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르푸르, 다양한 지역 요인 얽힌 내전
‘다르푸르를 구하자’는 1987~89년에 시작된 분쟁의 원인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발발 당시 다르푸르 분쟁은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었다. 가장 큰 원인은 영국의 식민지 통치 기간 중의 토지분배 정책이었다. 다르푸르의 모든 토지는 부족별로 재분배됐고, 이 과정에서 유목민족들은 배제됐다. 1940~80년대 대가뭄 시기를 거치면서 사하라사막이 남쪽으로 40km나 확대되자 비정주민들은 남하해 수단 중부의 제벨 마라 산악지대를 장악했다. 그리고 농민과 유목민 사이의 해묵은 분쟁이 이어졌다. 가장 비옥한 땅을 갖게 되는 사람이 가뭄에서 살아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로널드 레이건은 1981년 미 대통령 취임 즉시 리비아를 테러국으로 지정하고 이 지역에 관심을 집중시켜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이때부터 한쪽에는 미국·프랑스·이스라엘이, 다른 쪽에는 리비아와 소련 양대 세력이 수단에 인접한 차드 내전에 개입했다. 다르푸르는 차드 정부 지원 세력의 군사 거점 후방기지가 됐다. 1980년대, 물은 부족했지만 다르푸르는 무기로 홍수를 이뤘다. 즉, 수단 정부가 개입하기 이전에 이미 국제 세력들이 개입돼 있었던 것이다.
1987~89년 수단 동부에서 벌어진 내전은 가혹했다. 악명 높은 잔자위드 민병대(1)도 이 무렵 만들어졌다. 1989년 5월 엘파셔에서 열린 화합 포럼에서 한쪽은 홀로코스트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상대편을 집단학살이라고 비난했고, 다른 쪽은 다르푸르 ‘원주민’들이 자행하는 인종청소라고 비난했다. ‘다르푸르를 구하자’는 집단학살이라고 비난하는 쪽의 입장을 선택한 것이다.
엄밀한 의미에서의 다르푸르 봉기는 2003년, 두 진영 중 한 편이 수단 정부를 불안정하게 할 목적으로 진짜 반군운동으로 나아가면서 발생했다. 부족별로 전투요원들이 충당되기는 했지만 반군연합은 부족 차원을 벗어났다. 민병대는 수단 남부의 자치권을 주장하는 수단민족해방군(SPLA)과 손을 잡았고(2), 다른 편은 종교지도자 하산 알투라비(3)의 이슬람 반대세력과 연결됐다. 무장봉기에 대처하기 위해 알바시르 대통령이 유목민 진영과 손을 잡은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때부터 땅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은 국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싸움을 겸하게 됐다. 현장에서는 학살이 이어졌다.
글·마흐무드 맘다니 Mahmood Mamdani
우간다 마케레레(Makerere)대학 마케레레 사회조사연구소 소장, 미국 컬럼비아 허버트 레먼 정부학 석좌교수. 1946년 인도 뭄바이에서 태어나 우간다 캄팔라에서 자랐으며 1963년 미국 피츠버그대학에 입학한 뒤 당시 시민권운동에 참여했다. 주요 저서로 『구원자와 생존자: 다르푸르, 정치, 대테러전쟁 Saviors and Survivors: Darfur, Politics, and the War on Terror』 등이 있다.
번역·김계영 canari62@ilemonde.com
<각주>
(1) 잔자위드는 ‘아랍인들’로 구성된 민병대로, 대략 ‘칼라슈니코프(러시아제 AK 소총)로 무장한 기병들’이란 뜻이다. 그들은 ‘운동’이나 조직 단위가 없다. 그들은 그저 도적떼이거나 수단 정규군에 소속된 보조원들이다.
(2) 제라르 프뤼니에, ‘Paix introuvable au Soudan 수단의 불안한 평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02년 12월호 참조.
(3) 하산 알투라비는 1989년 알바시르와 함께 쿠데타를 주도한 인물이다. 10년 동안 막후의 실력자였던 그는 1999년 알바시르 대통령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야당 반대 세력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