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파간다로 전락한 “다르푸르를 구하자”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서구인들의 자기만족적 운동
사건 성격 자의적 왜곡…기업가들, 탈세 노려 기부
영화배우 조지 클루니는 미국에서 벌어진 ‘다르푸르를 구하자’(Save Darfur) 캠페인에 가장 깊은 인상을 남겼다. 2003년에 미국 대학생과 고등학생들이 가장 지속적으로 참여한 캠페인은 이라크전 반대운동이 아니라 바로 다르푸르 구조운동이다. 산하 단체들의 효율적인 로비 활동 결과 국제형사재판소(ICC)가 오마르 알바시르 수단 대통령을 고발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캠페인으로 수백만 달러가 모금되었지만 다르푸르에는 단 한 푼도 전달되지 않았다. 이 캠페인은 그야말로 선전 홍보운동이고, 그나마 항상 엄정하게 진행되지도 않는다.
‘다르푸르를 구하자’의 성공은 1960년대 미국에서 벌어졌던 반전운동이나 80년대 아파르트헤이트 반대운동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이 캠페인은 여러 면에서 다른 운동들과 구별된다. 우선, 이 운동은 평화적이지 않다. “군사 개입!”, “이라크 철수! 다르푸르로 가자!”는 슬로건들이 이 캠페인의 성격을 보여준다.
유엔 인도주의 운동을 담당하고 있는 한 책임자는 ‘다르푸르를 구하자’ 운동으로 모금돼 아프리카에 전해진 1500만 달러의 분배에 관한 질문을 받고 “제로”라고 대답했다. 워싱턴에 자리잡고 있는 이 운동본부에 확인 전화를 하자 “우리는 지원 사무소가 아니다. 우리의 목적은 단지 다르푸르의 입장을 옹호하는 것이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수백만 달러 모금… 분배는 ‘제로’
2004년에 개설된 ‘다르푸르를 구하자’ 인터넷 사이트에 따르면, 180개 단체 1억3천만 명이 이 운동에 참가하고 있다. 원래 이 운동은 종교단체, 특히 유대교와 복음주의 종교단체에서 시작됐다. 이들은 알바시르 정부가 2003년 이래 수단 동부에서 인종청소를 계속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지속적인 압력 행사와 미디어 홍보, 정치 홍보 끝에 이 운동은 2004년 미국 정부가 다시금 알바시르 대통령을 고발하게 만들었다.(1)
하지만 이 고발은 사실과 다른 면이 있다. 2003~2004년 다르푸르 폭력사태가 절정에 달했던 시기의 희생자와 전체 희생자 계산 또한 상당히 과장돼 있다. 미 의회 소속 정부 프로그램 감사기구인 미 회계감사원(GAO)은 다르푸르에서 사망한 희생자 수를 놓고 세계보건기구(WHO) 통계(7만 명)와 ‘다르푸르를 구하자’ 쪽 집계(40만 명)에 대해 12명의 전문가에게 조언을 구했다. 전문가들은 너무 높은 수치는 개별 케이스들을 과도하게 일반화한 것이어서 신뢰도가 떨어진다고 결론지었다. 그들은 희생자 수를 11만8142명(2)으로 집계한 벨기에 재난역학연구소(CRE)의 통계가 가장 사실에 접근해 있다고 평가했다. 또한 이 연구소 자료에 따르면 희생자들은 단지 폭력으로 인해 사망한 것이 아니라- 폭력으로 인한 사망자 수는 3만5천 명에 불과하다- 가뭄과 사막화가 주요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다르푸르를 구하자’는 수치를 과장했을 뿐 아니라 사건의 성격에 대해서도 과오를 범하고 있다(상자기사 참조).
더욱이 ICC가 알바시르 대통령을 전범 및 반인륜 범죄로 기소했고, 그 공소시효가 2009년 3월 4일로 끝났지만 인종청소로 재기소하지 않았다.
아프리카연합이 평화적 해결책을 모색하기 시작한 2004년 말에 이르러 내전으로 인한 사망자 수는 현격히 줄어들었다. 잔 엘리어슨 유엔 특사는 2008년 1월~2009년 4월에 사망자 수가 월평균 150명 수준으로 감소했다고 밝혔다(내전 초기 사망자 수는 하루 평균 200명). 그는 다르푸르가 위급 상황을 벗어나 저위험 내전 상황에 접어들었다고 본다. ‘다르푸르를 구하자’ 운동의 선전구호들을 경청하는 사람들에게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이 운동은 광고회사를 풀타임으로 고용해 <뉴욕타임스>에 대단히 눈길을 끄는 전면광고를 내보낸 바 있다. 1960~70년대 대중운동이 이용했던 방법들과 매디슨 애비뉴(광고의 대명사)의 뛰어난 마케팅 감각을 결합한 이 운동은 비용이 많이 드는 홍보 캠페인을 벌였다.
‘테러와의 전쟁’과 유사점
신기하게도, ‘다르푸르를 구하자’의 프로파간다는 그 메시지가 신빙성을 잃을 때 가장 강력한 임팩트를 만들어낸다. 1960년대와 비교해보면 이 역설을 이해할 수 있다. 교육학적 측면에서 보자면 60년대의 운동들은 젊은이들(특히 대학생들)이 연구자와 지식인 세계에 대항하는 양상을 보였다. ‘다르푸르를 구하자’는 교육자의 위치에서가 아니라 광고업자의 위치에 있다.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들을 ‘정당한’ 입장에 서게 해 만족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그들은 대학생들보다 고등학생들을 더 겨냥한다. 고등학생들은 본의 아니게 아프리카에 상륙한 군인들의 ‘사촌들’이다. 그 결과, 토론이나 교육학적 필요들은 무시한 채 공연이나 스포츠계 유명 인사들이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 운동은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발언들을 세심하게 준비했다. 르완다에서 얻은 교훈이 바탕이 됐다. 때로는 오래 생각할 시간이 없다, 너무 늦기 전에 행동해야 한다고 말한다. 투치족이나 후투족이 무엇인지 알 필요도 없고, 왜 투치족이 후투족에게 학살당했는지 그 이유를 알 필요도 없다. 청소년 세대가 ‘<CNN> 효과’(<CNN>이 세계의 주요 사건·사고를 생생하게 현장 중계해 해당 국가의 정책 결정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가설- 역자)를 쉽게 받아들이도록 만든 것이 바로 생각과 행동 사이의 이분법이다. 이는 중환자를 대하는 의사에게 진단할 시간은 없고 단지 약을 처방할 시간만 있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며, 개입하기 위해 특별한 지식을 쌓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충격을 많이 받은 사람들이 더 빨리 행동하기 마련이다. 환자를 간호하기보다, 환자를 지켜보는 사람들을 진정시키고 있는 셈이다.
사유 없는 행동이 남긴 부작용들
하지만 르완다에서 얻은 진정한 교훈은 모든 것을 알지 못한다고 해서 앎이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행동해서는 절대 안 된다, 갈등의 해결은 군사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이다, 그 지역 현실에 뿌리내리지 못하면 어떠한 평화도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이다.
2003년 이래 다르푸르 구조운동은 대학생과 고등학생들 사이에서 꾸준히 지속되고 있다. 하지만 미국인은 자기들 나라가 직접 개입된 근동 문제에 더 전념해야 옳았다. 젊은이들이 이라크에 대해 얘기할라치면 그들은 정치적인 방식을 택한다. 우리가 이라크를 떠나면 어떻게 될 것인가? 수니파와 시아파는 싸울 것인가? 쿠르드족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이라크를 말할 때 그들은 미국의 영향력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스스로 죄책감을 느끼거나 무력하다고 느낀다. 반대로 다르푸르를 얘기할 때는 무언가 할 수 있다는 느낌, 마치 그들이 구세주라도 된 것 같은 느낌을 갖는다.
미국인들은 단체에 기부할 때 대단히 관대하다. 하지만 그들은 세금을 내지 않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인도주의 단체에 100만 달러를 기부하는 사람이 조세제도의 빈틈을 찾아내기 위해 천문학적 액수의 변호사 비용을 지불하기도 한다. 이런 비교를 더 밀고 나가보면, 다르푸르는 기부이고, 이라크는 세금이다. 다르푸르는 이라크에서 멀리 떨어진 피신처, 바꿔치기가 가능한 은신처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평온함을 느끼는 것이다.
글·마무드 맘다니 Mahmood Mamdani
컬럼비아대 인류학 교수, 아프리카 사회과학진흥위원회장. 저서에 <구세주와 생존자. 다르푸르, 정치와 테러 전쟁>(판테온, 뉴욕, 2009)이 있다.
번역·김계영 canari62@ilemonde.com
파리4대학 불문학 박사. 저서와 역서로 <청소년을 위한 서양문화사>(2006), <키는 권력이다>(2008) 등이 있다.
<각주>
(1) 아를렌 게츠, ‘비극을 포장하며’, <뉴스위크>, 뉴욕, 2007년 10월 26일.
(2) 데바라티 구하 사피르, 올리비에 드곰, <다르푸르: 사망자 통계-다양한 데이터로 측정한 사망률>, CRED, 브뤼셀, 2005. www.cred.be
(3) www.savedarfur.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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