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성 이름 아래 교묘해진 노동착취
영리기업들, 공공가치 내세워 노동자 충성심 유도<br/>공직사회의 기업화 맞선 공무원들 투쟁과 대조적
공무원들은 점점 더 이윤추구에 매진하고 임무를 망각하라는 요구를 받는 반면, 민간 부문 경영진은 노동자에게 헌신과 책임의 가치를 역설하고 있다. 공동체를 위해 일하는 이들은 역할 완수를 금지당하고 있고, 사익을 추구하던 이들은 고귀한 대의를 위해 스스로 희생하고 있다고 주장해야 한다. 대체 이런 상황이 왜 일어나는 걸까?
20여 년 전부터 노동시장에서 진행되는 변화는 놀라운 현상을 초래하고 있다. 오늘날 경영자들은 공공부문의 고유한 직업적 가치들을 민간부문에 도입하려고 한다. 그런데 이 가치들은 바로 민간 경영논리의 공격을 받는 가치들이다. 양 부문이 엇갈린 러브콜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1968년 5월 대파업 이후 경영자들은 생산성 요구에 좀더 순응하고 좀더 순종적인 노동력 확보를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회사 쪽의 요구를 완전히 수용하며 믿을 수 있고 헌신적이며 고용주가 기대하는 바를 잘 이해하고 회사 처지에서 가장 수익성 좋고 효율적인 방식으로 일하는 노동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때까지 프랑스 임금노동자들은 고용주와 자신들 간에 넘을 수 없는 대립 관계가 존재한다고 확신했다. 노동자들은 직업 규칙과 노동사회가 추구하는 규칙에 따라 업무를 수행하려는 의지를 지닌 생산자로서의 정체성뿐만 아니라, 세상의 질서를 바꾸기 위한 공동 행위의 동력인 계급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날 노동자들은 고용주의 목표를 수용하고 경영진이 정의한 대로 자신을 일자리와 동일시하고 극단적인 충성 관계를 통해 고용주에게 헌신할 것을 요구받는다.
노동자의 삶까지 간섭하는 기업
경영자들은 계급투쟁 이데올로기를 제거할 수 있는 자신들의 능력을 의심하지 않았다. 우리는 작업 조직의 주요 혁신은 언제나 가치와 생활양식을 바꾸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는 것을 자본주의 역사를 통해 알고 있다. 헨리 포드가 대표적인 예다. 포드는 노동자의 집에 감독관을 파견해 노동자가 결혼과 올바른 식사 같은 건전한 생활 수칙을 지키고 있는지 파악했다. 심지어 권장 식사 메뉴까지 제안했다. 소비 패턴도 감시했다. 포드의 노동자는 자사 자동차를 구입할 수 있도록 절약하는 방법을 배워야 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노동자를 관리하려는 회사 쪽의 간섭도 더욱 교묘한 논리를 취했다. 이를 위해 일종의 ‘언어 혁명’이 일어났다. ‘노동자’ 개념이 사라지고 ‘운영자’, ‘파일럿’, ‘시설운영자’ 같은 용어들이 출현했다. 뿐만 아니라 ‘갈등’ 개념도 사라졌다. 대신 ‘사회적 파트너’라는 단어가 대안으로 등장했다. 새로운 이데올로기가 탄생했다. 이 이데올로기에 따르면 넘을 수 없는 이해관계의 대립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집단도 존재하지 않고, 오직 고용주를 위해 충성하는 개인들만 존재한다. 노동자에게 크게 불리한 고용시장 상황, ‘경제전쟁’을 내세운 협박, 대안 이데올로기의 붕괴는 경영자에게 늘 승리를 가져다줬다. 경영자는 노동자의 참여를 끌어내고 조정했다. 업무를 계획하고 생산성 목표와 품질 목표를 조율하는 어려움은 이제 노동자에게 전가되었다. 그 결과 노동 강도가 훨씬 높아졌다. 각 개인은 목표 달성을 위해 전념하며 누구의 도움도 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쥐어짜내야 했다. 물론 직장 생활과 관련된 고통, 심리사회적 위험, 스트레스, 자살 등을 말하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그러나 민간부문 경영자는 공무원 세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직업윤리와 태도를 도입하는 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민간 기업 논리의 지속적인 공격을 받고 있는 가치들과 노동 관계를 다름 아닌 민간 기업들에 도입한 것이다.
사실 각종 연구가 보여주는 것처럼(1) 책임·충성·헌신이 일반적 가치로 인정받는 부문은 공공부문이다. 공무원들은 업무에 깊이 몰입하며 해당 기관과 임무를 자신과 동일시하고 남들의 인정을 바라지 않고 사심 없이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이들이다. 물론 모든 공무원들이 이렇게 행동하는 것은 아니다. 나태하고 옹졸하며 권위적이거나 비양심적인 공무원들도 있다. 그러나 이들이 주류는 아니다. 기본 조건들이 충족될 때 공공부문에 고유한 직업의식이 확고해진다.
비록 관료제 논리와 규율 준수가 일반적 현상이긴 하지만, 공공성의 가치에 의해, 또는 직종별 특성에 따라 배제될 수도 있다. 즉, 이는 상당 부분 해당 기관들에 달려 있는 문제다. 여러 기업들과 기관들에서는 다양한 노동조직 형태에 의해 상이한 직업적 정체성과 공공 서비스 수행 방식이 나타난다.
공무원의 직업적 정체성 혼란
심지어 대다수 공무원들은 업무가 자율성이 없고 하찮은 일이라 해도 안전과 평등 개념을 중요시한다. 상급자가 눈감아줄 경우 어떤 공무원들은 규율 해석의 재량을 보이기도 한다. 이들은 임무를 자신의 일로 생각하며 상황에 따라 규율을 조정할 정도로 개별화돼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국가 역할의 수호자로서 국가의 원칙을 적용하기 위해 언제나 그렇게 한다. 그렇게 공무원들은 관료제의 부정적 효과를 완화한다.
반면에 다른 상황에서는, 관료제의 경직성이 모든 공무원들의 봉사정신을 죽일 수도 있다. 즉, 공무원들의 일상적인 노동이 온갖 제약과 기한, 책임 떠넘기기로 이어지면 그런 일이 빚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관료제가 자신의 법칙을 강제하지 않고 위계가 공무원을 과도하게 통제하지 않는다면, 민간부문 경영자들이 그토록 부러워하는 직업 관행이 발전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관행들은 특별한 토양에서만 자란다.
공무원들도 이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공공부문의 일원이라는 사실에서 자긍심과 안정감을 느낀다. 비록 업무 자체가 별것 없고 지위도 낮지만, 공무원들은 자신의 업무가 고귀하고 중요하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도 잘하려는 의지와 책임감이 ‘당연히’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공익을 담보하고 공화국의 정신을 실현한다는 의식을 갖고 있으며 ‘공공부문을 위해 복무할 것’을 자처한다. 공무원들은 삼중의 평등을 주장한다.(2) 즉, 사용자 간의 평등, 공무원 간의 평등, 공무원과 사용자 간의 평등이 그것이다.
각 부문은 각각의 자긍심을 구현한다. 시설 분야는 도로와 다리를 건설·유지하고 주택 건설을 규제함으로써 국토의 공공성 유지에 기여한다. 우체국이나 프랑스 국영철도회사(SNCF)는 사회의 네트워크를 담당한다. 재무부는 납세가 정당하게 이루어지는지 감시한다.
경영자들의 반노동적 헌신윤리 도입
우리는 이 모든 것이 민간부문의 경영자들에게 꿈을 심어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은 공공부문 모델의 왜곡된 변이를 창조하는 데 성공했다. 경영자들의 헌신윤리 도입 전략은 특별한 조건에서 진행되었다. 즉, 이런 책임 의식이 사회 발전을 위한 사심 없는 기여나 보편적 가치의 이름으로 뿌리내려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공무원의 윤리를 기업의 좁은 테두리 안에 가두는 것이 중요했다. 공무원들의 책임감과 헌신은 노동자가 오직 기업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기업의 무조건적 활동가가 되는 경우에만 의미가 있었다. 이에 대한 보상으로 경영자는 노동자에게 윤리헌장과 기타 의무론적 양식을 본뜬 모델에 부응한다는 만족감 외에 인정, 자율, 자기계발 및 자아실현의 기회를 약속했다.
노동자는 이제부터 노동이 감춘 다양한 도전들에 맞섬으로써 노동의 한계 내에서 최고를 추구하고 다른 이들과 겨루며 비교하고 자신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발견할 것을 요구받았다.(3) 안마리 뒤자리에의 분석처럼,(4) 경영자는 노동자에게 기업 내에서 자아실현의 매개체가 될 수 있는 이상형을 추구할 것을 제안했다. 단, 이같은 현대화 과정에서 노동자가 승리자가 되기는커녕 많은 것을 잃어야 한다는 사실을 은폐한 것은 물론이다.
비록 경영자가 노동자를 효율적이고 수익성 있게 활용해야 한다는 걱정에 휩싸여 있다가 노동자의 주체성을 갑자기 ‘발견’하긴 했지만, 이 주체성이 예전에도 그저 수면 아래 가라앉아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심지어 저숙련 노동자들도 규정을 해석하고 수많은 사건·사고에 적합한 작동 양식을 찾거나 동료와 공유하는 가치들을 만들어내는 주체성을 갖고 있었다. 이 주체성은 단체 생활과 직업 관행에서 도덕의 형태로 나타났으며, 직장 생활과 사회 전체 간의 관계를 표현했다.
노동자의 인간적이고 저항적인 차원을 제거하는 것으로 알려진 테일러주의가 가장 엄격하게 적용된 상황에서도 이 집단적 주체성은 노동자를 종속 관계에 가두는 사적 노동계약 내에서조차 사회의 근본적 쟁점과의 탯줄을 유지했다. 이 주체성은 모든 노동·연대·저항의 문화도 탄생시켰다. 개인적인 어려움과 무력감, 부당함은 이 집단적 감정을 기준으로 재해석되었다.
노동자는 이제 이런 집단적이고 주관적인 차원 대신, 기업의 수익성 및 자기만족의 테두리에 갇혀 있다. 이 테두리 안에서 오늘날 노동자가 자신의 환경에서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의미가 있고, 현대 기업이 새로운 형태의 조직을 정당화하는 출발점인 ‘계약’이 있다. 이 새로운 조직 형태는 노동자에게 기업의 목표 달성에 필요한 수단을 제공하지 않으며, 생산성·품질·사후관리라는 동시 만족이 어려운 요구들에 대한 해법을 찾기 위해 개인의 모든 역량을 총동원하도록 강제한다. 경영진이 제시한 이상형에 도달하거나 그런 요구를 만족스럽게 충족시키는 것은 매우 어렵다. 노동자는 서로 영원한 경쟁자로서 그들에게 요구하는 탁월함과 전지전능함을 기약 없이 추구하며 온몸을 불사른다.
노동자에게 요구되는 헌신과 준비된 자세는 공무원의 그것과 외관상으로만 비슷할 뿐이다. 공무원은 다른 이들을 위해 일하고 전체의 논리에 기여하는 매개 구실을 한다는 자부심을 갖는다. 공무원은 자신의 노동조건을 순전히 조합주의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회문제로서 제기한다. 예를 들어 교사나 철도공무원, 병원노동자는 노동조건을 공공서비스의 질과 평등 및 공공선의 준수와 연결짓는다.
노동의 보편적 가치를 지키려면
반대로 민간부문 노동자는 고객이나 사회 전체의 이익을 무시하는 한이 있더라도 언제나 기업의 이익을 우선시하도록 강요받는다. 개별 기업의 이익 대 사회의 이익, 자신들의 이익 대 다른 이들의 이익 같은 가치 충돌에 사로잡혀 노동자는 자기비하의 제물이 된다. 자신들이 겪고 있는 상황의 집단적 차원을 인지할 수 없다 보니 많은 노동자들이 자신을 불의나 착취의 개별적인 희생자라고 생각하며 고립되고 버려졌다는 느낌을 받는다. 더구나 상사가 그 자신의 어려움에 빠져 있거나 부하 직원들이 겪는 상황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자주 자리를 비우면서도 부하 직원들을 개별 인터뷰를 통해 평가하는 경우 이런 느낌은 더욱 강화된다.
노동의 근본적인 의미와 사회와의 관계가 완전히 변질되었다. 문인과 영화인이 자신들의 창작열을 직장인의 세계를 묘사하는 데 집요하게 들이대는 것도 이 때문이다.
노동자는 바보가 아니다. 그들은 고용주가 요구하는 헌신이 공무원의 그것과 별 관련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노동자가 노동의 보편적 가치를 보전하기 위해, 저항하고 노력하는 공무원을 지지하지 못하는 것도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노동자가 현대화와 경제전쟁의 미명 아래 희생된 자신들의 가치를 정작 공무원은 투쟁을 통해 지키려고 하는 것을 보며 분노하는 것도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사실 공공부문 지도자가 민간부문의 경영 방식을 도입하려는 의지를 천명했을 때, 공무원은 자신들의 세계와 가치가 사라지는 걸 거부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런 변화는 공화국 윤리의 아슬아슬한 균형을 변질시킨다. 고객 개념을 도입하는 것만으로도 진정한 분열이 발생한다. 고객 개념의 도입은 차별 대우의 가능성을 열며, 삼중 평등의 원칙을 해체하기 때문이다. 즉, 공무원은 이제 모두가 평등하지 않은 고객을 상대해야 한다.(5) 일반 고객과 ‘주고객’을 구분하기 때문이다. 또한 비정규직, 온갖 종류의 계약직 노동자 고용, 성과급 및 경력의 개별화는 공무원 간의 평등 원칙을 파괴한다.
최근 통과된 금융 법안은 체계적인 수익성 목표를 제시하며 각 활동별로 모든 걸 수치화하도록 강제한다. 이는 우리가 본 것처럼 단순한 수익성보다 더 많은 가치를 추구하는 모든 공무원들을 절망으로 내몰고 있다.
글·다니엘 리나르 Daniele Linhart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소(CNRS) 연구소장. Travailler sans les autres 타인 없이 노동하기』(쇠유출판사, 2009년)의 저자.
번역·박수현 domyosie@ilemonde.com
역서로 『세계화의 문제점 100가지』(2007) 등이 있다.
<각주>
(1) 다니엘 리나르, 이자벨 베르토-비암므, 미쉘르 데콜롱주, 니콜라 디베르, 사샤 르ㅤㄷㅟㄱ, 넬리 모샹, <공공 부문 현대화의 다양한 얼굴>, 라 도큐멍타시용 프랑세즈, 파리, 2006.
(2) 오렐리 장트, ‘사회적 관계로서의 서비스 관계’, <노동사회학>, n? 45, 파리, 2003년
(3) 뱅상 드 골르약, <경영 논리에 병든 사회>, 쇠유, 파리, 2005년. 위젠 엥리퀘, 기업에서 권력과 욕망의 게임, 데슬레 드 브루베, 파리, 2002년.
(4) 안마리 뒤자리에, <직장에서의 이상>, 르몽드/PUF, 파리, 2006년
(5) 프랑스 전기공사에서 ‘로빈 후드’들은 공공서비스의 연속성을 선택했다. 전기세를 낼 수 없는 가정에 전기를 끊는 걸 거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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