즉각 부응하기를 원한다. 시리아와 이라크에선 수많은 젊은이들이 캠프나 검문소를 지키는 것과 같은 단조로운 하급 잡무만 담당하거나 무기와 탄약을 스스로 구입해야 할 때가 있다(카라슈니코프라는 소련제 자동소총 한 정은 대략 1,300-1,500 유로다). “전선에 가면 부대가 탄약을 준다. 그렇지만 너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는 네가 알아서 탄약을 구입해야 한다. 한 발에 1 유로다”라고 센느-생-드니에서 온 야신느가 말한다.
 
물론 보기 드문 능력을 갖춘 이들은 상황이 다르다. 앞에서 언급한 마르티의 편지에 따르자면, “군 복무 경험이 없는 자로서 보내도 되는 유일한 인력은 조종사나 기술자 등의 전문가뿐 입니다.” 1947-1949년 전쟁 당시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지하 민병조직인 하가나는 직접 수소문해서 영국인 민간조종사나 인력을 합류시켰다. 최근에는 이슬람 국가의 홍보 담당자들이 자신들의 영문 홍보잡지 <다비크>에 “군대나 행정, 서비스 경력이 있는 사람들과 의사와 모든 전문 분야의 엔지니어들을 특별 소집한다. 우리는 그들에게 알라를 두려워하고 그들의 이주는 와지부아니(개인의 의무)이며, 그래서 이슬람이 그들에게 부과한 무거운 책임에 응하도록 상기시키고 또 상기시킨다”고 광고를 냈다.(16)
 
소위 ‘전문가’들은 소중한 자원이기에 자격에 걸맞게 보수도 양호한 편이지만 다른 지원자들은 그 지역 전투원들과 화합하기 어렵다. 그들의 빈약한 군사적 가치도 문제이지만 대부분이 지역의 언어를 말하지 못한다. 이런 요인이 화합을 어렵게 하고 위험을 가중시킨다. 그래서 이들만을 별도로 분리해내어 언어별로 독립적인 부대를 조직하기도 한다. 이런 부대는 모든 면에서 다른 부대와 거리가 있을 수밖에 없다.
 
언어 문제는 때로 지역 상황과 맞물려 문화적‧정치적 차원에서 더 악화되기도 한다. 외국인 전투원들은 자신을 이끈 이념에 따라 그 지역의 갈등을 이해하고 참여를 결심했기 때문에 원칙을 고수하려는 경향을 보이는데 반해 지역 전투원들은 훨씬 더 실용적이다. 그래서 그들은 전체적 차원에서 본 이익을 위해 싸우기보다는 자신의 가족이나 마을을 지키기 위해 싸운다. “스페인에 도착한 의용군들이 지닌 일반적인 문제는 당파성이었다. 스페인의 상황에 대한 연구도 부족했고 인민전선의 정책에 대해서도 무지했다. 프랑스인들, 폴란드인들, 이탈리아인들을 포함한 기타 의용병들은 3개월 동안이나 ‘소비에트 공화국을 도처에!’를 강령으로 간주했다”고 마르티가 회고한다. 말레 역시 아프가니스탄, 보스니아, 소말리아에서 ‘전 세계의 지하드’를 주장하는 진영과 소비에트 군대, 세르비아 혹은 크로아티아 군대, 미국 군대 혹은 경쟁적인 계파를 우선적으로 몰아내기를 주장하는 진영 간에 불협화음이 있었다고 유사한 지적을 한다. 이스라엘을 건국하는 과정에서 분쟁이 일어났던 당시에도 외국의용군조직의 머리글자를 따서 만든 말 ‘마할Machal’은 이디시어(yiddish, 원래 중앙 및 동부 유럽에서 쓰이던 유대인 언어-역주)로 “이스라엘 영토 밖에서 온 또라이들”이었다.
 
하나의 이상을 위해 싸우러 떠난 외국인 전투원들은 지역 사령부가 서로 다른 정치적‧지역적‧종교적 성향을 가진 다른 부대와 전략적으로 연대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시점에서도 이들과 비타협적으로 행동하기도 한다. 심지어 주민들의 역사를 경멸하고 그들에게 자기들의 관점을 강요하려고 한다. 시리아에서 잠시 프랑스 여단의 ‘지휘관’을 지냈던 옴센도 그가 ‘권력 남용’이라고 명명한 행동을 한 몇몇 젊은 유럽인들에게 화를 낸다. 옴센에 따르면, 그들은 토착민들의 고유한 신앙생활을 침범할 위험성이 있었다. “나는 그들을 보러 가서 말했다. 당신들이 적용하려는 샤리아(이슬람 법 체계)는 부당하다. 간음죄를 범한 누군가에게 채찍형을 적용하기 전에 먼저 교육을 시켜야 한다. 예언자는 그 종교의 기초를 세우는 데 23년이나 투자했다. 알코올은 단칼에 금지되는 것이 아니다.” 외국인 전투원들은 군사적 효율성의 차원에서 볼 때도 무능하고 전략적 필요에도 잘 부응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들이 작전을 벌이는 곳에서조차 정당성을 획득하는 데 애를 먹는다. 그래서 그들은 예전의 프랑스 의용군 연대처럼 핵심적인 활동에서 배제된다. 스페인내란 당시 프랑스 의용군 연대는 독일 군대의 안전부대에 배속되어 후방에서 질서를 유지하거나 총알받이 역할을 하며 홀대 받는 신세였다. 1937-38년 겨울 사이에 지속된 테루엘 전투에서 싸웠던 제13국제여단은 한 대대 전체가 전투에서 배제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생존자들의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이는 부상자와 사망자의 비율이 다른 전투부대보다 훨씬 더 높았기 때문이다. 이라크에서는 군사적으로 빈약한 가치를 지닌 외부에서 온 지원병들에게 희생 정신을 강조한다. 이는 이들을 자살폭탄 테러에 이용하기 위한 고차원적인 전략일 것이다(17). 여기에 (전선에서 먼 곳이라고 해도) 전쟁의 냉혹함, 긴 기간, 거리, 게다가 지역 주민들과의 화합을 어렵게 하는 불신감, 그리고 그들이 전투에 참여하는 방식까지 감안하면 외국인 지원병들의 사기를 짐작할 만하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싸우는 자들은 이념적 신념을 위한다기보다는 자부심, 다른 그룹과의 연대감, 혹은 먼저 죽어간 이들에 대한 의무감으로 싸우는 것이다. 일부는 도망치려고 시도한다. 1937년 2월 프란시스코 라르고 카바예로 스페인 공화정부 총리는 국경을 폐쇄하고 국가 안정청장에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경찰과 돌격대와 협력해서” 외국인 의용병들의 출국을 막으라고 엄명했다. 이슬람국가는 라카(Raqqa, 시리아 라카주(州)의 주도(州都) 혹은 시리아의 유프라테스 강 상류에 있는 유적-역주)에 헌병대를 설치하고 탈영병들을 추적해 백여 명을 처형하기도 했다(〈파이넨셜 타임스〉, 2014년 12월 24일). <다비크>지(誌)는 그들이 총살당하는 사진까지 개제했다.(18) 만일 미성년이나 소심한 병사가 많을 때는 지역 사령관들은 보다 교묘하다. 일부러 도망가도록 유도하기도 한다. 2015년 7월 2일자로 시리아나 이라크로 간 1,210명의 프랑스인 중 27%가 프랑스로 다시 돌아 왔다.(19)
 
이들이 조국으로 귀환하면 무슨 일을 할까?
 
전투가 승리로 끝나도 일반적으로 외국 병사들은 현장에 머물지 않는다. “나는 이스라엘을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거기에 거주하려는 생각은 없었다”고 마할 부대에서 싸웠던 한 남아프리카인이 회상한다. 그는 동료들 90%가 그랬던 것처럼 집으로 돌아갔다.(20) 이들의 귀환은 당연히 정보국이나 경찰의 관심을 끈다. 이 전사들이 조국에서 이전에 했던 활동을 연장하거나, 정치‧사회적 질서를 위협하거나, 아니면 조금 더 떠들썩한 탈출구를 찾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조국에서의 활동은 당연히 개인차와 상황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당국이 어떤 조치들을 취하느냐에 따라서도 달라질 것이다. 말레와 스쿠텔스키는 예전의 전사들은 (다소간 은밀한 경찰의 감시 하에) 별 어려움 없이 사회에 통합되었다고 한다. 반대로 아랍 국가에 간 아프가니스탄인들처럼 가혹한 박해를 받은 사람들은 다른 길을 택했다고 한다. 돌아갈 집이 없는 자들은 ‘전문가’가 되어 이 분쟁지역 저 분쟁지역을 떠돌아다닌다고 한다. 그렇게 이들은 산재한 집단들을 서로 연결하는 접합점이 되어 (예컨대 지하드 같은) 하나의 깃발 아래로 집단들을 결집시키는 데 기여한다. 물론 테러와 위조여권 등의 제작 노하우도 전수한다.
 
사회학자인 에밀 뒤르켐은 관찰과 비교를 사회과학의 근간으로 삼았다. 이는 모든 요소가 다 가치가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국제여단에 참여한 자들은 마할부대나 프랑스 의용군부대 혹은 이슬람국가의 자원 병사들이 아니고, 또한 이들의 경험은 완벽하게 유사하지도 않다. 그럼에도 이렇게 서로 다른 개인이 서로 대립되는 유토피아의 도래를 위해 싸운 구체적인 메커니즘을 분석함으로써 도덕적인 판단을 정치의 영역에서 해석해볼 수 있다. 어느 특정한 시점에서 일부 주민은 자신의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는 이상을 위해 떠난다. 이러한 이상에 어떻게 맞서 싸워야 할까? 궁극적으로는 해외 군사 개입과 강력한 내부 치안을 강화한다는 의미로 귀착되는 “문명의 전쟁” 같은 무기력한 표현은 결코 그 해답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글·로랑 보넬리 Laurent Bonelli
주요 저서로 <두려워하는 프랑스. ‘불안’의 사회적 역사>(La Découverte, Paris, 2010) 등이 있다.
 
번역·이진홍
파리7대학 불문학박사
 
(1) 메흐디 느무슈(Mehdi Nemmouche)는 4명의 희생자가 발생한 브뤼셀의 유대박물관 테러 혐의자인 프랑스 청년이다. 그는 시리아에서 1년을 보낸 후 돌아왔다.
(2) 다비드 말레(David Mallet), <외국인 전사들, 내전에서의 초국가적 정체성 (Foreign Fighters. Transnational Identity in Civil Conflicts)〉, Oxford University Press, New York, 2013.
(3) 조안 푸뤼돔므(Johann Prod’homme), <지하드 lol (Le djihad, lol)>, Vice.com, 12 février 2014.
(4) 필립 카라르(Philippe Carrard), 〈우리는 히틀러를 위해서 싸웠다(Nous avons combattu pour Hitler)〉, Armand Colin, Paris, 2011.
(5) 레미 스쿠텔스키(Rémi Skoutelsky), 〈희망이 그들을 이끌었다. 국제여단의 프랑스 의용군(1936-1939) (L’espoir guidait leurs pas. Les volontaires français dans les Brigades internationales (1936-1939)〉, Grasset, Paris, 1998. 별도의 언급이 없는 한 스페인 국제 여단과 관련된 인용문은 이 책에서 발췌한 것들이다.
(6) 프랑수와 비뇰과 아제딘 아흐메드-샤우크(François Vignolle et Azzeddine Ahmed-Chaouch), 〈지하드의 프랑스(La France du djihad)〉, Editions du Moment, Paris, 2014.
(7) 토마스 카델바흐(Thomas Kadelbach), 〈나카라과의 스위스 의용여단(1982-1990) (Les Brigadistes suisses au Nicaragua (1982-1990)〉, Université de Fribourg, coll. « Aux sources du temps présent », 2006.
(8) 피에르-장 루이자르(Pierre-Jean Luizard), 〈이슬람국가(다에쉬)의 함정. 이슬람 국가와 역사의 회귀(Le Piège Daech. L’Etat islamique ou le retour de l’Histoire)〉, La Découverte, Paris, 2015.
(9) 다비드 톰슨(David Thomson), 〈프랑스 지하드들(Les Français jihadistes)〉, Les Arènes, Paris, 2014. 별도 언급이 없는 한 시리아와 관련된 인용문들은 이 책에서 발췌한 것이다.
(10) 파스칼 도벵& 조아나 시메앙 (Pascal Dauvin & Johanna Siméant), 〈인도주의 작업. 비정부 기구 현장 요원들(Le Travail humanitaire. Les acteurs des ONG, du siège au terrain)〉, Presses de Science Po, Paris, 2002.
(11) 브라이언 피쉬먼 & 조셉 펭터 (Brian Fishman & Joseph Felter), 〈이라크의 알카에다 전투원들- 신자르 기록의 첫 검토(Al-Qa’ida’s Foreign Fighters in Iraq : A First Look at the Sinjar Records)〉, Combating Terrorism Center, West Point, 2007.
(12) 나탈리 굴레 & 앙드레 라이샤르트 (Nathalie Goulet & André Reichardt), <프랑스와 유럽의 대 지하드 조직 투쟁의 방법과 조직에 관한 보고서(Rapport sur l’organisation et les moyens de la lutte contre les réseaux djihadistes en France et en Europe)>, Sénat, Paris, avril 2015.
(13) 필립 카라르(Philippe Carrard), 〈우리는 히틀러를 위해 싸웠다(Nous avons combattu pour Hitler)〉, Armand Colin, Paris, 2011. op. cit.
(14) 더그 맥 아담(Doug Mac Adam), ‘고위험 행동파 모집, 프리덤 섬머 케이스 (Recruitment to high risk activism. The case of Freedom Summer)’, <American Journal of Sociology>, vol. 92, n° 1, Chicago, 1986.
(15) 로멩 위에 (Romain Huet), ‘“불행한 자들”이 “분노한 자들”이 될 때- 시리아 무자헤딘의 인류학(2012-2014) (Quand les “malheureux” deviennent des “enragés” : ethnographie de moudjahidines syriens (2012-2014)’, <Cultures & Conflits>, n° 97, Paris, été 2015.
(16) 〈다비크 Dabiq〉, n°1, Ramadan 1435 (ha, ha, c’est un calendrier musulman, courage, correcteurs).
(17) 무함메드 하페즈 (Mohammed M. Hafez), ‘이라크의 자살 폭탄 테러 – 순교의 이념과 전략( Suicide Bombers in Iraq : The Strategy and Ideology of Martyrdom)’, <United States Institute of Peace>, Washington, DC, 2007.
(18) 〈다비크 Dabiq〉, n° 5, Muharram 1436.
(19) 세바스티안 피에트라산타 (Sébastien Pietrasanta), ‘순화, 대 테러 투쟁의 수단( La déradicalisation, outil de lutte contre le terrorisme’, <Rapport au ministre de l’intérieur>, Paris, juillet 2015.
(20) 다비드 말레, op. c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