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률은 체제변혁의 진앙지

[서평] 플라톤의 ‘법률’

2009-10-06     전진식|한겨레 기자

플라톤의 법률
플라톤 지음, 박종현 역주, 서광사, 5만5천원

플라톤(기원전 427~347)은 소문이 낳은 소문이었다. ‘2500여 년이 지나도 빛을 잃지 않는 철학자’라거나 ‘모든 서양철학은 플라톤에 대한 각주에 불과하다’는 말은 모호하거나 뜬금없었다. 정직하게 말해보자. 제대로 그를 읽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던가. 마치 커튼 뒤로 살포시 드러났다 사라지는 여인처럼, 조각난 퍼즐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허망함처럼, 그는 온전한 모습을 ‘한국어’로 좀체 보여주지 않았다. 그새 한국의 대통령은 17대에 이르렀고, 한국의 법치는 다시 갈림길에 섰다. 2007년 12월 한국인들은 주사위를 잘못 던진 것인가. 플라톤에게 묻는다. 그의 대답은 이렇다. “친구들이시여, 속담대로, 우리의 처지가 딱 중간에 있는 것 같아 보이는군요. 만약에 우리가 나라 체제 전체와 관련해서 모험을 감행하고자 한다면, 즉 사람들이 말하듯, 주사위의 6점을 세 번 던지거나 또는 1점을 세 번 던지는 걸 감행코자 한다면, 이를 해야만 합니다.”

플라톤을 온전한 한국어로 복원하고 있는 인물은 박종현(75) 성균관대 명예교수다. 스물여섯(또는 스물여덟) <대화편> 가운데 <국가>(politeia·폴리테이아)에 이어 이번에 <법률>(nomoi·노모이)이 우리말로 완역됐다. 개인적으론 학문적 댓돌을 하나 더 놓은 것이요, 사회적으론 안남미처럼 후 불면 날아갈 듯한 학계와 언론계에 던지는 ‘소리 없는 죽비’인 셈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론 정치에 질려 냉소로 돌아선 시민들에게 전하는 ‘희망의 증거’가 아닐까 싶다. 플라톤 역시 현실 정치에 실망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오늘날의 모든 나라들에 대해서 이것들이 모조리 나쁘게 통치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소. 이 나라들에 있어서 법률의 상태는, 요행과 함께 어떤 경이적인 대비책이 없는 한, 거의 치유가 불가능할 정도이기 때문이오.” 마흔 살 무렵에 쓴 서한인데, 우리는 여기서 하나의 실마리를 얻는다. 과연 <국가>는 50대의 플라톤이 절대적 이상을 밝힌 것이고, <법률>은 이상을 접은 70대 현실주의자의 목소리인가. 박종현 교수는 “플라톤의 의도를 전혀 잘못 짚은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잘라 말한다. 오히려 단절이 아니라 연속성이 두드러진다는 것인데, 그 근거로 박 교수는 칼리폴리스(kallipolis·아름다운 나라)를 든다. <국가>에서 이미 플라톤이 “이론상으로나 성립하는 나라… 그 나라는 지상의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단언했다는 것이다.

설득이 배합돼야 차선의 지배

그러면 이데아라고 흔히 일컫는 이상은 왜 필요한 것일까. 현실 어디서도 찾을 수 없을지라도 그것이 하나의 척도(metron) 구실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는 좋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나라가 최선이라면, 현실에선 차선을 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말한다. “지혜와 절대 권력을 함께 갖춘 ‘철인 치자’의 등장은 현실적으로도 거의 불가능한 일일 뿐만 아니라, 자칫 유사 ‘철인 치자’에 의한 권력 남용의 위험을 초래할 뿐일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의 한계, 잘못할 수 있는 인간성의 약점을 전제로 하여, 방금 말한 최선의 나라에 최대한 가까운 나라의 실현을 위한 법률을 제정하여, 이 법률이 지배하게 되는 나라가 차선의 실현 가능한 나라이다.”

<법률>은 플라톤 자신으로 볼 수 있는 아테네인, 스파르타인인 메길로스, 가상의 식민지 마그네시아(magnesia)의 입법을 위임받은 클레이니아스, 이렇게 세 사람이 나누는 대화로 짜이며 모두 12권이다. 실제 법규에 대한 내용은 3분의 1 정도다. 절반 가까운 분량은 ‘법률을 법률이게 하는 것’이라 할 법철학적 내용이며, 이 책의 알짬이라고 하겠다. 플라톤이 법률다운 법률에 대해 장광설을 펼치는 이유는 분명하다. 법률이 권고나 설득의 말도 덧붙이지 않고 강제력의 행사만을 앞세우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순전한 강제성만을 이용하는 법을 ‘단순한 형식의 법’(ho haplous nomos)으로, 강제성과 설득이 융화를 이룬 법을 ‘이중적인 형식의 법’(ho diplous nomos)으로 가른다. 이때 설득에 해당하는 부분이 바로 전문(前文·prooimion)이다. 전문의 목적은 “입법자가 법규로 공포하는 그것들을 수용할 사람들이 호감을 갖고 받아들이도록 그리고 호감으로 해서 더 쉽게 알아듣도록 하기 위해서”다. 우리나라의 헌법 전문은 어떤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국민투표에 의하여 개정한다.” 억지 춘향 한 문장이며, 거기엔 선언만 있고 설득은 없다. 그러니 하위법인 형법·민법 등은 차라리 논외다.

<법률>에서 플라톤이 말하려는 고갱이는 또렷하다. 그것은 지성(nous)이다. 플라톤이 보기에 지성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신성(神性)의 편린, 곧 불사성(不死性·athanasia)이다. 그러므로 보편이며 언제나 타당한 것이다. 이러한 지성에 복종한 뒤 법률이 지성의 배분 노릇을 할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최선의 법률, 바른 법률이 되는 셈이다. 이상적인 법치(법의 지배)란 이런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렇지 못할 때 “법이 휘둘리고 권위를 잃은 곳에서는, 그런 나라에는 파멸이 닥쳐와 있는 게” 보인다고 플라톤은 말한다. “법률이 일부의 사람들을 위한 것인 경우에, 이 사람들을 우리는 도당이라 말하지 시민들이라 말하지 않으며, 이들이 올바른(정의로운) 것들이라 말하는 것들도 공연히 말하는 것들입니다.” 요컨대, 법의 제정이란 ‘만물의 척도’인 신을 본받고 신을 닮는 것이라는 게 플라톤 당대의 ‘상식’이었다. 그것을 일러 중용(to meson)이라 했으며, 중용을 잃고 만용이나 오만에 빠지는 것을 히브리스(hybris)라 한다. 사정이 이러하므로 법을 제정하는 사람은 “법 제정을 하게 되는 나라가 자유로우며 자체적으로 우애롭고 지성을 갖추게 되도록 입법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지성의 바위에 따뜻한 체온이 스밀 때

독일의 법철학자 구스타프 라드브루흐는 법의 이념으로 정의, 합목적성, 법적 안정성을 들었다. 그러나 실제 법률은 이따위 추상명제로 구현되지 않는다. 사람 잡는 법도 엄연히 실재하며, 그런 법일수록 쉬 제정되고 집행되며 개악된다. 그러나 폐기는 어렵다. 왜 그런가. 나쁨(악덕)에 이르는 길은 평탄하고 힘들지 않게 가도록 해주는데, 그 이유는 그 길이 아주 짧기 때문이라는 게 헤시오도스의 통찰이다. 플라톤은 한발 더 나아간다. 그리고 이 책에서 가장 격정적이라 할 대목을 각혈처럼 쏟아낸다. “그 어떤 인간의 자질도 나라 체제와 관련해서 인간들에게 유익한 것들을 충분하리만큼 타고나진 못하며, 설령 알더라도, 최선의 것을 언제나 행할 수 있기에 또한 내켜서 그렇게 하기에 충분하리만큼 타고나지는 못한다는 겁니다. …절대권을 행사하는 자로서 나라를 다스리게 된다면… 오히려 죽게 마련인 자의 그 인간성이 그를 탐욕과 사익의 추구로 언제나 몰고 갈 것이니, 비이성적으로 고통은 피하면서 쾌락을 추구할 것이며, 더 올바르고 더 나은 것보다도 이들 둘을 앞세우게 될 것이며, 또한 제 안에 암흑까지 조성하여서는 마침내 저와 온 나라를 온갖 악으로 가득 채울 것입니다.” 현실에서는 이상적 지성을 지닌 인물이 결코 있을 수 없으므로, 우리는 사람이 아니라 법률을 택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것이 바로 지성의 배분이라는 것이다.

법률에 대한 가장 심오한 성찰이 다다르는 곳이 체제 변혁의 진앙지라는 점은 역설이다. 1970~80년대 숱한 인권변호사들이 그러하며, 전태일이 그러하며, 지금도 끝끝내 법률의 테두리에서 생존의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투쟁하는 노동자들이 그러하다. 플라톤의 <법률> 또한 그렇다. 풍화를 견디는 바위가 그 단단함으로 무기가 되듯, 플라톤의 <법률> 역시 여느 고전처럼, 여느 열사처럼, 여느 참사람처럼 ‘따뜻한 체온이 있는 부재’이다. 사람들이 그것을, 그들을 온전히 읽어내고 공감하고 부름에 응답할 때, 부재는 현존으로 갈아입고 강력한 ‘사랑의 무기’가 된다. 그것을 먼 나라 먼 시절에 살았던 플라톤의 글에서도 목격한다. 그러면 무엇을 할 것인가. <법률>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가담할 것입니다.” 사변철학이 실천철학으로 전환되는 순간이다.

글·전진식 seek16@hani.co.kr
<한겨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