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과 그리스, 민주주의를 부인하는 3가지 특징
2015-10-06 필리프 랑베르
잠시 찾아온 듯했던 ‘아테네의 봄’은 그리스 은행들에 대한 숨통 조르기로 물거품이 됐다. 지난 7월 13일, 그리스는 일주일 전 실시된 국민투표 결과와는 반대로, 3차 구제 금융안을 받아들였다.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하지 않은 채 한 나라의 주권을 제한하는 유럽연합(EU)에 대해 불만의 목소리가 높아졌음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이러한 반민주주의적인 변화를 걱정하는 이들 가운데에서도 유럽연합의 필요성에 적극 찬성하는 이들이 있다.
그리스가 유로존에 잔류해야하고 유럽연합은 더욱 강화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는 한 사람으로서, 나는 이른바 ‘2015년 7월 13일 합의’라 불리는 그리스 3차 구제 금융안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3차 구제 금융안은, 겉으로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문제를 더욱 악화시킨 지난 1, 2차 구제 금융안의 경제적·재정적 난센스와 그 맥락을 같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의 경제 붕괴는 빠른 속도로 이뤄졌고, 이에 따라 부채 부담은 가중되었을 뿐 아니라, 부채 상환도 여전히 까마득한 일로 남아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 실패의 대가가 바로 유럽연합의 본질과는 맞지 않는 사회적 고통으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리스의 긴축정책으로 제일 큰 피해를 본 것은 가장 취약한 계층의 그리스 국민들이었다. 안타깝게도 이번 3차 구제 금융안 역시 경제적 난센스와 사회적 부당함으로 얼룩진 1, 2차 구제 금융안과 같은 방향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민주주의 측면에서 보자면 지난 7월 13일의 합의는, 초기의 거시경제적 구제안이 금융 위기 국가를 대상으로 시행됐을 때 야기된 예기치 못한 변화들의 연속이며 더욱 악화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러한 합의가 경제·사회 정책에 있어서 민주주의의 정당성을 약화시키거나 아예 자취를 감추게 한다는 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형식 민주주의에서 식민행정 수용으로
제 2차 그리스 구제 금융안 합의가 이뤄지기 몇 주 전인 2012년 2월 중순, 그리스와 트로이카(국제통화기금, 유럽중앙은행,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간의 협상에서는 3억 2,500만 유로 규모의 예산 감축과 관련한 마지막 조율이 진행 중이었다. 당시 그리스 정부는 국방부 지출을 줄이는 방안을 해결책으로 내놓았으나 트로이카는 이를 거부하고 퇴직연금 예산에서 이 금액을 충당할 것을 요구했다. 사실, 유럽중앙은행 총재, 장 클로드 트리셰는 2010년 10월과 2011년 8월에도 아일랜드와 스페인 그리고 이탈리아의 재무 장관에게 비밀리에 서신을 보냈다. 그는 금융 분야뿐만 아니라 예산과 사회 부문에 있어서도 확실한 조치를 취할 것을 종용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트로이카의 통상적인 역할을 보여주는 예는 차고 넘친다. 물론 형식적인 측면에서 보면, 긴축정책과 관련된 조치는 그리스 국회에서 최종 통과된 것이다. 이는 각각 자국의 의회에서 그리스 채무에 대한 책임을 져야하는 채권국 재무 장관들의 지원 및 승인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겉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일이다. 그러나 채무국 국회에서 이 ‘제안된’ 조치들을 심의하고 수정할 수 있는 그 어떠한 권한도 없고, 유로그룹의 재무 장관 사이에서나 하물며 그들 국가의 의회에서도 이들 조치 중 어느 하나도 논의된 적이 없다면, 누가 이것을 민주주의라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IMF는 유럽연합에 속한 기관이 아니다. 따라서 유럽의회나 유럽연합 국가 의회의 지시에 따를 필요는 없다. 유럽중앙은행은 자신의 독립성을 방패 삼아 트로이카 내에서 기술적인 역할만 수행해왔다는 것을 계속 강조하고 있다. 원칙적으로는 유럽의회에서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져야하는 유럽집행위원회의 경우, 법적인 실재가 없는, 유로존 각국의 재무 장관 회의인 유로그룹의 대리인 같은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다. 결국 유럽집행위원회도 자신의 특수한 구조를 무기로 의회의 실질적인 통제에서 벗어나고 있다.
근본적으로 이런 식의 절차적 비민주성과 기관들의 책임 회피는 경제 및 금융 분야를 주 무대로 삼는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이어지고 있다. 나아가 그리스의 가장 부유한 납세자들과, 심지어 그리스 군대를 비롯해 프랑스, 독일, 미국 군수업체 등의 이익을 보호하는 수단이 되고 있다. 같은 맥락에서 필자가 기억하는 일이 하나 있다. 2011년 유럽의회와 유럽이사회 간에 유럽연합의 거시경제적 지원 프로그램에 대한 법적 근거를 마련하는 첫 번째 문서에 대해(1) 논의할 때였다. 녹색당에서는 노동시장과 사회 안전 분야의 관련 조치를 검토하는 중이었고, 사회적 협의 파트너들의 자문(사전 동의가 아닌)을 의무화 하는 개정안을 제출했다. 유럽집행위원회의 대리인으로 나선 한 관리는, 사회적 협의 대상자들의 단순한 자문이 야합을 초래할 수 있으므로, 해당 분야의 모든 개혁이 불가능하게 될 수 있다고 주장하며 개정안을 격렬히 반대했다.
7월 13일 합의는 모든 우려의 목소리들을 지워버렸다. 그리고 트로이카의 식민 논리를 그리스에 명백하게 새겨 넣었다. 합의문은 “그리스 정부는 합의가 이루어진 분야에 대한 모든 행정 정책에 대해, 공공분야의 자문이나 의회 안건 제출 전, 적절한 기간 내에 ‘기관들(로 개명한 트로이카)’의 자문과 동의를 얻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결국 합의문은 그리스 국회의원들의 민주주의 주권이 고작 실질 민주주의가 아닌 형식 민주주의의 정당성만을 지닌 기관들의 주권에 의해 제한된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민주주의에서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로
2015년 7월 13일의 합의로 구체화된 민주주의에 대한 두 번째 부정은,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를 강제하고, 민주주의적 투표로 선출된 한 정부를 능욕하려는(유럽연합의 한 관리는 파이낸셜 타임스를 통해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의지와 관련이 있다. 너무나도 난폭한 방식으로 행해졌기에 그리스 정부는 다른 대안이 없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었던 이 굴레 밖으로 나가길 원하기까지 했다. 그것이 모욕이었는지 아니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2) 7월 13일, 채권단이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에게 요구한 조건들은 일주일 전 치프라스 총리가 국민 투표에 부쳐 그리스 시민 61%가 거부했던 조건들과 상반될 뿐만 아니라, 그보다 훨씬 가혹했다. 물론, 그리스 채권 국가 정부들의 민주주의도 지난 7월 5일 국민 투표로 표현된 민주주의에 견줄 수 있을 만큼 정당성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유럽연합은 회원국들이 합의하에 민주주의 주권을 공유하는 것에 동의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나라들에 의해 한 국가의 민주주의적 주권이 짓밟히는 것에 동의하는 것인지 궁금하다. 그리스에서 일어난 일, 특히 7월 13일 이후의 상황을 살펴보면 정답은 후자이다.
필자는 이러한 모욕의 본질적인 동기가 유일한 해결책으로 여겨지는 유럽연합의 모든 대안에 맞서려는 정당들의 헤게모니에서 출발한다고 확신한다. 보수주의, 기독교 민주주의 성격의 유럽인민당, 사회민주주의 성격의 유럽사회당, 자유주의 성격의 유럽자유민주동맹 등 소위 ‘대연합’이라 불리는 정당들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7월 13일의 정치적 합의문의 첫 줄부터 언급된 ‘신용 추락’이라는 표현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신민주주의당과 사회당, 정확히 말해 그리스 기독교민주주의자들과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지지자들을 등에 업고 지난 40년 간 그리스를 부패시켜왔다. 그런데, 40년 간 그들로 인해 부패한 그리스를 급진좌파 정부가 고작 5개월 동안 개혁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신용 추락’이라고 비난할 수 있을까? 그리스 기독교민주주의자들과 사회민주주의자들이 그리스의 재정 상태를 속여 유로존에 가입하고, 2010년 이전 뿐만 아니라 그리스에 지원 프로그램이 실시되었던 처음 5년 동안에도 이들은 인기 전술 시스템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었는데도 당시에는 유럽 정치인 동료들이 신뢰를 잃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던 듯하다.
그러나 낯선 경쟁 정치세력인 시리자당이 등장하자 그리스에 대한 신뢰는 갑자기 증발해버렸다. ‘대연합’ 공모자들은 재정 타격이라는 자신들의 힘을 이용하여 새로운 세력을 짓밟기로 한 것이다. 보수주의자인 마리아노 라호이 스페인 총리도 그 사실을 숨기지 않았듯이, 시민들이 새로운 정치적 시도에 모험하지 못하도록 그 본보기로 시리자당을 처단했다. 주도권을 가진 정치 세력들이 경쟁 상대의 제거를 위해 상대를 짓밟고 능욕을 공모할 때 민주주의는 위험에 처한다.
국민을 기만하는 기술, 국민 투표
신자유주의 신봉자들의 집요한 행동들에 대한 평가가 가혹하지만, 필자는 치프라스 정부의 조치가 가져 온 민주주의적 충격 또한 무시하고 넘어갈 수 없다. 트로이카 시대의 종식을 공언하며 지난 1월 당선된 치프라스 총리는 7월 5일 국민투표를 통해 그리스 국민들이 트로이카가 내놓은 긴축 요구안을 거부하는 결과를 얻었다. 그런데 일주일 뒤 이전보다 더 가혹해진 조건들을 수용하며 치프라스 총리는 갑자기 태도를 바꿨다. 물론, 정당이 정권을 얻기 전의 공약을 권력을 잡은 후에 일관되게 시행하리라 기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리스의 경우 문제가 다르다. 국민들은 민주주의의 근간 중 하나인 신뢰가 무너지는 모순의 순간을 목격하고야 만 것이다.
먼저, 채권단들을 상대로 완고한 입장을 고수하며 치프라스 정부가 펼친 방법에 대해 자문해 볼 수 있다. 특히, 그리스가 유로존이라는 통화 공동체에는 남고 싶어하면서도 트로이카의 논리를 거부했다면, 트로이카와 합의점을 찾았어야 했다는 사실을 그들이 몰랐을 리가 없다. 트로이카가 내세운 조건을 수용할 수 있는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그리고 이 한계를 벗어나게 될 경우의 대안은 무엇인지가 관건이었다. 치프라스 정부는 대안 마련은 고사하고 아무 준비도 하지 않았다. 이는 치프라스 총리가 7월 13일 갑자기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을 내린 이유라 할 수 있다. 바루파키스 전 재무 장관이 준비하던 유로존 탈퇴와 병행 통화 유통에 관한 프로젝트는 치프라스 총리에 의해 중단된 것이다.
통화 공동체에 남고싶어 하는 국민들의 의지를 존중하기 위해, 그리스 정부는 국가부채 재편 등을 포함한 수용 가능한 조건들을 전제로 모두를 설득할 수 있어야 했다. 프랑스에게도 친숙한 이 개념에 따르면, ‘그렉시트(Grexit; 그리스(Greece)와 탈퇴(Exit)의 합성어로, 그리스의 유로존 이탈을 뜻한다-역주)’라는 최후의 무기를 앞세운 채권단들에 맞선 그리스 역시, 같은 무기를 사용할 준비가 된 것처럼 보일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 정부가 정말 유로존 탈퇴를 원했는지가 아니다. 만일 채권단과의 협상이 자신들의 수용범위를 넘어설 경우 실제로 유로존 탈퇴를 실행할 준비가 돼있었는지 여부다.
유로존 탈퇴라는 선택은 그리스에게 단기적으로는 고통을 안겨주겠지만 채권단에게도 18개국으로 사용국이 줄게 된 단일통화의 신용 하락이 동반된 완전한 채무불이행의 위험을 의미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채권단의 경우, 볼프강 쇼이블레 독일 재무 장관이 제출했고 앙겔라 메르켈 총리도 분명히 동의했을 문서 <그리스의 최종 제안에 대한 의견>에서, 그들의 무기고에는 최후의 무기가 있으며 언제든 그것을 사용할 의사가 있음을 밝혔다. 별 다른 해결책 없이 협상장으로 향한 치프라스 총리로서는 일주일 전 과반수의 자국 시민들이 재확인 시켜준 신뢰를 지켰어야 함에도 그리스를 유로존에 남게 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대가라도 치르겠다고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채권단은 뻔뻔하게 자신들의 이러한 이점을 이용했다.
이러한 민주주의에 대한 3중의 부정은 의회의 심의나 사회적 협상 파트너의 자문은 개혁의 속도를 늦출 뿐이라는 구실 아래, 민주주의의 모든 정당성을 헤치는 유로존의 경제·사회적 ‘거버넌스’로서 작용한다. 유럽연합의 입법과정을 보다 단순하고 효율적으로 만든다는 구실을 내세운 ‘더 나은 규제’ 프로젝트는 규제를 대폭 완화하는 것뿐만 아니라, 미래의 모든 입법관련 계획에 대해 의무적으로 일련의 영향 평가 및 사전 자문을 받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현재 진행 중인 유럽연합과 미국 사이의 자유무역협정 협상의 목표는 각국의 조세, 사회, 환경 제도들을 지속적인 경쟁에 붙여 다국적 기업들에게 선점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다국적 기업들은 자신들의 이윤에 대한 권리를 내세우며, 투표로 선출된 정부가 시행 중인 또는 준비 중인 모든 조치들을 공격할 권리를 가지게 될 것이다.
위의 두 가지 사례에서, ‘성장과 고용’을 촉진시킨다는 구실로, 금융 관계자들에 맞서는 민주주의 기관들의 힘이 더욱 약화되고 있음을 잘 알 수 있다. 민주주의 규칙보다 경제 원리 준수가 우선시 되고 있다는 사실은 유럽이사회의 태도에서도 드러난다. 유럽이사회는 자신들이 요구하는 재정 목표를 지키지 않는 회원국에게는 처벌의 위협을 마구 휘두르면서도 빅토르 오르반 총리가 이끌고 있는 헝가리처럼 유럽연합의 민주주의 가치를 짓밟는 국가들은 오히려 가만히 내버려 두고 있다(오르반 총리의 정당은 유럽인민당의 모든 의원들에 대해 대항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유럽연합 회원국의 대통령과 총리들이 모인 최후의 만찬에서도 모두가 오르반 총리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려 조심한 반면, 치프라스 총리는 깔아뭉개 버렸다.
유럽 국민들이 이 시대의 사회적·환경적·전략적 시련을 이겨내기 위해 함께 행동할 필요성을 느끼는 이 순간에, 엘리트들은 자신들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점점 더 강압적으로 밀어붙이면 붙일수록, 오히려 자신들이 반유럽주의, 민족주의를 주장하는 이들의 대리인 역할을 한다는 점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원리에 대항하는 투쟁이 지금처럼 민주주의 주권을 회복하는 투쟁이 된 적은 없었다. 민주주의 주권은 이제 공동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함께 공유하는 주권이 되었다.
글·필리프 랭베르 Philippe Lamberts
유럽의회 녹색당 및 자유동맹그룹 공동대표
번역·김자연
jayoni.k@gmail.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졸
(1) 일명 Two-pack이라 불리는 유럽연합의 긴축강화 프로그램 중 장폴 고제의 보고서 내용.
(2) 야니스 바루파키스, ‘그들은 우리를 능욕했다’ 기사 참고,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5.8