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한 프로메테이즘, 유치한 낙관주의

위기에 처한 생태, 그 어떤 지능보다 훨씬 복잡
비관적 태도라야 문제의 본질과 대면할 수 있어

2009-10-06     모나 숄레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자

2006년 여름. 이날도 여느 아침처럼, 실업자 신세인 영국의 젊은 컨설턴트 로렌스 쇼터(<낙관주의자의 비밀> 저자)는 그의 이웃들이 출근길에 몰고 나가는 메르세데스와 BMW가 내는 굉음을 듣는다. 하지만 그는 침대에서 좀체 빠져나올 수 없다. 절망에 찬 그는 “나한테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라고 자문한다. 그러다 그는 라디오를 켠다. 그리고 그는 갑자기 깨닫는다. 미디어들이 끊임없이 장황하게 반복 열거하는 전쟁, 전염병, 경제위기 등이 자신을 쇠약하게 하는 재난들이라는 사실을….

그 후 그는 스스로 임무를 부여한다. 불행의 예언자들에게 복수를 하고, 그 대신 낙관주의를 복원해 이를 전세계에 퍼뜨리는 일이 그것이다. 다시 말해 그는 비관론자들, 즉 자신보다 훨씬 많은 책을 읽은(척 보면 알 수 있다) 냉소주의자들에게 보복할 작정이다. 그들은 으레 저녁 식사 때 아리따운 여성 앞에서 그를 모욕하며 즐거워하는 작자이다. 그는 이번 기회에 자신의 장래를 보장할 웅대한 운명을 실현하리라 다짐한다.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다보스포럼’과 ‘클린턴재단’ 그리고 그 밖의 수많은 유력 기관들이 나한테 문을 열어줄 테고, 난 분주한 새 삶을 누리게 되리라.”

여기에서 우리는 쇼터가 갖는 불안의 근원을 금세 감지할 수 있다. 그는 신자유주의와 테크노사이언스가 결합해 생긴 능력들이 인류를 밝은 미래로 인도할 것이라는 자신의 믿음이 심각하게 흔들리고 있음을 잘 알면서도, 결코 그 믿음을 버리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는 우울했다. 그래도 그는 해결책만 생각했다. 이왕이면 카페와 유기농 슈퍼마켓의 체인점, 그리고 무료 다과를 제공하는 소프트웨어 체인 업체들의 글로벌 유통을 이끌어낼 묘안은 없을까? 그는 사람들이 그에게 “모든 것이 제대로 관리되고 있고, 우리가 인류사에서 가장 번영의 시대, 가장 멋진 시대를 살고 있다”고 말해주길 고대한다. 그래서 그는 만나는 사람마다 그들이 알고 있는 낙관론자들을 소개해달라고 호소한다. 가끔, 장난꾼은 그를 잘못된 길로 안내한다. 그럴 때면 그는 자신이 미친 비관론자, 어쩌면 심지어 마르크스주의자인지도 모르는 자의 소굴에 무모하게 뛰어들었다는 생각에, 이마에 식은땀이 맺히는 것을 느낀다.

불안의 근원은 낙관주의

쇼터는 지구 온난화의 현실을 부정하는 덴마크 교수 비욘 롬보르와 접촉을 시도했지만, 안타깝게도 그 교수는 그의 이메일에 답장을 주지 않았다. 이후 그는 노화 중지와 인류의 불멸을 주장한 영국의 한 연구원을 비롯해, 프랑스의 불교도인 마티외 리카르, 서핑의 달인인 캘리포니아 랍비, 인터넷 기업 구글의 한 여성 이사 등 다양한 사람들과 접촉했다. 이어 그는 제3세계를 여행했다. “반세계화를 외치는 사람들은 환경오염, 처참한 노동현장 등을 규탄하지만, 지금 인도인들 중에 레이벤 선글라스를 구입할 만한 이가 얼마나 되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는 얼마 안 있으면 인도 벵갈루루가 모든 면에서 현재의 미국 샌프란시스코처럼 되리라 확신한다. “그때까지 난 더는 벵갈루루를 찾지 않으리라”고 그는 다짐한다.

쇼터는 사소한 것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는 ‘히피 취급’을 받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극복하고, 긍정적인 사고를 배우기 위해 서점에 들러 ‘자기계발’ 코너를 찾았다. 이어 그는 자신의 모든 소원을 실현하기 위해, 혹은 신과 ‘윈윈’ 파트너십을 맺기 위해 모르 바르벨의 저서 <우주에서 주문하기>란 책을 찾아낸다. 책의 내용은 그에게 현기증 나는 지평을 열어준다. “콩고민주공화국을 생각하라! 우리는 저들에게 평화와 풍요로움을 보여줄 수 있다.” 곧이어 책을 읽으면서 그는 “부정적 사고의 진행을 막기 위해” 자신만의 방법을 발견한다. “일어나 손바닥으로 벽을 치며 ‘스톱’을 외쳐라! 이것은 단순한 테크닉이지만 매우 효율적이다.”

그는 흔히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맞닥뜨리는 여러 문제들, 가령 정신적 혼란, 나약함, 자만, 유아적 이기심 등 가장 기본적인 것조차 판단하지 못하게 하는 병적인 무능이나 스타에 대한 맹목적 숭상 등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들을 곳곳에 언급해 눈길을 끈다. 사람들은 바로 이 때문에 <낙관주의자의 비밀>의 저자인 쇼터를 비관론자인 베르트랑 메외스트와 한방에 가둬야 한다는 가학적인 환상을 갖게 되는 것이다. 생태철학자 베르트랑 메외스트는 철학자 장피에르 뒤퓌가 “계몽적인 극단적 비관주의”(1)라 칭한 독일 사상가 귄터 안더스(1902~92)와 <예방의 원칙>의 창시자 한스 요나스의 업적을 잇는 많은 저자들 중 한 명에 속한다. 이들 중 메외스트가 가장 비관론자다. 그는 “시장이 촉발시킨 것을 시장이 전혀 제어할 수 없을까봐”, 그리고 시장이 일련의 잔꾀를 부리더라도 자유주의 사회가 “정신 세계는 항상 자신의 존재를 고집스럽게 찾는다”는 규칙을 무시할까봐 강한 우려를 표명한다. 요컨대 “오랫동안 시스템이 정상 작동하지 않은 초거대 타이타닉호(l’Hypertitanic)의 궤도를 수정하지 못해 우리는 분명 빙산을 피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기술은 위기 극복 해법 못 돼

그러나 메외스트는 그의 저서 <모순어법의 정치>에서 “우리는 낙담할수록 오히려 우리 자신에게 더 많은 동기를 부여해 그런 상황에 맞게 대응할 수 있도록 한다”고 주장한다. 비록 수필가들이 각각 잡다한 관점에서 나름대로 문제 해결 방식을 제시하더라도, 이들은 하나의 사실, 즉 우리가 인류의 역사에서 전례 없는 순간에 살고 있다는 것에 동의한다. 언론인 에르베 캄프는 이 순간을 마치 “인류가 생물 영역의 한계와 만나는 지점”이라 정의하고, 여성 과학철학자 이사벨 스텐저스는 의도적으로 도발적인 사진을 사용해가며 이 시기를 (대지의 여신인) ‘가이아(2)의 출몰기’라고 했다. 메외스트가 “역사상 인류가 처한 가장 심각한 위기”라고 정의한 상황에 직면한 우리는 기술적 해결책만으로 만족할 수 없다. 가능하다면 우리의 모든 행동이나 인류의 표현 방식, 의무와 위상을 재점검해봐야 한다. 뒤퓌는 <쓰나미에 대한 형이학적 소고>에서 현대인을 이제 막 정신분석학에 입문한 사람에 비유한다. 열악한 처지에 놓인 이 신참 정신분석학자는 모든 성급한 결정을 자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인류가 엄청난 재난을 당했을 때, 패닉 상태에서 잠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능력과 현재 인류가 살고 있는 경이로움을 관조할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한다면 좋을 성싶다. 왜냐하면 인류는 심지어 자신의 생존 문제가 걸려 있는 순간에도 자의식에 접근하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혁명적인 사고를 수행할 만한 자질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캄프는 그의 저서 <지구를 구하기 위해, 자본주의에서 벗어나라>에서 어려움을 호소한다. 하지만 “조작된 사회 여론이 젊은 세대에게 개인이 전부라고 끊임없이 반복해서 말하더라도 젊은 세대가 사회적 연대의 가치를 재발견해야 한다”고 그는 강조한다.

캄프는 싸구려 생태 담론은 항상 개인을 겨냥한다고 지적한다. 이 담론들은 각자 ‘자신’의 지구를 ‘자신’의 집에서 완성하기에 안성맞춤인 ‘좋은 행동’들을 들먹인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스텐저스는 똑같은 방식으로 되묻는다. “실현 가능하고 바람직한 다른 제안들, 즉 당장은 원하는 사람들끼리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같이 할 수 있는 제안이 어디 있는가? 구체적이고 집단적인 협상을 거친 선택이 어디 있는가? 성공한 사람과 실습생이 공유할 수 있는 사례가 담긴 상상력으로 가득한 이야기가 어디 있는가? 서로를 격리시키고 서로를 평가하는 것에 반대하는 노동 형태, 즉 함께 일하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키고 모든 사람의 성공을 돕고 공동 작업의 힘을 경험하게 하는 노동의 형태는 어디 있는가? 우리는 이 모든 것, 이를테면 우리를 교육하고, 움직이고, 세뇌하고, 비워버린 방식을 기억해야만 한다.”

나치즘과 근대성의 구분선은?

이처럼 저자들마다 자신의 소망이 담긴 새로운 사고의 틀을 밝히기 위해 전개한 분석들은 대부분 섬세하고 적절했다. 하지만 프랑수아 플라오는 그의 저서 <프로메테우스의 황혼>에서 우리가 물려받은 신념에 대해 좀더 멀리까지 탐험하며 의문을 제기한다. 지식의 보물찾기 중에서 가장 설득력 있는 방식은 서구 문명 수세기를 거쳐 전해 내려오는 프로메테우스의 숨겨진 진화와 지속성을 캐는 것이다. 뒤퓌가 ‘오만한 휴머니즘’이라 지칭한 이 게임은 현대 프로메테이즘, 즉 자연을 완전히 제압하는 인간의 능력에 대한 신뢰 위에 확립된 이 위대한 광기가 어떻게 예술·과학·기술, 심지어 이데올로기를 키우고 세뇌시켰는지 보여준다. 모든 이데올로기를 걱정스런 방식으로 키우고 세뇌시켜,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미국 우파가 자랑하는 방임주의 그리고 나치즘과 자유민주주의처럼 정치 방향이 극과 극인 이데올로기들이 프로메테우스의 영감을 공유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문화적 기반의 편재(遍在)가 결과적으로 그 기반을 볼 수 없게 만들고, 바로 그 기반이 지금 우리를 파멸로 이끌 위험이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혼란스런 시각이 나오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주 나치즘과 근대성을 구분짓는 방역선을 설치하려 노력한다. 나치즘은 철저히 기이한 것으로 내모는 반면, 근대성은 거의 순수한 것으로 치부한다. 특히 나치즘을 근대성이 결여된, 향수에 젖은 구시대적 가치로의 회귀로 규정했던 프랑스 철학자 뤼크 페리가 그러했다. 이런 시각으로 그는 생태주의와 나치즘을 접근시켜, 이 둘이 자연에 대해 동일한 태도를 갖는 것처럼 몰아갔다. 이 논리에 메외스트는 “나치즘은 분명 근대의 야만, 즉 악화되고 미쳐버린 근대성의 형태”이며, “페리가 자연을 예찬하는 것은 다른 것에 겹쳐 나오는 부수적인 주제로, 자신을 위한 상상 속의 보상을 노린 것”이라고 반박한다. 근대성의 대표적 단어가 ‘슬픔’이라 생각한 페리는 다른 사람이 만들어놓은 나쁜 선례(나치즘- 역자)를 이용한다. 즉, “슬픔과 파멸의 환상”과 “힘으로 세상을 재정비하겠다는 의욕”으로 나치즘이 “우리의 근대성을 가장 명확하게 앞당겨준다”는 보기 드문 프로메테이즘 선언을 한 것이다. 한편 플라오는 한술 더 떠서 “20세기의 재난을 단지 전체주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식민 팽창주의와 1차 세계대전을 전체주의 체제 탓으로 돌릴 수 없다는 사실을 잊은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러자 프로메테이즘은 우리가 쉽게 떨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시각에 힘이 실린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가 자랑스러워하는 가치인 자유, 진보, 개인의 해방운동, 다른 문화에 제안하고 강요해도 정당할 것처럼 보이는 근대성”과 뒤얽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모든 관건은 진보에서 ‘프로메테우스적이지 않은 개념’을 확립하는 데 있다. 계몽주의 시대의 유산에 애착을 갖는 스텐저스는 이 결론에 동의하면서도 “어떻게 그것을 계승”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한다. 그의 의문은 계속된다. 어떻게 자연스럽게 이 문제에 개입할 좋은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까? 어떻게 초보 주술사처럼 굴지 않고 인류의 운명을 개선할 방안을 찾을 수 있을까? 어떻게 서구에서 개인을 그의 친구들과 격리해 외톨이로 전락시키지 않고, 그가 획득한 자율성을 지켜줄 수 있을까? 스텐저스에 따르면 향후 수년간 우리는 이런 질문에 집착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인간은 신과 경쟁할 수 있을까

플라오의 책을 읽다 보면 프로메테이즘의 특성이 자세히 드러난다. 그는 인간은 신들과 하나님과 경쟁할 수 있고, 그들의 권력에 도전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고, 인간은 자연의 일부가 아니라 자연 위에 있다고 확신한다. 그는 인간은 마치 자연 속에 있는 농장주와 같아서, 자연에 도전하고 자연을 제압하고 개척하고 탈바꿈시킨다고 믿는다. 메외스트는 아마도 이런 뿌리 깊은 확신 때문에 “테크노사이언스는 재난을 초래하는 질주 이외에는 할 일이 없고, 자신이 파괴한 것을 앞으로도 여전히 복구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생물 영역은 자신이 만들어낸 테크노사이언스의 지능보다 훨씬 복잡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해 사람들을 약간 당혹스럽게 했을 것이다.

플라오는 저서의 한 장(章)을 할애해 어린 시절 푹 빠졌던 쥘 베른의 소설을 분석했다. 플라오는 타고난 카리스마로 동료를 압도하고 욱일승천하는 기세를 지닌 용맹한 영웅들이 독창성이 물씬 풍기는 기구를 타고 역경과 맞서는 것을 프로메테이즘의 전형처럼 봤다.

놀이공원인 도쿄 디즈니랜드(3)는 쥘 베른의 세계를 기리기 위해 조성됐다. 게다가 이 놀이공원의 화산 이름은 ‘프로메테우스의 산’이다. …플라오는 프랑스 작가(쥘 베른- 역자)가 묘사한 이 탐험가들의 “씩씩하고 남성적인 그림이 앞으로도 오랫동안 그의 뒤를 잇는 보이스카우트, 군인, 파시스트들을 중심으로 지속·순환될 것”으로 보았다. 사람들은 이 그림에 1980년대부터 우주의 자유로운 영상(공상과학(SF) 영화- 역자)에 고무돼 스포츠와 모험에 뛰어든 기업가들을 추가하고 싶어할 것이다. 열기구를 타고 대서양을 횡단했던 버진그룹의 창업자 리처드 브랜슨은 2004년 <필리스 포그(역경)>를 영화로 만든 미국 영화 <80일간의 세계일주>에 출현하지 않았던가?

또 프로메테이즘은 “인간의 기원(종의 진화 또는 아동의 발달 측면에서 보면)이 처음에는 사물과의 상호작용으로 시작한 뒤, 이어 개인들 간의 상호작용으로 진행된다”고 믿게 만든다. 예컨대 서양의 상상력 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물리적 환경을 만들고 통제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이후 인간은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득이 된다는 것을 깨달고 “사회를 구성”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과 어울린다. 인간은 사회적 관계를 사물과 자신의 관계를 상상할 때와 똑같이 도구적 방식으로 상상하며, 존재하는 것을 “백지 상태”로 만들어 이상적 도식에 따라 사회를 재창조하려는 의욕을 보이는 경향이 있다. 사회생활이 ‘옵션’이기 때문에, 인간이 처음에는 자연의 일부였다는 이런 사고는 루소뿐만 아니라 로빈슨 크루소(4)의 성격에서도 잘 드러난다.

게다가 점점 더 많은 저자들이 지적하는(5) 문제의식은 충격적이다. 아무도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벗어나 개인 및 개체처럼 될 수 없다고 지적한다. 물론 “사회생활은 인간 조건의 자연적 속성”이지 숙고해 고른 선택은 아니며, ‘사회계약론’은 신화다.

확실한 것은 개인주의를 근본주의(6)로까지 몰고 간 <미국 우파의 등대>의 저자 아인 랜드의 시각이 오판이라는 점이다. 그녀가 세상에 대한 자신의 시각에서 “널리 퍼져 있는 가정을 토대로 급진적인 결론”을 내렸지만, 그녀는 개인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해 “정신은 개별적 속성이다. 총체적인 두뇌와 유사한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7) 이에 플라오는 두뇌는 그 반대로 “네트워크로 작동되는 사회적 조직”이라며, 그녀의 결론은 오류라고 지적한다. 두뇌가 개별 활동을 하려면 다른 두뇌들로부터 가능한 한 많은 자극을 받아야 한다. 사람들은 항상 “죽은 자들이 산 자들에게 물려준 사회·문화적 생태계 안에서” 생각하며 산다고 주장한다. 랜드는 “다른 것들과의 관계에 따라 살아가는 존재들은 더 이상 현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들의 현실은 더 이상 자신들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한다.(8)

하지만 이 주장은 주객이 전도된 억지다. 아이가 개체로서 스스로를 개발하고 자신의 존재감을 획득하려면 부모를 필두로 한 주변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플라오는 인간 조건의 역설을 “존재의 자아는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의 자아로부터 생기고, 독립심은 의존에서 생긴다”고 요약했다. 만약 랜드의 소설들이 미국에서 대단한 성공을 거둔다면, 그것은 그가 자신의 힘만 가지고 사회와 맞서고 있다고 주장하며, 시시한 대중이 이해할 수 없는 영웅처럼 굴며 현혹하기 때문이다. 낸시 휴스턴은 많은 낭만적 표현들의 터전이 된 이런 작품 구도가 허무주의 문학의 성공을 불렀다며, 이런 토양을 가리켜 ‘엘리트주의적 군락’(gregarite elitiste)이라 칭했다.(9)

공포를 극복 못한 불쌍한 소년들

이제 단단히 마음먹고 쇼터의 책을 다시 살피던 우리는 어떤 계시에 화들짝 놀란다. 처음에는 하나의 무형의 부조리 더미처럼 보였던 말들이 갑자기 깊은 일관성을 띠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쇼터는 ‘낙관론’이라는 미명 아래 프로메테이즘의 복원을 시도하고 싶어한 것이다. 쥘 베른의 독자가 그렇듯, 쇼터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불가항력의 파워와 웅대한 운명”에 대해 얘기해주길 바랐다. 그는 “얌전한 계집애처럼 구는 생태학자들”을 경멸하고, “비전을 제시하는 사람, 기업가, 세계 지도자”들을 예찬하며 부단히 남성적이고 의기양양한 태도에 높은 가치를 부여했다. 브랜슨은 그의 영웅 중 한 명이었다. 결국 그는 책 말미에서 브랜슨의 자선 재단 ‘버진 유나이트’에서 일자리를 찾았다고 밝힌다.

플라오에 따르면 이런 “유치한 과대망상”은 프로메테이즘이 우리 안에서 헛된 꿈을 심어주고 있다는 방증이다. 쇼터는 “지배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지, 신음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고 스스로를 평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그는 비관론에 대해선 마치 “세상사에 대한 나약하고 한심한 대응”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사람들은 우선 인류의 미래, 즉 우리에게 자신감을 복원해줄 그의 위대한 낙관론자의 명단에서 “이라크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 중 한 명”인 미국 외교관 존 볼턴의 이름을 발견하곤 그만 가가대소한다. 그는 볼턴을 “미국의 비전과 권위를 우유부단하고 심약한 전세계를 호령할 수 있는 추진력 있는 사람”처럼 소개했다. 이에 대해 플라오는 과오를 “백지 상태”, 즉 없었던 일로 되돌린 최근의 가장 명백한 프로메테우스적 사례들 중 하나가 이라크 침공이라고 반박한다.

캄프 역시 흥미로운 얘기를 했다. 그는 “그 어떤 시련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2007년 어느 날 저녁, 프랑스의 ‘에드몽 드 로칠드 금융회사’가 주도해 만든 한 ‘환경가치 투자 펀드’ 출시 행사에 참석했던 얘기를 들려줬다.

토론 주제는 ‘환경을 성장 엔진처럼’이었다. 장마크 실베스트르, 뤼크 페리(10) 그리고 클로드 알레그르 등이 패널로 참석했다. 알레그르가 “이 나라는 위험을 감수하는 문화가 필요하다”고 포문을 열었다. 페리는 생태를 떠올린 듯, 생태가 “공포의 열정”을 담고 있다는 비판과 함께 그것은 “슬픈 열정”이라며 규탄했다. 더 나아가 그는 “우리가 어렸을 때, 사람들은 우리에게 공포는 부끄러운 것이라고 얘기했다. 다 큰 소년은 공포를 모른다. 큰다는 말은 공포를 극복한다는 것이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아직 공포를 극복하지 못한 듯, 페리는 플라오가 치르고 있는 똑같은 비평 시험에 자신의 신념을 담은 답안지를 제출할 채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알레그르와 페리, 이 볼썽사나운 두 소년은 사람들로부터 게임장에서 쫓겨나길 원치 않는다. 그들은 바로 이 지구에서 자신의 담론을 게임처럼 펼치고 있는 것이다.

글·모나 숄레 Mona Chollet

번역·조은섭 chosub@ilemonde.com
파리7대학 불문학 박사로 알리앙스프랑세즈에서 강의하고 있다. 주요 역서로 <착각>(2004) 등이 있다. 


<각주>  

(1) 장피에르 뒤퓌, <계몽적인 극단적인비관론을 위하여>(Pour un catastrophisme eclaire), Seuil, 파리, 2002.
(2) 그리스 신화에서 말하는 대지의 여신.
(3) 도쿄 우라야스에 있는 월트디즈니사가 참여한 복합 레저단지.
(4) 프랑수아 플라오, <로빈슨의 역설, 자본주의 및 사회>, Mille et une nuits, 파리, 2005 참조.
(5) Jacques Genereux, <La Dissociete>, Seuil, 파리, 2006.
(6) 프랑수아 플라오, ‘Ni dieu, ni maitre, ni impots’,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8년 8월.
(7) Ayn Rand, <La Source vive>, Plon, 파리, 1997.
(8) Ibid.
(9) 낸시 휴스턴, <절망하는 교수들>, Actes Sud, 파리/아를, 2004.
(10) Sebastien Fontenelle, ‘Dix jours en mer avec trois astres de la pensee francaise’,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9년 8월.


<추천 도서>

체르노빌의 프로메테우스

“1970년대에 지어진 광대한 체르노빌의 복합 도시 프리피야트가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이 신도시는 주로 인근 원자력발전소 직원들의 숙소로 쓰였고, 약 5만 명의 주민이 거주했다. 이곳의 삶은 소련의 여타 도시에 비해 훨씬 좋았다. 우리는 프리피야트의 한 영화관 정면에 굵은 글씨로 쓰인 ‘프로메테우스’라는 간판을 읽을 수 있다.
영화관 앞에는 불의 힘을 얻으려고 두 팔을 하늘로 치켜든 거인상이 우뚝 서 있다. …10월 혁명 이후 60년이 지난 지금, 지칠 줄 모르는 진보의 에너지의 원천인 원자를 정복했다고 허풍을 떠는 프로파간다의 상징이다. 쥘 베른의 작품 주인공처럼 낙관론자인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소장은 “핵 원자로가 사모바르(러시아식 주전자- 역자)처럼 생겼다”고 말했다.
1986년 4월 25~26일 밤, 4번 핵 원자로가 폭발했다. 화산 분출처럼, 원자로는 상공 170m까지 불길을 내뿜었다. 약 50t에 달하는 핵연료가 유출됐다. 그 유명한 ‘체르노빌 구름’이 인근 소나무 숲을 태우고, 이후 서부 유럽과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을 덮친 뒤, 심지어 북아메리카 대륙으로까지 확산됐다.
체르노빌은 영원한 사지로 전락했다. 사람들은 주민이 떠난 프리피야트에 있던 프로메테우스상을 철거해 원자력발전소 입구에 세웠고, 상은 여전히 그곳에 서 있다. 이제 하늘을 향해 두 팔을 치켜든 프로메테우스의 상은 당시 사건을 처리하기 위해 동원됐던 ‘처리반’에게 경의를 표하고 있다.”
* 프랑수아 플라오의 저서 <프로메테우스의 황혼>, p. 11~13.


누가 과학자들을 위해 돈을 낼까?

“아무도 상상할 수 없는 미래가 만들어지는 곳이 있다면 그게 어디든 그곳에서는 정치 투쟁이 일어난다. 이 정치 투쟁은 기득권 수호나 스캔들 고발에 그치지 않고, 정말 미래 만들기에 관한 의문들을 다룰 것이다. 누가 기술자들에게 돈을 줄까? 사람들은 어떻게 과학자들을 교육할까? 무슨 약속이 환상의 물레방아를 돌릴까? 사람들은 어떤 부자의 꿈에 ‘경제 살리기’ 작업을 맡길까? 과학자들과 기술자들은 이런 자문을 해볼 필요가 있다.”
* 이사벨 스텐저스의 저서 <재해의 시대에>, p. 200~201.

그밖에…

* 로렌스 쇼터(Laurence Shorter): <낙관론자의 비밀>, <행복에 미친 사람의 세계일주>, JC Lattes, 파리, 2009.
* 베르트랑 메외스트(Bertrand Meheust): <모순 어법의 정치> <우리를 지배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세상의 현실을 숨기는가?>, Les Empecheurs de penser en rond/La Decouverte, 파리, 2009.
* 이사벨 스텐저스(Isabelle Stengers): <재해의 시대에> <다가올 야만에 저항하기>, Les Empecheurs de penser en rond/La Decouverte, 파리, 2009.
* 에르베 캄프(Herve Kempf) : <우주를 구하기 위해, 자본주의에서 벗어나라>, Seuil, 파리, 2009.
* 프랑수아 플라오(Francois Flahault): <프로메테우스의 황혼>, Mille et une nuits, 파리, 2008.
* 장피에르 뒤퓌(Jean-Pierre Dupuy): <쓰나미에 대한 형이상학적 소고>, Seuil, 파리,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