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카라과 혁명가 오르테가의 ‘실용적 도전’

외세·특권층 억압으로 얼룩진 역사 잔재 여전
미국 우파 지원에 남미 좌파정부 연대로 맞서

2009-10-06     에르난도 칼보 오스피나|<르 디플로> 특파원

혁명이란 단어가 라틴아메리카에 다시 출현하고 있지만, 산디니스타민족해방전선(FSLN)의 마나과는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독재 정권을 전복시킨 30주년을 기념하고 있다. 1979년 무장봉기로 승리를 쟁취했으나 미군 침공의 희생자였으며, 오랫동안 야당 활동을 했던 FSLN은 2006년 정권을 탈환했다. FSLN은 항상 좌파를 표방하고 있지만, 때때로 보여준 ‘실용주의’가 어느 정도 자신의 이미지를 모호하게 만들어버렸다.


“나는 항복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서 당신네들을 기다릴 것이다. 나는 자유로운 조국이 아니면 죽음을 원한다.” 무기를 버리지 않으면 끝까지 추적할 것이라고 위협하는 미군사령관의 편지에 대한 ‘혁명투사’ 세사르 아우구스토 산디노의 대답은 위풍당당했다. 니카라과는 미국의 침공을 여러 번 받았다. 첫 번째 침공은 1854~56년에 가해졌다. 당시, 영국 역시 대서양 연안의 통제권을 획득하려 했다. 두 강대국은 중앙아메리카의 니카라과를 태평양과 대서양 간의 미래 운하 건설에 꼭 필요한 땅이라고 생각했다. 1914년 운하는 결국 파나마에서 빛을 보게 되었다.

필랜더 녹스 미 국무장관은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의 정치적·군사적 긴장을 제거한다는 핑계로 1909년 9월 니카라과에 군대를 파병한다. 파병군은 1925년에 귀환한다. 그 다음해에 5천 명 이상의 ‘해병’이 다시 상륙해 1933년까지 주둔한다. 이들이 갖다댄 핑계는 ‘멕시코 볼셰비키 선동자들’의 국가 침탈을 막기 위해서였다.

산디노는 이런 선동자들 중 한 명인 셈이었다. 비록 스스로 자유주의자라고 말했지만, 그는 1927년부터 ‘제국주의자’ 혹은 ‘코카인 마피아’라고 볼 수 있는 외국 점령군일 뿐 아니라, 억압자이고 착취자이며 인종차별주의자이고 매국노인 자유·보수주의 엘리트들을 격퇴하기 위해 무기를 들었다. 사회학자 올란도 누네즈는 “산디노는 멕시코 무정부조합주의자들의 흑적 깃발과 사상 그리고 엘살바도르의 파라분도 마르티(1)의 사상을 받아들였다. 그의 책에서 산디노는 시몬 볼리바르가 꿈꾸었던 것처럼, 라틴아메리카의 통합이 필요하다고 역설했을 뿐만 아니라, 미 제국주의를 분쇄하기 위해 민족주의 기업들과 동맹을 해야 하고, 정치 투쟁에서 인디언들과도 통합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말한다.

미 침략군은 ‘자유인들의 장군’인 산디노가 이끄는 게릴라들에게 집요하게 공격을 당했을 뿐 아니라 대공황으로 전쟁 비용을 감당하기 벅차지자 1933년 퇴각했다. 침략군들은 미국 육군아카데미에서 교육받은 아나스타시오 소모사의 국가수비대를 남겨놓고 떠난다. 1934년 2월 21일 정부와의 협상을 받아들였던 산디노는 후안 바우티스타 대통령이 마련한 리셉션을 마치고 나오다가 암살된다. 몇 년 후 소모사는 암살 명령을 아서 블리스 레인 미국 대사가 내렸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워싱턴, 반민주적 우파 정권 지원

‘소모사 왕조’의 독재정치- 아나스타시오(1936~56), 루이스(1956~63), 아니스타시오 주니어(1967~79)- 는 워싱턴의 후원 속에서 거의 40년 이상 지속된다. 그럼에도 이전의 투쟁이 헛된 것은 아니었다. 1960년의 쿠바혁명과 산디노 사상의 영향을 받은 카를로스 폰세카 아마도르, 토마스 보르헤와 그 밖의 다른 지성인들이 FSLN을 탄생시킨다. 오랜 세월 이 게릴라 단체는 농촌 주민들과 좋은 관계를 맺지 못해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미국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소모사 가족의 권력 남용과 권력 집중 때문에 부르주아 일부가 불만을 품게 되면서 상황이 바뀐다.

일부 부르주아는 FSLN과 동맹을 맺으면 독재자를 제거할 수 있고, 자신들의 정치 공간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FSLN 처지에서는 동맹을 맺음으로써 자신들의 목표를 가장 빨리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더불어 해방신학을 믿는 서민들이 다니는 교회와 연합을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정부의 억압이 가중되고 있었지만 FSLN의 눈길을 끄는 군사행동이 1978년 전세계의 동정심을 자아냈다. 카터 대통령의 미 정보국조차 소모사를 계속 지지할 수 없게 되었다. 1979년 7월 19일 무장폭동이 승리를 거둔다.

산디니스타 혁명은 니카라과 국민뿐 아니라, 유럽의 사회민주주의 정부들까지 큰 관심과 우려를 동시에 가졌다. FSLN의 창시자인 자기 아버지 이름과 똑같은 카를로스 폰세카는 다음과 같이 기억하고 있다. “혁명은 엄청난 열기를 일으키며 동기를 부여했기 때문에, 거의 모든 니카라과 젊은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사람들은 낙관주의자가 될 수 있었고 꿈을 꿀 수 있었다.”

다니엘 오르테가가 주도한 정부의 문맹 퇴치 운동은 문맹률을 54%에서 12%로 떨어뜨렸다. 서민들도 마침내 고등교육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의료 혜택도 소수만의 특권에서 벗어났다. 농민들은 토지개혁의 혜택을 입었다. 전략적 자원이 국유화되고, 노동조합 가입과 중소 생산자들의 조직 구성이 권장됐다. 누네즈의 말에 의하면, 그것은 쿠바를 제외한 라틴아메리카와 니카라과 역사상 유례없는 사회정의의 과정이었으며, 국민이 조직을 직접 만드는 과정이었다.

그런데 이런 조처들을 시행하려면 정치·경제 시스템이 재조직돼야 했다. 본질적인 알력이 동맹 권력 내부에서 생겨났다. FSLN과 동맹을 맺은 부르주아 분파는 독재를 타도하기 원했지만 결코 국가 구조를 바꾸고 싶지는 않았다. 그럴 경우 자신들이 패자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혁명주의자들은 자기 정부가 외국의 승인을 받는 데 부르주아와의 동맹관계가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혁명이 민주적이고 기독교적이었다는 사실을, 다시 말해 미국과 유럽의 이익에 어떤 피해도 끼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줘야 했다”고 누네즈는 계속해서 말한다.

레이건의 그릇된 판단

그러나 그것은 오판이었다. 카터 대통령 시절, 미국이 친소모사 수비대들을 도와 반혁명 세력을 키움으로써 상황이 악화되었다. 1981년 1월 취임한 레이건 대통령은 심지어 니카라과가 미국의 안보에 ‘가장 문제가 된다’고까지 선언했다. 몇 달 전인 1980년 4월 부르주아 분파 대다수가 FSLN을 탈퇴했다. 친소모사 엘리트들과 연합한 그들은 워싱턴의 불안정화 계획을 지지했다. 온두라스, 엘살바도르, 코스타리카에서 미국과 쿠바의 반혁명 민병대와 용병들이 ‘콘트라 반혁명군’을 훈련시킨다.(2) 반혁명군은 인접국 국경에서 기습작전을 감행해 많은 인명을 앗아갔다. 폰세카 주니어는 “내 세대에게는 전쟁이 강요됐다. 수천 명의 니카라과 사람들이 그랬듯, 나도 전쟁에 참여했을 때 나이가 15살이었다. 그것은 미국과 내부의 소수 특권 집단의 잘못이었다”고 증언한다.

‘무신론자들’, ‘전쟁광들’, ‘공산주의자들’, ‘혁명을 수출하는 전체주의 체제’, ‘마약 밀매업자들’ 등의 용어가 유포됐다. 상처를 주는 것이 꼭 총탄만은 아닌 것이다. 일간지 <라프렌사>와 니카라과 미디어들을 동원해 니카라과에는 표현의 자유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전하면서 국제적인 비방 캠페인을 전개했다. 전시경제 탓에 식량이 부족해지고 사회발전 프로그램이 줄어들면서, 결과적으로 일부 국민의 불만이 터지게 된다. 산디니스트들 역시 콘트라 반혁명군을 강화시키는 데 일조했다. 왜냐하면 일부 농민들이 콘트라 편이 되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산디니스트들이 불공정한 경쟁으로 여겨지는 협동농장을 지지하고, 자유시장 체제를 공격하며, 가격이 통제되는 국영농장 육성에 치중한 점을 일부 농민들은 견디지 못했다. 위협이 상존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1983년 9월부터 의무 군복무제를 시행한 점도 일부 농민들에게 부담이 되었다. 현재 중앙아메리카 의회의 FSLN 의원이며 퇴역 전투원인 야신토 수아레즈는 이렇게 말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농민들과 좋은 관계를 맺는 방법을 몰랐다. 우리는 콘트라 반혁명군의 옛 지도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우리가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다. 우리는 농민과 인디언 구역을 공격했다.(3) 우리 중 상당수는 무기로 위협하면 농민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2만9천 명의 사상자를 낼 정도로 참혹한 피해를 주고도, ‘콘트라 회랑’이라 불리는 농촌 주변 지역에서 전개된 반혁명은 군사적으로 실패했다. 산디니스트들은 1984년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했다. 반혁명을 지속적으로 지원한 워싱턴은 갖가지 종류의 스캔들에 빠지게 되었다. 미중앙정보국(CIA)이 콘트라 반혁명군을 재정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콜롬비아에서 코카인을 밀매한 사실이나 이란에 무기를 판매한 사실(이란 게이트)이 1986년 폭로되었다. 그리고 니카라과 항구들에다 지뢰를 매설한 사실이 폭로돼 헤이그 국제사법재판소가 1987년 미국에 유죄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니카라과의 수도 마나과는 이때 경제적으로나 인도적으로 탈진 상태에 빠졌다. 산디니스트와 콘트라 반혁명군 사이에 협상이 이뤄지고 새로운 선거가 실시되었다.

우파의 재등장과 반미 의식 고조

선거를 위해 전국야당연합(UNO)에 재결집한 반산디니스트 세력과 워싱턴의 지지를 받은 비올레타 차모로가 1990년 2월 25일 승리한다. 여론조사 결과 선거운동 기간 중 산디니스트들은 국민 53%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수아레즈의 말에 따르면, 전혀 예기치 못한 사건이 상황을 반전시켰다. “전쟁의 강도는 콘트라와의 협상 덕택에 약화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사상자 수가 감소했다. 사람들은 터널의 끝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파나마가 침공당했을 때,(4) 마나과 주재 미국 대사관이 탱크에 포위당했다. 무장 산디니스트들이 파나마와의 연대감을 보여주기 위해 거리로 뛰쳐나왔던 것이다. 이틀 후에 여론조사를 했다. 우리는 34%로 추락했다. 그 순간부터 흐름을 되돌릴 수 없었다. 전쟁으로 회귀한다는 생각이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자아낸 것이다.”

콘트라 반혁명군은 해체되고, 구성원들은 힘겹게 니카라과 사회조직에 재통합되었다. 새로운 통치자들과 소수 특권 집단은 협정을 공격하고, 니카라과 사람들에게서 혁명의 결과물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최고 지위를 차지한 ‘배타적 특권 그룹’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은 곧바로 현실을 깨닫게 되었다. 콘트라 반혁명군의 전직 사령관 중 한 명인 이스라엘 갈레아노는 “소수 특권 집단은 당신들 산디니스트의 도움을 받아 소모사를 축출했다. 그들은 우리의 도움을 받아 당신들을 축출했다. 당신들과 우리 어느 누구도 승리하지 못했다. 승자는 소수 특권 집단이다”라고 말했다.(5)

차모로는 니카라과에 신자유주의를 도입했다. 미국 다국적기업이 가장 많은 혜택을 받았지만 유럽과 아시아의 다국적기업도 혜택을 받았다. 금융 특권 그룹은 국가 재산 탕진과 경제 투기에 전력을 다했다. “단 몇 년 만에 그들은 이미 연약해진 중산층을 제거해버렸고, 농촌과 도시의 중소 생산자들의 활로를 막아버렸다. 그들은 니카라과를 역사상 최악의 경제·사회·금융 위기에 빠뜨렸다”고 누네즈는 이야기한다. 1990년부터 세 대통령 -비올레타 차모로, 아르놀도 알레만, 엔리케 볼라뇨스- 이 혁명이 이룩한 모든 것을 거의 앗아가버렸다. 임금 가치는 3분의 1로 떨어졌고 실업률은 45%에 육박해 수많은 니카라과 사람들이 비참한 삶을 살게 되었다.

이런 고통스런 과거로의 회귀를 방지할 방법이 없었다.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 만큼 혁명이 충분히 오랫동안 지속되지 못했다. 그것은 정치·경제 현실과 억지로 강요된 전쟁 때문이었다. 권력에 대한 국민의 제도적 참여가 이뤄지지 않았다. 만약 그게 이뤄졌다면 신자유주의가 그처럼 쉽게 사회적 획득물들을 해체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폰세카는 분석한다.

1994년 FSLN의 전당대회가 개최되었을 때, 두 가지 흐름이 격돌했다. 폰세카에 따르면 “한 파는 반제국주의, 사회주의, 당의 전위성을 포기할 것을 주장했다. 다니엘 오르테가가 이끄는 다른 파는 산디니즘의 사상적 원칙들을 유지하면서 프로그램을 재조정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오르테가파가 15개 중 12개의 고위직을 차지했다. 대부분의 민족지도자들, 상당수 장관과 의원들은 ‘오르테가의 권위주의’를 비난하면서 ‘수정된 산디니스트 운동’(MRS)(6) 단체를 만들기 위해 FSLN을 떠났다.

산디니스타 정권의 부활

그럼에도 2006년 11월 5일 오르테가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해(38%의 유효표) FSLN이 권좌에 올랐다. 승리하기 위해 FSLN은 수많은 정치 협정을 체결했는데, 이로 인해 니카라과 내부는 물론 외국의 동조자와 친구들로부터 많은 의구심과 비판을 받았다.

과거에는 산디니스트들이 아르놀도 알레만 전 대통령을 부패 혐의로 재판하고 구속하기 위해 보수주의자들과 동맹을 맺었다. 이번에는 산디니스트들이, 헌법자유당(PLC)이 ‘중립’을 지킨다는 조건으로, 20년 징역형에 처해진 알레만을 출소시켜 ‘가택연금’으로 대체해준다고 제안했다. 또한 산디니스트들은 1980년대 자신의 강력한 적 가운데 한 명이던 미겔 오반도 이 브라보 추기경과 ‘불가침조약’에 서명함으로써 놀라움을 자아냈다. 신교의 점진적 성장에 불안을 느낀 가톨릭교회는 불가침조약을 체결하는 것이 이익이라고 판단해 게임에 참여했다.(7)

‘제로’라는 별칭의 전설적 사령관이던 에덴 파스토라(8)는 이런 사실을 확인해주었다. “우리는 소수 특권 집단의 여러 당과 과감하고 유익한 동맹정책을 맺었다. 어떤 날은 이 사람과, 다음날은 다른 사람과 동맹을 맺었다. 우리가 매수되지 않으면서 전진하는 동안 상대방들은 분열돼 약화되었다. 만약 그들이 우리를 권좌에 올린다면, 그들이 우리에게 사회 프로그램을 재개하게 허락해준다면 협정들은 찬양받을 것이다.”

2007년 1월 10일 공식적으로 권력을 쥔 FSLN은 2008년 11월 9일 시의회 선거에서 전체 코뮌 146곳 중 105곳에서 승리한다. 우여곡절과 모욕을 넘어 건강과 교육 혜택이 국민에게 다시 주어진 덕분이었다. 수천 명의 어린이들이 다시 학교에 다닌다. ‘기아 제로’ 계획이 실시되었다. 매일 100만 끼의 식사가 교육 시설에서 분배되고 있다.

국가의 주권과 식량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낮은 이자로 토지와 돈을 중소 생산자들에게 빌려주었다. 수십만 농촌 가정은 협동조합 여성이 시행하는 이 프로젝트의 혜택을 받고 있다. 아구일라르 여사는 말한다. “여성이 안정돼 있어 거의 대부분 가족의 생존을 맡고 있다. 남성이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돌아다녀야 하기 때문에(때로는 외국으로) 더욱 그렇다.”(9) 여성은 교육을 받고 자기 몫의 소, 돼지, 종자씨도 받는다. 여성은 융자금의 20%를 상환하고, 나머지는 독립적인 식량 생산자가 되기 위해 저축을 한다. ‘파손 제로’ 프로그램은 예전에 25%였던 이자율을 5%로 낮추어, 자영업자의 45%에게 재정 지원을 한다. 은행들은 이 프로그램을 전쟁 선포로 간주했지만, 이 프로그램의 혜택을 받은 신발·가구·의류상들은 소비자에게 훨씬 싼 제품들을 공급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 대사관과 소수 특권 집단이 정치적 리더십을 상실한 것에 분노한다면 수많은 기업가들이 FSLN과 가까워진 사실에도 역시 분노할 것”이라고 누네즈는 확신한다.

나머지 문제들은 지역의 역동성에 의해 해결되고 있다. ‘미주볼리비아대안’(ALBA)(10)의 틀 안에서 니카라과는 콩과 고기를 베네수엘라의 석유와(11) 교환한다. ALBA는 또한 상당수의 사회 프로그램을 지원하고 있다. 쿠바 의사들은 베네수엘라가 보낸 최신 장비를 사용해 수천 명의 눈을 무료로 시술한다. 문맹 퇴치 캠페인 역시 ‘예, 나는 할 수 있어요’라는 쿠바 프로그램의 지원을 받아 실시되었다.

아구일라르 여사는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우리가 가진 조그만 것과 라틴아메리카와 카리브 연안 친구 국가들의 도움을 받아 우리는 적절한 속도로 전진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우리에게 미디어 전쟁을 선포했다. 문제들만을 퍼뜨린다! 아마 사람들은 FSLN이 2012년 다시 승리하는 것을 막고 싶어서 그럴 것이다.” 2008년 2월 워싱턴의 새 대사인 로버트 캘러한이 마나과에 임명되었다. 그의 존재가 옛 상처를 들춰내고 있다. 이 사람은 1980년대 존 네그로폰테(미국 국가정보국장과 국무부 부장관 역임- 역자)의 부하로서 온두라스 주재 미국 대사관 홍보담당관이었다. 그 시절 CIA는 온두라스에서 가장 많은 피를 뿌린 소수의 콘트라 반혁명군을 지도했다. 현재 산디니스트들이 급성장하는 것을 염려하는 그는 공개적으로 니카라과 야당을 지지하고 있다. 오르테가 대통령이 그의 추방을 다짐할 정도로, 그가 2009년 2월에 내정간섭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르테가의 반대자들은 국가 수반이 “먹이를 주는 사람의 손을 물어뜯는다”고 반박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무덤 속 산디노 장군은 알고 있을까?

글·에르난도 칼보 오스피나 Hernando Calvo Ospina
언론인이며 <콜롬비아, 연기 자욱한 장막 저편. 국가 테러리즘의 역사>(르탕데스리즈, 파리, 2008)의 저자.

번역· 고광식 kokos27@ilemonde.com
파리8대학 언어학 박사. 한국외국어대에서 강의하고 있다. 


<각주>  

(1) 엘살바도르의 공산당 창시자인 파라분도 마르티는 2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1932년 민중폭동이 진압된 후 총살되었다.
(2) ‘CIA의 환상적인 작전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9년 1월 참조.
(3) 혁명 권력과 대서양 연안의 미스키토스족들의 분쟁 참조.
(4) 1989년 12월 20일 미국은 비민주적이고 마약 밀매인이며 CIA의 전직 협력자이면서 파나마의 실력자인 마누엘 노리에가 장군을 전복해 체포하기 위해 ‘올바른 대의’라는 군사작전을 전개한다.
(5) 올란도 누네즈, <니카라과의 소수 특권 집단>, 시프레스, 마나과, 2006.
(6) 분리파들은 1996년 선거에서 유효표의 1%(2006년에는 7%)만을 획득함으로써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
(7) 니카라과 엘리트들과 워싱턴은 즉각 브라보 추기경을 교체하라는 압력을 바티칸에 넣는다.
(8) 1978년 8월 22일 특공대 대장인 에덴 파스토라는 왕궁을 장악했는데 이는 9월에 시작된 폭동의 서곡이었다. 국방부 부장관이 된 그는 1982년 콘트라 반혁명군에 들어갔다가, 코스타리카 국경 주변에서 성장하고 있는 산디니스트 전선에 다시 합류한다. 파스토라 분파의 존재로 얻어진 중요한 효과는 그 지역의 반혁명군 그룹 내부가 분열되면서 남부 전선을 제압하게 된 것이다. 산디니스트들에게는 엄청난 도움이 되었다.
(9) 라파엘 바이이, “니카라과 사람들은 생존을 ‘코스타리카’라고 부른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6년 12월.
(10) 베네수엘라가 추진한 이 동맹체는 베네수엘라, 쿠바, 온두라스, 볼리비아, 도미니크, 세인트빈센트그레나딘, 니카라과가 그 구성원이다.
(11) 20여 개국과 관계된 ‘카리브 석유’ 협정의 틀 안에서 베네수엘라가 제공한 석유에 대해 50%만 갚고 나머지는 20년 동안 1%의 이자율로 갚는다. 즉시 갚지 않는 50%의 융자금은 사회 프로그램을 지원하는 데 사용돼야 한다.


‘권력의 화신’ 오르테가의 야욕

니카라과 사람들이 친숙하게 ‘다니엘’이라고 부르는 다니엘 오르테가 대통령은 소모사 독재 정권 종식 후 다른 8명의 반군 지도자와 함께 산디니스타 집단지도체제 정부를 최초로 구성했던 젊은 게릴라의 모습과는 동떨어져 있다.

미국이 침략전쟁을 일으키는 동안 위계적 권위주의가 FSLN에 뿌리를 내렸다. 모든 종류의 불화가 혁명에 치명적 피해를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90년의 선거 패배가 상황을 바꿔놓게 된다. 패배 때문에 적어도 상황을 바꿔야만 했다. 당내 민주의의에 대한 요구가 FSLN 내부에서 거세진다. 오래전부터 세르히오 라미레스 전 부통령 주변에 결집한 ‘개혁론자들’과 오르테가의 ‘근본주의자들’ 사이에 갈등이 싹트고 있었다. 이런 갈등은 1994년 5월의 임시전당대회에서 폭발한다. 갈등은 5월 9일 라미레스파의 무조건적 축출과 더불어 절정에 이른다. 이때부터 FSLN 내부의 반대자들이나 오르테가와 등졌던 옛 동료들이 ‘개인적 야망, 총통식 독주, 권위주의, 사당화’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오르테가를 끊임없이 비난했다.

1998년 3월 오르테가와 그의 첫째 부인 로사리오 무리요 사이에서 태어난 딸 소일라메리카 나르바에스가 11살 때부터 10년 동안 성폭행을 당했다고 오르테가를 비난했다. 곤혹스런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당시 31살이던 딸의 뒤늦은 폭로는 5월 15~18일 개최될 FSLN 3차 전당대회 전날에 이뤄졌고, 끊이지 않았던 내부 투쟁을 극한으로 몰고 갔다. 많은 사람들이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적절한 시기에 스캔들이 터졌다고 생각했다. 소일라메리카의 옹호자들과 반대자들, 역으로 오르테가의 옹호자들이나 반대자들 모두 FSLN에서 고위 직책을 맡고 있었다. 폭로한 딸 역시 1979~90년에 산디니스타 청년당의 주요 지도자였다. 근거 있는 폭로인가, 막후 공작인가? 모든 사람이 그러는 것처럼 오르테가 역시 무죄 추정의 혜택을 받았다. 폭로 사건 초기부터 오르테가의 부인 무리요 여사는 ‘자기 딸의 머리를 세뇌한’ 사람들을 비난하면서 오르테가의 편을 들었다. 그러나 아르놀도 알레만의 PLC와의 멋진 공조에 힘입어 국회 산디니스타 그룹 수장으로서의 면책권이 박탈되지 않았던 오르테가는 재판을 받지도 않았고, 결과적으로 폭로 혐의에서 벗어나지도 못했다.

선거법 개정에 필요한 국회 유효표를 얻었던 것은 1990년대 말 오르테가와 알레만 사이에 맺어진 ‘통치권’ 협약 덕이었다. 선거법 개정에 의해 1차 투표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는 데 필요한 득표 비율이 35%(2등에 비해 5%를 앞선다는 조건하에서)로 내려갔다. 선거법 개정으로 오르테가는 2006년 11월 4일 유효표의 38%를 얻어 승리하게 된다. 그가 통치하는 동안 중앙아메리카 대학 학회지인 <엔비오>(Envio)는 이 협약이 규정한 새로운 놀이 규칙을 가혹하게 비판했다. “이 협약은 선거기구를 양당으로 만들고, 강압적으로 유권자의 의지를 양당 체제로 유도한다. 양당 체제에서는 다수가 인정받고 소수는 존중받지 못한다.”(1) 산디니스타 의원들은 투표 전날인 2006년 10월 26일 가톨릭교회의 비위를 맞출 목적으로 출산 때 치명적인 위험을 안고 있는 여성이나 강간 피해 여성에게조차 치료적 낙태를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PCL의 표에 자신들의 표를 보태주었다. 피해 여성을 도와준 모든 의사는 선거편의주의로 인해 차후에 4년에서 8년의 징역을 받게 됐다.

글·모리스 르무 Maurice Lemoine
번역·고광식 kokos27@ilemonde.com

<각주>
(1) <엔비오>, 마나과, 2000년 1~2월.

 

                        <니카라과 연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