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이 기억 하는 1945

2015-08-31     김상수

 

 극작가이면서, 연출가, 미술가, 사진작가, 그리고 최근엔 영화감독으로 종횡무진하며 문화의 대중화에 매진해온 김상수 감독은 이른바 문화권력의 독선에 치열하게 맞서온 예술가로 통한다. 특히 어느 누구도 감히 지적하지 못한 정명훈 서울시향 예술감독의 전횡과 비리를 처음으로 파헤쳐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런 그가 지난 7~8월 나치 패망 및 제2차 세계대전 종전 70주년을 맞는 독일 곳곳을 다녀온 뒤 여행의 단상을 남겼다.

 

 

  #베를린
 
7월 9일, 6년 만에 베를린을 다시 찾았다. 25년 전 동독 지역이었던 동베를린 지역에서는 70년 전의 제2차 대전으로 파괴되거나 구동독 시절의 낙후된 시설을 개보수하는 공사가 도처에 눈에 띄었다. 6년 만에 마주한 ‘베를린 돔' 대성당이다. 제2차 대전의 전화(戰火)로 70년에 걸쳐 복구 중이다. 원래 상태로 되돌리는 데 앞으로도 10년이 더 걸린단다. 많은 이들이 의문을 갖는다. 어떻게 독일에서 히틀러가 권력을 제압하고 집권에 성공할 수 있었을까? 지금 패전 70년을 맞는 독일은 70년 전의 과오의 역사를 ‘성난 얼굴’로 돌아보고 있다.
역사의 과오를 기억하는 자들만이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는다. 일본이 국가 이름이던 ‘대일본제국'의 명의로 저지른 죄악상을 도쿄 도심 한복판인 아카사카나 신주쿠 등에 세울 수 있을까? 독일은 지금 그렇게 하고 있다. 베를린에 있는 이 ‘공포의 지형도 박물관'이 세워진 자리에서 1930년대 초부터 히틀러는 ‘나치', ‘게슈타포', ‘SS’의 본부를 적절하게 운용하며 권력을 행사했다. 유럽뿐만이 아니라 세계를 정복하겠다는 히틀러는 세계의 수도에 해당될 도시를 계획하기에 이른다. 히틀러의 ‘삽질'이 시작된 것이다. 치밀하고 꼼꼼하게 심혈을 기울인 이 ‘삽질'로 말미암아 ‘알베르트 슈페어'라는 건축 총책임자가 등장하고, 1938년엔 인구 1억 명의 ‘게르마니아'를 오늘날 베를린에 해당되는 넓은 지역에 계획하고 공사하는 일이 시작됐다.
이번 베를린 방문에서 강렬한 인상을 받은 곳은 ‘독일역사박물관'이다. 이 박물관은 동독정부가 옛 병기고를 개조해 1952년에 열었는데, ‘독일역사'를 보여주기보다는 마르크스나 레닌 등에 대한 자료를 중심으로 한 ‘프로파간다'적인 목적성이 강했다. 그러나 통일 이후 이 박물관은 독일의 역사를 전시하기 위해 리모델링됐고 특히 현대사에서 히틀러 집권 시기는 상당한 규모로 세세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냉정하게 역사의 과오를 철저하게 보여주면서 자기 나라의 이름을 정면에 내건 ‘독일역사박물관'은 허장성세로 역사를 꾸미고 왜곡하며 자국의 우월성을 내세우는 역사박물관의 수준과는 너무 달랐다. 독일역사박물관을 보면서 가리고 감추고 외면하는 것이 아닌, 밝히고 드러내고 보게 하는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진술이야말로 역사와 새롭게 마주하는 태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한 번 말하지만 독일인들에게 기적은 없었다. 이들은 피와 눈물로 역사의 현실을 감내하며 어려움을 극복해 왔다. 이렇듯 베를린 시내 ‘공포의 지형도 박물관' 과 독일역사박물관에는 1933년 히틀러 집권과 1945년 독일제국의 패망까지, 그리고 동서독 분단과 1989년 통일까지, 현대사의 자기 과오와 이를 극복하고 치유한 사회적 노력들을 세세하게 낱낱이 밝히고 있다.
반민족적인 행위를 한 자들의 자식들이 지배하는 한국 사회의 현실이란, 기실 ‘인간의 사회'가 아니다. 그것은 ‘짐승들의 사회'다. 사회원칙과 정의가 실종된 사회란 짐승들의 악다구니가 횡행하는 원시부족 문맹의 사회다. 그러니 아이들이 수학여행을 가다가 300명이나 몰살을 해도 개의치 않겠다는 식이다. 오로지 힘이라는 단위에 굴종하는 비겁한 사회다. 민족반역자의 딸이 대통령이 되고, 또 다른 민족반역자의 아들이 집권당 대표로 미국에 가서 큰 절을 하는 ‘엽기적'인 행위가 가능한 것도 여기에 기인한다.
 
 
독일은 베를린 장벽을 실재 자리에 일부 그대로 두고 있다. 히틀러의 광기와 동서냉전의 베를린 장벽이 독일을 피폐시켰지만 독일 시민은 다시 일어섰다. 기적은 없었다. 히틀러 집권을 허용한 참담한 실수 이후, 총력을 기울여 일으킨 것은 민주주의 시민사회체제다.
베를린 시내 보도 곳곳에는 구리로 만든 명판(銘版)이 새겨져 있다. 슈톨퍼슈타인, 곧 걸림돌이라는 뜻의 이 명판은 훼손되지 않도록 동판에 가로 세로 높이 10cm의 돌을 끼워 만들었다. 발길을 멈추고 고개를 숙이고 내려다 읽어보면 ‘1888년 생 프리에다, 프리에다 만 여기 살았다. 1942년 아우슈비츠로 끌려갔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히틀러 나치에 끌려가 죽은 평범한 이들은 길가 바로 앞집 뒷집의 이웃사람들이었다. 이 명판은 독일의 한 조각가가 과거의 기억을 오늘에 되살려야 한다는 운동에서 시작됐고 베를린시가 명판 심기에 협력했다. 이 명판은 현재 베를린 시내에만 5,500개가 넘는다.
 
독일의 다른 지역에서 베를린으로 여행을 온 독일 학생들이 히틀러의 명령으로 지식인의 저서 2만 권을 ‘비 독일서적'으로 분류해 ‘베벨광장’에서 불태운 현장을 상기시키는 광장 바닥의 설치미술을 내려다본다. 훔볼트 대학본부 건물 앞 ‘운터 덴 린덴’ 대로(大路) 건너편에 복원공사 중인 오페라 하우스 사이에 위치한 베벨광장 바닥에는 투명한 플라스틱판이 놓여 있다. 그 판에 가까이 다가가면 판 아래로 흰색의 빈 책꽂이가 가로 세로로 가지런하게 서있는 것이 밑으로 보인다. 설치미술이다. 히틀러가 불태운 책 2만여 권을 꽂을 수 있는 책꽂이가 지하에 무덤처럼 서 있다. 그 책들 중에는 프로이트, 하이네, 볼테르, 토마스·하인리히만 형제, 레마크르, 아인슈타인, 마르크스 등의 책들이 있었다. 선전부 장관 요셉 괴벨스는 이런 저자의 책들은 ‘비독일적인 책’이라고 규정했다. “이것은 서곡에 불과하다. 책을 불태우는 곳에서는 언젠가 인간을 불태울 것이다.” 독일 베를린 베벨광장 바닥에 새겨진 문구다. 이 글귀는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의 글이다. 그의 예언은 적중했다. 나치 히틀러는 전쟁을 일으켰고 무수한 생명과 인류 문화를 파괴했다. 당연히 나치 히틀러는 멸망했다.
 
 
 
 
#라이프치히
 
나는 베를린에 이어 라이프치히를 찾았다. 라이프치히에서 첫 번째로 방문한 곳은 ‘룬데 엑케’ 박물관이다. 이곳은 구동독 시절 국가안전부(슈타지) 본부로 사용되었던 장소로 통일 후에는 시민위원회가 박물관으로 개조해 ‘슈타지-권력과 일상성'이라는 주제로 상설전시관을 운영하고 있다. 2015년 한국 사회를 살고 있는 시민들에게 이 장소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부도덕한 정권은 어떤 가공할 만능의 수단을 지닌 폭력기구를 보위기구로 두고 있다 하더라도, 끝내 역사의 판결을 받는다는 교훈을 여기서 배우게 된다. 박물관에는 동독의 국가안전부 슈타지의 갖가지 만행이 증거로 제시되어 있다.
라이프치히를 통해서 독일 지방자치제 분권의 오랜 역사와 문화의 저력을 봤다. 인구 50만 명의 산업도시를 문화와 예술이 이끌고 있었다. 그리고 과거 역사는 현재에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것이다. 25년 전의 동독 시대 전차가 시내를 달렸다. 일부러 바꾸지 않았다. 전쟁으로 폐허가 되다시피 한 도시를 옛 도시의 구축도와 건물 설계도를 구해 하나하나 복원했다. 고건축과 현대건축은 절묘한 조화를 이루었고, 도시를 완성하는 작업은 끈질기고 치밀하게 계속되고 있다. 학문의 요체인 라이프치히 대학은 명성의 면모를 잃지 않았고 헌책을 파는 서점엔 젊은 사람들이 꽉 차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도시는 과거 역사의 과오까지 세세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라이프치히를 떠나기 전에 꼭 기록해둬야 할 내용이 있다. 바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최고(最古)의 오케스트라인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와 종신지휘자 쿠르트 마주어(Kurt Masur, 1927~)에 대한 이야기다. 1781년 라이프치히 양복조합 소속 상인들이 300년 된 무기고를 구입해 1층은 직물 전시장, 2층은 500석짜리 콘서트홀을 만들었다. 건물 안에는 도서관, 회의실, 무도회장, 식당을 갖추었다. 여기서 16명의 연주자를 고용해 첫 공연을 한 것이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시작이다. 게반트하우스란 ‘양복조합 회관'이라는 뜻이다. 즉 양복조합원들이 만든 오케스트라다. 1800년대에 4차례의 개보수 공사를 통해 1천석까지 객석을 늘렸다. 하지만 1943년 12월 연합군의 공습으로 파괴됐고 1944년 2월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이후 세월이 흘러 게반트하우스는 동독시대인 1977년 1월 20일에 착공해 1981년에 문을 열었다. 개관 기념공연 지휘자가 쿠르트 마주어다. 그는 지그프리트 틸레의 오라토리오 <태양에 바치는 노래>와 베토벤의 <합창교향곡>을 지휘했다.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건립을 위해 동독 정부에 탄원서를 제출하는 등 마주어의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부활을 위한 노력은 눈물겨웠다.
지휘자 쿠르트 마주어가 그의 음악세계 이상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1989년 10월 9일에 일어난 저항운동 때문이었다. 옛 동독 라이프치히 아우쿠스투스 광장에서 니콜라이 교회 등 라이프치히 시내 교회에서 기도회를 마치고 나온 동독 시민들은 이렇게 외쳤다. “비밀경찰 슈타지 사라져라!”, “우리는 주권을 가진 인민이다!”, “우리 독일인은 한 민족이다!”를 외치면서 10만여 명의 시민들이 탱크를 앞세운 동독 보안군 1만 명과 대치했다. 그 전날 쿠르트 마주어는 시민들에게 라디오방송을 통해 비폭력 평화시위를 당부했었다. 그러나 시시각각 일촉즉발의 긴장이 더해졌다. 언제 발포명령이 떨어질지 몰랐다. 이때 마주어가 동독 보안군의 총구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마주어는 게반트하우스 음악당의 문을 활짝 열어 시위 군중을 피신시켰다. 이 일을 계기로 이후 마주어는 음악계뿐 아니라 독일 시민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대중적인 인물이 되면서 첫 통일 독일 대통령으로 거론되기도 했다.
 
 
 
 
#드레스덴
 
드레스덴 기차역에서 내려 도심으로 걸어 들어가는 길은 마치 재개발 신도시를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제2차 대전의 유럽전선에서 전쟁 마지막 몇 달 간 미국과 영국이 독일 작센 주의 주도인 드레스덴 시를 대규모로 폭격한 일이 어떠했는가를 70년이 지난 오늘에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영국 공군 소속 중폭격기 722대, 미국 육군 항공대 소속 중폭격기 527대가 드레스덴 시에 3,900톤 이상의 고폭탄 및 소이탄을 투하했다. 폭격과 그로 인해 발생한 화염폭풍으로 드레스덴 도심의 40km² 면적이 파괴됐으며 25,000명 이상이 즉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폭격으로 인해 1천년 문화재가 초토화됐고 70년이 지난 오늘도 독일인들은 도시를 재건하고 있다. 히틀러가 가한 독일의 죄업은 너무나 깊고 넓었다. 꼼꼼하고 치밀한 복원에는 1945년 이후 70년의 기간도 부족하다. 독일인들의 끈질긴 정신세계와 마주하는 느낌이 들었다.
1945년 폭격 직후와 오늘의 모습이 놀랍다. 폭격으로 무너지고 부서져나간 프라우센교회는 시민들이 석재를 모아 번호를 하나하나 매겨서 보관했다. 맞출 수 없는 부분은 새로운 석재를 사용했다. 10년 전인 2005년에야 복구가 완성됐다. 종교개혁을 일으킨 마르틴 루터의 동상도 새로 세웠다.
2015년 7월 19일의 드레스덴 시어트 플라츠광장은 조용했다. 1935년 히틀러 나치의 국가사회주의 정당 집회가 있던 이곳은 집단 광기에 열광한 장소다. 80년 전 역사의 현장이다. “우리나라의 거리들은 혼란의 도가니입니다. 대학들은 폭동과 난동을 피우는 학생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우리나라를 호시탐탐 파괴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러시아는 무력으로 우리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국가의 도처에 지금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내부의 적과 외부의 적들이 들끓고 있는 지금 우리나라에는 법과 질서가 필요합니다. 법과 질서가 없다면 우리나라는 살 수가 없습니다.”누가 한 말일까? 위 연설문 일부는 아돌프 히틀러의 연설이다. 그리고 36여 년 전 한국 사회의 독재자 박정희와 유사한 연설문이기도 하다. 놀랍게도 2015년 오늘의 한국 정권도 같은 논조로 말하고 있다.
 
#바이마르
 
이번 독일 여행 때 바이마르에서 규모가 아주 큰 건물은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좁은 도로 폭에서는 한 앵글로 건물 전체를 잡을 수가 없었다. 바이마르 기차역에서 도시 중앙으로 언덕길을 내려가다 오른편 길로 돌아서면 바로 있는 건물이다. 역에서 가깝다. 이 큰 건물을 독일 정부는 지금 처치 곤란해 한다. 부수자니 건축의 역사적 가치는 있고, 다른 용도로 사용하자니 그 건물 안에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폭행과 고문으로 다치고 죽었다. 현재는 연방정부 건물로 표식을 붙여놓고 문을 닫아 놓은 상태다. 거대하고 음산한 건물인 히틀러 시대의 비밀경찰 SS본부 건물은 동독시대 때는 악명 높았던 국가안보국 슈타지의 건물로 사용됐다. 이 건물은 지금은 버려져 있다.
라이프치히나 드레스덴 그리고 옛 동독지역의 베를린에서 보고 느끼는 것이지만 만약 독일이 통일이 안 되고 계속해서 분단체제라면 과연 역사적인 유물들이 복원될 수 있었을까 의문이 든다. 불가능하다. 1945년 패망 이후 동독공산주의 체제는 수많은 유적들과 유산들을 방치하거나 체제가 지향하는 가치와는 맞지 않는다고 의도적으로 외면했다.
동독 지역이었던 바이마르에는 아직 수리하지 못하고 낡고 부서진 집이 자주 눈에 띄었다. 통일 25년이 지났지만 분단의 고통은 깊다.
 
#한국의 과거를 돌아보며
 
한국은 8‧15를 거쳐 남북분단의 시기를 맞게 됐다. 70년 전의 한국이란 국가는 ‘자기결정권'이 없었다. 지금은 그럼? 혼란스럽다. 21세기는 고사하고 당장의 난제를 풀어갈 국가 역량은 있을까? 박근혜 정부는 제쳐두고 공동체로서의 ‘국가'말이다. 베를린에 있을 때 시선을 끈 것은 중도 일간지 <타게스슈피겔>의 특집 연재기사였다. 신문사가 국가 담론을 이끌고 있었다. 무엇으로? 어떻게 더 나은 국가와 사회를 만들 것인가를 두고 각 분야별로 시리즈를 내놓고 있었다. 정책 제목이 신문사 이름을 그대로 가져와 <타게스슈피겔 어젠더 2015, 2030>이다. 당장의 문제와 15년 이후를 연결해서 보는 시각이다.
일본 식민지 시절 반민족행위자들의 후손들이 정치‧경제 실권을 쥐고 있는 우리의 현실 속에서 일본의 아베 내각이 굳이 사과를 할 필요성이 있다고 느낄 수 있을까? 일본의 진실에 가까운 사죄가 있으려면, 한국이 민족반역자를 엄중하게 심판하고 그 후손들이 행사하는 일체의 권력을 거둬들일 수 있을 때만이 가능하다. 정의롭고 강력한 민주주의 국가만이 대등한 외교를 펼칠 수 있음은 주지의 사실 아닌가. 한국 사회는 아직도 “친일”이란 표현을 공공연하게 사용한다. 이런 표현이 바로 언어 프레임을 통한 인식의 교란이다. “친일”은 민족반역자 또는 반민족행위자들이 그들의 죄과를 물타기하려는 목적에서 그대로 오랜 시간 관용어처럼 사용하는 표현이다. 명확하고 명백하게 명명해야 한다. ‘민족반역', ‘반민족행위'로 정확하게 고쳐서 불러야 할 것이다.
일본 패전 70년 이후, 일본과 독일의 결정적인 차이는 무얼까? 일본은 전쟁범죄자의 직계 후손들이 오늘의 현실정치를 지배한 채, “미래의 평화”를 말하면서도 전쟁법안을 통과시키고자 책동을 하고 재무장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반면에, 독일은 전쟁범죄자의 후손들이 용서를 구하고 자신들의 부모들이 저지른 “과거의 죄상”을 되새겨 부끄러움을 느끼며 깊은 침묵 속에서 지낸다. 더하여 일본 정부는 과거의 침략 죄상을 어떻게든 합리화하려고 하지만, 독일은 베를린 시내 한 복판에서 자신들이 저지른 죄악상을 낱낱이 드러내고 있다. 나는 일본은 정치와 정치세력이 바뀌지 않는다면 반드시 과오를 저지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 진정한 유라시아대륙 횡단은 남북철길이어야!
 
베를린에 있는 동안 송두율 선생과 두 차례 만났다. 주고받은 대화 중 이런 대화가 있었다.
“어젠가 오늘인가? 무슨 ‘유라시아대륙 철도횡단’이라고 한국정부가 주최하는 행사가 여기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 있다던데 알고 계신가?”
“얘긴 들었다. 근데 여기서는 뉴스가 안 된다. 그 행사가 진실하고 공감이 가면 여기 독일 미디어가 다룬다. 미친 짓이다. 남북도 못 오가는데 삐잉 둘러서 뭔 짓인지. 한국 언론만 뉴스로 취급하는 행사를 국민 돈으로 남의 나라에서 왜 하는지. 국내에 보여주기 행사 수준이다.”
“남북부터 철도길이 먼저 열려야 유라시아 장정이 되는 것이지. 내실과 진정성이 없다. 그나저나 남북문제 어떻게 풀 수 있을까?”
“대결을 통한 ‘경멸'과 ‘공포'로는 답이 없다. 상대의 입장에서 볼 수 있어야 한다.”
“어디서 희망을 찾을까?”
“시간이 걸린다.”
독일은 통일을 치밀하게 준비했다. 통일을 명분으로 가장한 ‘쇼'를 안했다. 상대의 입장에서 면밀하게 사태를 응시하면서 시간과 돈을 합리적으로 사용했다. 정통성 있는 민주정권을 세워야만 남북통일에 대한 전망을 구체적으로 세울 수 있다. 독일은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 있는 저 철조망을 치우기까지 진정성 있게 자기 내실부터 차곡차곡 쌓아나갔다.
나는 독일 베를린을 올 때마다 꼭 이 문 앞에 선다. 그리고 마음속 깊이 통일을 생각하고 간절하게 바라는 마음이 저절로 인다. 우리에게도 그날이 오길 바라면서.
 
 
글·김상수
극작가·연출가·미술가 겸 영화감독. 이 글은 필자가 지난 7~8월 독일 베를린, 라이프치히, 드레스덴, 바이마르를 여행한 과정을 담은 ‘포토 에세이’로, 독일 패전 70년의 의미를 새롭게 일깨우고자 그의 페이스북에 올린 것을 다시 정리한 것이다. 김상수 감독은 현재 남북분단 문제를 오늘의 시각에서 들여다보는 영화 <남방한계선>을 준비 중이다. 그의 홈페이지(www.kimsangsoo.com)를 방문하면 그의 작업을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