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난민이다

난민을 누가 받아들일 것인가?

2015-10-06     아나 자베르
     
서방 국가들은 최근 몇 주 간 난민 유입 사태를 바라보며 시리아가 겪고 있는 혼돈이 어느 정도인지 잘 아는 듯이 행세한다. 그러나 내전을 피해 조국을 떠나온 1천1백만 명의 시리아인 가운데 천신만고 끝에 유럽으로 건너온 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난민은 자국의 다른 지역이나 터키, 레바논, 요르단 등의 인근 국가에 피난처를 마련하고 있다. 그로 인해 해당 지역은 대대적인 난민 유입 사태로 인해 많은 사회경제적, 정치적 불안을 겪고 있다.

“제 어머니는 어르신들을 봉양하시기 위해 남동생과 마을에 남으셨습니다.” 15살 소년 아마드 함다니가 입을 열었다. “저보고는 삼촌을 따라 터키로 가라고 등을 떠미셨지요. 제가 안전한 곳으로 떠나길 바라셨거든요. 아자즈를 점령한 민병대 때문에 혹 제가 위험에 빠지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많으셨어요.” 알레포 북부의 작은 도시 아자즈의 한 외곽 마을에서 살던 함다니는 이미 3년 전 시리아를 떠났다. 그의 아버지는 2012년 7월 바샤르 알 아사드 정부군의 공습으로 드럼통 폭탄(정부군이 민간인 거주 지역에까지 드럼통에 폭약과 쇠붙이 등을 넣은 일명 ‘통폭탄’을 무차별 투하했다-역주)을 맞고 사망했다. 몇 주 뒤 소년은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어머니와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정부군에서 탈영한 삼촌의 가족들과 함께 소형 화물차에 몸을 실었다. 하루아침에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 던져진 난민들은 이처럼 저마다 특별한 개인사를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개개인의 사연들은 그저 시리아의 비극에 대해서도, 그 비극이 이웃 나라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도 아주 단편적인 사실만을 보여줄 뿐이다.

함다니 가문 일행이 처음 정착한 곳은 터키 접경지 킬리스 주의 온쿠피나르 난민촌이었다. 온쿠피나르 난민촌은 터키 정부가 2011년 들어 시리아와 국경을 맞댄 9개 접경지에 설치한 22개 난민촌 중 하나였다. 유엔난민기구(UNHCR)는 내전을 피해 인근 국가로 떠난 시리아인이 4백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한다. 그러나 국내에서도 다른 지역으로 이주한 피란민 수가 760만 명에 달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1) 오늘날 시리아 난민의 절반가량(UNHCR에 따르면 190만 명)은 터키에 거주하고 있다. 그 가운데 80%가 난민촌 밖에서 생활한다. 함다니 가족 일행도 현재는 난민촌을 떠나 가지안테프 시의 한 서민촌에서 작은 방을 구해 생활하고 있다. 가지안테프는 현재 주민 10명 중 1명꼴로 시리아인이 거주하고 있다. 함다니는 카페 종업원으로 일하고, 삼촌은 음식 배달과 온갖 잔심부름을 도맡아 하고 있다. “처음에 저희가 정착한 킬리스의 난민촌은 환경도 깨끗하고 체계도 잘 잡혀 있었어요.” 하마드의 삼촌 와엘 함다니가 입을 열었다. “우리는 아무런 부족함 없이 생활했지요. 그러나 여러 사람이 우글대며 함께 지내는 집단생활을 견디기가 힘들었어요. 담장 안에 갇혀 지내는 것도 너무나 답답했지요. 난민촌을 출입할 때마다 받아야 하는 검문 절차도 아주 지긋지긋했습니다. 고작 병영에 다시 갇히기 위해 목숨을 걸고 탈영한 것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일을 하고 자유롭게 활동하며 가족들을 먹여 살리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 때는 그것이 이렇게까지 힘든 일일 줄은 상상도 못했지요.” 한편 하마드도 학교에 다닐 수 있었던 난민촌 생활을 그리워했다. 그는 현재 여기 저기 길거리를 전전하는 수천 명의 ‘유용한 젊은이들’ 행렬에 합류했다.

터키의 도전과제가 된 시리아 난민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의 말을 빌리자면 시리아 난민 사태는 “터키에게 있어 어마어마한 도전 과제”다. 터키는 단순히 난민 안전이나 물자보급 같은 문제만을 신경 써야 하는 것이 아니다. 세계 언론 매체가 난민 수용 실태를 열심히 보도하는 상황에서 국가 이미지 관리를 위해 “가급적 공손하게 난민을 맞이하는데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알리 바이라모글루 논설위원은 설명했다. UNHCR과 터키 정부가 공동으로 운영하는 난민촌은 대개 도시와 멀찍이 떨어진 곳에 설치되어 갑작스러운 난민 유입에 따른 부작용을 완충하는 감압실 구실을 하고 있다. 난민들은 당국에 구체적인 목적지를 밝힐 때에만 비로소 난민촌 밖을 벗어날 수 있다. 물론 터키 정부는 이슬람국가(IS)의 전투원들만큼은 자국 영토에 발을 들이지 못하게 막겠다고 호언장담한다. 그러나 터키 언론은 정부가 얼마나 국제 교역의 실상에 무지한지 연일 성토하는 목소리가 높다.
난민 유입에 따른 두 번째 도전과제는 터키 사회의 단합이다. 800km에 걸친 터키-시리아 접경지대는 사실상 투르크메니스탄인, 쿠르드인, 아르메니아인, 그리스정교, 수니파, 알라위파, 아랍어 사용자, 터키어 사용자 등 온갖 종파와 인종이 다양하게 뒤얽힌 복잡한 모자이크 천으로 감침질이 되어 있다. 터키 정부는 거의 한 세기에 걸쳐 이런 다양한 인종 및 종파 간의 평화적 공존을 위해 노력해왔다. 그러나 다인종 사회에 난데 없이 밀려드는 난민 행렬은 그들이 미처 매듭짓지 못한 집단 역사의 미해결 과제에 다시금 불을 붙이는 도화선이 될 우려가 있다. 사실상 이 지역에서는 주기적으로 온갖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는다. 가령 올 여름 초순에는 터키 남서부 지역에서 터키의 아랍어 사용자들이 극단적 민족주의자들의 맹렬한 비난에 휩싸였다. 아랍어 사용자들이 해당 지역을 ‘아랍화’하기 위해 시리아인의 유입을 장려하고 있다는 이유였다. 특히 1939년 터키 병합 이후 시리아와의 끊임없이 역사적 갈등을 빚고 있는 알렉산드레타 산자크(터키어로는 이스켄데룬-역주) 지역이 논란의 중심에 섰다.
터키는 1951년 제네바 난민협약에 가입하였지만 난민 보호 관련 의무를 유럽인에게로 제한한 규정으로 인해 2013년 4월 외국인에 관한 법률을 채택하게 된다. 이 법률에 의거해 터키는 국내 거주 중인 시리아인을 추방하지 않아도 되는 한편, 노동 허가증 발급과 관련한 규제도 상당히 완화할 수 있었다. 더욱이 터키는 2014년 4월 총리 산하 직속으로 이민총국을 설치하기도 했다. 터키 정부 난민이 국내에 최종 정착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완전히 빗장을 걸어 잠그지는 않았다. 심지어 터키계 부모에게서 태어난 시리아인이나 투르크메니스탄인에 대해서 터키 국적 취득을 장려하기까지 했다. 

난민촌이 IS의 배후기지가 될까 염려

세 번째 도전과제는 경제다. 지역 인구 증가, 임대료 및 물가 상승, 관광 감소 등은 난민에 대한 자국민의 거부감을 더욱 부채질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물론 지금까지 자국민과 난민 사이에 심각한 충돌 사태가 일어난 적은 없었다. 게다가 대다수의 난민들은 지금도 터키를 비교적 안전한 안식처로 여긴다. 그러나 긴장 촉발로 선거기반을 더 단단히 다지는 정치 전술에 의지하고 있는 터키의 에르도안 대통령은 시리아의 전쟁 사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2) 민족주의 정당은 터키인의 정체성을 위험에 빠뜨린다며 정부를 비난하고, 세속주의 좌파는 난민촌이 IS의 배후 기지가 될 것을 우려한다. “2011년 이전, 비자 제도가 면제된 이후 시리아인은 터키에서 널리 환대를 받았습니다.” 알레포 출신의 사업가이자 현재 이즈미르에 정착해 살고 있는 나세르 아흐세네가 설명했다. “시리아인은 터키 물건을 소비하며 양국 교역 활성화에 기여했습니다. 지금도 물론 터키는 시리아인을 비교적 따뜻하게 맞아주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과거에 비해서는 상황이 많이 열악해졌지요. 예전만큼 열렬한 환대를 받고 있다는 느낌은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유럽으로 가려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는 것입니다.”
난민 수용으로 인한 경제적 비용도 계속 늘어나고 있다. “그동안 터키는 난민 구호에 상당히 많은 재정적 노력을 기울여왔습니다. 이제는 다른 나라의 지원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지난 9월 중순 누만 쿠르툴무스 터키 부총리가 이같이 선언했다. 그러면서 그는 그동안 터키는 난민 수용을 위해 “2011년 이후 총 70억 달러에 달하는 예산을 지출해온 반면 유럽연합은 무대응과 이기주의로 일관하고 있다”며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다.
한편 레바논에 유입된 난민의 수도 현재 110만 명에 달한다. 자국 인구의 무려 1/4에 해당하는 수치다. 그러나 터키와 달리 레바논은 정부 차원의 지원이 미비하기만 하다. 물론 현재 레바논의 정치 상황을 감안하면 그리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레바논에서는 이미 1년 넘게 대통력직이 공석으로 남아 있는 채로, “자기들이 제멋대로 임기를 늘린” 의회와 각 행정 부처가 국정을 책임지고 있다.(3) 그러다보니 확고한 원칙 없이 국경 개방과 폐쇄 조치가 수없이 반복되고 있는 실정이다. 정치적으로 파행을 지속하고 있는 레바논은 할당 난민의 수용 또는 거부, 2015년 2월 이후 입국 비자 제도 실시 등 난민 문제에 대해 그저 임시방편적으로만 대응하고 있는 실정이다. 긴급한 상황임에도 재정적 지원과 난민촌 설치가 전혀 이뤄지고 있지 않다. UNHCR과 기타 수많은 국내외 비정부기구(NGO)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난민들은 ‘자력 운영이 어려운’ 나라에 자력 생활이 어려운 채로 남아 있는 것이다.

생활고에 시리아 난민들 되돌아가기도

베이루트에서는 길을 걷다가 아무나 붙들고 시리아 난민을 만날 수 있는 곳이 어디냐고 물으면, 누구나 이렇게 대답한다. “어디에서든 만날 수 있습니다.” 정말 거리를 걷다보면 우연히 건물 밑이나 바람이 들지 않는 인도의 구석 자리에서 난민 가족이 빙 둘러 앉아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간단히 요기를 하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마주할 수 있다. 베이루트의 얼마 남지 않은 공터에 ‘UNHCR’이라는 문자가 새겨진 텐트가 쳐진 모습을 발견하는 일도 그리 어렵지 않다. 함라 거리에 있는 한 카페의 테이블을 차지한 레바논 기자 라드완 엘 제인은 이렇게 말했다. “처음에는 시리아의 부유층이, 그 다음은 서민층이, 그리고 지금은 빈곤층이 레바논을 찾아오고 있어요. 그 중 일부는 진저리를 치며 시리아로 되돌아가기도 합니다. 최근에도 이 동네에 얼굴이 잘 알려진 한 신문팔이 소년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시리아로 돌아갔다 폭격을 맞아 숨졌다는 겁니다.”
국경없는 의사회(MSF)에 의하면, 대부분의 시리아 난민은 심리적 고통 속에 극도로 불안정한 삶을 지탱하고 있다. 한편 UNHCR은 학교에 다니는 학생이 40만 명 중 10만 명에 불과한 현실을 개탄한다. 언급하지 않을 길이 없는 최근의 역사적 사건들과 시리아군이 레바논에 주둔한 30여 년(1975~2005)의 세월이 남긴 유산의 무게에 짓눌린 레바논인들은 무엇보다도 현재 너무나도 저평가된 난민의 규모를 우려한다. 2011년 시리아 내전이 발생하자 레바논에서는 불구대천의 두 진영의 서로 격돌했다. 레바논의 수니파는 대대적으로 시리아 반정부 진영의 편에 섰고, 헤즈볼라는 알아사드 정권을 적극 지원했다. 물론 기독교인들은 늘 그렇듯 양쪽으로 진영이 엇갈렸다. “레바논에는 여전히 시리아인에 대한 원한을 버리지 못한 계층들이 많습니다”라고 익명을 요구한 한 마론파(레바논 고유의 기독교 분파-역주) 정치인이 말했다. “우리는 국경 너머의 내전이 30년 동안 우리를 점령한 자들이 받는 천벌이라고도 생각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아사드 정권이 몰락하기라도 하면 아주 중대한 사회적 불안이 야기될 것이고, 해당 지역에 사는 소수 비무슬림계에게도 상당한 위협적 요소가 될 것이라는 사실도 잘 압니다.” 
시리아와의 접경지대인 베카의 수니파 거주 지역 에르살은 지형적으로 시리아의 칼라문 지역과 붙어 있는 한 협곡에 자리하고 있다. 이 지역에서는 헤즈볼라의 지원을 등에 업은 시리아 정권과 기타 반정부 분파들(특히 알카에다 계열의 알노스라전선)의 전투가 나날이 격화되자, 대대적인 난민의 유입이 늘어나면서 지역 인구가 무려 세 배나 증가했다. 시리아 반군 소속의 지하디스트들이 탈영해 민간인 속에 스며드는가 하면, 이슬람국가(IS)의 깃발이 등장했다. 그러자 시리아 영토에서 아사드 정권을 지원하는 데 그쳤던 헤즈볼라는 돌연 수니파의 위협이라는 카드를 흔들고 나왔다. 유혈 분쟁으로 수십 명이 희생자가 발생하였고, 2014년 여름과 2015년 5월에는 레바논 군대가 군사 개입에 나섰다.

국가의 체계적인 대응이 부족한 상황에서 종교계가 나서서 국가의 역할을 대신해 난민 구호에 팔을 걷어붙이기도 했다. 전국 곳곳에서 활동 중인 결속력이 강한 온갖 종파를 막론한 모든 기독교 교구들이 연대 조직망을 구축해가며 기독교 난민들에게 온정의 손길을 베풀었다. 한편 예전부터 시리아 노동자가 대거 유입되는 지역이었던 베이루트나 트리폴리의 서민가는 나흐르 엘 바레드, 샤틸라, 부르즈 엘 바라즈네, 아인 엘 헬웨 등의 팔레스타인 난민촌과 비슷하게, 난민들의 주요한 낙하지점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일부 시리아 가정은 돈을 지불하거나 혹은 경비 일, 정원 일 따위를 돌봐주며 레바논의 농촌 지역이나 외딴 마을에 피난처를 마련하기도 한다. 모두가 이념적, 종파적 갈등 따위는 잠시 내려놓았다. 가령 레바논의 남부에 위치한 헤즈볼라의 텃밭인 빈트 즈베일에서는 데라, 라카 등에서 넘어온 수니파 가족들이 거주하고 있다. 난민들에게 침묵, 다시 말해 종교적, 정치적 신념을 표현하지 않는 행위는 암묵적인 생존의 법칙과도 같다. 그같은 법칙은 현재 강제가 아닌, 양심에 의거해 지켜지고 있다.
시리아 내전으로 인해 세 번째로 많은 피해를 본 요르단의 경우에도, UNHCR의 집계에 따르면 수용 난민 수가 현재 63만 명에 이른다. 사실 요르단은 한 번도 난민 수용을 거부한 역사가 없다. 가장 최근의 대대적인 난민 사태는 영미연합군이 이라크를 침공한 200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에도 약 30만 명으로 추정되는 이라크 난민이 들어왔었는데, 대부분의 부유층은 요르단에 정착하였지만, 그 외 난민들은 어렵사리 유럽으로 건너가거나 혹은 이라크로 되돌아갔다. 
현재도 과거의 난민 사태 때처럼 서로 가깝게 지내는 접경지역 주민들 간의 연대 의식이 빛을 발하고 있다. 가령 시리아의 데라와 요르단의 람사가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 두 자매 도시는 역사적으로 오랜 교류 및 교역(유목생활, 혼인, 밀매, 대상(카라반세라이)의 숙소 등)을 바탕으로 국경을 초월한 결연 관계를 맺어왔다. 나란히 앉아 있던 데라 출신의 두 여인이 기구한 사연을 들려줬다. 그들은 각각 2011년 시리아 치안당국에 체포된 두 젊은이의 어머니와 숙모였다. 당시 두 젊은이는 중학교 교정 담벼락에 “에르할(떠나라)”이라고 낙서를 했다가 투옥되고 고문을 받았다. 결국 이 사건은 시리아 반정부 운동에 불을 댕겼다. 정부의 탄압에도 민주화 운동은 다른 지역으로 들불처럼 번져나갔고 결국 유혈 항쟁으로까지 이어졌다. “아이들은 정말 처참한 몰골이 되서 돌아왔어요.” 두 젊은이의 어머니 움 카셈이 말했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어요? 우리는 고향을 떠나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살던 집이 저격수들의 차지가 되었거든요. 아마도 데라의 모든 주민들이 거의 다 엇비슷한 이야기를 할 겁니다. 우리들 가운데 정말 좋아서 고향을 떠나게 된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요. 람사 주민 중에 우리 시리아 피란민 가족을 받아주지 않은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고도 말할 겁니다.” 사실상 가족, 마을, 부족, 경제적 관계 등을 막론한 모든 종류의 연대 의식이 적극 활기를 띠었다. 흡사 이산가족이 재회하기라도 하듯, 누구보다 당사자들이 놀랄 정도로 이웃 지역의 주민들은 난민들을 정겹게 맞아주었다. 마치 오랜 옛날 하우란 지역이 갈릴리 지역과 조화를 이루며 사람들의 왕래가 자유롭던 과거의 영화로운 시절로 되돌아간 것만 같았다.

난민수용에 좀 더 적극적인 요르단 정부

이웃 터키에 비해 재원은 부족하지만 이웃 레바논 보다는 난민 수용에 조금 더 적극적인 요르단 정부는 자국으로 유입되는 난민 구호를 위해 대책을 내놓았다. 2012년 7월 말 요르단 북부에 자아타리 난민촌이 설치됐다. 요르단은 과거의 경험에서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이미 지난 1948년과 1967년에는 팔레스타인 난민 사태를 겪은 적이 있고, 1차 걸프전 때도 이라크를 떠나온 외국인 노동자들이 대거 유입되는 경험을 한 바 있었다. 또한 2003년에도 이라크 침공의 여파로 온갖 종파 간 분쟁이 촉발되면서 요르단에는 난민의 물결이 쇄도했다. 그러나 금세 요르단인과 조국을 떠나온 시리아인 사이에 갈등이 빚어지고 해당 지역 내에 사회적 저항감이 높아졌다. 결국 요르단 정부는 난민 문제에 팔을 걷어붙이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내 ‘난민촌(캠프)’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했다. 난민촌(캠프)이란 텐트나 캠핑 트레일러들이 대거 모여 있는 장소를 지칭했다. 공식적으로는 요르단 북부 6개 주요 도시에 난민촌이 세워졌다. 그러나 그 외에도 특히 요르단 중부 지역을 중심으로 수많은 무허가 임시숙소가 중구난방으로 세워졌다 철거되기를 반복했다. 요르단 정부는 고작해야 자아타리와 아즈라크 난민촌 설치를 위해서만 토지 수용 조처에 나섰다. 각각 12만 명과 13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시설이었다. 난민촌 설치와 운영에 드는 비용은 2012년 이후 20억 달러로 추산됐다. 그러나 90%가 걸프 군주국을 비롯한 해외 재정지원에 의존했다.(박스기사 참조)
실제적으로 UNHCR은 유엔난민구호사업기구(UNRWA)의 전문성을 바탕으로 난민 규모 집계와 난민 시설 배분과 같은 행정적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4) 일반적으로 유엔은 2015년 시리아 난민 수용에 소요되는 총비용을 30억 달러로 추산하고 있다. 사실상 2014년 요르단 왕국이 지원 받은 금액이 전체 지출 금액 23억 달러의 고작 38% 수준인 8억5천4백만 달러에 불과한 점을 감안하면 정말이지 어마어마한 금액이라 볼 수 있다.
터키 난민촌에 견줘 인프라 수준이 미흡한 자아타리나 아즈라크도 어느새 도시의 구색을 갖춰나가고 있다. 이제는 사우디아라비아가 제공한 캠핑 트레일러나 조립식 건축물이 텐트를 대신하고 있다. 거리에는 가로수도 심어졌고, 도로에는 자스민, 대추 등 목가적인 이름도 붙였다. 한편 자아타리 난민촌의 커다란 대로변에는 온갖 종류의 다양한 상점과 작업장이 줄줄이 들어섰다. 사람들은 대부분 암스테르담 시가 제공한 자전거를 타고 통행한다. 아랍에미리트도 수도 시설이나 하수도망 설치 등과 같은 인프라 공사에 필요한 자금을 부분적으로 지원했다. 그러나 이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막 한 가운데 지어진 두 난민촌은 그다지 안락한 환경을 제공하지는 못한다. 2013년 3월 15만6천 명에 달했던 두 난민촌의 수용 인원은 지난 8월 전체 수용 가능 인원의 1/3 수준인 7만9천 명으로 급감했다. 난민들의 관심사는 오로지 한 가지뿐이다. 요르단 암만 등의 도시로 나가 도시민에 융화되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특히 요르단 북부를 비롯한 요르단 도시와 사회의 풍속도에도 적지 않은 변화의 바람이 일고 있다. 수공업, 요리, 상업 등의 분야에서 널리 두각을 나타내기로 유명한 시리아인들이 자신들의 재능을 널리 발휘한 덕분에 도시 곳곳에는 철공소, 목공소, 식당, 도매상점 등이 문을 열었다. 부동산업계도 부유층 난민의 주거 수요가 증가한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그런가 하면 시리아 사업가들은 가공식품업을 필두로 알 하산 등의 산업지대에 많은 투자를 하기도 한다. 요르단 암만에는 1895년 창립한 유명 아이스크림 가게 바크다시(Bakdash)와 비슷하게 시리아 다마스쿠스의 고급 제과점들이 등장했다. 한편, 몇몇 카페는 어느 정도 과거의 관습을 되찾은 시리아인 손님들로 북적인다. 

시리아인들의 대거 유입에 요르단 국경검문 강화

새로운 난민이 쉴 새 없이 밀려들자, 그동안 많은 도시 생활의 노하우를 전수하며 요르단 소시민의 본보기가 되어오던 시리아인들도 어느새 불청객이 되고 말았다. 요르단 당국의 규제도 점차 엄격해지고 있다. 국경 검문이 더욱 강화되는 한편, 불법 입국자들은 그들이 겪게될 위험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시리아 당국에 가차 없이 인도되기까지 한다. 요르단은 레바논과 마찬가지로 제네바 난민협정 가입국이 아니기 때문에, 흔히 난민 보호 의무에 관한 조항을 반드시 준수할 의무는 없다고 인식한다.
레바논이나 터키에서처럼 요르단에서도 난민은 때로 국내 정치의 볼모가 되기도 한다. 자칭 ‘좌파 야당’은 진보주의와 반제국주의를 표방하며 난민들이 요르단인의 정체성과 안보에 위협이 된다고 비판한다. 친 시리아 정권 성향의 인쇄매체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리기도 했다. “해외 시리아 난민들은 대개 시리아 고유의 문화적 양식에도, 다원주의에도 전혀 적응하지 못하는 사회계층이 대부분이다. 그러니 그들이 나라를 떠난다고 해서 그것을 인구 유출로 보기는 힘들다.”(5) 요르단 정권은 총선에 이어 2013년 시의회 선거에서도 민중의 저항을 잠재우고, 이슬람형제단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외국인 혐오주의를 적극 활용하였다. 특히 요르난 내에 지하디스트가 활개를 치면서 이런 외국인 혐오주의 여론은 더욱 팽배해지고 있으며, 난민에 대한 불신도 점차 깊어지고 있다. 한편 요르단 정부는 아랍의 봄이 한창이던 2011년 약속한 개혁안을 질질 끌고 있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난민 사태를 핑계거리로 삼고 있다.
시리아 엑소더스는 규모 면에서 1948년 팔레스타인 엑소더스를 능가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런 인구의 변화가 어떤 대변혁을 가져올지 궁금해 하고 있다. 물론 난민 수용 국가들은 놀라운 회복력과 특히 재앙 수준의 사태를 극복하는 매우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난민 행렬과 무장세력의 왕래로 인해 국경선이 뚫리면서 앞으로 중기적으로 어떤 영향이 미칠지 심히 우려되는 상황이다. 터키는 적극적이고 의욕적으로 난민 사태에 대응하고 있는 반면, 오히려 시리아와 언어적, 문화적 모태를 함께하는 요르단과 레바논은 시리아 난민 구호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글·아나 자베르 Hana Jaber
콜레주 드 프랑스 아랍현대사학과 연구원

번역·허보미 jinougy@naver.com
서울대 불문학 석사 수료.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1) '2015 UNHCR country operations profile. Syrian Arab Republic', www.unhcr.fr.
(2) 아크람 벨카이드, ‘협상과 개입 놓고 엇갈리는 주변국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5년 9월.
(3) 의회 정족수 미달. 수니파 사드 하리리와의 ‘314 그룹’의 지원을 등에 업은 레바논군 지도자 사미르 게아게아와 시아파 헤즈볼라와 연대한 자유애국운동 소속 미셸 아운 후보자 가운데 누구도 확실한 과반수를 획득하는 데 실패했다.
(4) 1948년 창설된 이 유엔 기구는 중동에서 팔레스타인 난민을 지원하고 있다.
(5) <Al-Akhbar>, 2014년 9월 11일. 항의가 쇄도하자 결국 이 신문은 그같은 사설 개재를 허용한 것을 사과해야 했다.
(6) 아나 자베르, ‘Jordan, protestes, opposition politics and Syrian Crisis', <Arab Reform Initiative>, 2014년 7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