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대부수 르마탱, 언론이었나 약장수였나?

만병통치약 ‘생톨’ 판촉 위해 신문을 선전도구화
역사의식 없이 나치 협력 뒤 해방되자 종적 감춰

2009-10-06     도미니크 팽솔|보르도3대학 사학과 교수

모리스 뷔노바릴라를 기억하는가? 프랑스 제3공화국의 수많은 국회의원들을 전율시킨 그 이름은 이제 고작 역사가들만을 소스라치게 할 뿐이다. 뷔노바릴라는 20세기 초 프랑스 유력 일간지에서 나치 부역 혐의로 강제 폐간된 <르마탱>(Le Matin)의 파란 많은 운명을 짊어진 인물이다. 부패했지만 인류의 장래를 개선시킨다고 확신했던 이 사업가의 인생 역정은 언론과 권력, 돈의 관계에 확대경을 들이댄 듯 보여준다.

 

모리스 뷔노바릴라는 42살 되던 해인 1897년, 재력가이자 광고업자인 앙리 푸아다츠와 은밀히 손잡고 당시 규모가 그리 크지 않던 일간신문 <르마탱>을 매입한다. 그는 자신의 동생 필립과 함께 파나마 운하 건설에 참여해 큰돈을 번 뒤, 재산 일부(부정 축재한 재산도 포함돼 있다)를 언론에 투자한 것이다. 독자 수가 적은데다 적자 상태였던 <르마탱>은 그의 뛰어난 경영 수완에 힘입어 불과 10여 년 만에 대형 일간지로 성장했다. 1차 대전 중에는 발행부수가 170만 부에 달했고, <프티 주르날> <프티 파리지앵> <주르날>과 더불어 프랑스의 4대 일간지 반열에 올랐다. 경쟁지와 비교해볼 때 <르마탱>의 광고 의존도는 매우 높았다. 1914년 이전에는 전체 수입 중 광고수입 비율이 거의 30%에 가까웠다. <르마탱>은 원래 비종교적이며 민족주의적인 정치 노선을 표방했지만, 뷔노바릴라의 인수 이후 레몽 푸앵카레(1860년 8월20일~1934년 10월1일)를 지지했던 그의 취향과 이해관계에 따라 논조가 수시로 변했다. 세계대전 이전에 <르마탱>의 고문 변호사를 역임했던 푸앵카레는 1913~20년 제3공화국 제9대 대통령을 지냈다.

뷔노바릴라는 1차 대전이 끝나자 수익성 좋은 새 기업을 경영하기 시작한다. 돈과 관련한 그의 성격과 사상은 그에 관한 책들에서 쉽게 드러난다. “노동자의 노력은 회사가 주는 돈이나 명예로 보상된다. 돈이란 노력의 대가를 입증해주는 보너스인 셈이다.”(1) 돈으로 무엇이든 사들일 수 있다는 생각이 비난받자 그는 곧 이렇게 대답했다. “천재성을 지닌 사람이란 무엇인가? 천재는 늘 고독하다. 천재처럼 높은 가치를 지닌 사람은 돈을 무시하는 것으로 보통 사람들과 쉽게 차별화된다. 그는 자신의 세계 안에서 산다. 사람들은 흔히 그가 자신의 말을 귀담아듣는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그들의 생각일 뿐이다.”

자신이야말로 “천재적 인간”이라고 확신한 그는 무엇보다도 의학에 관심을 가지고 혁신시키려는 야심을 가졌다. 그는 자신의 신문을 통해 대규모 위생 캠페인을 벌이고, 과학 진흥에 자신의 신문을 이용하는 동시에, 1921년 알코올과 멘톨(박하뇌), 클로랄을 주성분으로 한 용액에 눈독을 들인다. 그때까지 상용화되지 않았지만 이 용액을 개발한 오를레앙 출신 약제사 로제 박사의 말에 따르면 생톨이라는 이 약품은 다양한 통증에 진통제가 될 수 있었다. 뷔노바릴라는 이 ‘만병통치약’이 1차 대전이 끝난 상황에서 새로운 투자처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1922년, 그는 이 의약품을 개발하기 위해 프랑스과학실습연구소(SFRAS)라는 회사를 설립한다. 연구소는 실제로 그가 장악하고 있었지만 명목상 경영자는 그의 두 아들 중 한 명인 기(Guy)였다.

<르마탱> 사장 뷔노바릴라는 생톨을 판촉하는 데 힘을 쏟았다. 수많은 초대 손님들에게 생톨을 나눠주고, 자신이 고용한 이들에게는 이 약을 사용하도록 강요했다. 그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은 혹시 그의 화를 부추길까, 아니면 <르마탱>의 블랙리스트에 오르게 될까 두려워 고분고분 받아들였다. <르마탱>의 외신부장 줄 사우어바인이 들려주는 일화에 따르면, 어느 날 뷔노바릴라는 푸앵카레가 “노망이 든 것”(2) 같으니 그에게 생톨 두 병을 가져다주라고 했다. 푸앵카레는 <르마탱>의 지지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혼쭐이 빠져” 틀림없이 하루에 세 번 생톨을 복용하겠다는 뜻을 뷔노바릴라에게 전해달라고 사우어바인에게 부탁했다는 것이다. “그때 나는 우리에게 가장 강력한 힘은 공포를 심어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우쳤다”고 사우어바인은 회고한다.

“일종의 자아 과대 팽창”

사람들은 <르마탱> 소유주의 욱하는 성격을 절대 거스르는 법이 없었다. 그의 성격에 대해서는 사우어바인의 말이나 다른 많은 증언들이 일치한다. “일종의 자아 과대 팽창이 그의 정신에 오만함과 한량없는 야심을 싹트게 만들었다. <르마탱>의 절대군주에 맞설 만한 힘을 가진 사람들, 자신의 명성에 자신감을 가진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았던 시절에 그의 이런 자질들은 특수한 상황을 만들어냈다. 그는 저항하기 힘든 존재로 여겨졌다. 철저히 이기주의에 중독된 그는 북아메리카 평원의 시우족 족장처럼 행동했다. 반대에 부딪치지 않으면 그는 평범했다. 하지만 일단 누군가 자신의 계획에 맞서면, 그에게 숨어 있던 일종의 야수성이 터져나와 일말의 수치심도, 거북함도 느끼지 못했다. 그가 자기 자신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은 모든 한도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그의 과대망상은 동시대인들의 빈정거림을 자아냈고, 생톨의 특별한 효능에 대한 그의 믿음은 파리 언론계와 정계에서 농담의 주제가 됐다. 사우어바인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어느 날 뷔노바릴라의 말 한 마리가 심한 병에 걸렸는데, 그는 그 말이 “회춘”하도록 생톨을 푼 물에 말을 목욕시키며 “우린 이제 죽지 않을 것”이라고 탄성을 질렀지만 말은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죽었다는 것이다.

자본과 제약의 결탁 관계는 곧 국경을 넘어섰다. 전후 복구에 관한 프랑스와 독일의 협상이 시작되고 1924년 프랑스가 루르 공업지대를 점령하면서 독일 외무장관은 뷔노바릴라의 생톨에 대한 열정에서 허점을 찾아 이용하려 했다.(3) 바이마르공화국에 대해 새로운 정책을 채택하도록 프랑스 여론을 설득하려 했던 독일 외무부와 파리 주재 독일 대사관은 영향력 있는 신문들의 지지가 필요했다. <위마니테>는 그 신문들의 행태를 “가증스러운 배금주의”라고 싸잡아 비난했다. 베를린 출신 사업가 레오 시몽은 거의 100만 부 가까이 발행되는 <르마탱>에 특별히 관심을 보였다. 그는 뷔노바릴라의 환심을 사려고 파리로 날아왔고, 그 점을 높이 평가한 뷔노바릴라는 코트다쥐르에서 여름휴가를 보낼 때 그를 초대했다. 베를린의 특사는 생톨의 열렬한 애호가인 척하면서 새 회사를 설립해 독일에서 생톨을 생산할 것을 제안했다. 거기에 붙는 조건은 단 하나, <르마탱>이 독일에 우호적이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뷔노바릴라는 열광했다. 1925년 말, 사우어바인(그는 프랑스-독일 관계 정상화의 열성 지지자였다)은 레오폴드 폰 회슈 독일 대사에게 <르마탱>이 구스타프 슈트레제만 독일 외무장관의 정책을 지지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레오 시몽의 보호와 독일 정부의 비자금 지원 아래, 1926년 여름 베를린에 독일 생톨사가 설립됐다. 하지만 뷔노바릴라의 만병통치약은 독일 사람들을 사로잡지 못했다. 판매 부진은 심각했다. <르마탱> 사장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지 않으려고 독일 외무부는 1927년과 1928년 독일 생톨사에 자금을 지원했다. 외무부 로비에서는 “생톨을 바르다”라는 표현이 “뇌물을 바치다”와 같은 의미가 됐다.

1929~30년까지도 <르마탱>과 독일의 관계는 좋았다. 하지만 1931년부터 뷔노바릴라는 정확하지 않은 이유로- 여자 문제라는 말이 있다- 아리스티드 브리앙(로카르노조약(4)의 주역)과 관계를 끊었다. 그때까지 파리 주재 독일 대사관과 협력했던 사우어바인은 <르마탱>을 떠나야 했다. 독일 외무부는 1929년 슈트레제만 사망 뒤부터 독일 생톨사의 적자를 메우는 데 싫은 기색을 내비쳤다. 생톨이 독일건강보험 환급 대상이 되도록 노력해온 회슈 대사마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1932년부터 <르마탱>은 갑자기 독일 기록보관실들에서 자취를 감췄다. 독일 생톨사도 점차 마찬가지 신세가 됐다.

하지만 이런 현실도 회사 이익의 일정 부분을 점점 더 자기 몫으로 챙기고, 점점 더 <르마탱>의 실질적인 경영에서 멀어져 ‘고위 정치’와 ‘거대 금융수단’에 몰두하는 뷔노바릴라의 용기를 꺾기에는 아직 충분치 않았다.

입가심 용액과 대독 협력

1930년대 내내 <르마탱> 사장은 생톨의 생산과 판촉에 공을 들였다. 그는 서슴없이 생톨을 기적의 약이라도 되는 양 소개했다. 1929년 수많은 의사들에게 보낸 소책자를 보면 “생톨을 겉에 바르면 보통 약보다 더 훌륭한 새로운 치료가 된다. 피로, 과로, 노쇠, 편두통, 류머티즘, 신장통, 타박상, 염좌, 관절염, 화상, 정맥류, 정맥염, 심지어 암종성 상처에 이르기까지, 혈관운동성 장애와 관련된 다양한 병적 상태를 치료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돼 있다. 생톨은 물약이나 질 좌약, 포마드 등의 형태로 판매됐는데, 뷔노바릴라의 말에 따르면 생톨이야말로 “공기나 음식, 수면과 마찬가지로 삶에 필요불가결한 조건”(5)이라는 것이었다.

1920년대 중반부터 <르마탱>의 판매부수는 감소했지만 사장의 자부심은 판매부수와 반비례해서 커져만 갔다. 1932년 뷔노바릴라가 알렉시스 카렐(우생학자,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의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 썼던 것처럼 “인류의 행복”을 위해 일한다는 확신에 가득 차 있던 그는 자신의 음모를 비난하는 사람들을 경멸했다. 1934년 12월, 스타비스키 사건(6) 조사위원장에게 보낸 답변서에서 그는 “나는 바쁘다. 내가 많은 흥미를 느끼고 있고, 아마 당신 또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류의 건강과 관계된 일이다. 우리가 벌이는 이 불행하고 사소한 논쟁보다 훨씬 더 흥미로운 일이다.”(7) 하지만 뷔노바릴라가 자기 신문의 영향력에 기댈 수 있는 부분은 점점 더 줄어들었다. <르마탱>은 <파리 수아르>에 추월당했고, 1930년대 말 발행부수는 33만 부로 추락했다.

뷔노바릴라는 독일의 파리 입성이 자신의 신문을 다시 살릴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골수 반공주의자였던 그는 히틀러가 권력을 잡은 뒤부터 호의적으로 독일을 관찰했고, 그런 만큼 더욱 열성적이었다. 극우로 전향한 <르마탱>은 휴전협정 이전에 파리에서 재발행되는 최초의 일간 정보지가 됐다. 그리고 독일 협력기관이 됐다. 이런 정치 노선은 신문사의 재정난을 해소해줬고, 뷔노바릴라는 점령자들에게 ‘다량의 생톨’을 팔기 위해 타협했다. 독일에 대한 협력은 금전적 이해관계를 넘어서, 그가 오래전부터 고수해오던 입장을 견지할 수 있게 해줬다. 1941년 10월 그는 “내가 <르마탱>을 사들인 목적은 내 나라에 방어할 수 있는 몽둥이를 주려는 것이었다. …그 목표는 달성됐다”(8)고 설명했다.

<르마탱> 사장 뷔노바릴라는 1944년 8월 1일 88살의 나이로 숨졌다. 그 다음날 스테판 로잔(1901년 <르마탱> 입사)은 그의 ‘예지력’에 경의를 표하는 추도사를 썼다. “그는 다른 모든 지도자들보다 탁월했다. 그는 멀리, 아주 멀리 앞을 내다봤다. 그의 비전에는 뭔가 초자연적인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프랑스 해방 이후 <르마탱>은 재간 금지 조처를 피하지 못했다. 1946년 3월, 독일 점령 치하에서 발행된 대부분의 언론사들을 강제 수용한 드골 정권은 1908년경 혁명가 빅토르 메릭이 내뱉은 충고를 그대로 따랐다. 메릭은 당시 <르마탱> 사장을 빗대어 이렇게 빈정거린 바 있다. “효과적으로 세상을 뒤엎으려면, 그것은 <르마탱>이 아니라 모든 신문을 대상으로 해야 한다. 언론 전체, 체제 그 자체를 바꾸어야 한다. 신문을 자본의 도구가 아닌 다른 것으로 만들라. 그러면 뷔노바릴라 같은 사람들은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순진한 사람들아, 뷔노바릴라 같은 사람들은 너무나 많다.”(9)

글·도미니크 팽솔 Dominique Pinsolle

번역·김계영 canari62@ilemonde.com 
파리4대학 불문학 박사. 저서와 역서로 <청소년을 위한 서양문화사>(2006), <키는 권력이다>(2008) 등이 있다. 


<각주>

(1) 프레드 쿠페르만, ‘<르마탱>의 정치적 변화, 1903~14, 1934~40’, 사학 고등교육학위 논문, 1958, 21쪽에서 인용.
(2) 줄 사우어바인, <한 자리에서 30년>, 파리, 플롱, 1962, 50쪽.
(3) 이하 일화들은 자크 바리에티, ‘바이마르공화국 시대의 <르마탱>과 독일’, <언론과 정치, 낭테르 콜로키움 보고서(1973년 3월), CEREP>, 1호에서 인용.
(4) 1925년 국제회담에서 채택된 이 조약은 독일과의 관계 정상화를 상징한다.
(5) 알렉시스 카렐 재단, 의학 아카데미 고문서.
(6) 1934년 1월에 터진 프랑스 지도층 일부가 연루된 부정부패와 사기 의혹 스캔들. 이 스캔들로 정부는 실각하고, 의회제도에 대한 반감이 커졌다. 1934년 2월 6일에는 극우 소요가 일어났다.
(7) 스타비스키 사건 조사위원회 보고서, 부록, 4권, 파리, 국회 출판부, 1935, 4557쪽.
(8) 모리스 뷔노바릴라가 재판장에게 한 진술, 1941년 10월 21일, 국가고문서(Z6/157).
(9) <이 시대의 인물들>, 17호, 19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