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두라스, 되살아나는 냉전의 추억

중남미 좌파 정권 확산 막으려는 미국의 음모
정통성 없는 쿠데타 세력과 부패 세력의 야합

2009-10-06     모리스 르무안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자

지난 6월 말 군부 쿠데타로 축출된 마누엘 셀라야 전 온두라스 대통령이 9월 21일 전격 귀국해 정국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니카라과 국경을 넘어 온두라스에 입국한 셀라야 전 대통령은 수도 테구시갈파 주재 브라질 대사관에 머물면서 복귀를 적극 모색하고 있는 반면, 임시정부의 로베르토 미첼레티 대통령은 브라질 정부에 셀라야 전 대통령의 신병을 넘겨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브라질 등 다른 좌파 국가들은 셀라야 전 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선언하며 팽팽히 맞서고 있다. 온두라스에서는 쿠데타로 인해 마누엘 셀라야 정부가 전복된 뒤 이미 15명이 정치적으로 암살되고 100여 명이 행방불명됐다. 불법적이고 강압적인 로베르토 미첼레티 체제는 1970~80년대의 독재 유령을 연상시킨다. 이 위기 속에서 버락 오바마가 이끄는 워싱턴의 중남미 정책은 아직 아무런 변화가 없다. 미국은 극우적인 온두라스 쿠데타 정부를 용인할 뿐 아니라, 콜롬비아에 군사기지를 설치하는 등 중남미의 좌파 정권들을 압박하는 양상이다. 미국의 전략인가, 아니면 도박인가?


벌채용 칼을 힘겹게 든 한 무리의 고달픈 노동자들, 끝없이 펼쳐진 거대한 플랜테이션 농장, 그리고 산더미 같은 바나나들을 항구 코트레스·텔라·세이바로 실어나르는 철도들, 이 모든 것은 온두라스에서 익숙한 풍경들이다. 온두라스만큼 다국적기업의 입김이 센 곳이 어디 있을까?

1974년 2월 온두라스 정부가 농산물 수출 때 20kg당 1달러의 세금을 내는 조항을 신설하자, 미국 회사 ‘스탠더드 프루츠’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노동자 700여 명을 해고했다. 그해 4월 세금은 50센트로 낮춰졌고, 곧이어 25센트로 떨어졌다. 하지만 당시 최고 국가통치자인 오스왈도 로페스 아레야노 장군은 1975년 4월 22일 해임되었다. 세금 감면을 대가로 ‘유나이티드 프루츠’(1)의 개명 회사인 ‘유나이티드 브랜즈’라는 다국적기업으로부터 125만 달러를 받았다는 게 그 이유였다. 시대가 바뀌면 관습도 달라지는 걸까? 2008년 12월 마누엘 셀라야 대통령은 최저임금을 126유로에서 202유로로 올렸다. 이전 ‘유나이티드 브랜즈’가 또 한 차례 개명된 ‘치키타’의 이사회는 전투 준비 태세에 돌입했다. 이 회사는 연간 800만 상자의 파인애플과 2200만 상자의 바나나를 생산한다. 치키타는 다국적기업들을 자문하는 법률회사로 유명한 ‘코빙턴앤드버링’(2)을 통해, 정부의 조처에 마찬가지로 불만을 품은 ‘온두라스 기업위원회’(COHEP)와 함께 법적 제소에 나서는 등 반발했다.

다국적기업들이 싫어하는 셀라야 정권

셀라야의 자문관이고 에콰도르 주재 현 온두라스 대사인 라파엘 무리요 셀바는 “2006년 10월 이미 첫 번째 대결이 벌어졌다”면서 “정부는 경쟁입찰을 통해 셰브론, 엑손모빌, 셸과 국내 기업 디프사가 누렸던 연료의 판매와 유통 독점을 바로잡고자 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누구한테도 간섭을 받지 않아온 다국적기업들은 이번 조처로 게임의 룰이 바뀐 데 대해 불만을 품고 있다. 온두라스의 경영자 단체, 최고 법원, 찰스포드 미국 대사는 연합전선을 구축해 자유시장 규칙을 준수하려는 정부의 이런 주도권 행사를 방해하는 데 앞장섰다.”

이런 이유로 셀라야는 어쩔 수 없이 카라카스(베네수엘라) 쪽으로 손을 내밀어 ‘페트로카리브’(Petrocaribe) 협정에 서명했으며, 이 협정에 따라 베네수엘라 석유를 유리한 조건으로 반입할 수 있게 되었다. 의약품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온두라스가 쿠바 정부와 일반 의약품 공급 계약 협정을 저렴한 조건으로 맺었을 때, 수입업체들과 약품 분야 다국적기업들은 반대 전선을 형성했다. 온두라스의 대표적 제약회사 ‘핀라이’의 소유주 카나후아티 라라쉬 가문은 자신들이 소유한 전국 유력지 <엘 헤랄도>와 <라 프렌사>를 이용해 정부의 조처를 비판했다고 무리요는 설명한다.

셀라야 정부가 전복되고 6월 28일 코스타리카로 강제 추방된 것은 그가 임기 연장 불법 선거를 실시하려 했기 때문이라는 ‘찬탈자’ 로베르토 미첼레티 대통령의 주장은 터무니없는 것이다. 오히려 셀라야가 다가올 11월 선거에서 재선출될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셀라야가 의견을 구하기 위해 제헌국회 소집을 요구하는 것은(3) 2006년 1월 27일에 제정된 시민참여법 제2조에 ‘국가적 사안을 제안하고 결정하는 시민권’으로서 보장돼 있었다.

그 후 국제사회의 일치된 규탄, 미주기구(OEA)의 온두라스 축출, 온두라스 내부에 나날이 증가하는 국민적 저항에도 불구하고 셀라야는 온두라스에 귀환할 수 없었다. 7월 5일 테구시갈파 공항을 통한 귀환 시도와 7월 25일 니카라과 국경을 통한 귀환 시도가 좌절되었다. 이에 반해 로버트 우드 미 국무부 대변인은 “이런 행동은 오스카르 아리아스 코스타리카 대통령의 중재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고 있다”면서 셀라야의 귀환 시도를 오히려 비난했다.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도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에게 온두라스 사태에 개입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오바마, 대외정책 통제 못해

미국의 대통령이 오바마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다. 누군가 미국의 대통령이 될 수 있지만, 내부 부하 직원들을 완벽히 통제할 수 없으며 참모들은 더더욱 그렇다. 이번 사실은 공화당원과 민주당원 사이뿐만 아니라, 심지어 같은 민주당원들 사이에도 명백한 견해차를 드러냈다. 처음에 버락 오바마는 확실히 셀라야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힐러리 국무장관은 위기 관리 권한을 여러 좌파 정부가 확고히 자리잡은 OEA에서 아리아스 코스타리카 대통령의 집무실로 넘겨버렸다. 아리아스가 꾸민 공작은 쿠데타에 대해 전반적인 규탄을 하면서도, 셀라야가 제한된 특권만을 가지고 화해 정부의 대통령직에 복귀하게 하는 것이다.

7월 9일 아리아스의 후원하에 코스타리카의 산호세에서 회의가 열렸을 때, 미첼레티의 대표단은 미국인 자문관 2명의 도움을 받았다. 미첼레티 쿠데타 정부의 제안서 작성을 담당한 베네트 라트클리프는 홍보 전문가로, 클린턴 대통령(1993~2001) 정부에서 일했다. 래니 데이비스는 1996~98년 클린턴 정부의 자문관이었고, 선거자금 조사와 모니카 르윈스키 사건 관련 탄핵 절차에서 대변인을 맡았으며, 그 후 예비선거에서 오바마와 대결한 힐러리 클린턴의 선거 핵심 참모를 지냈다.(4)

오릭, 헤링턴앤드서트클리프 LLP, 비전아메리카스, 코맥그룹 같은 영향력 있는 국제 로펌이나 홍보회사들이 미국의 의회, 국가안전위원회 및 다른 기관들에 공공연히 로비를 펼치는 동안, 온두라스 엘리트들, 오토 라이히, 로저 노리에가(5) 같은 레이건과 부시 부자 행정부 팀들은 은밀하게 작전을 전개했다. 국무부는 기자회견에서 “법적으로 우리는 (온두라스 사태를) 쿠데타라고 말할 수 없다. 그 점에 대해 여전히 분석을 진행하고 있다”고 선언했다. 결과적으로 테구시갈파에 대한 현실적인 강제 제재는 이뤄지지 않았다.

8월 5일 온두라스 텔레비전 <카날5>의 카메라 앞에서 군 총사령관 미구엘 안젤 가르시아 장군은 차베스 대통령 이름을 언급하지 않은 채 “온두라스와 온두라스 군은 미국의 심장부까지 민주주의로 가장한 사회주의를 퍼뜨리고자 하는 한 미주 지도자의 팽창주의 정책을 저지했다”(6)고 선언했다.

셀라야의 원죄는 ‘좌파적이라는 것’

셀라야의 커다란 원죄 중 하나는 2008년 8월 26일, 미국의 전통적 ‘뒷마당’에까지 영향력을 미치려는 차베스의 야심이 담긴 ‘미주볼리비아대안’(ALBA)에 가입한 것이었다.(7) 2006년 11월 니카라과에 산디니스트가 복귀한 후, 마우리시오 푸네스가 2009년 3월 15일 엘살바도르에서 1980년대 게릴라들인 ‘파라분도 민족 해방전선’(FMLN)의 깃발 아래 선출되었다. 이번 사건과 관련된 메시지는 분명하다. ‘너무 좌파적’ 정치는 위험할 수 있다는 점이다.

말할 것도 없이 미국이 라틴아메리카를 통제하려고 새로운 전투를 전개한 것이었다. 셀라야를 적극 지지하는 국가들 중에서 ALBA 멤버들, 특히 핵심 국가들인 쿠바·볼리비아·에콰도르·니카라과·베네수엘라는 가장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므로 미국은 모든 방법을 동원해 이들을 물리쳐야 한다. 그러나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반혁명군인 ‘콘트라’가 니카라과 산디니스트들에 대항해 임시 주둔한 온두라스 지역에서 죽음의 저주를 퍼붓고 있을 때인 1983년, 미국은 온두라스의 푸에르토카스티야에 지역군사교육센터(CREM)를 개설했다. 콘트라 반군은 이 센터에서 물자를 지원받아 무장하게 되었다. 온두라스 군인들과 2400명의 엘살바도르 엘리트 군대가 이곳에서 훈련받았다. 그 후 미국은 팔메롤라에 소토 카노 공군기지를 존속시키고 있는데, 현재 600명의 인원이 이곳에서 작전을 펼치고 있다.(8) 기지의 존재에 확실한 위협을 느낀 셀라야는 이 공항을 조만간 민간 비행장으로 바꿀 것이라고 예고했다. 당시 에콰도르에서도 라파엘 코레아 대통령이 만타의 전초작전기지 허가권을 미국에 연장해 주지 않아 7월에 폐쇄되었다.

펜타곤은 이같은 상황을 반전시킬 카드를 다시 만지작거리고 있다. 곧 발효될 협정에 따라 미국은 콜롬비아의 라란다와 아피아이(콜롬비아 동부), 톨레마이다와 팔렌케로(콜롬비아 중부), 말람보와 카르타젠(카리브해 연안), 말라가(태평양)에 7개의 군사기지 사용을 양도받는다.

그런데 기묘한 신호가 콜롬비아로부터 발신되고 있다. 알바로 우리베 대통령은 ‘콜롬비아 해방군’(FARC)이 소멸되지 않았음에도 FARC가 약화되고 사라졌다는 점을 끊임없이 전파하고 있다. 이런 소문 유포를 둘러싸고 완벽하게 상호 보완적인 두 가지 가설이 존재하는데, 우리베가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또는 미국·콜롬비아의 목표가 예상보다 훨씬 더 원대하다는 것이다.

누가 테러리스트를 규정하고 또 마약 밀매범을 정의하는가? 현재로선 워싱턴과 콜롬비아가 경제단체들과 통신기업들 사이에 맞물린 이해관계를 이용하고, 세계화 확대로 더욱 영향력이 커진 미디어의 매카시즘을 활용해 테러리스트와 밀매범을 규정하고 있다.(9) 스페인 일간지 <엘 파이스>(2009년 7월 16일)가 입수한 미 의회보고서는 베네수엘라를 새로운 ‘마약국가’로 간주하고 있다. 발췌 기사는 “미 정보국이 2007년 마약을 운반한 것으로 의심되는 베네수엘라 공항발 비행기 177대를 조사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미국이 규정하는 테러리스트의 의미

베네수엘라 군의 미사일 발사대 3기가 FARC에서 발견되었다고 콜롬비아 정부가 규탄한 사실이 널리 유포됨으로써 8월에 새로운 스캔들이 터졌다. 차베스가 마약 테러 행위를 하고 심지어 전쟁까지 벌이다니! 사실 이 장비는 1988년 스웨덴의 ‘사브 보포르스 다이내믹스’사가 베네수엘라에 판매한 한 세트의 AT4 대전차 로켓 장비의 일부인데, 1995년 2월(차베스가 집권하기 3년 전) 메타강 유역 카라보보의 베네수엘라 국경 군부대를 공격한 콜롬비아 게릴라 그룹이 5기를 훔쳐간 것이었다. 그리고 콜롬비아는 이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동시에 라울 레이에스(10)의 ‘마법 컴퓨터’에 FARC가 라파엘 코레아 현 에콰도르 대통령의 선거운동에 40만 달러를 지원했다는 정보가 실려 있다고 퍼뜨렸다(<엘 파이스>, 8월 2일). 한편 <월스트리트저널>은 FARC와 온두라스의 셀라야 지지자들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증명해주는 서류들을 ‘손에 넣은 것’처럼 암시했다.

이런 끊임없는 정보 흘리기 탓에 국제 여론은 날이 갈수록 ALBA 회원국들을 조금씩 더 불신하게 되었다. ALBA 회원국 정부들에 영향을 끼치는 쿠데타와 폭동 시도(베네수엘라 2002년 4월과 12월, 볼리비아 2008년 9월)가 벌어졌을 때, 온두라스에 쿠데타가 발생한 다음날 보도된 ‘마누엘 셀라야, 쿠데타를 저지르다’(11)와 같은 주옥같은 기사를 통해 가해자와 피해자를 뒤집는 일이 그만큼 용이해질 것이다. 심지어 서구에 방해되는 대통령들의 전복을 정당화하기까지 한다.

콜롬비아의 이웃국가들은 이런 위기 속에 콜롬비아에 마약 밀매, 테러리즘, 국제적 성격의 또 다른 범죄들을 격퇴할 목적으로 외국군 기지가 건설되는 것을 우려한다. 남미국가연합(UNASUR) 정상회담이 8월 10일 에콰도르 키토에서 개최되었을 때, 차베스는 코레아 에콰도르 대통령과 에보 모랄레스 볼리비아 대통령의 승인을 얻어, 콜롬비아의 미군 증가가 해당 지역에 ‘전쟁 바람을 불러일으킨다’고 비난했다.(12) 브라질의 먼 바다에서 발견된 대규모 탄화수소 지층 위를 순항하는 미국 제4함대의 활동에 이미 민감해진 셀소 아모림 브라질 외무장관은 “우리가 염려하는 것은 콜롬비아 내의 질서 유지에 필요한 능력보다 훨씬 강력한 외국 군대가 주둔하고 있다는 점”(13)이라고 명확히 표현했다.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브라질 대통령과 라틴아메리카 대통령들은 이번 사건에 대해 오바마 대통령과 논의하기를 원한다. 필립 크롤리 미 국무부 대변인은 “합의는 ‘엄격히 양자 간’에 이뤄지는 것이지, 해당 지역 마음대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라면서 차후 대화의 한계를 이미 명백히 표명했다.(14)

글·모리스 르무안 Maurice Lemoine

번역·고광식 kokos27@ilemonde.com
파리8대학 언어학 박사. 한국외국어대에서 강의하고 있다.  


<각주>

(1) 1899년 설립된 미국 바나나 회사 ‘유나이티드 프루츠’는 중앙아메리카 정기벌목회사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이 회사는 1954년 과테말라에서 하코보 아르벤스 대통령을 축출하는 데 직접 간여했다.
(2) 미국의 현직 법무장관이고 버락 오바마의 공동선대위원장이며 클린턴 행정부 시절 법무부 부장관이었던 에릭 홀더는 2001년부터 최근까지 이 로펌에서 근무했다. 그는 2007년 치키타가 콜롬비아에서 민병대들과 맺은 관계 때문에 미국에서 2500만 달러의 벌금에 처해졌을 때 변호사로 사건에 참여했다. 니콜라스 코즈로프, ‘과테말라의 아르벤즈 대통령에서 온두라스의 셀라야 대통령까지: 라틴아메리카의 치키타’, <카운터펀치>, 2009년 7월 17~19일 참조.
(3) ‘쿠데타’(<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9년 8월)와 ‘온두라스, 첩보원들의 복귀’(www.monde-diplomatique.fr/carnet/2009-07-01-Honduras) 참조.
(4) 진저 톰슨, “온두라스의 경쟁자들은 정치 위기를 해결하는 데 미국의 개입이 결정적이라고 생각한다”, <뉴욕타임스>, 2009년 7월 13일. 마크 와이스브로트, “누가 미국 외교정책을 담당하는가?”, www.guardian.co.uk, 1999년 7월 16일. 데이비스가 미국에서 이스라엘 이미지를 개선할 목적으로 설립된 기구인 ‘더 이스라엘 프로젝트’(TIP)의 자문관과 대변인이라는 사실을 덧붙여야 한다.
(5) 두 명 다 부시 정부 임기 때 라틴아메리카 담당 보좌관이었다.
(6) <엘 누에보 헤럴드>, 마이애미, 2009년 8월 6일.
(7) 호세 데 코르도바, ‘온두라스 위기의 배경, 우고 차베스의 영향’, <월스트리트저널>, 뉴욕, 2009년 7월 27일.
(8) 무장 폭동을 방지하기 위해 온두라스의 1982년 헌법은 자국 내에 외국군의 상시 주둔을 금지하고 있다.
(9) 1970년대 초 칠레 일간지 <엘 메르쿠리오>의 편집 방침은 살바도르 아옌데 정권을 적극적으로 전복하는 것이었다. 지난날의 <엘 메르쿠리오>(칠레)가 여전히 동일 회사명으로 존재하고 있고, <엘 헤랄도>와 <라 프렌사>(온두라스), <엘 나시오날> 또는 <엘 유니베르살>(베네수엘라), <라 라손>(볼리비아), <엘 티엠포>와 <세마나>(콜롬비아) 역시 마찬가지다. <월스트리트저널>, <마이애미 헤럴드>(미국), <엘 파이스>(스페인), <리베라시옹>과 다른 신문들(프랑스)도 빼놓아서는 안 된다.
(10) 라울 레이에스는 2008년 3월 에콰도르 영토에서 살해된 콜롬비아해방군의 2인자였다. 콜롬비아군이 그에게서 3대의 컴퓨터를 발견했는데, 거기에서 마약·게릴라의 음모와 연관된 ‘비밀들’이 끊임없이 터져나오고 있다. 이 정보들의 신빙성에 대해서는 ‘콜롬비아, 인터폴, 사이버 게릴라’(<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9년 7월)와 ‘콜롬비아의 프랑스 밀사’(<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9년 5월) 참조.
(11) <리베라시옹>, 2009년 6월 30일.
(12) 남미국가연합 회원국들은 만약 현 온두라스 정부하에서 선거가 실시된다면 선거 결과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명백히 밝혔다.
(13) <라 폴라 데 사오 파울로>, 2009년 8월 2일.
(14) LatinReporters.com, 2009년 8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