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문화대혁명으로 회귀?
[Spécial]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60돌
문화혁명에 희생된 세대가 부활해 ‘잘 사는 국가’ 건설
마오쩌둥의 유산, 젊은이에게 자긍심과 민족의식 고취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했을 때, 중국은 피투성이였다. 60년이 흐른 지금, 중국 정부가 저지른 범죄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많은 도약을 거쳐 세계경제 전면에 나서고 있다. 빈곤이 퇴치된 것은 아니지만 기근은 사라졌다. 심각한 불평등이 존재하지만 중국인 90%가 글을 읽고 쓸 줄 안다. …문화혁명 기념행사를 준비 중인 베이징은 불만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지역 당국에 축제 행사를 제한하라고 지시했다. 지역 당국들은 30년 전에 수도 베이징에서 촉발된 문화혁명을 지금 ‘국가적 재앙’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 사진들이 문화혁명(1)의 어둡고 끔찍한 면을 부각시키지는 않는다. 내가 그런 면을 목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모든 사진이 그렇듯 이것들도 현실의 파편들만 보여주기 때문에, 그런 맥락 속에서 이 사진들을 설명하고 혹은 재구성하며 의미를 찾아야 한다. 그렇다고 해도, 근 40여 년간 상자 속에 묻혀 있던 이 사진들은 퍽 흥미롭다.
이 시기에 대한 증언 자료가 아주 귀하기 때문이다. 중국에 거주하는 유학생과 대사관 직원들 말고는 베이징에는 외국인이 거의 없었다. 게다가 서구인은 더욱 보기 힘들었다. 당시는 핑퐁외교 전이었다.(2) 깨지고, 부서지고, 편집된 이미지와 정보의 홍수 속에 갇혀 지내는 우리 같은 사람들이, 직접 실황을 중계하는 텔레비전과 라디오도 없이 세상을 상상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물론 전화 통화도 힘들고 인터넷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현지에 특파된 몇몇 언론사 특파원(프랑스는 <AFP> 특파원이 유일했다)을 비롯한 모든 사람의 이동(여행 특별허가 발급이 엄격하게 관리됐다)이 통제됐다. 베이징 주변 반경 20km는 회랑으로 연결돼 명 왕조의 무덤과 만리장성에 접근할 수 있었다. 모든 외국인은 잠재적인 위험인물로 간주돼 언어 소통의 어려움 때문에 접촉하는 것이 아니면 국민과의 접촉이 금지됐다. 게다가 우리 같은 서양인은 통제받는 군중 속에서 쉽게 눈에 띄어 찾기 쉬웠다….
얻을 수 있는 정보는 거의 없었다. 예를 들어 당시 2년간 <르몽드> 1면에 실린 기사를 고기록에서 찾아봤지만, 여름에 있었던 큰 시위에 대해 1면에 난 2단짜리 칼럼 하나가 전부였다! 그 밖에는 통신사가 간간이 보낸 사건 속보뿐이었다. 정보가 거의 없어 사건을 정치적으로 분석할 수도 없었고, 그때까지만 해도 알려지지 않았던 원근 도법(scenography)으로는 사진 형태만 보고 의미를 파악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호기심 어린 사진 속의 시선들
이 사진들의 증언은 이례적인 상황 때문에 이례적인 것이 됐다. 사진이 아그파사의 슬라이드 필름으로 찍은 컬러사진이었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언론매체는 흑백사진을 사용했고, 아주 귀한 컬러필름은 대부분 전문 보도사진에 쓰였다. 중국에서는 공식 출판물에만 유일하게 컬러필름이 사용됐다. 따라서 당시 대사관 직원들은 부족한 필름을 홍콩에서 수입했고, 현상도 그곳에서 했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이런 컬러사진들을 보며 “이것들이 흑백으로 남아 있던 내 기억을 되살려준다”는 말을 되뇌며 무척 감동한다.
우리는 사진 주인에게 “위험한 적은 없었나요?”, “협박받은 적이 없었나요?”, “사람들이 사진을 찍게 가만 놔두던가요?”라고 물었다. “아뇨, 전 아무 문제도 없었어요. 제가 홍위병들과 같은 또래라서 위험인물이 아니었거든요. 당시 시위에 가담한 젊은 홍위병들, 특히 외국인을 평생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시골 출신들은 절 보고 믿기지 않는 듯 미소를 지었죠. 그런데 40여 년이 지난 후, 제게 꽂힌 사진 속의 시선들을 보며, 제가 그들을 사진에 담았지만 사실은 제가 그들의 호기심거리였다는 것을 알았죠. 우리는 서로를 발견한 것이죠….”
글·솔랑주 브랑 Solange Brand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사진부장(1980~2004)을 지낸 뒤 사진작가로 활동 중. <베이징 1966: 문화혁명의 역사>(2005) 저자.
번역·조은섭 chosub@ilemonde.com
파리7대학 불문학 박사로 알리앙스프랑세즈에서 강의하고 있다. 주요 역서로 <착각>(2004) 등이 있다.
<각주>
(1) 중국 사진기자 리전성의 <Le petit livre rouge>, Pha?don, 파리, 2003.
(2) 중국에 대한 서양의 개방정책을 일컫는 말.
Part 2
Part 2
Part 2
Part 2은폐된 역사에 맞서
사람들은 현 중국 ‘공산주의’ 체제에서는 문화혁명을 거의 떠올리지 못한다. 이제 중국은 공식적으로 그 사건을 종결하고, 개발과 소비를 즐겁게 만끽하는 미래지향적인 국가가 됐다. 항상 그렇듯, 어떤 비극적인 사건이 국민을 동시에 사건의 가해자와 피해자로 만들 때면, 개별적으로 그 진상을 알리려고 나서는 사람은 없다. 혹 있다 해도 극소수에 불과하다.
문화혁명에 어쩔 수 없이 뒤엉켰던 도시와 시골 국민이 그 멋진 순간에 대한 추억을 간직한 채 이념에 배반당하고, 이용당하고, 속았던 자신의 씁쓸한 심경을 토로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가능하고 모든 것을 쟁취(자유로운 이동, 무료 기차 이용, 발언권, 부모와 스승으로부터의 독립)할 수 있을 것처럼 자유에 도취됐던 이들은 가족의 비극, 폭력, 자살을 방조했다. 이들은 모든 세대에게 청년 시절의 상징인 우정과 연대의 추억 속에 갇혀 있거나 일부 스승 혹은 이웃, 가족에 대한 죄책감 속에 갇혀 있다.
젊은 세대의 반응을 발견하는 것은 특별한 경험이었다. 가끔은 사진에 무관심하거나 단지 통속적인 면에만 관심을 보이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자신에게 낯선 역사 속의 시간과 마주하면서 처음 듣는 일이라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놀라고 충격을 받는 모습이었다. 하나 거의 모든 이들이 명시적으로나 구체적으로 그 사건에 질문을 던져야 할 필요성과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데 공감했다.
Part 3
Part 3
Part 3
Part 3진행되는 역사에 맞서
1966년 10월 1일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선포 17주년 기념행사가 열렸다. 150만~200만 명의 홍위병들이 자금성 입구 톈안먼 광장에 세워진 연단 앞을 행진하며 문화혁명과 문화혁명의 ‘지침’을 지지한다고 외쳤다.
‘대약진 정책’(2)의 실패로 위기에 처한 노쇠한 마오쩌둥은 차후 4인방(1)이라 칭한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 프로파간다의 전문가 및 린뱌오(林彪)가 이끄는 군대의 도움을 받아 재집권을 도모했다. 마오쩌둥은 당과 국가기관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기 위해 젊은 세대들에게 혁명을 호소했고, 그 호소에 동참한 젊은이들은 관료주의, 특권층, 부르주아 타파 투쟁을 외치며 과거의 유적을 파괴했다. 이것은 “위대한 영도자” 마오쩌둥이 “소련식” 혁명보다는 “중국식”의 혁명을 원했기 때문이다.
“주석궁을 불사르자!”라는 슬로건을 어떤 젊은이가 거절할 수 있단 말인가? 정부 최고위층에서 주도한 모험이자, 일부 지도자들에게 쏟아지는 거센 비난(3)을 이용해 교묘히 연출해낸 사기극이었다. 1966년 봄 이후 초등학생부터 대학생까지 학생들이 동원됐고, 이들은 열정에 들떠 징과 북을 울리고 구호를 외치며 대행진을 시작했다.
붉은색이 수평으로 뻗은 회색 도시 베이징을 점령했다. 그해 8월 톈안먼 대로와 광장에는 연일 거대한 행진이 이어졌고, 마오쩌둥은 자신에게 경외심을 표현하기 위해 전국에서 몰려든 수백만의 젊은이들을 그곳에서 여덟 번에 걸쳐 맞았다. 행동과 열망을 지배한 ‘마오쩌둥 주석의 사고’가 담긴 <붉은 소책자>는 사방에 깔려 있어, 사람들은 이 책을 외우고 낭독했다.
하지만 10월 1일은 그중에서도 정말 특별한 날이었다. 군대의 행진을 비롯해 꽃장식한 전차 그리고 형형색색으로 꾸민 무대가 보이지 않았다. 단지 파란색이나 혹은 카키색 작업복에 흰 셔츠를 입고 팔에 완장을 찬 젊은 홍위병들이 여러 시간 동안 행진을 했다. 그리고 여성들은 땋은 머리를 이미 싹둑 잘라버렸고, 바지 차림이었다. 모두가 구호에 맞춰 <붉은 소책자>를 치켜들었고, 그 위로 같은 색의 깃발과 펼침막이 일렁였다. 그곳에 참가한 사람들은 거대한 회전문에 끼어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곧바로 특권층을 숙청한다는 미명하에 통제, 비난, 비판, 폭력이 난무하며 사회적 혼란이 가중됐다. 1967년 자행된 숙청 이후, 문화혁명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군대가 사태 수습에 나섰다. 도시에 거주하던 수백만의 대학생들이 시골로 보내져 “고운 말”을 쓰도록 “교화”됐다. 사람들이 “젊은 인텔리 세대”(4)라고 부르는 이 젊은이들의 소요에 종지부를 찍기 위한 방편이었다. 유배로 가족이 뿔뿔이 헤어지며, 이들의 삶도 피폐해졌다…. 그 이후 10년을 사람들이 “재앙의 10년”이라 부르는 이유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은 기하급수적 인구 증가 때문에(5) 만성적 기근에 따른 풍토병에 시달리자, 국민을 구하고 그들의 기본적 욕구를 충족시켜 후진국의 이미지에서 벗어나고자 박차를 가했다. ‘맨발의 의사’란 단체가 오지 마을에 기본적인 위생·치료 시설이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왔다.
많은 이들이 보건, 문맹 퇴치, 교육, 여성 인권에 대해 깨우쳤다. 강도 높은 정치·사회적 압박 때문에 절도, 도박, 성매매, 부패 등의 관행이 거의 사라졌다. 지난 수천 년간의 제국을 거쳐, 20세기 말 이후에는 광적인 정복자로 군림한 중국에서 일어난 수십 년간의 문화혁명은 초강대국에서 발생한 가장 급진적인 정치 변화 중 하나로 인류사에 기록되고 있다.
불과 40년 전까지만 해도 6억 명의 중국인들은 유엔에서 따돌림을 당했다.(6) 20세기 첫 반세기 동안 중국은 내란과 서구 열강 및 일본에 짓밟히며, 영토는 분할되고 모욕당하고 피투성이가 됐다. 비록 독립을 쟁취했지만, 이후 17년 동안 중국은 서구 열강과 일본의 틈바구니에서 투쟁해야 했다. 그 덕에 사람들은 지금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민족주의와 자긍심을 되찾았다고 생각한다. 마오쩌둥은 아직도 그런 민족주의와 자긍심이 주는 혜택을 누리고 있다. 그가 사망하자 중국 공산당은 “그의 치적 중 70%는 좋게, 30%는 나쁘게” 평가한다는 간략한 성명을 발표했다. 마오쩌둥 계승자들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들의 적법성을 따지는 토론을 배제하기 위한 조처였다.
문화혁명은 국가의 재난으로 선포됐다. 공식적인 책임은 4인방이 졌다. 이 일로 “위대한 영도자” 마오쩌둥의 책임은 흐지부지됐다. 그 후 덩샤오핑은 이 시기를 네거티브 모델로 삼아, 개방정책을 펼치며 시장경제를 받아들였다. 그런 그는 차세대가 시장경제의 정언명령 같은 “부자 되세요”(7)란 슬로건에 만족하지 못한 채 톈안먼 사태를 일으켰을 때, 무력 진압으로 저들의 열망을 잠재웠다.
<각주>
(1) 마오쩌둥 사망 한 달 뒤인 1976년 10월 6일, 그의 부인 장칭을 비롯한 문화혁명의 상징인 장춘차오, 왕훙원, 야오원위안 등이 체포됐다.
(2) 1958년에 도입된 대약진 정책은 사유재산권을 폐지하고, 국가 주도의 산업화를 추진했다. 이 과도한 산업화 정책은 1500만에서 3천만 명으로 추정되는 노동자의 목숨을 앗아갔다.
(3) 대약진 정책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은 덩샤오핑과 류사오치였다.
(4) Michel Bonin, <시골로 쫓겨난 중국의 젊은 인텔리들 1968~80>, 프랑스 사회과학고등연구원, 파리, 2005.
(5) 1979년 아이 하나 낳기 정책 도입으로 인구 성장은 멈췄지만 인구 고령화 같은 부작용이 발생하고 있다.
(6) 프랑스는 1964년부터 중국의 유엔 가입을 지지했지만, 중국은 1971년에야 비로소 유엔에 가입하게 된다.
(7) 1976년 톈안먼 광장에서의 정부 압박 시위에 굴복하지 않았던 덩샤오핑은 정권을 화궈펑에게 물려주게 된다. <마니에르 드부아>, n°85, 2~3월호 참고, 2006.
<중화인민공화국 연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