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생각한다면 유엔을 지켜라

[Dossier] 유엔의 가치와 비전
맹목적 자유주의가 인류 막다른 골목 내몰아
오직 유엔만이 진정한 균형 담보할 수 있어

2009-10-06     로무알드 시오라 | 영화감독·작가

유엔이란 무엇인가? 내가 이 문제를 처음으로 생각한 것은 2003년 여름, 전세계를 충격에 빠뜨린 바그다드 테러가 터지고 며칠 뒤, 내가 2년간 머물렀던 레바논에 관한 영화 <피닉스의 재>를 끝낸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해 질 무렵이었다. 나는 유엔평화유지군들이 지키는 이스라엘과 레바논 남부의 국경선 ‘블루 라인’ 위에 서 있었다. 푸른색 깃발 아래, 확신에 가득 찬 마음 착한 사람들을 만난 뒤였다. 그때 나는 유엔의 역할 하나를 이해했다. 평화를 유지하고, 죽음과 파괴를 부르는 새로운 분쟁 발생을 막는 것이 그들의 1차 목표다.

하지만 ‘평화 유지’라는 말로 모든 걸 다 말할 수 없고, 또 만족할 수도 없다. 나는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이 비난하고, 더러는 의심받고, 더러는 경멸당하며, 모든 악의 온상이라고 비난받으면서 세계의 자기기만의 희생양이 되어버린 유엔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었다. 쉽사리 비판해버리는 유엔의 겉모습 뒤에는 과연 무엇이 있을까? 사람들은 이 거대한 조직의 역할을 제대로 인정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한다. 유엔의 역사와 도전, 그리고 그 다양한 면모를 더 명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유엔의 본질에 대한 탐색 작업은 그 자체로 흥미로운 모험이다.(1) 그것은 2차 세계대전의 폐허 위에서, 어떤 경우에도 인간들 간의 관계가 새로운 파국을 맞는 것을 피하기 위해, 그리고 좀더 평화적이고, 덜 이기적이고, 무엇보다도 덜 폭력적인 세계를 건설하기 위해, 군사력과 파괴력이 아닌 다른 가치에 근거해 세워진, 복잡한 사회를 찾아나서는 모험이다.

유엔에 가해지는 때로는 정당한 비판, 특히 세계 균형에 어긋나는 안보리 구성에 대한 비판에도 유엔은 삶의 수많은 양상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 최근 발간된 <플래닛 UN>(2)에는 다양하고 모순적이며 신랄한 의견들이 실려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한 가지 사항에는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 즉, 노엄 촘스키가 말한 대로 “유엔이 엘리너 루스벨트(프랭클린 루스벨트 전 미국 대통령의 부인)와 다른 창설자들의 희망을 대변해야 한다”는 것이다.

초국가적 기구로서 유엔의 가치

급진자유주의가 지배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배고픔으로 고통받는 이 세계에서는, 유엔과 같은 초국가적 기구만이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다. 지금 시급하고 중요한 일은, 맹목적 자유주의가 우리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으리라는 사실을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이 깨닫게 하는 것이다. 21세기 후반에 도래할 후기 자본주의 시대로의 이행을 생각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21세기 후반은 후기 자본주의 시대와 유사할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이 중요하다. 혁신되고 더 강화된 유엔만이 이런 생각을 도와줄 수 있고, 위험부담을 최소화하면서, 증오와 폭력의 원천이 되는 불평등의 심화를 방지해, 전세계가 역사적으로 결정적 단계에 진입하도록 보장해줄 수 있다.

지금 힘의 균형은 한창 변화 중이다. 지난날 강대국들은 그런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은 주요 20개국(G20) 회의체 등을 통해 그들의 헤게모니를 더욱 강화하려 한다. 반면에 오직 경제력만을 논의 대상으로 삼는 정상회담에서 제외된 약소국들은 지역기구의 틀 안에서 상호 연합을 시도한다. 물론, 국제사회에서 그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을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유엔은 회의 때마다 전세계 모든 국가들을 집결시킬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유일한 기구다. 그런데 그런 유엔이 점점 소외되고 속 빈 강정이 되어가고 있다.

유엔 앞에는 진정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그리고 이 세계의 앞날도 마찬가지다. 무역, 과학기술 연구, 금융권력 분야를 장악한 ‘성공한’ 나라들에게 지구의 운명을 맡긴다는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자신들이 정치적·경제적으로 지배하는 다른 나라들에 대해 결정권을 행사하는 부유한 나라들로 이루어진 세계정부를 상상할 수 있을까? 하지만 비상 사이렌을 울리기에 충분한 일들이 현재 벌어지고 있다.

오직 유엔만이 필요한 균형을 담보할 수 있다. 유엔은, 그 나라의 경제력·정치력·군사력과 상관없이 모든 나라들이 존중받을 수 있게 해주는 보증인이다. 그리고 그들의 권리를 행사하는 방식이 제대로 적용되도록 감시한다. 유엔은 사라져서는 안 된다. 그 반대로 유엔은 적응해나가야 하고 더 강화돼야 한다. 그것은 인류의 양심, 도덕적·윤리적 원칙, 선한 지성, 그리고 지속적인 평화에 대한 희망과 관계된 문제다.

군비축소와 환경보호, 유엔의 새 임무

유엔만이 효율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두 가지 중요한 임무에 착수하는 것이 시급하다. 군비축소를 가속해 핵분쟁 위험을 제거하고, 더 늦기 전에 환경훼손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 이 두 가지는 너무나도 중요하고,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도 이것들을 우선 과제로 정했다. 위기에 처한 국제 상황을 생각할 때, 유엔과 여러 전문기관들이야말로 인류가 무의식적으로 저지른 중대한 실수의 원인과 결과에 직접적이고 즉각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실제적 틀이다. 유엔을 죽여서는 안 된다. 유엔을 쇄신하고, 그 행동 방법을 강화하고, 무엇보다도 유엔을 구성하는 정부들이, 그들의 부(富)가 전쟁이나 환경재앙에서 그들을 보호해주지 못할 강대국들까지 포함해서, 유엔을 제외하고는 우리 앞에 기다리는 다른 재앙을 피하게 해줄 다른 대안이 없다는 사실을 깨우치도록 해야만 한다.

글·로무알드 시오라 Romuald Sciora
영화감독 겸 작가, <유니이티드 미디어> 창립자 및 책임자. 뉴욕에서 유엔과 국제기구들을 위한 싱크탱크를 운영하고 있다.

번역·김계영 canari62@ilemonde.com
파리4대학 불문학 박사. 저서와 역서로 <청소년을 위한 서양문화사>(2006), <키는 권력이다>(2008) 등이 있다.

 


 

<각주>

(1) 쿠르트 발트하임(1972~81), 하비에르 페레스 데케야르(1982~91), 부트로스 부트로스갈리(1992~1996), 코피 아난(1997~2006) 등 4명의 유엔 전 사무총장과의 인터뷰로 이루어진 다큐멘터리 <유리의 집> 참조.
(2) 로무알드 시오라, 아니크 스티븐슨, <플래닛 UN>, Tricorme, 제네바, 2009년, 360쪽 + CD롬, 32유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