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통 좌파로 돌아온 코빈의 영 노동당
‘정통 좌파’ 코빈의 노동당
2015-10-06 알렉스 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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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라진 대지>, 2006-앤디 골드워시 |
2015년 5월 총선에서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가 승리하자, 영국 언론은 노동당의 참패는 당수 에드 밀리반드의 좌편향 때문이라고 단언했다. 반면 노동당 지지자들은 패배의 원인을 전혀 다르게 분석하며 에드 밀리반드보다 더 과감한 인물을 새 당수로 선택했다. 영국의 제1야당인 노동당이 더 이상 기대하지 못했던 대중의 지지 운동 덕분에 강성 좌파인 제레미 코빈이 당수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노동당 상·하 의원들과 당내 중진들은, 새 당수가 임무를 무난히 수행하도록 두지 않을 것이다.
9월 12일 노동당 당수가 된 지 불과 몇 시간 후, 제레미 코빈은 런던 의회 광장에서 열린 난민돕기집회에 참석했고, 연단에 올라 수천 명의 군중 앞에서 지지 연설을 펼쳤다. 그의 연설이 끝나갈 무렵 ‘Team Corbyn’이라고 새겨진 붉은 셔츠를 입은 여성 지지자들은 무리를 지어 무대 뒤에서 안전선을 쳤다. 그 지지자 무리는 새 당수를 지지자들, 방송국 카메라, 기자들, 셀카족 사이에서 무사히 탈출시키느라 바빴다.
3개월 전인 지난 6월, 제레미 코빈은 이곳에서 열린 다른 집회에도 참석했었다. 그때 그는 집회가 끝난 후에도 느긋하게 참가자들과 수다를 떨며 오랜 시간 머물렀다. 신중하고 훌륭한 성품을 지녔으며 노동당 내에서도 강성 좌파인 이 베테랑 의원이 갑자기 영국 제1야당의 수장으로 떠오를 것을 예측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수십 년 전부터 몸담은 하원에서도 비주류이자, 언론에서도 무시당하기만 하던 제레미 코빈은 당 대표 입후보조차 불투명했었다. 제레미 코빈은 시민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고 당 대표 선거에서 득표율 59.5%를 기록해 19%를 기록한 다른 후보를 40% 차로 따돌리며 새 당수로 당선되었다. 영국 정치사상 유례없는 압도적인 승리였다.
6월의 집회에서부터 심상치 않은 징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지난 5월 총선이 보수당의 승리와 좌파의 패배로 끝나고 얼마 후 개최된 반긴축 집회에는 놀랍게도 수십만 명의 시민이 운집했고, 모든 집회 참가자들이 잠재적인 코빈 지지 유권자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집회가 제레미 코빈에게 선거운동으로 작용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코빈은 전형적인 좌파 인기 연설가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그리스 치프라스 총리 같은 카리스마도, 코빈의 멘토이자 1979년, 1980년대에 노동당내 좌파 노선의 리더였던 토니 벤 같은 뛰어난 언변도 없다. 사실 그는 노동당 동료들이나, 노동당 지도층의 경쟁자들에게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인물이었다. 언론의 입맛에 잘 맞는 연설을 하는 수많은 영국 정치인들과 달리, 직설적이고 허풍이 없다는 점이 오히려 그의 강력한 특장점으로 작용했다.
코빈을 지지하는 3개 집단
코빈은 마법사처럼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척 하기보다는 대기 중의 전류를 흡수할 준비가 되어있는 피뢰침처럼 주변의 수호자이길 자청한다. 코빈의 지지자는 전 연령과 계층을 망라하는데 그 중에서도 주요 지지층은 3가지 집단으로 나뉜다. 첫 번째 지지층 집단은 2008년 이후 신자유주의의 역습으로 높은 집세와 일자리의 질적 하락으로 고통 받고 있는 청년층이다. 코빈 지지층의 대표적인 모습이 생기 넘치는 얼굴에 고등 교육을 받았으나 카페에서 아르바이트하고 있는 청년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2012년 대학 학비가 3배 인상되자 강한 분노를 느낀 청년들이 거리로 나와 여느 때보다 훨씬 더 급진적인 항의 시위를 펼치며 정치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두 번째 지지층은 전쟁을 반대하는 시민들이다. 코빈이 의장으로 몸담고 있는 전쟁저지연합(Stop the war)에서 개최한 2003년 이라크 침공 반대 시위에는 2백만 명의 시민이 모여 큰 반향을 일으킨 바 있다. 이는 영국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시위였다. 전쟁저지연합을 공동으로 주최한 린지 저먼은 “이 시위가 코빈의 당 대표 선거운동에 든든한 밑거름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그간 노동당이 해온 일에 환멸을 느끼고, 토니 블레어 전 총리를 싫어한다. 이라크 사태 당시 당을 떠났던 많은 원로당원들이 되돌아오고 있다”고 말한다.
영국 언론은 반사적으로 이 시위의 중요성을 축소시켰지만, 이 시위를 말하지 않고 코빈 현상을 설명하기는 힘들다. 코빈은 팔레스타인 문제부터 정신건강의학 서비스까지 다양한 종류의 집회에 참석해 연설을 했다. 덕분에 코빈이 당 대표 선거 출마를 공표했을 때 많은 지지를 기대할 수 있었다.
세 번째 지지층은 노조다. 노조가 여전히 큰 영향력을 갖고 있는 공공서비스 분야에서 연봉은 몇 년 전부터 동결되었고, 수많은 공공서비스가 중단되거나 민영화된 실정을 생각하면 노조의 코빈 지지가 놀라운 일은 아니다. 대다수 노조의 사무총장들은 현재 좌파 노선을 걷고 있다. 이러한 변화를 진지하게 포착하지 못한 노동당의 지도층들은 영국에서 가장 큰 노조인 유나이트(Unite)와 유니슨(Unison)이 노조원들의 압력에 의해 제레미 코빈 지지를 선언하자 그저 망연자실할 따름이었다.
이러한 의식 변화는 유럽 전역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영국에서는 좌파 노선을 채택한 노동당이 대권을 잡은 역사가 없다. 영국의 소선거구 단순다수득표 당선제(First past the post)는 녹색당 같은 소규모 정당이 의회에 입성하기 힘든 제도다. 그리스 급진 좌파 연합 시리자(Syriza)나 스페인의 대안 정당 포데모스(Podemos)가 이뤄낸 경이로운 성공은 꿈도 꿀 수 없다. 극우정당인 영국독립당(Ukip)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노동당 내부에서 신자유주의 정책에 반대하는 당원이 많았음에도, 현재 많은 당원들이 블레어주의 노선을 걷고 있다.(1)
새로운 당원이 유입되고 당 대표 선거방식이 변경되자, 노동당에는 변화가 찾아왔다. 이번 선거에서는 당원이 아니어도, 3파운드만 내면 참여 가능했다. 새 선거방식은 또한 소셜 미디어를 잘 활용했다. 클릭 한번으로 당원으로 가입하거나, 친구들에게 소식을 널리 전달할 수 있었다. 페이스북과 트위터에서 인기가 많은 제레메 코빈에게 매우 유리한 방식이었던 것이다. “당 외부에서 시작된 코빈 지지 열기는 신규 당원의 유입으로 당 내부까지 퍼졌다”라고 제레미 코빈 곁에서 오랫동안 일해 온 여성 작가 힐러리 웨인라이트는 말한다. “좌파 후보라고 대대적으로 홍보하자 오래된 당원들이 코빈에게 한 표를 보냈으며, 대규모 집회를 동반한 대중들의 지지 운동이 탄생하게 되었다”고 힐러리 웨인라이트는 덧붙인다.
현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이러한 대중의 지지 운동 열기가 반대파의 공격을 제압할 수 있을 정도로 오랫동안 열정적으로 지속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이다. 영국 정부가 국익으로 내세운 여러 주제에 대해서 코빈이 정면으로 반대를 표명한 만큼 그에 대한 적대 반응이 나타는 게 놀라운 일은 아니다. 제레미 코빈은 시리아 공습에 반대했고, 핵미사일 트라이던트의 신형 모델 개발도 원치 않았고, 특히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역할과 군사 개입 지역 확대를 비판하는 등 군사력 발휘를 정당화시키는 행위를 그만두라고 비판했다.
경제 분야에 있어서 제레미 코빈은 시티오브런던(런던의 금융 중심지-역주)의 금융 산업과 언제든 전쟁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말한다. 그는 영국중앙은행에 대한 감독 체제를 재정비하고, 철도를 비롯한 여러 공공 서비스를 다시 국영화함으로써 대처주의의 교리와 작별을 고하길 원한다. 일명 ‘Brexit’라 불리는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에 관한 입장 표명은 유보한 채 ‘사회적 유럽’의 건설에 역점을 두고 있다. 그는 EU와 미국이 협상중인 자유무역협정이라는 거대 시장 그리고 그리스에 가해진 조치들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노동당내에서 코빈의 개혁 노선이 얼마나 자리 잡을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새 당수와 그를 지지하는 대다수의 당원들 사이에는 당내 유력인사들로 구성된 집행부가 자리 잡고 있다. 이 집행부는 당 혁신에 있어서 큰 장애물이라고 할 수 있다. 노동당 소속 의원 대부분은 토니 블레어 전 총리와 고든 브라운(2) 전 총리의 비호 아래 정치를 시작했고 정치 인생 내내 당내 좌파 노선을 무너뜨리는데 공헌했다. “이처럼 의원들의 지지 없이 당내 정권을 장악한 사람은 없었다. 제레미 코빈의 앞날은 험난할 것으로 보인다”라고 토니 블레어의 전 홍보책임자 랜스 프라이스는 밝혔다.
반대파에겐 제거 대상이 된 코빈
유럽 좌파의 새로운 인물로 등극한 코빈은 반대파의 계략을 무력화하기위해 당 연례회의에서 당내 중진들만 가졌던 결정권을 바로잡아 노동당을 민주화 시키려는 전략을 세우고 있다. 이런 방법으로 당내 중진의 영향력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코빈은 권력을 쥐락펴락 할 능력이 있는 사람이다”라고 프라이스는 평가한다. 프라이스는 집행부와 지도자가 노선이 다르다고 해서 좌파 지도자가 마비될 일은 없을 거라고 말한다. 은밀히 당 분열의 가능성을 시사하는 의원들도 몇 몇 있으나, 당 분열이 일어날 일은 없을 것이다. 블레어주의자들은 당 대표 선거에서 자신의 후보 리즈 캔들을 당선시키는데 실패했다. 리즈 캔들은 겨우 4.5%라는 굴욕적인 득표율로 참패를 맛보았다.
그나마 좀더 유리한 가설은 바로 당내 우파들이 제 살 깎아먹기의 위험성을 무릅쓰고 코빈에게 복수를 감행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집행부를 뒤집어엎고, 당 대표 선거를 재투표로 이끌기 위해서는 내규에 의해 정해진 수치인 47명의 의원수가 필요한데, 코빈의 반대파 의원 수는 충분히 47명을 넘길 수 있다. 물론 이런 일이 당장 일어날 리는 없다. 눈엣가시 같은 코빈이 이미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것을 미루어 보건대, 섣불리 당 대표 재선거를 시도하다가는 오히려 지지자들의 반발을 사서 코빈이 더 높은 득표율로 재당선될 가능성이 있다. 코빈을 공격하는 것은 2016년 5월 스코틀랜드 총선, 2019년 대선과 같은 차기 선거에서 노동당에게 불리한 패로 작용할 수 있다. 그때까지 할 수 있는 방법은 언론을 이용하거나, 의회 로비에서 비열한 수법을 쓰는 수밖에 없다.
제레미 코빈은 일부 지방의회 의원에게 기대를 걸어 봄직하다. 전 런던 시장(2000~2008년)이자 코빈의 친구인 케네스 리빙스턴은 좀 더 낙천적으로 미래를 내다보고 있다. 그는 “상·하의원들의 존재는 별로 중요치 않다. 제레미는 대중에게 직접 호소할 수 있고 설문조사에서 차기 총리 후보 중 선두를 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정치인들이 감투를 얻기 위해 그에게 고개를 조아리게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블레어주의자들과는 달리 보수당의 견제 방식은 솔직하고 예측 가능한 측면이 있다. 보수당의 전략이란? 코빈을 하마스나 헤즈볼라나 심지어 벤 라덴의 공범에 비유하는 동영상을 정성껏 만들어 유포했듯이 무슨 일을 저질러도 뻔뻔하게 대응하는 것이다. 데이비드 카메론 총리는 9월 13일 노동당 당 대표 선거 결과에 대한 반응을 트위터에 올리며 보수당원으로서 모범을 보였다. “이제 노동당은 영국의 국가 안보, 경제 안보 그리고 가족의 안전에 큰 위협이 되었다.”
“이런 메세지는 M15나 정보국에 보내는 일종의 신호 아닐까?” 위키리크스의 창립자 줄리언 어산지는 자문한다. 코빈은 하원에서 줄리언 어산지를 여러차례 옹호했었다. “코빈이 계속해서 NATO를 비판하고 영국군 작전의 보물이랄 수 있는 핵미사일 트라이던트를 반대한다면 차기 선거 전 코빈의 앞길을 막기 위해 엄청난 수단과 방법이 동원될 것이다. 사안의 중대함을 고려하건대 코빈이 총리가 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무슨 일이든 일어 날 수 있다”라고 어산지는 말한다. “코빈은 이미 NATO 탈퇴라는 예전 주장을 철회했다. 코빈은 모든 적들과 동시에 전쟁을 치를 정도로 바보가 아니다”라며 어산지는 코빈이 자신의 경고를 진지하게 받아들일 거라 희망적으로 말했다.
언론에게 있어서 제레미 코빈은 제거 대상이다. 처음에 언론은 코빈의 급부상에 경악스러워하다가 그의 성공에 놀란 나머지 공황에 빠졌다. 현재는 그를 멸시하며 적대감을 보이고 있다. 이는 언론재벌이 소유한 보수 언론사만의 반응이 아니라, 영국의 모든 주요 신문의 반응이다.
“누가 중상모략을 하려는지 신은 알고 있다. 정말 상상을 초월한 추악한 일들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이를 방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대중들의 운동뿐이다. 백만 명의 시민이 한 목소리로 ‘당신의 말은 거짓이다’라고 말한다면 계속해서 코빈을 비방하기는 어려울 것이다”라고 스틸은 말한다.(3) 코빈은 노동당이 일종의 사회 운동 정당으로 바뀌기를 원하고 있다. 의회의 반감이 이 약속을 지키려는 제레미 코빈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다. 언론이 제레미 코빈에게 적대적일수록 소셜 미디어를 통한 지지층의 결집과 반격은 더욱더 활발해지고 있다.
“코빈에게 한 표를 던지기만 해놓고 당 안팎에서 그를 옹호하고 지지하지 않는다면, 페이스북에서 ‘좋아요’를 누르는 것과 대체 뭐가 다를까?”라고 가수 빌리 브래그는 염려했다. 빌리 브래그의 노래는 수많은 시위의 현장에서, 특히 대처 시절 시위에서 수없이 울려 퍼졌다. 빌리 브래그는 녹색당을 비롯한 다양한 좌파 정당들이 동맹해서 만들어낼 시너지 효과를 기대하고 있다. 녹색당의 지도자 내털리 베넷은 “기존의 노동당은 우리 녹색당이 반대하는 모든 정책들, 즉 긴축재정, 민영화, 트라이던트 그리고 군사개입에 찬성했다. 일단 노동당이 어떻게 변모할지 지켜보겠다”라고 말하며 좌파동맹의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영국의 반긴축 운동이 대규모 정당의 주도로 이루어졌다는 점은 많은 장점도 있지만 동시에 심각한 단점도 가지고 있다. 노동당은 국가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진 정당도 아니고, 그리스의 시리자처럼 기존의 사회 질서에 도전하는 정당도 아니다. 제레미 코빈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당수로 만들어준 놀라운 대중의 힘이 지속될 수 있도록 사회 운동 중심으로 노동당을 바꿔야만 한다. 지난 몇 달간 타오른 대중의 열기가 국민의 다른 쪽으로도 퍼진다면, 그리고 모험이 계속된다면 제레미 코빈에게는 모든 기회가 열려있다고 할 수 있다. 대중의 사회운동이 약화되고, 제레미 코빈이 노선을 중도로 옮긴다면 그 기회는 사라질 것이다.
글·알렉스 넌스 Alex Nunns
언론인, 작가, 잡지 <Red Pepper>의 정치담당 논설위원
번역·김영란
고려대학교 불어불문학과 졸업.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토니 블레어는 1994년 7월 노동당 당수로 당선된 후 1997년 5월부터 2007년 6월까지 총리로 재직함.
(2) 블레어 총리 시절의 재무장관으로 재임. 2007년 6월부터 2010년까지 총리로 재직.
(3) "The Andrew Marr Show" BBC, 2015년 7월 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